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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생애(3)
중기
조조를 떠나다
건안 4년(199년) 6월, 세력이 쇠락하여 망해가던 원술이 원소에게로 가려고 하자 조조는 유비, 주령, 노초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하비에서 원술의 길을 막아 공격하게 하였다.
상단에서 서술하였듯 조조가 유비를 군부 2번으로 부리기 위해서 한 일이기는 했지만 조조가 방심하다시피 유비를 믿고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한 걸 보면 그 조조를 유비가 완전히 오판시킨 것이다. 조조를 껌뻑 속아넘기고 농락할 정도면 유비의 처세술과 연기력은 진짜로 대단했던 모양. 사실 유비의 인생 자체가 조조의 천적이다.
어쨌든 이 때문에 유비는 의대조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하남으로 내려갔지만 유비의 진짜 목적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허도에서 같이 일을 꾸미는 게 아니라 서주에서 공모하는 쪽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후 이 소식을 들은 정욱과 곽가, 동소가 유비를 놓아주면 안 된다고 진언하고 나서야 실수를 알아챈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으나 때를 놓쳤으며, 이것은 서주 대학살, 적벽대전과 더불어 조조의 일생일대 최악의 실책이 되고 말았다.(정욱전, 자치통감)
유비는 원술이 원소에게 가지 못하게 방해했고 원술은 우회해서 가려다 도중에 죽는다.
서주 군벌로 재기하다
유비는 원술이 죽자 서주 자사 차주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주 하비국을 점거하여 서주를 되찾는다.
참고로 서주는 본래 항우의 본거지였던 팽성국이었지만, 서주 대학살로 인해 팽성국이 행정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도겸 시절부터 주요 지점을 하비국으로 옮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유비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에도, 여포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에도 하비국이 중심이었다.
이때 조조가 같이 파견했던 주령은 유비가 하비를 점령하자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돌아오는데,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이후 주령은 유비의 일로 열받은 조조에게 화풀이 대상으로 갑질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유비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고, 주령이 조조의 부하가 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정 가치도 없다. 그렇게 유비는 조조에게서 벗어나 독립 군벌로 재기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가 패(沛)의 관아로 돌아가자, 조조가 유비를 엿보게 하여, 유비가 바야흐로 파(蔥)를 찢으며, 하인에게 이를 하게하나, 바르지 못해, 바로 지팡이를 들어 그를 때림을 보였는데 조조는 안심했는지 "귀 큰 녀석이 아직 이를 깨닫지 못했구나." 라고 했지만 유비는 그날 밤, 급히 동쪽으로 갔다.
정욱과 곽가가 다시 이를 말해, 조조가 말을 달려 그를 추격하게 하나, 미치지 못했다. 유비가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배반했다.
이후 유비는 관우에게 하비를 맡기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조조의 군벌 본거지가 연주, 예주 다수, 사례 일부고 협천자 명분으로 건립한 허도가 행정구역으로 예주 영천군 허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조조와 맞서기 위해 일부러 접경지역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나서면 중요 후방지역을 관우에게 맡기는 신뢰는 훗날 유비가 익주를 차지할 때 형주를 맡긴 것에서도 드러난다.
유비가 서주를 점거하자 서주 동해군(東海郡)의 창희가 모반하고 서주의 군현 대다수는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의 편을 들었으며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첫 번째와 달리 조조와 손잡고 서주 군벌이었던 여포를 죽인 뒤 조조가 임명한 서주 자사를 몰아내고 무력점거한 것이었다.
심지어 유비는 (물론 배신했지만) 그 서주 대학살의 주범인 조조와 손을 잡았던 적이 있다. 이럼에도 서주의 군현 대다수가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의 편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지지 세력이 서주에 얼마나 튼튼히 자리잡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지 겨우 육칠여 년, 학살 후유증이 여전했으니 처음만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불구대천지원수보다는 나았으리라. 아마 조조가 군비를 유지를 위해 서주에서 엄청나게 뜯어갔으리라.
착취를 견디 못한 이들이 유비의 편을 들어 조조와 대적한 것이리라.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감행하였고 그 이후에도 기필고 서주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도 서주의 풍족한 생산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생 동안 유비가 내세운 이데올로기는 일대를 차지할 때 사람의 인심을 얻은 뒤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처음 서주를 넣을 때는 물론 형주와 익주를 차지할 때도 이러한 수순을 거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습점거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서주 군현들이 곧바로 전향한 것을 보면 단순한 기습점거가 아니라 사전에 현지 세력과 치밀하게 기획된 프로젝트라고 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이는 유비가 서주 민심을 잘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사이에 여포와 조조의 치세를 거쳤고 유비의 서주 지배 기간이 2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서주를 잘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유비가 옛 도겸의 부하들인 조표와 단양병들의 배신으로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일부의 여론'이었을지언정 '절대다수의 여론'은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유비는 조조와 손잡고 여포를 죽였음에도 그로 인한 서주의 불만이 없던 것을 보면 여포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 서주를 잘 못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았냐면 그것도 아닌 게, 조조가 유비를 용서할 리가 없고 서주는 방어에 취약한 지형이었다. 거기다 서주 대학살도 아직 피해가 수습되지 않은 판국이었다. 유비는 기껏 손에 넣은 본거지를 잃을 수는 없기 때문에 부지런히 밑바탕을 깔았다.
원술의 하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 사실상 말려 죽인 뒤에 서주를 점거한 것은 원술이 세가 약해졌다지만 변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조조보다 세력이 강한 하북 군벌인 원소와 동맹을 맺어서 조조를 견제했다.
원소도 조조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비에게 기병을 보내서 군사적 지원을 했다.(선주전, 원소전) 기록은 없지만 조조와 싸우는 동안 다른 군벌이 쳐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가장 강대한 군벌인 원소와의 동맹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허도의 동승같은 반 조조세력과 연줄을 유지해서 자신이 조조와 싸웠을 때 뒷치기를 하거나 최소한 조조 본거지를 흔들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조조와 유비의 세력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불리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주를 겨우 7개월 만에 조조의 침공으로 잃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의 불리점을 최대한 상쇄하기 위해서 여러 긴밀한 움직임을 펼쳤고, 조조를 속아넘긴 것부터 시작해서 서주 장악과 안정에 이르는 이러한 판짜기 능력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아무튼 유비는 예주 패국 패현에 머물면서 조조를 견제하고 있었고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지만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유비에게 이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유비는 이들을 격파하고 "조조가 직접 온다면 모를까, 너희들이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헌제춘추)
영웅기에는 '조조와 유비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했는데 유비가 원소에게 비밀을 흘렸고 원소는 조조가 (아마도 원소) 도모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조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피가 흐르게 하여 실언에 대한 후세의 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했다는 점, 조조 스스로 실언했다고 생각했다는 점, 그게 또 하필이면 대놓고 조조가 원소를 저격하는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기록은 논영회 일화를 유비가 원소에게 흘림으로서 원소가 자신을 도모할 뜻을 품은 조조를 공격하게 할 마음이 들게 만들려는 시도로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유비가 서주에 다시 복귀한 다음 원소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견제하던 199년 후반에 있었던 일을 기록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일화는 유비는 사소한 일화 하나하나까지 오로지 조조를 대적할 마음으로 철저히 이용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다.
