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 근심 고통 치유하는 천년 화엄성지”
숲 계곡 암자 어우러진 ‘화합 상생의 도량’
어른과 대중 극진 모시니 ‘수행공동체’ 살아나
치유의 숲길에서 바라본 각황전. 숲과 계곡 암자가 어우러진 구례 화엄사 치유의 길은 연기암까지 이어진다.
지리산 화엄사는 ‘천년의 화엄성지’다. 연기 자장 의상 도선 등 고승이 ‘화엄’을 펼쳤으며, 오대 명산 중 한 곳으로 숭배했던 남악(南嶽)의 보물이었다. 천년 화엄 성지에는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로 불릴 정도로 산과 계곡 곳곳에 절이 들어섰다.
화엄사에서 성삼재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숲, 역사와 문화가 서린 사찰과 암자가 어우러지는 길은 들어서는 순간 몸과 마음이 순화되는 치유길이다. 계곡과 숲에서 발생하는 음이온 산소 햇볕에다 다양한 동식물이 서로 어울리며 뿜는 향기와 냄새 바람 물소리 바람소리가 지치고 힘든 마음과 몸을 저절로 치유한다. 그래서 길 이름이 ‘화엄계곡 치유 탐방로’다.
화엄사 입구에서 연기암까지 약 4km에 이르는 구간에는 암자가 줄 지어 섰고 암자마다 이야기를 담았다. 천년의 화엄성지 화엄사와 치유의 계곡과 그 주변의 암자를 찾았다. 4월 중순 맑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석등 앞의 각황전. 화엄도량 구례 화엄사를 대표하는 당우로 조선 숙종대에 지었다.
화엄사(華嚴寺)는 백제 성왕 22년(544) 인도 스님 연기조사가 대웅상광적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으며, 원효성사가 해회당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가 2층 4면 7칸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현재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742~764)대에 8원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 세계 면모를 갖추고 신라 말 헌강왕(875) 대에 도선국사가 동오층 석탑과 서오층석탑을 조성하여 화엄사는 이 땅 최고의 화엄성지였다.
구층암 천불보전. 구층암과 봉천암은 도광스님이 선원을 열어 납자들을 제접하고 오늘날의 구례 화엄사를 일으킨 유서깊은 도량이다.
고려대에서도 화엄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가람이었다. 태조는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으며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고 문종 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하는 등 고려 내내 화엄사 중창 불사가 이뤄졌다.
선교로 통합했던 조선조 화엄사는 선종대본산으로 그 위상을 이어갔다. 정유재란 때 남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관문 석주관에서 승병 300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선 호국도량이었다. 그러나 왜군이 그 보복으로 화엄사를 전소시켰다. 석조물을 남기고 전부 불탄 화엄사를 인조 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건물을 중수하고 숙종 대에 계파선사가 장육전 자리에 각황전을 건립하여 선교양종 대가람으로 다시 우뚝 섰다.
해방 후 빨치산이 지리산에 은거한 뒤 1950년 6·25전쟁까지 지리산의 수많은 당우가 사라졌지만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화를 비켜갔다. 조선 중·후기 중수한 대웅전 각황전 등 중요한 당우가 그대로 남아 오늘날 그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암 앞에 조성한 시의 공원은 지리산에서 벌어진 민족 비극을 화합과 치유로 승화시키는 원력을 담고 있다. 공원에 조성한 목탁 조형물.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게 한 ‘화엄신중’은 차일혁 토벌대장이었다. 1948년 여순사건 주도자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칠불사, 연곡사가 전소되고 화엄사 지장암과 사하촌 여관마을이 불탔다. 1950년에는 내원암, 보적암이 파괴되고, 1951년에는 상원암, 보운암, 만월당이 소실됐다.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졌지만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이후 8사단이 새로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고, 1951년 5월 10일 군경합동작전회의에서 또 다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차일혁 부대장은 관할 지역이 아닌데도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부대장을 대신하여 화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문짝들만을 뜯어내 소각하는 것으로 명령을 수행했다. 화엄사와 구층암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차일혁 대장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늘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불교신자 답게 자비로웠다. 비록 적이었지만 이현상의 주검을 정중히 화장하고 권총 세 발을 예포로 쏘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이현상 주머니에서도 염주가 나왔다. 화엄사는 그 공덕을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화엄성지 천년 역사는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쉰다.
