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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荀子/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D)’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동양의 프로메테우스
그리이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 밑에서 불을 다루는 거인이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느 날, 제우스를 속여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불을 갖게 된 인간들은 그때부터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인간 사회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판도라라는 아리따운 여자를 만들게 해서 인간 세상에 내려보냅니다. 신들은 인간세상으로 가는 판도라에게 예쁜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판도라가 호기심에서 상자를 열자 상자 속에 들어있던 질병과 재앙의 영들이 나와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자 구석에서 마지막으로 한 조각의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게도 벌을 내렸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프로메테우스를 묶어 놓고는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게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간이 다시 생겨났고, 그때마다 독수리가 날아와 간을 쪼아먹는 고통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헤라클레스가 독수를 쏘아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고통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인류의 문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은 인류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순자는 여러 면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유사합니다. 순자 이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았습니다. 만물을 낳아 준 것도 하늘이고, 주재하는 것도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만물 생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인간 도덕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하늘이란 비가 오고 바람 부는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낳아 준 존재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그 이전까지 하늘에 기대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에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홀로서기의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의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시킨 인문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순자의 눈에 보인 인간의 참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판도라의 상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판도라 상자 속에는 악한 본성을 이겨 나갈 숭고한 인간의 의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순자의 철학이 인문 정신의 극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자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뒷날 많은 학작들에 의해 두고두고 비판받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화려한 삶, 어두운 죽음
순자는 공자와 맹자를 이어 유가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입니다. 순자가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298년 무렵에 나서 238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기원전 298년은 공자가 죽은 지 200년쯤 뒤이고, 맹자가 죽은 무렵입니다. 당시는 혼란이 극에 이른 전국 시대 말기였지만, 한편에서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입니다. 순(筍)자가 손(孫)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손경이라고도 불렀는데, 경이란 벼슬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순자를 귀족 출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가장 믿음직한 역사서인 <사기>는 순자의 일생을 50세 무렵부터 적고 있습니다. 50세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순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이 점은 순자에 대한 뒷 사람들의 평가가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순자는 공자나 맹자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살아 있을 당시 상당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순자는 조나라에서 태어났으며 50세 무렵에 제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제나라로 모여든 학자들을 직하 학파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수자는 직하에서 가장 덕망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직하의 최고 사상가가 맡는 좨주 벼슬을 세 번이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좨주는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순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한 순자는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갑니다. 진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으며, 부국 강병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순자는 조나라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초나라의 실력자 춘신군 밑에서 난릉이라는 지역을 맡아 다스리게 됩니다.
난릉은 사방 백 리 정도의 작은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본 시기였습니다. 춘신군이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살해당하자 순자는 그대로 난릉에 정착합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짓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서 법가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한비자와 이사를 유가 사상가로 보지 않고, 순자를 법가 사상가로 보지도 않습니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며, 순자의 현실 지향적 사고가 법가 사상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덥스는 순자를 원시 유가를 틀에 구어 낸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순자가 예를 강조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구체화시킨 점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순자의 사상 속에 현실 지향적 측면이 들어 있음을 잘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후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순자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통해 유가의 본질인 인본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후에 몹시 불행해졌습니다. 죽은 뒤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맹자를 꼽았고, 그 뒤로는 도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순자가 인간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현대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순자는 사상사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순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책이 <순자>입니다. <순자>는 본래 323편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유향이 32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책의 편제는 대화체가 많은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식으로 되어 있으며,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짐작되는 일부분을 빼면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글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기> 가운데 많은 부분을 순자가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증자가 그의 문인들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대학>도 순자의 글로 보기도 합니다. <순자>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글은 표현이 소박하며 꾸밈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 방식의 체계적이며, 비교적 논증이 세밀합니다. 이 점은 순자의 철학이 객관적 방법론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악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악하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면, 착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이 점은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규정한 철학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생가가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 자신이 과연 착하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는 문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악한 사람인간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아마 이런 탓이었을까요? 순자는 생존 당시를 빼놓고는 역사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유학자들은 순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순자는 무슨 근거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일까요? 순자도 맹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 주목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습니다. 이 욕구는 귀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좋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감각 기관의 이기적 욕구와도 통합니다. 순자는 이러한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순자가 볼 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악한 행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피곤하면 쉬고 싶은 게 인간의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 욕구대로라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라도 일을 하다 피곤해지면 서로 상대방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자기는 얼른 들어가 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납니다. 서로 자기가 남은 일을 다 할테니 먼저 들어가 쉬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착한 행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性), 정(情), 려(慮), 위(僞)의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4부분은 마음이 움직이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이 4단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봅시다.
