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6.9.6.
참석자: 솔로투어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옥천> 영동> 추풍령> 모동> 화동> 청산> 보은> 청주> 대전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오늘은 간만에 기회가 닿아서 겸사겸사 솔로 투어를 가봅니다. 평소 맨날 지나쳤던 영동주변에서
궁금했던 곳을 찾아가봅니다.
영동군에는 영동읍내에 규당고택이 있고, 심천면에 소석고택, 양강면에 김찬판댁 고택이 있다.
그중에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곳이 오늘 찾아가는 소석고택이다. 규당고택은 큰 집이라면 김찬판댁은
작은집, 소석고택은 부농의 집이지만 그리 화려하지 않은 규모라 할수 있겠다.
영동끝자락에는 추풍령면이 있고 이곳은 철도, 고속도로, 4번 국도, 906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백두대간의 허리와 같은 곳이다. 하여 추풍령역에 들러서 숨을고르고 다시 신의터재를 보고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에 있는 느티나무, 고봉정사를 둘러보고, 신라의 최전망 정예성터인 3년산성과
누청리 은행나무를 둘러본다.
가을느낌이 와서 은행나무도 보고 느티나무가 자릴 지키는 논밭에도 가봤지만 누런 황금물결을 보기엔
이른감이 있다.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영동군 심천면 소석고택>
<소택의 맛은 흙돌담길과 기와지붕>
[소석고택]
충북 영동군에는 여러 채의 고택이 남아 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초강천을 비롯한 금강 상류 지류를 이용한 넓은 평야가 부를
축적하는 기반을 제공했고, 이런 분위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영동군은 교통의 요지이자 경제적으로 윤택한 지역이고 따라서
부의 상징인 기와집이 도처에 있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는 고택들이 많아 우리 전통 가옥을 답사하는 데 좋은
지역이다. 그중 하나가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마을 중앙에 있는, 고종 22년(1885)에 지었다는 소석고택이다.
이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던 당시 명칭은 영동송재문가옥(永同宋在文家屋)이었으나, 가옥을 지은 송병필의 호 ‘소석’을 따서 ‘영동
소석고택’으로 최근 지정 명칭을 변경(2007. 1. 29)했다. 이 집은 뒷산을 등지고 남쪽 방향에 터전을 잡은 집과는 다른 점이 있다.
소석고택은 넓은 평지 형태의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은 집으로, 한때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광채 등 여러 부속채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대에 없어졌다. 현재 광채는 초가집으로 복원된 상태다. 안채와 사랑채는 남북축으로
자오선상에 놓이고, 안마당의 동쪽 편에 광채가 있다. 넓은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가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병풍같이
감싸 안은 높은 뒷산이 없어서인지 약간 쓸쓸하고 허전한 감도 있지만, 주변의 넓은 밭들의 풍성한 결실을 느낄 수 있어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을 지닌다.
고택을 답사하고 감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필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현재 개인의 공간으로 생활하는 집이 대부분이고 또한 젊은 사람은 없고 연로하신 분들이 주로 사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개방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요인 중 하나다. 대부분의 답사자들은 ‘저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개들이 낯선 우리를 보고 엄청나게 짖어대 깜짝 놀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생들에게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사진으로만 감상하지 말고 직접 답사해 조상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하는 시간을 갖자고 강의하는데, 직접 답사를 다녀온 후에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것도 하나의 교육이니 남의 집을
방문하는 예절을 갖추고 찾아가는 법을 가르치곤 한다.
소석고택은 남쪽 담장에 사랑채를 바로 붙여 ‘공(工)’자 모양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사랑채 담장을 두고 행랑채를 배치하였으며 그
뒤편에는 안채를 배치했다. 안마당 동쪽에는 곳간채를 배치하였는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던 행랑채는 없어지고 사랑채와 안채의
공간을 구분하던 담장의 일부만 남아 있다. 광채는 복원되어 사용 중이다. 이 집이 특이한 것은 현재 사랑 동쪽 끝에 대문이 있어
출입문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랑채의 서쪽 끝에서 보면 문패와 널판을 이어 붙인 한 칸 크기의 대문이 사랑채에 붙어 있다.
