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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예천의 지명 전설
바야바 추천 0 조회 9 13.01.08 00: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예천의 전설

 

 삭다리걸 - 개포면과 예천읍 경계


  옛날 금리(거믄골)에 만석꾼 박씨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너그럽고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굶주리고 몸이 아파 약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양식과 돈을 주어 항상 은헤를 베풀어 인근 마을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예천읍 상리와 금리 경계의 소하천에 다리가 있었는데, 예천읍 쪽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오면 인정 많은 박 부잣집에서 쌀을 얻을 수 있다 하여 이 다리를 `쌀다리'로 불러오다가 세월이 흘러 지금은 `삭다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예천군수를 지낸 용궁면 금남리 훤평 출신의 장영이라는 사람이 금리 박씨 문중의 박희문이 아주 잘생기고 학문도 높아 사위 삼기로 하였는데, 혼례식 전 날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많아 이 냇가를 건널 수 없게 되자 혼인을 치르기 위해 쌀가마니로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하여 `쌀다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파리산과 거북바위 - 개포면 우감1리


  먼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큰 홍수가 나서 집이고 산이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물 속에 잠겨 버렸는데, 우감1리의 마을 뒷산만 파리 한 마리가 앉을 만큼의 자리만 남겨두고 모두 물 속에 잠겼다. 이 때 물 속에 잠기지 않는 부분을 `파리산'이라고 전해오며, 이 마을에서는 농악을 울리는 일이 없는데 그 이유는 농악을 울리면 파리가 놀라 달아난다고 한다.


  그리고 홍수로 인하여 물에 잠겼던 곳이 물이 빠지자 바위 밑에서 한 쌍의 거북이가 기어 나왔다고 해서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불렀으며, 바위 또한 거북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지금도 그 바위가 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국도 28번선인 경진리 삼거리에서 개포면사무소로 가는 924번 지방도로의 이사리와 우감1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고개를 안동고개라고 부른다. 옛날 경진리 서울나루터를 건너 영남 선비들 특히 안동지방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때 육로로 이 고개를 넘어가면 과거시험에 잘 붙는다는 전설이 있어 과거 보러 가는 영남 선비들은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다고 하여 `안동고개'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솔경지 - 하리면 오류2리


  이 마을에는 솔숲이 있다. 1816년(순조 16) 상리면 야목리에 효성이 지극한 도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장날마다 고기반찬을 사서 부모님께 대접하였는데, 하루는 나무를 늦게 팔아 해가 저물어서야 지게에 고기를 매달고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이 곳 마을 솔숲에 다다랐다. 이 때 갑자기 솔개가 날아와 지게에 매단 고기를 낚아 채 가는지라 눈물을 흘리며 집에 돌아오니, 그 솔개가 벌써 고기를 물어다 집에 갔다 놓아 도효자의 부인이 부모님 밥상에 반찬으로 올렸다고 한다. 이는 산짐승도 도효자의 효성에 감동하여 도와주었으며 이로인해 이 곳을 `솔갱이'라고도 한다. 또한 솔숲이 있는 이 곳부터 예천군과 은풍현의 경계가 된다 하여 솔경지(松境地)라고 전해진다.


 선돌(골매기 장군석) - 유천면 초적리


  선돌은 부족국가시대 마을의 경계(境界)로 세운 것이다. 초적리 마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잡귀를 추방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7척 정도의 이 자연석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놓고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을이 소가 누워 있는 형이므로 이 돌이 꼴단(束草)에 해당되기도 하고, 소를 매는 말뚝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동네 주민들 중 부정 없는 세 사람을 선출하여 보름날까지 3일간 몸가짐을 정결하게 하고 당일 목욕재계하여 산신, 목신, 석신에게 마을 대표자 자격으로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청감천 - 풍양면 청곡2리


  청곡2리 청감(양지마) 마을에 옛날 늦은 봄 선비 일곱 명이 나환자가 치료되었다는 약수를 먹고 용궁으로 가는 도중 산등성이에서 잠시 쉬어가는데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서 인가는 멀고 걱정을 하던 중, 난데없이 동자가 나타나므로 물 먹을 곳을 물으니 동자가 물이 있는 샘을 가르쳐 주었다. 선비들은 동자가 가르쳐 준 샘에 가서 물을 먹어보니 단 맛이 잡히고 맛이 좋아 정신없이 마셨다. 물을 먹는 동안 정신을 차려보니 안내한 동자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물맛이 하도 좋아 선비들은 샘이 있는 이 곳을 천감(泉甘)이라 했는데, 이 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천감에서 청감(靑甘)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샘이 있는 이 곳을 청감천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그 바위 밑에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새목 - 상리면 초항리