다시 서주를 잃다
5년(200년) 봄 정월, 동승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형벌을 받아 주살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 무제기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 대패)[37]했다 - 선주전
건안 5년(200년) 태조가 동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이 원소에게 태조의 배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으나, 원소의 자식의 병 때문에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니,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하길
"무릇 만나기 힘든 기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그르치다니, 애석하도다!"
라 했다. 태조가 이르러 유비를 격파하니,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삼국지 원소전
건안 5년. 좌장군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패(沛)[38]에 의거하며 조조를 등졌다. 조조는 이를 두려워했으며 장차 직접 유비를 칠 준비를 했다.
이에 전풍이 원소에게 말하길.
"공(원소)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조조입니다. 지금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치려 하는데, 이때 군사를 이끌고 뒤를 습격한다면 한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군사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원소는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며 이를 거절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슬프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한낱 어린아이의 병 때문에 잃으니 정말 아깝구나."
원소가 이를 듣자 크게 화를 냈고, 나아가 이로 인해 전풍을 싫어하게 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황하를 건너는 것을 두려워 했으므로,이에 급하게 유비를 쳐서, 마침내 그를 깨뜨렸다.
후한서 원소전
건안 5년(200), 조공(曹公, 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삼국지 관우전
태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延津, 황하 나루터. 진류군 산조현 북쪽)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태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官渡)로 돌아갔다.
유비가 서주를 들어 모반하자 태조가 동쪽을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견수(堅守)해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별영(別營)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하내군 급현, 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영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삼국지 우금전
200년 정월 임오일(9일) 동승, 왕자복 등과 계획했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동승이 처형된다.(의대조 사건) 조조는 사건 주모자들과 더불어 동승의 딸이자 헌제의 후궁인 동귀인(당시 회태 5개월이었다고 한다)까지도 교살한 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대패해서 또 처자와 하비에 있는 관우도 못 챙기고 도주한다.(선주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설마 원소가 있는데 조조가 오겠어?' 라고 생각하다가 조조의 대장기만 보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사마광은 통감고이에서 "유비가 필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헤아리니, 위서는 매우 터무니없다."라고 평가했다.[39]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장악하자 조조는 이를 두려워했으며 장차 직접 유비를 칠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이 때가 기회이니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라는 전풍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결국 원소가 구원하지 않아 유비는 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비의 주력이 격파되고 하비에 고립되어 있던 유비의 심복 관우는 곧 조조가 하비를 쳐서 사로잡힌 후 조조가 극진히 대우하여 편장군에 오른다.[40]
당시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단순한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실 원소 문서나 관도대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원소는 당시 역시 하북의 모든 역량을 장악하진 못했고 협천자 논리를 내세워서 직, 간접적으로 양면 공세를 펼치며 원소세력 외곽부터 잠식해 들어오는 조조를 상대하는 데 힘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유비를 동맹세력으로 놔두고 조조가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는 선택지도 분명 있었다.
다만 정사 삼국지 우금전에서는 우금이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유비를 치러 가는 사이 연진 사수를 명령받았고, 배후를 노린 원소에 맞서 견수한 후, 오히려 역으로 악진과 함께 원소의 영향력이 확고하지 않은 하내를 치면서 영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는 서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원소가 배후를 치지 않았다는 통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원소가 조조의 시선을 서주에서 여기로 다시 돌리기 위해 이 지역을 쳤는데 우금의 결사적인 방어로서 유비를 구원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도 일리가 있으며, 이는 원소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소수 분견대를 통한 원소의 견제 시도로 선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른 기록들은 모두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히려 원소군이 역습까지 당했기 때문에 우금전의 기록이 사실이라 해도 원소의 본대가 직접 움직인 것이 아니라 소수의 별동대를 통한 견제의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소극적 태도로 유비의 패망을 방관하던 원소가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자마자 한황실 재건을 명분삼아 대대적으로 남하하며 관도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원소의 관도대전 승리를 전제한다면 원소에게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었고, 유비를 원소의 대등한 동맹자로서 한 주를 차지해 정치적 실권을 가진 군벌로 대우해 그에게 지분을 주기보단, 유비 자신이 가진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몸만 간신히 살아남아 원소에게 명분을 바치는 상황을 원소가 의도했다는 해석 또한 충분히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아들의 병 때문에 원소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즉, 관도대전을 일으켜 조만간 조조를 치기로 이미 마음먹은 원소는 유비가 그의 명분만을 가져오는 것을 선호한것 같다. 실제로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 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소가 유비가 명분만을 가져오는 상황을 고려했다면 이 점도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원소에게 귀부하다
유비는 원소의 아들인 청주 자사 원담에게 갔는데 원담은 예주목 유비에게 무재로 천거받은 적이 있었고, 유비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보기를 이끌고 나와 그를 맞이한다.(선주전)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였고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원소에 귀부하자 원소 부자가 마음을 기울여 공경하고 중히 대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시기 유비가 반 조조 세력의 상징 격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뜻한다.
연의에선 아예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41]
그 와중에 대패로 다 흩어져 달아났던 유비의 병사들이 한 달 남짓 지나자 어떻게 알긴 알았는지 점차 유비에게 다시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비는 이 와중에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명을 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좌장군 유비의 부곡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
관도대전
관도대전이 일어나자 원소는 문추를 파견해 조조를 공격하게 했고 유비는 이때 문추와 함께 5~6천의 기병을 이끌고 조조와 싸웠지만 문추는 조조의 치중을 방치해 이용한 계략에 걸려 병력 통제에 실패해 사망하고 유비는 후퇴한다.
