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 주다
미술 작품, 특히 회화 작품을 보면 색체와 명암 그리고
인물이나 피사체의 공간 배치 등으로 작품의 메세지가 표
현됩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안에서 작가의 의도를 찾으며
작품을 감상하게 됩니다. 저는 그 캘리그라피를 ‘아름다운 글
씨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 작품’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씨는 단어 안에 이미 그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은유
적인 회화 작품과는 달리 매우 직관적입니다. 하얀 한지에
검은색 먹물로 표현되는 단순한 기법 안에서 더군다나 이
미 직관적인 내용들을 회화적으로 담아내는 일은 많은 고
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글씨의 다양한 변화로 전하고 싶
은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작품에 담기는 무장에는 영화나
연극처럼 주연과 조연이 존재합니다. 또한 행인과 같은 단
역도 여럿 존재합니다. 가는 선들이 반복되는 곳에서는 굵
은 산이 강조되며 주연이 됩니다. 반대로 굵은 선이 반복
되는 곳에서는 가는 선이 주연이 됩니다. 작은 글씨 안에
서는 큰 글씨가, 큰 글씨 안에서는 작은 글씨가 대비가 되
고 강조됩니다. 그리고 한 획을 그으면 반드시 빈 공간이
만들어지며 그러한 공간들이 여백이 되고 생각하는 공간
이 됩니다. 또한 하나의 글자는 인접한 다른 글자에 자기
의 공간을 내어주며 그렇게 서로의 공간 안에서 함께 교차
하며 짜임새 있는 구도를 만들어 냅니다.
제게 켈리그라피와 새김 예술을 배우는 회원분들은 매
년 연말에 ‘글씨 피정’을 합니다. 지도 신부님의 주제 강의
와 글씨를 통한 나눔, 그리고 파견 미사를 통해 한해를 돌
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피정입니다.
이 피정 중에 는 특별한 순서가 있습니다. 성경 구절 혹은
기도문을 조별로 묵상하고 개인이 느낀 점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함께 글씨를 쓸 말씀 구절을 정하고 공동작업 작품
을 완성합니다. 작업을 하는 시간에는 어떻게 쓸지 서로
논의하지 않고 반드시 침묵합니다. 쓰는 순서를 정하고 한
사람이 한 글자씩 돌아가며 씁니다. 이 작업 안에서 우리
는 그리스도인 삶의 방향을 발견합니다. 앞선 사람은 다음
사람의 글자를 위해 공간을 배려합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앞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 보고 부족한 공간을 채워줍니다.
이기적인 작업이 아 닌 이타적인 작업이며 여러 명이 썼음
에도 완성된 작품은 훌륭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기적인 사
람은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을 참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 기꺼이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렇게 ‘내어줌’으로써 공동의 행복을 향하며, 특
별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내어 주다’와 ‘사랑한다’는 말은
성경 안에서도 늘 함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3,16)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
다.”(요한15.13) 소중한 체험을 허락하신 주님께 오늘도 기도합
니다. ‘주님! 저희를 통하여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십시오.’
유임봉 스테파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