‘화엄십찰’ 중 한 곳으로 통일신라 말 해인사와 더불어 양대 화엄종찰로 번성했던 화엄사는 억불시대 조선에서도 선과 교를 모두 통괄하는 선교양종대가람이었다. 수많은 산 계곡과 강에서 흘러온 물이 바다로 흘러들 듯 반야 공 유식 선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화엄이다. 천년 화엄성지 답게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화합 융화의 전통은 오늘날 화엄사의 전통으로 면면히 계승된다. 용성, 동헌,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으로 이어지는 용성문도회 소속 화엄사는 화합문중의 모범이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평생 도반으로 함께 정진할 것을 약속한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의 권속이 오늘날 화엄사를 함께 일궈간다.
1969년과 1980년 두 차례 화엄사를 맡아 중창하며 오늘날의 화엄사의 기틀을 세운 도광스님은 지리산 보다 넓은 자비심으로 대중을 극진히 보살폈다. 범어사 해인사는 물론 문중 인연이 없는 용주사 파계사까지 6곳의 주지를 역임한 것도 이처럼 욕심 없이 대중을 외호한 성품 때문이다. 성품은 온화했지만 계행이 철저했으며 공사를 가림에 추상같았고 60이 넘어서도 은사를 극진히 모실 정도로 효상좌였다.
이러한 자비 인욕 청백가풍은 상좌들에게 이어져 종원(宗源,1984~1992), 평전(平典, 1992~1994), 종렬(宗烈, 1994~1998), 종걸(宗乞, 1998~2002), 종삼(宗三, 2005~2013)스님 등 상좌 스님들에게 이어졌다. 또한 도천스님 상좌 명선(明扇,1975~1980), 명섭(明燮, 2002~2005)스님이 이어받았다. 두 스님의 제자들은 서로 화합하면서 가람을 수호하고 산중의 화합을 이끌었다.
그리고 도광스님의 손상좌로 처음 교구를 맡은 현 주지 덕문스님에게 이어졌다. 스님은 얼마 전 만장일치로 주지 재임 소임을 부여 받았다. 노스님처럼 어른을 극진히 모시고 대중을 받들어 사회와 소통하고 종단 발전에 함께 노력한 결과다. 스님은 교구 중에서 가장 완벽한 승가복지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중 복지체계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른 스님들을 극진히 모시면서 대중이 마음 놓고 수행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수말사를 특정 스님이나 문파가 독점하지 않고 전 문중을 위해 복지기금으로 쓰도록 했으며, 오랫동안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됐던 천은사 입장료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사찰이 갖는 이익을 내려놓고 구례군민과 국민들 입장에서 바라본 결과다.
그리고 화엄사 전 대중 300명을 모두 만나 바람을 청취하고 꼼꼼히 기록하여 정리한 대중화합 섬김의 결과이다. 대중의 바람을 정리한 것이 승가복지 고승선양 광주포교당이며 이를 완성하는 소임을 2년차에 부여받았다. 그 기본 가치는 화엄이다. 스님은 “마음의 부조화로 사바세계의 고통과 근심 갈등 분열이 발생했으며 이를 치유하는 가치가 바로 화엄”이라며 “사바세계가 존재하는 한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우리 모두는 ‘꽃처럼 화사한 마음을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 우리 수행자의 일이며 화엄사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화엄사 일주문에서부터 ‘치유의 숲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따라 암자가 줄지어 섰다.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 곧 희망과 치유의 순례다. 화엄사 입구를 들어서면 일주문이 반긴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찬했던 그 일주문이다. 사천왕문 벽암각성대사비 박물관을 지나 보제루로 들어서면 말 그대로 화장세계가 펼쳐진다. 정면은 조선 인조 때 벽암대사가 중창한 대웅전이, 왼쪽에는 숙종 때 계파대사가 중수한 각황전이 맞이하며 통일신라대 탑과 석등이 순식간에 시계를 천년 전으로 되돌린다. 노고단이 경내로 들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모과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구층암.
茶禪一如 향기 품은 구층암 봉천암
대웅전을 지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대숲을 벗어나면 흑백 사진에서 보던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층암(九層庵)이다. 1961년 각황전을 중수할 때 주위에 널려 있는 부재를 수습하여 세운 삼층석탑이 원래부터 제자리 있었던 것처럼 당우와 조화를 이룬다. 댓돌 위에 신발이 여러 켤레다.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나 들러 차를 마시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다실이며 법이 오가는 설법전이다.
화엄사는 차(茶)가 가장 먼저 들어오고 사사자삼층석탑 공양인물상의 손에 든 공양물을 차로 보는 등 차 성지이기도 하다. 각황전 뒤편에서부터 구층암 봉천암 멀리 차일봉 능선에 이르기까지 야생차 산지다. 구층암은 ‘차 성지’ 화엄사의 오늘이다.