汝南黃巾劉辟等叛曹操應袁紹,紹遣劉備將兵助辟,郡縣多應之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를 따르자 원소는 유비를 보내어 병사들을 거느리고 유벽을 돕게 하니, 군과 현에서 대부분이 그에게 호응하였다.[42]
자치통감 63권
劉備略汝、穎之間,自許以南,吏民不安,曹操患之
유비가 여수, 영수 사이의 지역을 '경략'하자 허현으로부터 이남 지역의 관리와 백성이 불안하였으므로 조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자치통감 63권 한국어 번역
曹操與袁绍於官渡交戰,汝南郡黃巾餘軍劉辟等响應袁绍叛曹,袁绍便派劉備率軍與劉辟會合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교전하자 여남군 황건잔당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했고 원소가 유비에게 편승한 무리를 통솔하게 하고 유벽에게 무리를 모으고 합치게 했다.
이후 유비는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하는 동안 예주 여남군으로 보내져 허도를 공격한다. 예주 여남군(汝南郡) 행정구역에 속한 여양현(汝陽縣)은 원씨의 본적지라서 원소에게 호응한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후방 교란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즉 양동작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란하고 원소에게 붙었고 원소는 유비에게 장병을 딸려보내 유벽과 함께 다수의 군현을 호응케 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원소가 유비를 보내 허도 바로 밑인 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한편, 이 시기 관우는 백마 전투의 선봉으로 수많은 병사들 사이를 돌격하여 원소의 명장 안량을 찔러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원소의 장수들을 모조리 압도하여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푼 것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했는지[43] 조조가 보냈던 물품들을 모두 봉인하고 편지를 조조에게 써서 보낸 뒤 그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하북에서 사례를 통해 예주까지 가는 동안 조조군은 뭘 한 건지 두 번이나 유비가 예주 여남군을 오가면서 저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유비가 일생 동안 도주를 여러 번 하면서 단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을 정도로 위험지대를 피해서 돌아다니는 것에 능숙한 인물인 만큼 단순히 적군이 자신을 공격하기 힘든 곳만 다녔을 수도 있다. 생애 전반기 기록을 보면 의외로 유비는 예주에 머문 적이 많아서 지리를 잘 알았을 것이고. 여하간 쉽지는 않은 일이기에 미스터리하다.
강을 타고 갔다는 추측도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시기 유비는 낙양 북쪽 맹진항을 통해 조조의 배후를 크게 돌아간 뒤 예주 여남군에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유비는 원씨 고향이 있는 여남군, 그중에서도 헌제가 있는 허도 바로 남쪽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며 양동작전을 훌륭히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주의 거의 전역이 원소의 편을 들고 조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는 조조의 의대조 사건같은 만행들로 인해 예주 호족이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상태에서 원소가 그걸 놓치지 않고 유비를 보내 자신이 만든 한의 역적 조조 프레임을 공고화시킬 명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유비가 허도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설치는 것을 근심했다. 허도는 행정구역상 예주 영천군 허현이기 때문에 예주가 거의 다 등을 돌린 상황에서 허도가 함락되기라도 하면 협천자 프레임도 잃고 원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인이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병을 이끌어 유비를 패주시키고(조인전) 유비는 원소에게로 되돌아간다.(선주전)
201년,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패한 후 유비는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했다. 이미 관도대전 전부터 원소 몰래 조운을 통해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던 유비다. 언제고 간에 다시 독자 세력을 구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단 얘기.
거기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에서 패퇴하고 명분만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을 땐 수백리 앞에서 유비를 마중했지만, 그전에 유비가 엄연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별개의 군벌이었을 때는 동맹관계면서도 되도 않는 아들 병 핑계 대면서 사실상 도움을 주지 않을 거라고 천명한 인물이었으니 자신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태도를 바로 바꿀 인물이 원소라는 건 유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당시 원소가 겉으론 아직 강대한 세력이었지만 관도대전의 패배에서 보이듯이 세력 내적으로는 심각하게 균열이 가고 있었음은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였고 유비는 옆에서 그걸 직접 확인까지 했다.
그런 이유로 원소가 명분을 위해 유비를 이용했듯이, 유비도 명분을 바쳐줄 가치가 떨어진 원소를 버릴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조조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선 원소 세력은 조조의 샌드백으로 두고 자신은 허도와 가까운 유표와 인접한 여남으로 가서 그의 지원을 받아 천자가 있는 허도를 노리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유비는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소가 이를 받아들여 다시 예주 여남군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이후 유비는 다시는 원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44]
원소가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공도 등과 합쳐 그 병력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조조는 채양을 보내 공격하지만 "설령 우리 군세가 불충분하다고는 하여도, 너희들이 설령 백만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하여도,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조맹덕이 단신으로 온다면 내 스스로 물러나겠다만은!"라고 말하며 전사시킨다.(화양국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조조의 본군과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해서 손건, 미축을 유표에게 보내 형주로 망명한다. 형주는 서주 대학살 당시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친 피란민들이 많은 지역으로 유비가 인망을 얻기 유리한 곳이었다. 결국 그중에서 유비 일생일대의 파트너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 결정은 아주 좋은 것이였다.
유비의 생애 중후기
유표에게 귀순하다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유비를 영접해서 상빈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유비에게 귀부하는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많아지자 유표는 유비의 마음을 의심해 은밀히 그를 방비했다고 한다. 유표가 이렇게 유비를 맞은 것은 원소 이후 '조정을 장악한 역적 조조에 맞서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역적에 대항하는 한실의 종친' 유비의 명분론을 이용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조가 조정을 장악하고 중앙 정부로서 유표에게 순순히 따를 것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조정의 이름을 걸고 형주 지배의 당위성을 확립했던 유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유표는 칭제를 생각했던 듯도 보이지만 원술의 선례를 의식했는지 황제 비스무리한 흉내는 내면서도 결국 칭제하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는 있겠으나, 꽤 효과적이었던 원소의 선례를 따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형주의 호족들, 그중에서도 유표가 처음 형주에 왔을 때 그를 지탱해 준 양양의 대호족 괴씨, 채씨 일족들 같은 호족 세력 상대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채씨 일족을 대표하는 채모 같은 인물은 조조의 친구일 정도로 당시 유표를 지탱하던 세력들은 친조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표는 유비가 형주에서 인심을 얻어 형주의 여론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조조의 협천자 프레임을 깰 유일한 인물이 유비 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크게 의지하는데, 영웅기에 나오는 유비의 형주 자사 겸임 기록이나 유표가 유비와 계략을 논하거나 연회를 가지는 기록이 꽤 나오는 것을 봐도 유표 입장에선 유비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표전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의 대결 전에 장사 태수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 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지만 원소가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어도 그저 한수와 장강을 점거해 시세를 관망했다고 한다.[45] 유비는 이런 유표의 강대한 세력을 이용해 조조의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유표와 조조가 충돌했던 박망, 호양, 무음 등의 한수 이북 형주 지역은 허도와 지근 거리에 닿아 있기에 유표가 배후를 공략할 경우 이는 조조에게는 무척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유비가 이런 최전방 지역인 신야에 배치되고 박망 등에서 조조군과 부딪친 것만 보더라도 유표가 유비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 볼 수 있다.
