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 피아노 3중주 7번 B flat장조 op. 97 "대공"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가 최근 200년 사이에 이루어짐에 따라 음악의 수요양식은 급격히 변해왔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활약하던 시기는 물론 바흐 훨씬 이전부터 대중음악 (세속곡)을 제외한 음악 중 연주양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중세로부터 이어져 오던 종교음악과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롭게 등장한 양식인 실내악이었다. 이 시기의 음악은 사실상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한 사람의 귀족 혹은 그의 얼마 안되는 가족들을 위해 전속 악사들이 부속되어 연주를 해 주는 것이 이 시대의 일상적인 관례였으므로 대부분의 음악은 이들의 '수요'에 맞추어 공급되어진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작곡상의 제약도 많았다. 작곡자의 의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작곡 의뢰자-수요자인 고용주의 취향에 맞도록 음악을 만들어야 했으며, 또 가용한 연주인원도 작곡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고려 사항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음악은 작곡자가 기본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악기들 - 쳄발로,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등 - 혹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고용주가 연주할 수 있었던 악기 - 대부분 쳄발로나 간단한 현악기였다 - 들을 중심으로 한 소편성으로 작곡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형식이 근대적인 실내악의 기초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근대적 실내악곡의 가장 대표적 양식은 현악 4중주이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로 구성되는 매우 균형적인 양식으로 모차르트와 하이든에 의해 확립된 이후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이 좋은 작품을 남긴 연주양식이다. 특히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작곡된 현악 4중주는 각별히 뛰어난 것으로 베토벤이 작곡한 후기 현악 4중주들은 실내악 장르의 최고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작품들이다. 현악 4중주와 더불어 대표적인 실내악 연주양식은 바로 피아노 3중주이다. 특히 베토벤은 피아노-바이올린-첼로라는 인기있는 세 악기의 조합을 좋아했으며 이들 악기를 이용한 '삼중협주곡'을 작곡하는 등 이들 악기의 조합이 가지는 가능성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피아노 3중주라는 연주양식은 사실상 베토벤 이전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베토벤이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베토벤은 모두 7곡의 3중주곡을 작곡했다. 첫 번째 작품인 E flat장조는 1795년 여름에 출판되었지만 베토벤의 자필원고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정확히 언제 작곡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토벤의 가장 초기작품 중 하나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E flat 장조를 포함해 G장조, c단조로 이루어진 세 곡의 피아노 3중주를 op.1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 곡은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곡들은 당시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후작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연주되기 위해 작곡되었는데 당시 베토벤을 지도하고 있던 하이든의 음악적 영향이 많이 발견되는 곡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곡인 c단조에 대해 하이든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출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반면 세 곡 중 c단조에 대해 가장 만족감을 가지고 있던 베토벤은 그 권고에 대해 격노했으며 하이든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
하이든의 음악적 성격과 c단조 3중주곡의 음악적 파격성, 그리고 후에 빈번히 발견되는 베토벤의 인간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한다. op. 1 이후 베토벤이 다시 3중주를 작곡한 것은 1798년이다. op.11로 분류되는 B flat장조의 이 작품은 바이올린 파트 대신 클라리넷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던 시기에 작곡된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가끔 클라리넷 파트가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한다. 이후 베토벤은 10년 가까이 3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으며 1808년에 이르러 op.70의 3중주곡을 두 곡 출판한다. 이 시기는 작품번호를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op.67, 68의 두 교향곡, 5번과 6번 "전원"을 비롯해 op.73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등 베토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 쓰여진 충실한 시기였으며 op.70의 1번 D장조는 '유령 (Geister)'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곡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3중주인 B flat장조는 1811년에 완성된 곡이다. 자필 악보에의 첫 머리에는 '1811년 3월 3일', 마지막 부분에는 '1811년 3월 26일 완성'이라는 작곡자의 기술이 들어가 있는데, 여러 스케치 등으로 미루어 보아서는 1810년부터 이 곡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곡이 바로 실내악 사상 가장 뛰어난 3중주곡으로 평가받고 있는 op.97의 '대공 (Archduke)'이다. 이 곡에서 베토벤은 이전의 3중주곡, 특히 op.70에서 시도한 피아노 중심의 협주곡적 성격을 가지는 3중주곡을 완성시킨 것이다. 곡은 전형적인 4악장 구성이지만 기존의 어떤 3중주보다 큰 규모에다 베토벤 특유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선율, 이 시기의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우아함 등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이 곡의 제목인 '대공'은 베토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좋은 친구이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에게 이 곡이 헌정된 데에서 유래한다.