너무나 특별한 위치에 있고 현재는 대문 옆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어서 대문과의 출입 관련성이 없다. 이는 이 가옥 주변으로
집들이 들어차면서 골목길이 생기고, 서쪽으로 들어 왔던 이 가옥의 출입문이 동네 골목에서 들어오기 쉬운 곳을 찾다가 현재의
대문을 만들고 기존의 대문은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요일을 잘 맞추고 가야 구경가능합니다. 예전에는 화요일 문을 열었다는데 그사이 오픈시간이 변경됐습니다.>
<사랑채 누마루>
[소석고택 한옥의 미]
최근에 이 가옥을 둘러싼 담장을 축조했는데 진흙과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전통 담장의 검은색 기와와 흰색 아귀토의 색대비는
한옥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비가 오면 빗물에 깨끗이 씻겨 검은색의 기와가 더욱더 검게 보이고 흰색이 더욱더 희게 보인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에는 검은 기와 위로 쌓인 눈꽃이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새롭게 만들었으면 어떠하랴 전통 재료로 표현한
멋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현재 사랑채를 출입하는 대문으로는 한 칸의 건물만이 있다. 이 가옥에 있는 망와의 기록에 따르면 1885년에 번와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구조는 1고주 5량을 기본으로 하는데 기법이 안채보다 훨씬 장식적이며 잘 만들어졌다. 특히 누마루 아래의 주춧돌도
동일한 형태와 높이의 주초를 사용하면서 기단을 자연 지형에 맞추어 한 단 높이 정도 낮추고, 기둥의 마루와 귀틀 부분을
대청마루 툇마루와 일치시킴으로써 누마루 아래는 비교적 바닥에서 높이 떠 있는 형태가 되었다. 천장가구 기법을 보면 사다리꼴
판대공과 종도리 아래의 동자주 조립에 의한 넓은 공간 폭을 확보하면서 그 힘은 기둥을 거쳐 주춧돌로 전달되도록 꾸며져 안정성과
의장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다. 이러한 나무 부재 간의 조립에 의해서 생겨나는 의장성은 한옥의 목가구 기법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한옥에서의 우아한 지붕의 현수 곡선은 마치 우리 산의 형상과 꼭 닮은 모습이다. 마루는 비교적 높은 편이기 때문에
섬돌을 밟지 않고는 앞쪽에서 한복을 입고 오르기에 어려운 느낌이 있다. 이 가옥의 누마루는 장식을 생략한 난간 덕분에 우물마루가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옛날 분들은 이곳에서 다과를 즐겼을 것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는 자연을 벗 삼아 독서를 즐겼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동 소석고택 [永同 少石古宅] (한옥의 미, 2010. 7. 15., 경인문화사)
<소석고택을 뒤로하고 추풍령역으로 달려 구경하는 급수탑>
<추풍령 역 앞에서>
<경부선의 서울 방향>
<추풍령읍내를 관통하는 국도 4호선의 옛길....>
<급수탑에서 나와있는 철파이프....>
<대전 현충원에 있는 증기기관차....이런 증기기관차가 역에 서서 증기발생위한 급수를 하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칙칙 폭폭~~"이다.>
< 좌측에 눌의산.....우측에 급수탑>
<부산방향>
<눌의산 아래, 추풍령역이 있고 그 바로 옆에 기차공원이 있다.>
<추풍령역의 달맞이 꽃과 나팔꽃>
[신안리 석불입상]
불상이 방치된 골짜기가 탑골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밭을 일구다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연대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부처높이 2.70m 대좌높이 0.37m이며, 머리가 없다. 돌 하나에 불상과 광배가 새겨졌고
머리는 다른 돌로 새겨 조립하도록 했으나 없어졌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서 보병을 잡고 있다.