실제로 유표는 몇 차례의 호기를 맞이 하기도 했지만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비가 제안한 호기를 이용한 계책을 쓰지 않은 걸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건 그만큼 '대조조 대항용'으로서 유비의 입지가 형주에서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비는 이렇게 형주에 여러 해 머물렀다. 이 시기는 평생 전 중국을 좌충우돌 떠돌아다니면서 싸웠던 유비의 인생 가운데 몇 안되는 평온한 시절이었지만, 유비 개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세월은 아니었다.
한번은 일찍이 유표와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일어나 측간에 갔다가 넓적다리 안에 군살이 붙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자리로 돌아온 뒤 유표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말했다, "제 몸이 항상 말안장을 떠나지 않으니 넓적다리 살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으니 넓적다리에 군살이 올랐습니다.
나이는 공연히 먹어가는데 공업(功業)을 아직 세우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슬퍼했습니다."(구주춘추) 이 일화에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바로 비육지탄.
또 연의에도 나온 유명한 에피소드인 괴월과 채모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적로의 일화도 이 시절에 나온 것이다.(세어) 손성은 '주인과 손님에 입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사이가 더 벌어졌을 텐데 말도 안 된다'고 깠지만 학경의 경우 '유표가 사람들이 귀부하는거 보고 은근히 경계했다며? 그럼 괴월, 채모가 참소하는 게 혹시 있어서, 이 단계의 급작스런 일을 망언이라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라고 했고 나관중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연의에 이 에피소드를 집어넣었다.
이때 조조는 유비가 유표와 함께 배후를 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46], 곽가가 나서서 유표가 유비를 쓴다면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시킨다.(곽가전) 그런데 203년에 조조가 여양에서 원상과 대치하고 있을 때 유표의 명령으로 유비가 북침을 한 적이 있었다.
조조는 급히 하후돈과 이전을 보내 유비를 막게 하였는데 유비는 하루아침에 둔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매복을 의심했음에도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유비는 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그를 박망파에서 격파한다. 이전이 구원병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군은 철수한다.(이전전)
조조가 오환족과 싸울 때를 틈타 유비는 허도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지만 유표는 듣지 않는다. 유표가 나중에 유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유비는 '뭐 언제라도 다시 기회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넘어갔다고(한진춘추).
물론 속은 꽤나 쓰렸을 것이다. 당시 조조는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중에 현지에서 영입된 토착 세력가 전주의 존재를 배제할 경우 이미 패배가 확정적이었던 상황이었고, 전주의 안내에 따른 행군 과정도 중간에 길이 끊겨 산을 뚫고 계곡을 메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물을 찾지 못해 말 피로 연명하며 전멸의 위기를 겪는 등 험난한 도박의 연속이었기에 후에 원정을 말린 사람들에게도 조조가 상을 내린건 뭔가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당시 유비가 이런 점을 간파하고 이런 진언을 할 만도 한 게 유비는 유주 출신이고 조조가 맞서고 있던 그 오환족과 싸우던 공손찬 휘하에 있었으며 스스로도 오환기병을 거느리고 싸운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지역 사정과 그로 인해 조조가 겪을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전주가 개입하지 않았거나 하다못해 유표가 유비의 말을 들었다면 중원의 세력구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 와중에 유비는 서서의 추천으로 삼고초려를 통해 마침내 제갈량을 얻고, 둘의 관계를 스스로 물고기와 물에 비유하면서 수어지교라는 고사성어도 만들어냈다.(제갈량전)
형주에서 내몰리다
208년, 영웅기에 따르면 유표가 병에 걸리자 유비는 영형주자사(領荊州刺史)로 올랐다.[47] 한편 원가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평정한 조조는 마침내 형주를 공격하였고, 때마침 유표가 세상을 떠나면서 차남 유종이 뒤를 잇는다.
유종의 대신들(연의에선 채부인도 추가)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유종은 처음엔 거부한다. 이때 부손이 유비를 언급하며 설득한 과정이 볼 만하다.(유표전)
부손은 유종더러 그와 유비가 누가 더 낫냐고 질문하고 유종은 내가 유비보다 못하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손은 조조를 유비더러 막으라고 해도 힘든데 유종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만일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면 형주는 유종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결국 유종과 형주 수뇌부는 조조군에 투항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 대화를 통해 유표의 가신들, 정확하게는 양양의 괴씨, 채씨 일족들이 가진 유비에 대한 경계심을 엿볼 수 있으며, 사실 유비가 형주 인심을 서서히 얻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런 심리가 불거질 만도 했다.
단적으로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많은 형주의 호걸들이 그에게 귀부해서 유비를 유표 측에서 경계했다는 것도 그렇고, 가만 봐두면 형주는 유비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은 유표 측이나 다른 세력에서도 은근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기에서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하게 했다는 기록이나 물론 신빙성은 없다고 배송지가 부인하긴 했으나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맡기겠다고 했다는 말이 퍼졌을 정도면 유비가 장차 형주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당시 형주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실 하북이 평정된 이상 그 다음은 무조건 형주와 강동이 될 수밖에 없었고 반조조 입장이 전반적으로 강했던 형주민의 입장을 고려해 봤을때 조조가 내려와서 싸우게 되면 그 반동으로 형주 최전방에 있던 조조의 아치에너미 유비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유비가 이전부터 형주민들의 인심을 얻어가던 것과 함께 조조와 맞서기 위해 형주민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유종 대신 형주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부손의 말이었던 것이다. 이를 봤을 땐 유비의 형주장악은 필연적인 위협으로 유종이나 채씨, 괴씨 세력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유비는 당시 평판이 괜찮았던 유표의 장자 유기를 후원해 채씨 일족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는데[48] 이것은 장자이자 후계자로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 유기를 통해 인심을 얻는다는 면에선 매우 효과적이었다. 확실히 인망에 따라 움직이는 유비의 성향이 또 한번 드러난 일인 셈. 유종과 채씨 일족이 유비에게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항복을 결의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대로 두었으면 형주의 인심은 유비에게 쏠렸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 당시 형주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유기가 박대당하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 아파하였고 사람들은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를 모함했던 까닭에 이를 책망하며 그를 천시, 경멸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괴씨나 채씨가 당시 유표세력을 만들어 준 양양의 대호족이라고는 해도 여기서 나오는 '선비들'이나 '사람들'로 대표되는 다른 형주의 호족들이나 백성들이 유기에게 동정적이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다면 그 뒤에서 유기의 후원자 포지션을 잡고 있으면서 동시에 반조조 세력의 상징으로서 호걸들이 날로 귀부하는 등 인심을 얻어가던 유비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당장 채씨의 사위이자 괴씨의 처남이 유비 세력에서 핵심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당장 유비가 유종을 크게 부르고 강릉으로 떠날때 유종이 아무 말도 못하고 두려워 했던 것이나 유종 좌우 주위의 측근뻘 되는 사람들, 그러니까 호족들과 백성들 등 양양에 있던 형주 사람 대부분이 자신들의 주군 유종을 버리고 단지 성밖에서 유종을 불렀을 뿐인 유비에게로 우르르 몰려가 귀부하고, 유종과 채씨 세력은 그걸 전혀 막지 못했던 장면은 조조가 타이밍 좋게 유표가 죽을 당시에 곧바로 형주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형주의 상황이 장차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일 수 있다.