  백봉암(白鳳岩)이란 산봉우리에서 봉황(鳳凰) 한 쌍이 목을 길게 늘이고 쉴 터를 찾아가던 중 이 마을 앞산에 날아와 앉았다 하여 봉정(鳳頂)의 뜻인 새목(鳥項)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외부 세계와의 인연(因緣)을 끊고 마을 어귀에 풀이 우거져 있어서 초항(草項) 또는 새목(鳥項)이라고 한다.


 삼신당 - 유천면 고림리


  지금으로부터 2백여년 전인 1795년 쯤 셋 할머니 탱화를 모시기 위해 삼신당을 지었으나, 약 1백50년 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1938년에 새로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국사봉 숫서낭과 삼신당의 암서낭 사이를 방울이 내왕하면서 찾아와 기도하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 주었으며, 특히 삼신께 점지 받아 자식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서 지나 가지를 못하고 혼례길 가마채도 가마에서 내려 팽나무고개를 걸어서 지나가야 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네의 번영과 안녕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하여 군 입대하러 가는 동네 청년들도 이 곳에 찾아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게 해달라는 인사를 하고 떠나며 제대를 하고 온 후에도 삼신님의 음덕으로 무사히 다녀옴을 인사드린다고 한다. 삼신당이 있는 이 곳을 팽나무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삼신당 밑에 팽나무가 서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원터 - 보문면 산성리


  산성리 아랫마을에 원터라는 돌로 쌓은 집터 모양의 돌담이 남아 있다. 옛날 이 곳은 안동, 의성 방면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하여 길이 험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다녔다고 한다. 고을원님이 이 곳을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서 비바람을 피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돌로 집을 지어 하인으로 하여금 이곳에 밥을 갖다 놓게하여 오고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먹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밥을 먹고 가는 사람 꼭 밥값에 해당하는 돈을 놓고 가는 일이 생겨 원님은 그 돈을 회수하여 매일 같은 양의 밥을 해 놓았다고 전해 내려와 이곳을 원터라 부르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돌담으로 쌓은 집터 모양의 담벼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곳이 개간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백이재 - 호명면 월포리


  오백이재는 지금의 월포리 오백이지(못)에서 북쪽으로 산고개를 넘어종산리 맏질지(못)를 지난 예천으로 가는 옛날의 험한 산길이었으며, 현재 고개 정상에는 작은 돌이 흩어져 있는 서낭당이 있다. 옛날에는 수목이 우거지고 산이 험하며 산적(山賊)이 은거하고 있어 5백명 이상이 모여서 이 길을 지나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하여 오백이재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길이 남아 있다. 또 오백을 한자로 오백(五百)말고 오백(烏白)으로 표기해서 석탄(石炭)이나 흑연(黑鉛)의 광맥(鑛脈)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여 탐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범우리 - 호명면 본포리


  지금의 본포리와 원곡리 사이에 있는 범우리산(일명 호명산)은 옛날에 수목이 우거진 깊은 산 골짜기에 범이 살았다고 범우리로 불러진다 한다. 범 `호(虎)'자와 울 `명(鳴)'자를 따라 옛날의 면소재인 분포리가 속하는 행정단위의 이름을 호명이라 했다. 원곡리 동암산을 범우리산이라 하고, 본포리와 원곡리 사이에 범우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호명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고려 고종 때 태어난 임지한 장군이 범을 길들여 말처럼 타고 타녔다는데, 원종 때 경주에서 일어난 적도 최종, 최적, 최사 등을 청송 주왕산에서 토벌하고 그 공으로 큰 벼슬을 주고자 하니 상주 관내에 소속된 다인현을 예천군에 속하게 하도록 임금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임 장군이 다인을 왕래할 때, 장군이 탄 범이 여기에 이르러 크게 포효하니 이 산에 범들이 모두 따라 울어 범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중곡재 - 보문면 우래2리