첫 단계인 성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서, 삶의 자연스러운 본질이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생리적 본성입니다.
두번째 단계인 정은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서 생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노엽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번째 단계인 려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고 작용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네번째 단계인 위는 선택이 끝난 후 실행해 나가는 의지적인 실천입니다.
위에서 말한 4단계를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본성은 끊임업이 먹고 마시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때 떡과 음료수를 본다면, 입에 침이 고이면서 저 떡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부당하게 먹지 못하게 한다면, 노여워질 수도 있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또 내게 먹을 차례가 돌아오면, 기쁘다 즐겁다 하는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성과 감정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불쌍한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다면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모른척하고 나 혼자 먹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나누어 먹을 것인가?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 그냥 다 주어 버릴 것인가? 만약 그 자리에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음식들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허락을 받기 위해 주인이 올 때가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먼저 먹고 볼 것인가?
이런 고민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다 먹어 버릴 수도 있고, 불쌍한 어린이나 노인과 나누어 먹든가 다 주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먹고 달아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나 혼자 다 먹어 버리거나, 주인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먹고 달아나는 것이 본성에 충실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본성의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굳센 의지로 본성을 억누르면서 참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참는 작용이 순자가 마음의 네번째 작용으로 파악한 위입니다.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순자의 분석은 심리학자를 방불케 합니다. 순자는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은 악이고, 위는 선이라고 합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다고 해서 본성대로 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의지적 실천을 통해 본성이 가져올 악한 결과를 변화시켜 갈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이 갖는 가치는 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자의 철학은 의지에 기초한 실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라는 글자를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짓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위자의 의미를 거짓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순자의 철학은 죽습니다. 여기서의 위는 사람 인(人)과 할 위(爲)를 합쳐 놓은 글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 즉 의지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순자의 철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은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인 의지에 의한 노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빈다. 그리고 맹자의 말대로 본성이 본래 착한 것이라면, 현실의 인간은 대부분 태어나면서 바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라면 애초부터 훌륭한 임금이나 좋은 제도 따위는 필요가 없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맹자의 인의 도덕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인간 내면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내면으로 거슬러 들어가서 본성이 악하다는 규정을 내립니다. 순자는 사회가 잘 다스려지는 상태는 선이고, 혼란한 상태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은 혼란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혼란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선악을 가르는 기준을 인간 외적인 현실에 두었습니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강조점은 군자에게 두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생리적인 면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생리적인 면을 본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소인이고, 군자는 도덕성만을 본성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실상 군자의 도덕성만을 인정한 것이며,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도덕성에 근거한 군자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토양만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떨까요? 순자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한 그 본성은 누구의 본성을 가리킬까요?
순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합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요순의 본성과 가장 악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걸임금이나 도척의 본성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순자가 같다고 본 본성은 당연히 생리적·감각적인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부차적인 노력인 셈이 됩니다.
물론 순자도 맹자처럼 군자와 소인을 나눕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요? 순자는 사람의 성품과 지능,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은 군자와 소인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소인은 본성이 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군자는 교육과 예를 통해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순자가 그러한 의지적인 노력을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예였습니다.
인간의 홀로서기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이 나온 것도 하늘의 뜻이고, 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반 민중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해나 일식, 월식 같은 급작스러운 자연 현상의 변화가 보이면 하늘로부터 다스림을 위임받은 임금들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하늘에 빌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인간과 하늘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합니다.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다만 통치자가 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 행위는 인간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순자의 이해는 하늘을 도덕 근원으로 이해한 맹자와 전혀 다릅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습니다.