1814년 4월 11일 피아노에 베토벤, 첼로에 링케, 바이올린을 슈판치히가 담당하여 비인의 호텔 'Roemische Kaiser (로마 황제)'에서 연주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1811년에 이미 완성된 곡인 만큼 훨씬 이전에 연주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참고로 1814년의 이 연주를 끝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베토벤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출판은 1816년 9얼 빈의 슈타이너사에 의해 이뤄진다. 1815년 베토벤이 영국의 잘로몬사에 이 곡을 포함한 여러 곡의 출판을 의뢰한 것으로 미루어 곡의 판매에 많은 애를 먹고 있었던 듯 하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이하 괄호안 시간은 mp3로 제공된 카잘스 트리오의 녹음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오이스트라흐 트리오 (EMI), 켐프 (p), 쉐링 (vn), 푸르니에 (vc)의 음반 (DG)등이 스테레오 시절 이 곡의 대표적인 녹음이다. 특히 켐프-쉐링-푸르니에 음반은 LP시대 국내에 라이센스로 발매되어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지나치게 자의적인 템포설정으로 2,4악장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수크 트리오는 이 곡을 1975년과 1983년에 각각 녹음했지만 DENON의 음반인 만큼 쉽게 구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 곡의 가장 뛰어난 연주로 추천하고 싶은 음반은 아쉬케나지 (p), 펄만 (vn), 하렐 (vc)이 40세를 전후하여 녹음한 EMI반 (1982)이다. 일단 연주의 짜임새, 앙상블이라는 면에서 이 음반을 능가할 연주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곡이 가지는 밝고 우아한 성격과 연주자들의 특성도 꼭 맞춘 것 처럼 들어맞을 뿐 아니라 좋은 앙상블에서 자연스럽게 풍겨나오는 즐겁고 우아한 분위기는 다른 어떤 연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음반만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3악장을 주의 깊에 들어보기 바란다. 아기자기한 분위기 중에서도 적확하게 강조되는 음악의 포인트들, 그리고 3악장 말미에 재현되는 주제선율에서 들려주는 긴밀한 호흡과 선율미는 정말 가슴 찡한 감동을 전해 준다. 굳이 단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지만 피아노가 조금만 더 곡을 주도했으면, 조금만 더 다이내믹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앙상블이 너무나 잘 이루어진 탓에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이 음반에 못지 않은 좋은 연주로 프레빈 (p), 뮬로바 (vn), 쉬프 (vc)의 연주 (PHILIPS, 1993)를 추천하고 싶은데, 녹음상태가 좋은 것은 물론, 프레빈이 음악을 절묘하게 콘트롤하면서 다른 연주자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아쉬케나지-펄만-하렐의 음반에서 모자란다고 생각되던 다이내믹도 충분히 살아 있는 연주이다. 1악장 첫 머리를 행진곡풍으로 당당하게 연주하며, 2악장의 익살스러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프레빈의 모습도 재미있고 쉬프의 스케일 큰 발상과 당당한 첼로의 사운드, 뮬로바의 생기있는 표현 등 참신한 즐거움이 살아 있는 좋은 녹음이지만, 역시 3악장의 긴밀함과 아기자기함에 있어서는 아쉬케나지-펄만-하렐의 연주에 못미치고 있다.
정 트리오 (EMI, 1992)의 연주는 정명훈의 피아노와 정명화의 첼로 사이에 불균형이 심하게 드러나는 연주이다. 피아노가 음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점이나, 바이올린이 충분히 억제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인 연주를 들려주지만 곡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첼로의 역할이 지나치게 미미하다는 점에서 그다지 추천할 만 한 연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는 보자르 트리오의 PHILIPS 음반도 연주의 짜임새가 허술하며 우아함도 많이 떨어져서 추천하고 싶지 않다. - 김태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