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황새바위성지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800년대 즉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조 시대에 충청도의 각 지방에서 잡힌 사학죄인들이 숱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았을 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공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한 후 그래도 배반하지 않으면 감사의 명에 의해 사형대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죄인들의 공개 처형지였던 이곳 황새바위는 황새가 서식했던 곳이기에 황새바위라고도 하고 이곳에 있던 바위가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이 황새 모양으로 생겼고, 목에 큰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죽어 갔으므로 황새바위라고도 한다.
홈페이지주소 : http://www.hwangsae.or.kr/
나바위성지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김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나바위 성당은 1955년에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3백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대건 교육관 외에도 소규모 피정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따로 있고 자기 취사를 할 수 있는 설비도 마련돼 있다. 또 피정의 집 전방 운동장은 2천 평 규모의 대지로서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현재 나바위성지 지붕공사중입니다.
천호성지
1. 천호성지란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의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다. 천호공소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천호산 역시 이름 그대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甁)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1866년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순교자가 묻혀 계시며, 이 분들과 함께 순교한 수 많은 분들이 천호산에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묻혀 계시다.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 곧 육신이며 이름이며 살아온 일생의 내력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채 바친것이다. 천호산의 나무와 풀들은 이름과 종적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의 시신의 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생명들이다.
2. 성지의 조성과정
천호성지와 그 주변의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서 조선조 때 나라에서 고흥 유씨 문에 하사한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사는 신도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중 1909년 뜻하지 않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 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 서 공소신도들은 생활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941년경 150 정보 중에 서 순교자들의 묘와 종적은 알 수 없지만,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 되는 땅 75 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땅을 봉헌한 사람들은 목세영(베르몽)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며, 이로써 오늘의 성지를 보존하게 된 것 이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그동안 실전(失傳)되어 왔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치명한 후 합동으로 묻혀 있던 여덟 분의 유해와 천호산 기슭에서 두 분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천호산에는 지금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발굴하지 못하는 많은 순교자들이 계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를 개발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전주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세웠다.
이곳은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어서 그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3. 천호공소(다리실, 용추네)
천호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고 불렀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天呼)라는 행정명(行政名)은 후대에 교우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천호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도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도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다리실과 성 손선지, 성 한재권
천호 성지에 묻힌 순교 성인 중, 손선지 베드로와 한재권 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866년 12월 13일 손선지 성인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는 70여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와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이 때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으로 피신해 왔다.
5. 다리실 신앙공동체가 겪은 박해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 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 연은 이러하다.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지 스 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 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 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 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 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 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 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이겨 신음하고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을 곳이 들통나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 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 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 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 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공소였다. 오늘의 천호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 답게 주민 전체 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호성지 홈페이지 주소 http://www.cheonhos.org/
베론성지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이루어졌습니다.
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입니다.
황사영토굴
1929년 경 배론을 답사한 원주본당 정규량 신부는 ‘황사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배론 점촌 지굴(地窟)속에서 백서를 쓰다가 체포되었다’ 고 하여 그의 은신처가 땅굴 이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총독부 시대에 일본인 야마구치(山口正之)씨가 1936년 8월 25일 배론을 찾아온다. 그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집의 북쪽 부엌 뒤에 있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집은 1866년 박해때 처형된 프랑스인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교가 있었던 자리로 1976년 10월 18일자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되었다. 야마구치씨가 답사했을 때 1935년에 이사 온 집주인인 최재현이 신학교 교사(校舍)였음을 확증하였고, 이 집 뒤뜰 안에 옹기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다. 또한 배론 공소 안창현 회장의 손자인 안태화(1926년 생)는 ‘어린시절 10대 안팎일 때 신학교 건물인 최재현 집 위에 위치한 굴에 드나들며 놀았고, 그로인해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 굴은 토굴이었지 옹기 굴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1987년 8월 10일, 24일)
야마구치 등의 기록과 증언 현지의 지세를 종합하여 볼 때 즉 1801년 김귀동의 옹기점 뒤 산비탈을 이용하여 1m 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을 것이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생각된다.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 이었고,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황사영백서
● 백서의 발견과 입수
황사영과 함께 압수된 백서는 흉악한 글이라 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한다.
1894년 정부가 고문서를 정리 소각할 때 담당하는 관리가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 판단하고 천주교인 이건영(李健榮) 요셉에게 넘겨주고 이건영은 교구장 뮈텔 주교께 전한다.
1925년 7월 5일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에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백서를 교황 비오 11세께 봉정한다. 교구장 뮈텔주교는 교황청으로 보내기에 앞서 실물크기의 동판 사본을 제작한다.
제작된 동판사본 백서는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전시실에 있다.
● 백서의 내용
백서는 가로 62cm 세로는 일정치 않으나 39.1~40cm 되는 명주천 위에 122행, 13,384자로 된 것이다.
황사영은 백서에 박해의 진행과정과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30여명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순교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어서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교회가 재건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5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박해로 인해 피폐된 조선교회를 위한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둘째, 북경교회와 조선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조선교우가 북경에 가서 중국 젊은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거나 책문(柵門) 안에 연락처(가게)를 설립하자는 것이다.
셋째,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넷째, 청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조선을 영고탑(寧古塔)에 소속 시킨 뒤 친왕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하게 하고 조선 왕을 부마(駙馬)로 삼자는 것이다.
다섯째, 서양의 선박과 군사, 무기를 얻어 와서 조선에 출정한 뒤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