이후 손권에게 노숙이 형주에 은의를 베풀지 못하였으니 (형주 여론을 장악한) 유비를 방패로 삼자고 한 부분이나 위에서 설명한 친 유기, 반 유종-채모 여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유표가 죽을 무렵이면 유표와 연대해 형주를 지배하던 양양의 친 조조세력 괴씨, 채씨 등을 빼곤 형주의 호족들과 백성 다수가 강하로 내려간 유기와 전방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기울었고 이는 심지어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들과 백성들마저 조조에게 항복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유종과 채모를 비롯한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쨌거나 유종은 결국 조조에게 투항하고 형주를 들어바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9월 조조가 신야에 다다르자 유종은 항복하고 부절을 바쳤다. 당시 조조 진영에서는 속임수가 아니냐는 제장들의 의견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누규가 다들 왕공으로 높이는데 유종은 부절을 바쳤으니 지극정성이라고 했고 조조는 진군한다.
이 결정이 최전선에서 조조와 대치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가 남하하여 완성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유비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싸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49]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종은 유비에게는 감히 알리지 않았는데 유비는 시일이 지나고 마침내 깨달아, 친한 이를 파견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이 송충에게 유비에게 이르러 뜻을 밝히게 했다. 이때는 조조가 완에까지 진군한 상태였다.[50]
유비는 이런 소식에 크게 격분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이미 코앞에 있고 조조에 항복한 형주와 조조 본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비군은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분노하여 '경들이 이처럼 일을 만들고도 서로 알리지 않다가 화가 닥쳐서야 나에게 알리니 심하지 않은가!'라고 송충을 칼로 겨누며 '경을 죽여도 분을 풀기 어려우나 대장부가 떠나는 마당에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외치며 부하들과 작전을 논의한다.
선주전 주석 한위춘추에 따르면 어떤 이는 유종과 형주의 관원을 위협해 남쪽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유형주(劉荊州, 형주목 유표)가 죽을 때 내게 고아를 맡겼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죽은 뒤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겠소'라고 거절한다.
기록으로 보면 유표는 유비를 아들들의 후견인 격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 유기와의 합류는 유기 입장에서도 후견인 격인 유비의 합세로 더 버틸 힘이 생겼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형주 사람들이 유기를 동정하였으며 유비가 유기와 이전부터 연결되어 그의 후견인 격으로 있었던 것도 유비가 형주 사람들의 인심을 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 판단할 수 있다.
거기다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양양의 괴씨, 채씨 같은 친조조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진춘추에서 나오길 유종이 항복한 후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셔서,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원이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유종의 장군 왕위가 한다.
이 발언에서 몇 가지를 알아낼수 있는데 첫째, 유표가 생전에 조조에 대한 투항을 거부했던 것처럼 유기와 유비뿐만 아니라 친조조 세력인 채모, 괴월 등에게 추대받아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반조조의 기류가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 둘째, 당시 유종이 조조군에 항복했어도 정예 수천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런 군세를 요청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장군이 반조조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즉, 유종 세력 내부에서도 물주인 양양의 괴씨, 채씨 호족들 외에 조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세력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유종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했던 유표의 부하 관리와 군사들 대부분이, 적벽대전 이후 패했다해도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손권도 아니고 유기의 뒤에 있다가 그가 죽자 자연스레 그 세력을 흡수한 반조조 세력의 상징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조조가 내려오자 형주의 인심은 유종보다 유비를 따랐던 것도 사실이고, 왕위 같은 이가 했던 발언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유종의 후원자들이 작당해 벌인 기습적 항복에 어쩔수 없이 수긍했을 뿐이지 반조조 세력이 상당했고, 이걸 유비가 대안이 되어 모조리 흡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유표의 옛 부하들을 받아들이는데 수가 워낙 많아 유비가 다스리던 치소 공안이 좁아 손권에게 땅을 청구했을 정도다.
떠나기로 결심하다
유비는 바로 출발하여 양양을 지난다. 선주전 본전에는 제갈량이 이때 유비에게 양양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 권했지만 유비는 차마 그럴수 없다고 거절한다. 유비가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서 양양을 지나다가 말을 세우고 유종을 불렀는데 유종이 두려워하여 일어날 수 없었다. 유종의 좌우 사람들과 형주 사람 대부분이 유비에게 귀의했다.
무후(武侯)가 융중에서 선주를 위해 계획하며, 형, 익을 점유하라니, 선주가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 즉 촉이 형, 익 2주를 얻고자 하며, 마음에 새겨두며 주의 깊게 생각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건안 13년, 조조가 유표를 남으로 정벌했다. 유표가 죽어, 그의 자식이 형주를 가지고 항복했다. 무후가 선주에게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가질 수 있다고 권했다. 진지의 제갈량전에선 그의 계책을 기재하지 않았으나 선주전에는 보태어 보이니, 선주가 유표가 탁고한 이유를 들으며 이르길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했다. 위, 진 사이에 이 일을 의논하며, 대략 모두 습착치의 견해와 같아, 모두 선주를 옳다 여기며 무후를 바르게 보지는 않았다.
공연이 쓴 한위춘추에서, 깊이 그를 위해 숨기며, 곧 사서의 글을 바꿔 “어떤 이가 권했다.”라 적어, 무후의 계책이 아니게 했다. 배송지주, 통감 모두 공연의 설을 옳다고 여겼다. 마침내 정자(程子), 주자는 곧 선주가 공격하지 않은 것을 권도(權道)를 잃은 것으로 여겼고, 후의 논하는 이들은 마침내 선주가 앉아서 알맞은 시기를 놓쳤다며 힘써 책망했다.