겉옷의 광배는 연꽃문을 새긴 두광과 불꽃문을 새긴 신광으로 구분되고, 뒷면은 주형의 평편한 광배로 조각했다. 여래상인지
보살상인지 확연치 않으나 조각표현과 독립불상인 점으로 보아 여래상으로 추정된다.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에 보호각을 신축하였다.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안리석불입상 [新安里石佛立像] (두산백과)
<화동면 보미리의 느티나무>
<마로면 원정리 느티나무와 애마>
<황금 들판은 아직 이르다.>
<고봉정사>
<삼년산성에서>
<가을은 가을이다~~>
[삼년산성]
보은읍 동쪽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며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대단한 석축산성이다. 속리산 쪽을 향해 보은
시가를 벗어나자마자 곧 오른쪽으로 삼년산성 가는 길이 갈라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고 소지왕 8년(486)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보은은 지증왕 3년(553) 삼년산군이 되었고 경덕왕
1년(742)에는 삼년군으로 바뀌었다. 이때 삼년산·삼년이라는 지명이 삼년산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거꾸로 먼저 이 지역의
이름이 있고 거기서 산성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삼국사기』에는 성을 다 쌓는 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나중에는 오정산에 있는 산성이라 하여 오정산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지역은 대전·청주·상주·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다투던 분쟁지였다. 신라는 상주 사벌성을
점령하고 보은으로 나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여 이 성을 쌓았다. 이때는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었는데 이후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사비(부여)로 천도한 후에도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쪽의 백제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즉 삼년군 지역의 확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진흥왕 15년(554) 백제 성왕이 대가야군과 연합하여 관산성(지금의 옥천)으로 쳐들어오자 처음에 고전하던 신라군은 삼년산군에서
출병한 군사의 응원으로 성왕을 죽이고 백제 군사 3만 명을 전몰시켰다. 관산성 싸움의 승리로, 신라는 그전 해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지역 지배를 굳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서도 삼년산성이 백제 공격의 최전방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왕 7년(660) 신라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의 사비성을 깨뜨리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백제 유민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20여 성이 반란을 일으켜 유민군에 호응했다. 그러자 당 고종은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파견했는데
이때 태종무열왕이 왕문도를 맞은 곳도 삼년산성이었다.
이후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에 웅천주(공주)도독이던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반란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광주)·완산주(전주)·청주(진주)·사벌주(상주) 등
신라 아홉 주 가운데 네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충주)·서원경(청주)·금관경(김해)을 비롯한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왕의 진압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곳곳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저항했는데 이때 가장 비중이 큰 곳이 삼년산성이었다.
삼년산성에 진을 친 병력이 신라군에게 격파된 후 반란군은 기세가 꺾여 곧 진압되었다. 또 고려 태조 1년(918)에는 후백제 왕
견훤이 고려의 경계를 넘어 쳐들어왔는데 태조 자신이 후백제가 점거한 삼년산성을 치려다가 끝내 실패하고 청주로 물러난 적도
있다.