순자는 하늘에 빌고 매달리는 행위를 비웃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왔다고 합시다. 순자는 이런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낮과 밤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변하는 것고 인간의 삶과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인간을 하늘과 대등한 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기우제 같은 것도 아주 의미가 없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례와 상례 그리고 점을 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자가 이런 일에 대해 의미를 둔 것은 미신을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자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 문화적인 기능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그런 일이 귀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인들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삶을 장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 민중들에게까지도 상례와 제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순자는 상례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 죽은 이를 슬픔과 존경으로 따나 보내는 것으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꾸미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제례와 대해서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 사람의 감정을 꾸미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순자는 사람들에게 있는 지성과 감정을 다 인정한 셈입니다. 지성적인 판단으로 보면 귀신이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측면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불안한 감정이 지나치면 아무것에나 의지하려는 미신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지성과 합리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그냥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제사, 점, 기우제 등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자는 본질적으로 하늘을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하늘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는 기계적인 하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과 대등하게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과의 관련성을 부정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에 맞서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순자는 결국 그 힘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앞에서 본 의지적인 노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데서 벗어나, 인간이 반드시 하늘을 이겨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순자의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 정신의 극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순자의 이런 점에 주목해 유물론 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규범 : 예
순자는 질서 잡힌 사회는 좋은 것이고 혼란스런 사회는 나쁜 것인데, 인간이 타고난 본성대로 가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입니다. 그는 예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일이 만들어 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따로 떨어져 혼자 살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까닭입니다. 순자는 또 사람들이 힘센 것으로 따지면 소를 따를 수 없고, 달리기에서는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말과 소를 부리면 살 수 있는 까닭은 사회 조직을 이루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모두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회의 힘이 풍부해지고 강해지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제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투지 않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통제 수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예입니다.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구분 자체는 자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껴줌은 인위적인 노력입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규제하려 하였습니다. 이 경우 예를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최대한 고르게 채우기 위한 방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의식과 예절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요청되는 행위 규범인 예의 제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요? 예 자체는 의지적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일 뿐 인간의 본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타율적인 규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구체적인 예의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예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뀌면 여기에 따라 구체적인 예의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순자는 예가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핵심은 현실 중시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는 변법이 행해지던 사회였고, 변법의 생명은 그 이전의 제도와 예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가의 시의성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순자의 현실 중시 관점은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던 맹자의 관졈과 다릅니다. 순자는 적어도 현실 중시, 아니면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예의 제도만 강조한다면 권위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적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청조적인 지성을 묵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봄으로써 예의 탄력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전의 훌륭한 임금들이 만들어 낸 예의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가요? 순자는 오늘날의 임금들이 옛 훌륭한 임금들을 이어받아 예의 제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자는 예를 만들고, 그 예를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는 역할이 통치자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 그러한 통치자들은 후천적인 인위적 노력을 통해 자신이 타고난 본성의 악한 본질을 극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힘이 센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자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순자의 주장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더 보강해 준 면이 있습니다. 즉 본래의 악한 모습을 극복하고 남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사람만이 선한 것이며, 그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하고, 이 악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예에 의한 교육을 성인의 몫으로 돌리고, 그 구체적인 실현을 통치자 한 사람에게만 인정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순자가 살전 시기는 전국 시대 말기입니다. 전국 시대 말기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혼란이 더 심해졌지만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가능성은 덕에 의한 것보다는 변법에 기초한 무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무력 통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혼란의 종식인 동시에 법질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순자는 혼란의 원인이 인간의 무한한 욕구에 있다고 보았고, 동시에 통치자의 교화가 무한한 욕구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간절한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 통치자들이 모두 자신의 생리적, 감각적 욕구대로 전쟁과 침략을 일삼고 있지만, 통일과 동시에 자신의 본성이 더 이상 욕구대로 움직이지 않게 인위적인 의지로 억누르면서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욕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다스려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통일이 가능한 상황과 통일을 가능하게 할 현실적 힘의 주체에 대한 순자의 기대를 '후왕 사상'이라고 합니다. 후왕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을 뜻하는 '선왕'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현실의 군주를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전국 시대 후반에 올수록 주나라가 임명했던 구 귀족의 몰락이 심화되고, 신진 지주 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 아울러 구 귀족들을 돕던 관리들의 세습도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따라서 그나마 지탱되어 오던 구제도나 문화 유습은 급속히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회 변화는 모든 제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 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순자에게 과거의 제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강한 현실 의식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후왕 사상이었습니다.