  옛날 보문면 우래2리 속칭 몽골에 몽은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스님들은 이 마을 안으로 지나야만 몽은사에 출입이 가능하였다. 어느 날 마을 사람 중 힘이 장사이고 심술이 심한 사람이 평소 스님들이 자기 마을로 지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는 스님을 붙잡고는 씨름을 하여 이기면 마을 앞을 자유로이 지나갈 수 있으나, 만약에 지면 이 다음부터는 마을 앞을 지나다닐 수 없다고 하면서 씨름을 하자고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하기 싫고 질 것이 뻔하였으나 힘이 장사고 심술이 심한 마을 사람의 횡포에 부득이 씨름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스님은 우래2리 마을 앞인 기곡리 고개에서 한(恨) 없이 울고 갔다하여 중곡재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이 절의 흔적도 없고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쇠실(金谷) - 하리면 금곡1리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에 원병 왔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산천을 바라보니 매우 수려하여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생각하고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하여 데리고 온 지관에게 물으니, ‘이 마을 뒷산은 명당으로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자, 이여송은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뒷산에 있는 명당자리에 혈을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해서 `쇠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순천 김씨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처음 정착한 곳이라 `쇠실'이라고도 전해진다.


 인바위 - 감천면 대맥1리


  대맥1리 마을 앞 동쪽 대산지(池) 옆에는 작은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약 5백년 전 이 마을에 거주하는 경주 손씨 가문에서는 이 두 바위와 인접한 문중산인 화전이라고 부르는 이 산에서 매년 음력 10월 7일 조상의 성묘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작은 바위를 큰 바위 위에 올려 놓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씨 가문의 번창과 각종 액운을 없애준다고 하여 지금까지 계승하여 왔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손씨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마을에 화를 가져다 준다하여 손씨 가문에서 돌을 올려 놓으면 다른 주민들은 내려놓곤 하였다. 이렇게 작은 바위를 큰 바위 위에다 올려 놓는 행위가 마치 도장을 찍는 것 같다하여 이 바위를 인바위(印岩)라고 부른다.


 거북바위와 동신목 - 감천면 돈산리


  돈산리 산골마을은 조선 영조 때 한양인 조보양이 유동에서 고방산 동쪽에 터를 잡아 산골이란 마을 이름으로 지었으며, 동구에 있는 독서동에 서당을 건립하고 문도(門徒)들을 모아 강학(講學) 하였다. 명금간에는 잉어바위가 천연적으로 물고기 모양으로 누워 있으며, 산골마을 중앙에는 거북바위와 크고 작은 둥근바위들이 군데군데 박혀있고 주마산 동쪽에 반월산이 있어 나직한 산들이 마을을 푹 둘러싸고 있다. 이 거북바위는 조보양이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자 이곳에 쉬고 있을 때 잠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거북바위의 신령으로 만약 그대가 이곳에다 터를 잡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크게 일어날 테니 여기에서 살아라.’ 하면서 ‘내가 동신이 되어 그대의 후손을 보살펴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 신령을 모시기 위하여 동네 입구에 있는 버드나무를 동신목을 삼아 2년마다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조우치의 묘 - 상리면 두성리


  그 옛날 두성리 왕곡마을에 살던 조우치라는 사람이 죽자 그 후손들이, 뒷산 봉우리 명당에 묘를 쓰기로 하고 이곳 두성리 구모마을로 우회 하여 운구하던 중 마을 뒷산 길에 이르러 급한 전갈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조씨(趙氏)네가 역적으로 몰려 지금 금부(禁府) 나졸들이 잡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에 크게 당황하여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상여채로 묻고는 도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후부터 이곳을 조우치의 묘, 이 일대를 조우치네 메라고 전해온다. 아마도 이 전설은 고대소설인 「전우치전」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다.


 5월에 홍시를 구해 - 하리면 송월리


  월감에서 도촌 쪽으로 가다가 왼쪽 편으로 돌아가면 나타나는 골짜기가 있는데 도효자가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기 위하여 음력 5월에 홍시를 구하려고 감나무가 많은 이 곳을 뒤척이다가 날이 저물었다. 날이 저문 줄도 모르고 도효자는 감나무 밑을 계속 찾고 있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므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 강원도 강릉의 어느 산골 김씨 집에서 홍시를 구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때 도효자를 호랑이가 등에 업고 갔다하여 이 골짜기를 `업은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업은골은 1백여년 전 도효자 이전에 생긴 땅이름으로 호랑이가 도효자를 업고 강릉으로 홍시를 구하러 갈 곳을 미리 암시해 준 우리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엿보인다 하겠다.