구층암은 한국불교사에 이름난 선원이었다. 1900년 청하탄정선사가 설선회를 설립하여 경허선사를 모시고 선원을 열었으며 근세 한국불교사 최초의 비구니 선맥(禪脈)으로 존경받는 법희스님이 용맹정진했다.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 전국적으로 이름난 선원으로 만든 주인공은 도광스님이다. 스님은 1969년부터 1975년 7월 까지 구층암과 봉천암에 선원을 개설하여 생사를 걸고 정진했다. 가행정진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걸망을 짊어지고 화주하여 선원을 외호하기도 했다. 스님은 담양 보광선원을 운영 할 때도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며 선원 운영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대중의 수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전강스님이 한 시절 조실을 지내고 일타스님도 방부를 들였던 전국에 이름난 선원이었다. 일타스님이 구층암에서 정진하던 당시 모습을 정찬주의 소설 <인연>에서 만날 수 있다.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00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였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일타는 모과나무 기둥 사이의 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천년 전으로 시간 되돌리는 화엄세계
구층암은 그 이전에도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대들보였다. 정법(正法)이 퇴색하던 조선 후기에는 강원으로 법을 지켰으며 조선불교가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던 구한말에는 60인이 수행하던 백련결사 도량이었다.
구층암과 함께 있는 봉천암도 그 역사를 함께 해왔다. 봉천(鳳泉) 이름에서 보듯 차(茶)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연기조사가 천축에서 마야차를 가져와 시음하고 화엄전(華嚴田)을 만든 것이 지리산 차의 시초다. 음력 2월 28일을 연기존자 기일로 삼아 사부대중과 신도들이 대웅상적광전에 모여 다례제를 지내며 추모 행사를 했으며 차 잎 따는 시기가 되면 스님들은 화엄전으로 가서 울력을 했다. 어느 날 화엄전 뒤 숲에서 환한 빛이 나는 것을 본 한 스님이 다가가 보니 봉황이 내려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샘을 만들면서 봉황이 왔다는 봉래암(鳳來庵)이라 이름 붙였다.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헌종 12년(1846) 후봉선사(嗅峰禪師)가 그 터에 중창하며 봉천암(鳳泉庵)이라 명명(命名)하고 운수납자가 용맹 정진하는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도광스님은 당신이 정진했던 구층암에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은사 동헌스님을 병간호하며 극진히 모셨다. 1983년 9월 구층암에서 동헌스님이 입적하고 이듬해 9월 도광스님이 이 곳에서 이생에서의 몸을 벗었다.
봉천암에서 대나무 숲을 지나 화엄사 계곡 치유의 길을 따라 나서 연기암으로 갔다. 화엄사에 4km 가량 떨어진, ‘치유의 길’ 끝에 자리한 연기암은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에 먼저 세웠던 암자로 알려져 있다. 화엄사의 모체인 셈이다. 이 곳에 서면 구례읍과 섬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 가장 먼저 세웠다는 연기암은 마니차 문수보살입상 갤러리 등이 있는 문화가람이다.
마니차 문수보살 맞는 연기암
1980년대 은사 도광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은 종원스님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연기암을 다시 중창했다. 암자를 일으키면서 길도 새로 냈다. 암자 옆으로 난 샛길에 차가 다니는 길을 내면서 연기암에 이어 암자가 새로 들어섰다.
연기조사는 서기 544년 연기암을 창건하고 이후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을 창건하여 지리산 곳곳에 화엄사상을 펼쳤다고 한다. 화엄사적지에 나오는 이 창건연대는 정유재란으로 화엄사의 모든 기록이 소실된 뒤 쓰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창건주 ‘연기조사’는 공인된 역사다.
1978년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발문에 황룡사 연기(緣起)법사가 등장하면서 오랫동안 논란이던 ‘화엄사 창건주 연기법사’는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신라 수도 경주 황룡사와 백제권역 지리산 화엄사의 관계, 화엄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밝혀졌다. 자현스님(중앙승가대학 교수)은 2020년 12월 발표한 ‘화엄사 사적 창건기록의 타당성 분석’에서 “연기는 8세기 중반에 유행한 황룡사의 자장계 화엄의 전승자이며, 국가적인 후원 하에 호남의 안정과 신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황룡사를 떠나 호남에 화엄사를 개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6·25전쟁 당시 불탄 연기암을 1995년 원응당 종원스님이 복원했다. 대웅상적광전, 문수전, 관음전, 원응당, 적멸당 등을 지었다. 종원스님은 은사 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아 일주문 만월당 원융료 청풍당 등을 중창하여 가람을 일신했다.
은사 스님을 이은 현 주지 만해스님은 연기암에 또 다른 세상을 펼쳤다. ‘한 번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공덕과 같으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는 마니차(윤장대)를 만들고 화엄성지 화엄사와 지리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려 책을 든 대형문수보살 입상을 세웠다.
