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구룡사
6월에 절집을 다녀온 뒤로는 지금까지 쉬고 있었다. 금년 여름의 무더위는 유난하다. 나이를 생각하니 더위는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해마다 팔월이 끝날 즈음이면 아이들이 가족모임을 갖는다. 아내의 생일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의 장소는 주로 강원도이다. 올해도 강원도의 원주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원주라면 치악산이 유명하다. 생각나는 절은 없다. 젊은 날의 등산 모임 때는 강원도 치악산은 대구에서 너무 멀었다. 답사 모임을 할 때는 우리를 유혹할 만한 곳이 없었다. 영월까지가 한계였던 것 같다.
절집에는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아들네는 인터넷 검색에서 구룡사라는 절을 찾아주고는 먼저 떠나갔고, 우리 부부는 사위네 차를 타고 치악산을 찾기로 했다.
강원도는 본래 산세가 험하다. 산봉이 첩첩이고, 봉우리도 날카롭다. 치악산 골자기의 초입은 여뉘 산골처럼 한산하다. 골 깊숙이 들어가는 찻길은 지리산만큼이나 유곡이 이어진다. 들어가니 음식점도, 숙박시설도 나타나고, 등산객도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찻길을 따라서 더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 절집의 기와 지붕이 보이면서, 일주문-천왕문 그리고 누각 형태의 불이문이 나온다. 험한 산세 때문인지 오르는 계단은 매우 가파르다. 요사체도 여럿 보이고, 법당 안과 절마당에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몇 몇 가족들이 보인다. 사세(社勢)가 만만찮아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요즘 자주 만나는 부자절마냥 번쩍거리는 화강석을 깎아서 천박하게 보이도록 장식하지는 않아서, 분위기는 좋았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법당으로 들어가고, 사위네 가족은 저네끼리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바쁘다. 나는 절 마당을 으슬렁거렸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절의 소개글을 읽었다.
구룡사(龜龍寺)는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절로 치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구룡사는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氣)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의 아홉 마리 용이리라는 구(九)에서 거북이를 나타내는 구(龜)로 바꾸어서 龜龍寺라 한단다.
나는 절의 창건설화에서 우리의 토속신앙(무속신앙)과 불교의 다툼을 본다. 절의 창건설화이니 불교가 토속신앙을 누른다. 그러나 나는 절의 해설과는 다른 읽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108寺이야기에는 다른 읽기를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남의 제사에 와서 쓸데없이 밤 놔라, 대추 놔라 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절에서 말하는 그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668년(문무왕 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 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절의 창건설화는 거의가 우리의 토속 신앙지를 불교가 차지하는 내용이다. 불교가 당연히 토속신앙을 이긴다는 내용이다. 이 절의 아홉 마리 용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고대신앙을 공부한 나로서는 할 말이 많지만, 절집에 답사와서 시시비비를 따질 생각은 전혀없다. 절은 우리의 토속신앙도 잘 간직하는 역할을 함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68년(문무왕 8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던 것을 조선 중기 이후부터 '아홉 구(九)'자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써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신라말·고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는 절집 이야기가 길어지도록 함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절은 임진-병자 란 이후에 지었다. 이 절도 그랬다. 숙종 32년(1706)에 중건되었다고 전하는 구룡사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내려오는 길에 전망이 좋은 2층 커피집에서 차를 마셨다. 유리창 너머 아득히 멀어져가는 산골짜기를 보았다. 골짜기는 옅은 안개인지, 이슬비를 뿌리는 비구름인지에 쌓여서 흐릿해지고, 능선이 첩첩으로 겹쳐지면서 저 안쪽으로 더 더 깊어져간다. 그리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나는 절집보다는 비안개에 쌓여 실루엣처럼 그림자로만 보여주는 치악산 골짜기와 구름에 묻혀서 하늘로 사라지는 치악산 봉우리가 더 오래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하나 더 말하자면 원주에 들린 길에 박경리 문학관을 찾았다. 집사람은 원주에 박경리 문학관이 있는 지를 몰랐다면서 들려서 한 시간도 더 시간을보냈다. 나는 땀 흘리면서 기다려야 했다.
대구로 오는 버스 안에서 너무 피곤하여 살짝살짝 꿈속을 헤메곤 했다.
2023. 8. 21
첫댓글 치악산 구룡사 답사를 읽으며 문득 예전에 선생님께서 우리 토속신앙은 용이 아니라 거북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거북 구로 고친 게 더 좋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