대저 한의 토지를 가지고, 적신(賊臣) 조조에게 항복했으니, 유종에겐 공격해도 되는 도리가 있었다. 선주가 말을 멈춰 유종을 부르자, 유종은 두려워 일어설 수 없었으니, 유종에겐 빼앗기 쉬운 형세가 있었다.
형, 익을 취함은 융중에서 계책을 정해서, 선주는 일찍이 형주에 대한 뜻을 잊지 않았다. 탁고로 인해 차마 하지 못했다는 건, 기껏해야 영웅이 사람을 속임을 훌륭히 여기는 것으로, 이 미담을 빌려 형주의 인사를 농락한 것일 뿐이다.
유장劉璋이 선주를 부담했으나, 선주는 갑자기 습격해 이를 가졌는데, 선주는 또한 유종을 소중히 여김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형주를 탈취할 뛰어난 재능을 오래 그리워하여, 공격할 수 있는 때를 만났고, 유종을 소중히 여기는 진실한 뜻이 있지 않아, 빼앗기 쉬운 형세에 당면했으니, 당시 형주를 공격하기 적당하지 않다고 간하는 이가 있어도, 또한 군심을 흔들고 미혹케한다고 이르며, 그를 죽이고 드러내 보였다면, 형주를 취하며, 애초에 무후의 권유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를 권하나 오히려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뜻이 진실로 조조의 병사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조조가 남으로 내려올 때, 병사가 수십만으로, 기염이 매우 강성했다. 선주의 부하 병사는 불과 수천으로, 유종을 탈취함은 어렵지 않으나, 조조를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금방 얻고 금방 잃는 자였다면, 어찌 조용히 때를 기다렸겠는가?
선주의 계책은 무르익었다. 그런데도 선주가 공격하지 않음이, 전부 중요한 기회에 어두웠다고 이르는가? 논하는 이들은 또한 조조에게 항복한 날, 형주 인사가 유종을 떠나 선주에게 붙은 이가 10여 만 명으로, 10여 만의 용력을 얻어서, 그 세력이 조조를 대적하기에 충분하기에, 무후에게 이런 권함이 었었다고 이르나, 이 또한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그렇지 않은 견해다.
선주가 조조의 병사가 완에 이름을 듣고, 급히 무리를 이끌고 예봉을 피해, 강릉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보존할 작정이었으나, 당양(當陽)에 이르러, 조조가 5천 기로 그를 추격하자, 당시 선주는 10여만의 무리를 데리고, 싸우지 않고 저절로 무너져, 처자식도 서로 돌아볼 수 없었으니, 일시적으로 붙어서 따르는 무리가, 조조의 전군을 당해낼 수 있었다고 이름은, 감히 믿을 수 없다.
그런즉 무후의 권고는, 그가 실제로 행한 것이 아닌가? 이는 또한 그렇지 않다. 융중대에서, 이미 형주를 취할 것을 권했는데, 어찌 빼앗기 쉬운 형세가 있고, 공격할 수 있는 때를 만났는데, 그의 주군을 위해 권하지 않았겠는가?
조조가 가을 7월 남으로 유표를 정벌하니, 8월 유표가 죽었고, 자식 유종은 양양에 주둔했고, 선주는 번에 주둔했다. 9월 선주가 병사를 이끌고 달아나, 양양을 지나나,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다. 당시 조조의 군은 오히려 신야에 있었다.
무후가 선주에게 권고함은, 양양을 지날 때로, 양양은 신야에서 오히려 3백 수십 리가 떨어져있어, 4일이 못돼 이를 수는 없었다. 이에 수일 내에, 형주의 각군에 호소해, 형세가 혹시 한번 대적하기에 충분했거나, 설령 대적할 수 없어, 결국 양양을 잃었더라도, 형주는 진실로 유씨의 형주라, 조씨에게 모두 들어가는 것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
그 후 적벽의 승으로, 오와 땅을 나누며, 이 또한 유씨의 땅을 나눠 오에게 넘긴 거라, 손씨에게 굽히며 이를 취하지 않았다면, 당일 선주가 형주를 취하며 빌린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래의 어떤 날 손씨가 형주를 의논하며 또한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마침내 서로 분쟁하여, 각군을 잃고, 대장을 엎어지게 하며, 한번 기회를 놓쳤다고 다시 떨쳐 일어날 수 없었겠는가? 무후에게 사전에 미세한 것까지 알 수 있는 현명함이 있었으나, 선주가 헤아림이 미치지 못했구나.
황이주(黃以周)의 경계잡저 (儆季雜箸) 사설략사(史說略四)에서
청나라 말기의 학자 황이주(黃以周)는 제갈량이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자치하라고 한 게 사실이라고 하면서 유비가 유종을 공격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조를 이길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유종을 공격해 차지하고 형주를 규합했다면 조조를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고 후에 형주를 빌린 일로 손권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대저 형(荊), 익(益)을 점유함이 곧 융중(隆中)의 본래 계책이나, 당일 형세로 이를 헤아리면 아마도 제갈공(諸葛公)은 필시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조조가 이미 완에 있으며, 군세가 매우 성대했다. 선주가 체류하던 무리로 틈을 타 타인의 나라를 공격해 설령 유종을 취할 수 있었어도, 조조는 막을 수 있었는가?
선주는 남으로 가 강릉(江陵)을 점거하고자 하여, 사람도 많아 수만이나, 조조가 오천 기로 그를 추격하니, 싸우지도 않고 패하며, 마침내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그가 조조를 막을 수 없었음이 틀림없다. 공연의 한위춘추(漢魏春秋) 에서 "어떤 이가 유비에게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리를 얻고, 남으로 강릉을 점거하자고 설득했다."라 하며 제갈공의 계책이라 말하지 않으니, 그 말이 옳다.
통감에선 모두 그의 말을 기재하며 진지(陳志)를 따르지 않았으나, 진지의 두 말을 참고해 쓰며, 이르길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가질 수 있다.”라 했으니, 공연의 책에서 “어떤 이가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리를 얻고, 남으로 강릉을 점거하자고 설득했다."에 근거했을 뿐으로, 유종을 공격해 마침내 형주를 다 가질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주자(朱子)가 이를 논하며, 선주가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유장을 취해 경권(經權)을 모두 잃었다고 일렀다. 선주가 유장을 공격해 취하면서 옳지 않음이 비롯됐으나 다만 어쩔 수 없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이에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즉 진실로 잃었다고 여기지는 못한다. 이는 또한 주자의 확정되지 않은 견해일 뿐이다.