후왕은 현실적으로 철저한 세습제의 부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자는 말한 후왕은 지금 있는, 또는 앞으로 올 군주를 의미합니다. 순자는 주나라의 통치가 이미 무너졌다는 현실 긍정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의지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고 동시에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군주를 후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통치가 피치자 모두의 생리적·감각적 욕구를 잠재우고 선왕의 훌륭한 정치를 현실에 맞추어 되살려 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 강조한 예는, 한비자와 이사에 의해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하지만 법가 사상은 순자의 예에 대한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병으로 치면 예는 사전 예방이고, 법은 병에 걸린 다음에 하는 치료입니다. 또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법가 사상이 말하는 법은 불변이어야 했습니다. 순자의 후왕 사상 또한 신진 지주 계층에서 올라 온 당시 모든 임금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 되어 후대 통일 국가의 통치자를 옹호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폭군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습적 군주들의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곧 폭군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습니다. 순자는 서민도 재상이 될 수 있고, 왕이나 귀족들도 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는 이미 이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군주란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폭군은 혁명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폭군을 길길이 뛰는 난폭한 말이나 철모르는 갓난아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배를 띄우는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군주는 물이 배를 뒤엎듯이 혁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맹자의 혁명론과 다릅니다. 맹자의 혁명론도 민중이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민중의 뜻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뜻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을 끊어 버렸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직접적인 민중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의 논리학
순자는 고대 논리 체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순자의 논리는 공자와 정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의 논리가 도덕적인 목적을 그 안에 담고 있다면, 순자는 순수하게 논리적 관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에는 명가와 후기 묵가들의 역설적 논리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순자는 이들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명(名)과 실(實)의 문제를 따진 것입니다. 순자는 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가를 탐구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순자의 '명실론'은 현대의 논리학과 여러 가지로 비슷합니다.
순자는 먼저 지(知)와 지(智)를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知)와 지(智)를 별 구별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습관적인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두 개념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지(知)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智)는 사람이 안 것과 실제 대상이 들어맞았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순자는 인간의 인식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心)입니다. 감각 기관은 바깥 사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이고, 마음은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사물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더 세분해서 보면, 먼저 감각 기관이 받아들인 사물을 비슷한 것끼리 나누고 그것들을 이전에 가졌던 경험과 맞추어 봅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나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각 기관이 받아들이고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마음이 해석해 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 대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것이 명(名)입니다. 사물의 명칭이 생기는 이유는 편의라는 필요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 필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윤리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 이유입니다. 윤리적 이유란 명칭을 통해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기 위함이고, 논리적 이유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명칭은 약속입니다. 새로운 것이 생겼을 때 과거의 어떤 것과 같으면 같은 이름을 붙이고, 다르면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명칭은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고, 사물을 직접적으로 가리켜 혼동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 밖에 알맞는 이름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써 오는 명칭은 실명(實名)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명칭도 여러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말이나 돌 같은 단순 명사와 흰 말이나 단단한 흰 돌 같은 복합 명사가 있습니다. 순자는 단순 명사를 단명(單名)이라고 했고, 복합 명사를 겸명(兼名)이라고 했습니다.
또 공명(共名)과 별명(別名)이라는 구분도 있습니다. 공명은 보편적인 명칭이고, 별명은 구분하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이 공명이라면, 사람이나 말은 별명입니다. 순자는 한 걸은 더 나아가 더 이상 포괄할 수 없는 통칭을 대공명(大共名)이라 했고,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명칭을 대별명(大別名)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기반 위에서 묵가나 명가의 궤변적인 논리를 비판합니다. 묵가의 주장 가운데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논리는 도둑이 사람에 포함되는데도 도둑과 사람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명칭을 가지고 명칭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순자는 혜시가 제시한 산과 연못이 똑같이 평평하다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사물은 구체적이지만 명칭은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지대에 있는 연못이 낮은 지대에 있는 산보다 고도가 높을 수는 있지만, 산과 못이라는 일반 명칭은 일반적인 법칙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시의 논리는 구체적인 사실로 일반 명칭을 혼란시킨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또 공손룡의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흰 말은 말 속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런 논리는 명칭만을 가지고 사실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순자는 이 같은 잘못된 논리들이 논쟁과 시비거리로 발전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훌륭한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순자 철학의 가치
순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던 전국 시대 말기였습니다. 공자 때에도 이미 겸병 전쟁의 주체가 점점 아래 계층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나타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면 구 귀족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주 계층들까지 등장하면서 혼란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기존 통치 세력과 신흥 지주 계층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구 귀족은 봉건 통치의 부활을 꿈꾸면서 예치(禮治)를 내세웠고, 신흥 지주 계층은 개혁을 표방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 이론을 완성시킨 제자들, 한비자와 이사를 통해 열매맺게 됩니다. 역사의 발전이 가져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의 사상은 위에서 본 것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기를 바랐습니다.
순자는 자신의 철학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던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을까?
순자는 자기보다 먼저 유가를 높였던 맹자를 혹평하였습니다. 맹자는 글과 말만 뛰어났을 뿐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유가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순자는 유가가 몰락한 책임을 맹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어내고 그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였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불행들처럼. 그러나 그 제일 밑에 희망을 남겨 놓았습니다. 착한 일을 행하면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인위적인 의지가 그 희망입니다.
[출처] 순자(荀子/BC 298?~BC 238?)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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