그리고 최근에는 화랑을 개원했다. 가람이 문화도량이어야한다는 주지 스님의 원력을 담았다. 연기암 문수갤러리 첫 전시는 법관(法觀)스님 작품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개인전을 열고 해외를 비롯 수많은 전시회에 특별 초대될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면서 은둔의 수행자다. 선과 점만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개척해온 스님은 추상화 단색화 선화 화가 승려 수행자로 불린다.
연기암을 나와 노고단 방향으로 올라가다 차일봉 아래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의 방문을 불허하며 꼭꼭 숨은 용혈암이다. 작은 집 한 채만 있는 이름 그대로 암자다. 스님 한 분이 수행 중이다. 홀로 밥하고 빨래하는 불편을 감내하며 인적이 끊긴 토굴에서 오직 참선 정진에 매진하는 수좌다. 몇 년을 있겠다는 기약 없이 공부에만 매진한다.
청계암
물소리 듣는 청계암, 미륵대탑 금정암
화엄사 산내 암자는 성산재와 보현봉 주변까지 분포해 있다. 노고단에서 1km 가량 떨어진 문수대와 1969년 도광스님이 중건한 묘향대 역시 화엄사 암자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 보호 차 접근을 막고 있다. 용혈암이 화엄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셈이다.
다시 연기암으로 내려가 그 아래 청계암 미타암 보적암 금정암 내원암 지장암을 찾아갔다. 대부분 연기암 복원과 함께 길을 낸 1990년대 이후 중창했다. 연기암에서 화엄천 다리를 지나면 청계암이 나온다. 청계(聽溪),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법당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다. 1992년 종경스님이 요사채를 창건했으며 현재는 화엄사 주지와 초심호계원장 등을 역임한 종단 어른 종걸스님이 주석한다.
청계암에서 다시 내려오다 200m 가량 위로 올라가면 보적암(寶積庵)이 나온다. 조선 인조 8년(1630) 일어선사가 개창 한 후 1989년 종지스님이 중창하여 현재 주석중이다. 경내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법당과 요사채 종무소 건물이 보인다.
미타암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 위로 200m 가량 가면 넓은 경내에 아늑하게 자리한 암자가 나온다. 미타암이다. 절 입구에는 석조 불상 세 기가 서 있고 그 앞에 연못이 있다. 2001년에 복원했다. 비구니 암자다. 원래 비구니 스님들은 금정암에 있다가 미타암으로 옮겼다 한다.
다시 화엄사를 향해 내려가면 작은 암자 하나가 길에 서 있다. 각종 문화 강좌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스님과 신도들이 경내에 서서 무언가를 논의하기에 인사했더니 스님 말씀이 “지금까지 내가 주지했는데 이제 다른 스님이 주지”라며 소개를 하더니 사라진다. 천진한 아이와 같은 얼굴과 미소를 지닌 보기만 해도 따뜻한 스님이다. 2008년 지암스님이 복원했다. 오늘부터 내가 주지 아니라던 그 스님인 듯 했다.
금정암
그 아래 금정암(金井庵)은 화엄사를 대표하는 산내 암자다. 조선 명종 12년(1562) 설응선사가 창건하고 고종 때 칠성각을 건립했다. 1991년 화재로 소실 된 후 각심스님이 1993년 중건하고 1998년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종렬스님이 중창했다. 화엄사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곳에 있고 예전에는 선원의 역할을 했다. 5층 미륵전이 눈길을 끈다.
화엄사 일주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암자가 나온다. 지장암이다. 70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주석한다. 오래된 분위기가 나는 작은 암자다. 불심 깊은 속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출가해 평생 지장암을 떠나지 않고 부처님을 모시며 정진하고 있다.
남암
‘시의 공원’에서 만나는 치유와 화합
유일하게 화엄사 아래 위치한 암자가 남암(南庵)이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종삼스님이 2012년 복원했다. 남암 경내에서 서면 노고단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자는 넓고 정갈했다.
남암 입구는 ‘시의 동산’이다. 이원규 시인을 비롯한 지리산과 화엄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시와 목탁 등 조각 작품을 전시한 야외 문화 공간이다. 이 곳이 너무 좋아 매일 출근하듯 공원에 와서 머물며 사색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과 고통의 땅에서 화합과 치유의 땅, 평화의 산과 계곡을 염원하는 마음을 시의 동산으로 형상화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의 말처럼 세상은 본래 밝고 행복한 살맛나는 세상임을 화엄사와 치유의 숲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듯 했다.
[불교신문3666호/2021년5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