왕무횡(王懋竑)
반면 왕무횡은 유종을 공격하고 양양을 치는 것은 제갈량의 계책이 아니며 이는 공연의 한위춘추 배송지주와 통감 모두 제갈량의 계책이 아니라고 쓴 것이 합당하다고 서술했다, 또 유비가 본래 계책인 융중대가 있긴 했어도 조조를 막을 수가 없어서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썼다.
선주전 기록은 유비일파가 조조가 눈 앞에 닥쳐오고 앞뒤가 적으로 둘러쌓인 다급한 상황에서 고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장 제갈량은 양양을 지나면서 유종을 공격해 (뒤에 있는 후환을 제거하고) 형주를 신속히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고 어떤 사람은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원들을 장악한 다음 강릉으로 도망가야 한다 여겼다.
사실 유종의 좌우 사람들과 형주 사람 대부분이 모두 유비에게 귀부하고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와 유표를 이간한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하니 유비가 인심을 얻은 걸로 따지면 양양을 얻어 공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나 유표와의 신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사실 유비가 양양을 점거하면 양양의 대호족 채씨, 괴씨 일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으며 당장 조조가 언제 올지 모르니 공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선 본전과 한위춘추의 설을 고증해 정리하여 '송충을 떠나보낸 후 유비가 부곡을 불러 논의 했는데 혹자가 유비에게 권하길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가히 얻을 수 있다(或勸備攻琮,荊州可得)'라고 했으나 유비가 그러면 자기가 나중에 유표를 어찌 보겠느냐며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양양 공격은 제갈량이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형주를 떠나다
최전방에서 고립된 유비는 달아나야 했는데 이때 시간이 분명 지체됨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무덤에 들려 슬퍼하는 등 자신을 따르는 형주 백성들과 호족들의 인심을 얻는 퍼포먼스를 잊지 않았다. 유비가 이러는 동안 신야에 도착해 형주의 항복을 받았던 조조는 강릉에는 군량이나 군대에서 쓸 것이 충분하기 때문에 유비가 이를 점거하여 남형주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치중을 내버려두고 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유비가 이미 양양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5천을 뽑아 호표기라 하여 하루만에 300리(한나라 시대 1리 = 415.8m 따라서 125km에 해당)를 달려 장판파[51]까지 굽히 추격해 이르렀다.
유종 항복 직후 나온 조조와 유비 양대 책사진의 결론은 '강릉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로 이미 결론이 난 상황이었다. 일단 유비 진영 책사진의 회의 결과 자체는 사적에 확실히 나오고, 또 그렇지 않고서야 유비가 굳이 무리를 나눴을때 관우에게 지정한 최종 목적지를 강릉으로 선정한다는 제스쳐를 취할 필요가 없다.
또 조조군 책사진의 결론이 '유비보다 먼저 강릉 선점'이 아니라면 조조가 유비의 10만 무리를 미친듯이 추격한다음 유비 추격이 실패하자 마자 곧바로 10만 치중을 수습하기보다 강릉 선점을 위해 재빠르게 이동할 이유가 없다.
당시 조조는 후일 위왕 즉위 후 말년의 삽질을 보이지 않는당대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이었고 조조군 양대 책사인 순욱과 순유가 멀쩡히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적벽에서 전쟁을 반대한 가후도 있기는 하지만 배송지부터 당시 가후가 적벽 대전을 반대한 건 대국적으로 완전히 뻘소리라고 대놓고 깠으니 넘어간다.
유비 역시 조조만은 못해도 전쟁에서 전투로는 이골이 난 사람이고 그의 책사 제갈량 역시 만능의 능력자이자 당대의 전략가로 꼽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이 양양을 차지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후 당시에 낸 결론은 모두 동일하다. '강릉을 먼저 선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후한 말 형주 지도
위의 형주 지도를 확인해보자. 유비가 강릉을 얻으면 장강 수로를 통해 강하의 유기와 연계할 수 있고, 사서에는 군비가 충실하다고 나오며 형주의 잘 조련된 수군이 있기 때문에 수군이 약한 북방의 조조군에 대항하기 쉬워진다. 또 배후의 형남 4군을 통제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수 있다. 형주의 진짜 물량밭은 형남이다.
원래 형주자사의 치소도 유표 부임전에는 양양현(후에 조조 치세에 양양군이 된다)이 아니라 무릉군에 있었고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장사군만 해도 남군 전체 1.5배~2배 정도가 된다.
반대로 조조가 강릉을 수중에 넣는다면 곧바로 형남 4군을 발 아래 둘 수 있으며 형주 수군을 완전히 흡수하여 장강을 자신의 진격로로 활용할 수 있다. 과연 조조의 동오 침공에서 주력을 맡은 것은 채모가 이끄는 형주 수군이었고 이 형주 수군이 궤멸되자 조조는 더 이상 동오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직후 형주에 대한 통제권을 통째로 상실해버렸다.[53]
괜히 이후 조조가 유비의 강릉 접수 소식에 붓을 떨어뜨린 게 아니다. 그만큼 당시 강릉이 형주 전역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유비는 당시 상황상 거리상으로 강릉에 조조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유비는 군재 자체는 당대 최상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투에 있어선 계산이 빠르고 상황 수습이 능숙한 군인이다. 오랜 세월 패주를 거듭하며 유랑한 유비지만, 그는 자신에게 확실한 승산이 있는 싸움, 즉 한 수 아래인 조조의 부하 무장들(유대, 채양, 하후돈) 등을 상대로는 철저한 승리를 거뒀다. 애초에 그런 생고생의 끝에서도 끝끝내 살아남는 것도 자기 능력이다.
다만 자신의 근거지를 빼앗기거나, 혹은 여포/조조 같은 당대 최고의 무장들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를 안고 싸워야 할 때는 전투를 포기하고 미련없이 도주하거나 최대한 다른 군웅의 지원을 얻기까지 지연전으로 버티는 것이기에 약해 보이는 것일 뿐,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며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반증이 된다.
거기다 한중 공방전에서 보듯, 유비도 환경만 잘 조성되면 당시 좀 해이해진 상태였지만 그간 자신을 고생시킨 조조를 엿먹였다. 그런 사람이 굳이 강하가 아니라 강릉을 선택한 이유가 달리 있을까?
보통 '미끼'라는 것은 그 미끼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 보일 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양 진영 모두 전쟁의 행방을 가를 최중요 요충지로 강릉을 지목한 상태에서 '10만 군중의 탈취가 당시 형주 전역에서 강릉 선점에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미끼내지는 방패로서 성립하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은, 적어도 조조에게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비 역시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옛날 경사에서 조조를 처음 만나 조조의 고향인 패국에 가서 병사를 모아 동탁 토벌전에서 함께한 이래 몇 번이나 같이 있었고 서주와 기주에서 조조를 대적하면서 조조가 어떤 인물인지 뻔히 아는 인물이 유비였다.