 수수암(修水庵)의 옹달샘


  상리면 도촌리 쌍학마을 뒷산에 수수암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맑은 샘이 있다. 원래 이 옹달샘에는 바위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바위 옆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바위구멍에 대고 몇 명의 사람이 왔다고 말하면 정확히 사람 숫자만큼 그 분량대로 국수가 나와서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승(老僧)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욕심 많은 젊은 행자승이 바위구멍에 대고 사람이 한 사람인 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니 국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행자승은 참지 못하고 나무작대기로 그 구멍을 쑤시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큰 소리와 함께 바위가 갈라지며 붉은 물길이 솟아오르자, 행자승은 놀라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죽고 말았다. 이후 암자는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던 구멍은 맑은 물이 나오는 옹달샘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충북 단양군 방향으로 4km 이내 용두리(야목마을)에는 도효자비가 있으며, 등산로와 쉼터가 있는 용두분재농원이 위치하고 있다.


 떡을 주던 고개 - 상리면 덕고개


  상리면 도촌마을에서 사곡마을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나즈막한 고개이다. 집도 없고 숲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이곳을 지나는 길손은 대낮에도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고개 마루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지나는 길손에게 떡을 빚어 요기를 시키는 인심 좋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사실 이 할머니는 천년 묵은 암여우로 사람되기를 소원하여 이를 딱하게 여긴 산신령이 여우에게 이르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적선을 베풀면 사람이 되게 해 주겠노라고 하여 할머니로 둔갑하여 공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스름한 달빛 속에 한 사나이가 이 오두막집에 문을 두드리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하룻밤 쉬어 가기를 간청하였다. 이날은 산신령과 약속한 3년이 되는 마지막 날 밤이었고 하루 종일 지나는 길손이 없어서 적선을 베풀지 못해 초조해 하던 차에 손님이 찾아오므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사나이는 잠이 들었고 할머니는 윗목에 앉아 이젠 날만 새면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사나이의 피 냄새가 코를 스치자 본능적인 욕구가 꿈틀거렸다. 이를 악 물고 참았으나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사나이를 해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나이는 죽어 있었고 자신은 추악하고 늙은 여우가 되어 있었다. 땅을 치며 후회 하다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떡을 주던 고개라 하여 떡고개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덕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부처님 앞에서의 거짓말 - 용문사 큰북


  옛날 서울과 부산의 거짓말쟁이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는 자기라고 자찬하던 중, 서로의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나서 내기라도 해봐야지' 하고 각자 집에서 출발, 산천을 구경하며 예천에 도착했다. 예천이라면 금당 맛질과 용문사를 빼놓고 지나칠리 없는 두 양반, 용문사를 찾아 하루를 부처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후 시간, 경내를 구경하던 중 서로의 행석을 살펴보니 시골 촌뜨기는 아닌지라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 사는 김아무개요.' `나는 부산 사는 박아무개요.' 서로 놀라는 눈치였으나 태연한 척 더 이상의 인사가 필요 없었다. 서울 김 서방이 먼저 ‘우리집 뒤뜰에 오동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놈이 금년에 자란 새순이 너무 커서 꼭대기 가지를 잘라 북을 매려고 하나 그에 마땅한 가죽을 찾지 못했으니 답답한 마음 누가 알겠소.’이 말을 들은 부산의 박 서방은 김 서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포 전에 우리집 외양간에 있던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마굿간이 조금 비좁아 송아지 꼬리를 쬐금 잘라서 그 가죽으로 북을 매려니 그만한 통을 짤 수가 없어 당초 북을 맬 수가 없구려.’했다. 그럭저럭 해서 만들어진 북이 용문사의 큰북이었다니…. 이 이야기는 용문사 큰북이 얼마나 큰 규모로 만들어졌나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짓말을 간직한 큰북은 1984년 5월 8일 화재로 불타고, 다시 제작했다.