그러나 삼년산성이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기 위해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 들먹일 필요는 없다. 찾아가서 그
성벽을 돌며 눈으로 보기만 하면 누구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많은 부분이 무너져내렸지만 동남쪽 성벽은
제 모습을 지닌 부분이 많다. 벽돌로 쌓기라도 한 듯 빈틈도 없는 거무스름한 석벽이 밑에서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아슬아슬한 높이로 능선을 따라 일렁거린다. 무너져 너덜을 이룬 곳까지도 장대하여, 보는 사람은 우선 말을 잃게
된다. 이런 것을 쌓은 사람들과 이런 곳을 공략해야 했던 사람들의 의지나 집념, 그들의 시대에 생각이 닿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거의 수직으로 선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13m에서 20m에 이르고 위쪽의 너비는 8~10m쯤 된다. 이처럼 크고 높다보니
하중도 엄청나서 모퉁이 쪽에는 기초를 4중 계단식으로 튀어나오게 쌓아 힘을 받도록 했다. 성은 남동·북동·북서의 봉우리를
이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고 안쪽은 골짜기를 이룬 포곡식 산성이다. 성안의 물은 낮은 골짜기를 이룬 서쪽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둘레는 1.7㎞쯤 되며 안에는 논과 밭, 민가도 있었지만 지금은 빈터이다. 성안에 마을이 있던 때 그
마을은 삼년성, 성 바깥 마을은 성밑이라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년산성 (답사2 - 충북, 초판 1998., 6쇄 2003., 돌베개)
<삼년산성 서문에 서 있는 애마, 삼년산성의 입구를 찾기가 어렵고 찾아서 들어온다한들 입구가 험하고 들어오기
위험해서 호구라 칭했단다.>
< 그 옛날에 이많은 돌을 어찌 쌓았을까? 돌 무개만 몇십만톤이라는데.....>
< 삼년산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한번도 져본적이 없단다. 그만큼 난공불락의 요새란 얘기다. 또한 이 산성은 그 태생부터
활용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잘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호서승람(湖西勝覽)』 등에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한 꽃을 피운다 하여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주무숙(周茂叔)은 <애련설 愛蓮說>에서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소통하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다.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 있는 품은 멀리서 볼 것이요 다붓하여 구경하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연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한다.”고 하며 연꽃의 덕을 찬양하고 있다.
≪양화소록 養花小錄≫에서도 연꽃의 품성을 “깨끗한 병 속에 담긴 가을 물이라고나 할까. 홍백련은 강호에 뛰어나서 이름을
구함을 즐기지 않으나 자연히 그 이름을 감추기 어려우니 이것은 기산(箕山)·영천(穎川) 간에 숨어 살던 소부(巢父)·허유(許由)와
같은 유라 하겠다.”고 평하고 있다.
또한, 불교에서는 연꽃이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고 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꽃으로 쓰고 있다. 이를테면 극락세계를 달리 부를 때에 ‘연방(蓮邦)’이라고 한다든지,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태(蓮態)’라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처가 앉아 있는 대좌를 연꽃으로 조각하는 것도 이러한 상징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종자를 많이 맺기에 연꽃을 다산의 징표로 보았다. 부인의 의복에 연꽃의 문양을 새겨넣는 것도 연꽃의 다산성에
힘입어 자손을 많이 낳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꽃 [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벽과 가운데 연못....>
<보은군 누청리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
<몇백년이 됐어도 어김없이 새싹을 틔우는 은행나무앞에 우리 사람의 존재가 참 작다는 느낌이 듭니다.
100년도 못사는데 천년을 살것같이 아웅다웅하고 살고 있는건 아닌지 내 자신을 한번 되돌아 봅니다.>
<3년 산성의 서문과 성안쪽의 연못 주변 >
오랜만에 찾은 산성에 오니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참이었떤 삼국시대의 테마의 투어도 좋을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가 백제와 최후 결전을 벌인 논산황산벌전투는 신라군이 영동, 보은, 상주, 김천방향에서 각각 대전, 금산,
무주방향으로 진격한 루투를 답사하거나 논산의 황산벌을 중심으로, 혹은 백제 신라의 사신들이 다녔을 그
옛날길을 조사해서 부여에서 경주, 공주에서 중원 등으로 코스를 잡아도 즐거운 역사투어가 될듯하다.
첫댓글 멋 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했어~^^b
이제 얘들 밥 챙겨야죠..ㅎㅎ
오늘도 노력봉사...그래야 낼 출동하죠..ㅋ
기행솔투를 ㅎㅎ
잘봤어요 !! 역사는 살아 숨쉰다를 본듯합ㄴㅣ다
감사합니다. 조은시간님 카메라에 좀 찍혀봣으면..
연륜이 느껴지는 후기네요 ^^
저두 수령이 오래 된 보호수들을 찾아보는 투어를 생각하고 있네요.
자료수집중인데 이게 몇년째 계속 미뤄지고 있네요 ^^
네..고목은 충북,경북, 전북에도 많습니다. 그중 진안에 800년 된 천황사 전나무 강추 합니다.
잘 봤습니다!! 최고네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