눈으로 본 서주 대학살과 전해들었을 관도대전에서의 원소군 생매장만 보더라도 조조가 백성들이 죽든지 말든지 일체 신경 안 쓸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 보는 눈이 당대 제일인 유비가 결코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강릉 점령'이라는 위치 상의 이점을 선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조조가 당장 눈앞에까지 와서 언제든지 자신을 쫒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단지 10만 군중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따라 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다 끌어안아 가면서 어떻게든 가려고 했다.
유비가 자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외면한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신의 근본을 포기하는 짓이며, 강릉 선점도 선점이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할 순 없었던 가치였던 것이다. 그것이 유비의 인덕이든 간흉이든, 이 사건이야말로 유비라는 인간이 왜 유비인지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장판파에서 탈출하다
결국 기병의 추격이 이르자 애당초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유비의 무리들은 사방팔방 흩어지거나 조조군에 사로잡혔다. 이 와중에 서서의 모친이 잡히는 바람에 서서는 유비군을 떠나고(제갈량전), 유비는 민간인 사이에 섞여있던 자신의 처자까지 버리고 달아나서 측근들과 함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처한다. 호표기의 대장인 조순은 이런 과정에서 유비의 두 딸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는 강릉성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조인전)
이 과정에서 유비의 가족은 흩어졌고 조운은 필마단기로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54] 장비는 장판파에서 만인지적의 위세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다. 가족까지 잃은 유비는 필사적으로 강을 따라 도망가다 떠났던 관우의 배에게서 구출을 받아 면수를 건너고, 강하 태수 유기의 1만여 병력과 만나서 함께 하구에 도착한다. 유비는 관우의 소속이 된 수군과 잔병을 합쳐 1만 명을 모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37] 자기 나라에 패전(敗戰)을 일컫는 말,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뜻이다. 패적 자체가 전장에서 싸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용어이다.
[38] 소패, 예주 패국 패현이다
[39] 무제기, 선주전 본전, 원소전, 관우전, 자치통감에서는 일관적으로 유비가 싸우지 않고 도망을 갔다는 기술이 없으며 통감고이에서 사마광은 위서의 기록이 터무니 없다 기술했으니 자치통감의 서술은 따라서 유비가 싸웠다는 것을 기본으로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도망쳤다면 적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하니 그들을 쫓아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잡은 것이 2천여 명이었다.라는 식으로 별도로 기록을 했어야 하는데 삼국지 본전에 그런 기록은 없다.
[40] 관우전과 선주전에서는 禽(생포)을 강조하고 있다. 관우는 고립된 상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패배하여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치통감에서도 '進拔下邳,禽關羽'라고 기록해 조조가 하비를 공략하고 관우를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하비에서 공성전 끝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41] 이것은 조운 별전에 따랐을 때의 합류 시기로, 조운전만 보면 유비가 도겸에게 지원갔을 때 이미 합류 상태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대체적으로는 조운전에서는 그냥 수종만 한거고 본격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건 조운 별전 시기라고 절충하는 의견이 대세인 듯하다. 실제로 예주와 서주, 허도에 유비가 있었을 때는 조운의 기록 자체가 유비군 관련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어 위키백과나 관련 서적 등에서도 합류 시기를 이 시기로 잡는다.
[42] 자치통감의 현대어 번역인 자치통감전역에서는 '汝南郡的黃巾軍首領劉辟等背叛曹操,回應袁紹,袁紹派遣劉備統兵去援助劉辟,周圍的郡、縣紛紛起來響應'이라고 써서 '(여남) 주위의 군현 대다수가 잇달아 호응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43] 그전부터 공을 세우면 무조건 유비에게 돌아간다고 천명했었다.
[44] 물론 겉으로 유비가 원소를 떠날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벽, 공도와 함께 유표의 지원을 받아가며 조조의 후방을 노리고 사보타주를 벌였지만 이게 망하는 바람에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던 것이니까, 원소도 어차피 명분만 취하면 유비에게 더 볼 일도 없었을 테니 가능했던 일이긴 했다. 뭐, 이유야 어쨌건 유비가 먼저 원소를 은밀히 떠나고자 했던건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관우가 조조 휘하에서 안량을 참한 것도 있어서 떠나고 싶었을 테고.
[45] 환계전에 따르면 장사와 옆의 세 군을 인솔하여 유표에게 항거하고, 사자를 보내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마침 이때, 원소와 조조가 전투를 계속했으므로 조조의 군대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표는 급히 장선을 공격하였고, 장선은 병들어 죽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환계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한다.
[46] 그도 그럴 것이 유비가 형주에 머물러 있을 때 북쪽엔 원상의 세력이 살아 있었고 남쪽의 유표와 북쪽의 원상이 연계하면 조조도 형세가 어려워진다. 원상도 절대로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닌데다 고간 같은 뜻 밖에 위협적인 적수도 있었다.
[47] 영웅기의 저자 왕찬은 당시 형주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고 유표의 이름으로 외교문서를 대필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외교 쪽 일을 담당했을 테니 유비를 조정에 상표한 것을 본 게 확실할 것이다.
[48] 정사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후일 유비가 유기와 힘을 합친 것도 그렇고 유기가 제갈량을 중시하여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는 데서 이미 그 상황이 다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49] 선주는 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선주전)
[50] 완은 번과 매우 가까이 있어 적병이 이미 경계로 들어오나, 숨기고 서로 알리지 않아 과연 선주는 몹시 놀랐다.(삼국지집해)
[51] 오늘날의 후베이 성 징먼시 둬다오 구(掇刀区).
[52] 강릉은 남군 가운데 부근에 있다
[53] 적벽 대전은 조조가 동오 침공을 급하게 서두른 탓에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면이 컸지만, 형주의 민심이 조조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았기에(서주대학살로 인한 백성들의 극혐+형주 피난민들 유린 등...) 서둘러 동남 전역을 마무리 지어 후환을 없애야 했던 것이고, 그런 상황을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유비의 피난민 수용이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54] 조운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구출해온 아두가 바로 촉의 2대 황제 후주 유선이며, 호부견자의 대명사가 된다. 그래서 이것 가지고 조운을 까는 농담이 꽤나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물론 조운이야 구할 수 있는 유비의 가족을 구해서 오는 부하 장수로서 해야할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다. 유선이 훗날 못난이 짓을 할 거라고 조운이 무슨 수로 예견하겠는가.
[출처] 유비의 생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