 도둑들이 없어져 - 도덕암


  용문면 덕신리 마을 서쪽에 있는 덤바우봉에 높이 3.5m, 너비가 3m나 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는 굴이 하나 있다. 옛날 이 바위굴이 도둑의 은거지가 되어 이웃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는데 마을에 젊고 기개가 있는 한 젊은 선비가 이 바위에다 도덕암(道德岩)이란 글씨를 크게 새겨 놓고 부터는 도둑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이 바위의 이름이 도둑바위에서 덕암(德岩)으로 바뀌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덕암이 되었다고 한다. 도둑골이 덕암으로 된 것은 밉지 않은 전설이지만 도둑골을 도둑과 결부 시키는 것은 비약이다. 도둑골이란 지형이 모두룩하여 사람이 집을 짓고 살다 마을을 이루기에 불편이 없다는 고유어 지명이다. 또한 이 마을 입구에는 개구리바위가 있는데 논바닥에서 산등성이로 3m가량 높이에 개구리처럼 붙어 있다하여 붙여졌으며, 이는 백마산(白馬山)의 뱀바위와 눈싸움을 한다고 한다. 정월초에 실을 걸고 제물을 얹어 놓고 기원하기도 한다.


 연을 타고 고향을 찾아와 - 연무덤


  고려 중엽 용문면 구계리 김씨와 이씨 성을 가진 두집이 살고 있었다.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에서는 고려 조정에 대하여 매년 처녀를 공물로 바치게 했는데, 어느 해 마을 두 처녀가 뽑혔다. 그녀들은 멀고먼 이국만리 원나라 수도까지 끌려가게 되었는데 두 처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 가면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되었다. 두 처녀는 귀한 왕비가 되었지만 고향을 잠시도 잊지 않았으며,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고려 조정에 부탁하여 자기들이 살았던 집 뒤에 작은 암자를 짓게 하고 이름을 김이암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큰 부처그림 하나, 작은부처 1백여개를 그린 그림과 향로 한 쌍을 이 암자에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두 처녀가 연(輦)을 타고 고향을 찾아와 그들의 부모를 뵌 후, 그 연을 김이암터 앞에 묻어 이곳을 연무덤이라 한다. 조선말에 빈대로 인하여 폐사 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 암자에 보관되었던 부처그림은 미면사(문경시 동로면)에 전해지고, 은향로는 「예천군읍지」와 「교남지」엔 용문사 정수암에 보관되었다고 전해지나, 「예천군지」엔 군수 김귀현이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예천군지」가 1939년 편찬 된 것을 생각해 볼 때 김귀현이 일본인에게 상납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그후 김귀현은 왜인에게 빌붙어 전라도도지사가 되었다. 국보급의 부처그림과 은향로가 우리 군에서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명예가 있을 것을 미리 알려줘 - 어사금


  조선 태종 임금이 그의 여섯째 왕자인 희령군이 음율(音律)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거문고 한 개를 내려준 일이 있었다. 그 후 희령군의 자손들은 이 거문고를 어사금(유형문화재 241호)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로 생각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와중에 종가 계통의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경기도 광주에 있던 희령군 사당 마저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희령군이 분가할 때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라곤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는데, 이상하게도 어사금 한개만 용케도 남게 되었다. 이 거문고는 희령군의 끝집 자손 한 사람이 영남으로 이사를 올 때 가지고 왔다. 그리고 몇 대를 지나 병성(1771~1839)의 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가을, 갑 속에 있는 거문고에서 소리가 울렸는데, 그 소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영롱하고 그윽한 소리여서 온 가족이 모두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 당시의 임금인 정조가 병성에게 희령군의 사당을 모시게 하라는 분부의 교지가 내려졌는데, 당시의 사회 제도로 보아 희령군의 사당을 모신다는 것은 여간 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명예가 있는 것을 미리 알려준 어사금은 정말로 신비로웠다고 하겠다. 이후 그는 희령군의 사당을 수축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 사당을 모셔 받들게 하였는데, 그후에도 어사금은 후손들에게 스스로 신비로운 소리를 내어 길조를 알려 주었다고 하며 지금도 희령군의 사당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위치:용문면 구계리)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는 교훈 - 지고개, 박샘


  예천읍 서본리 선산봉으로 난 길 지고개에는 박샘이 있는데 이 곳은 옛날 술이 나는 샘이라 하여 주고개(酒峴)라 하였으며 그 샘을 주천(酒泉)이라 했다. 그 전설을 살펴보면, 정성을 들이면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에 이 근처에 사는 어느 가난한 집 아낙네가 남편에게 줄 술을 사서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느라 급히 고개를 올라가다가 그만 실족하여 넘어져 항아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한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에 대성통곡하며 실컷 울다 앞을 보니 기이하게도 조그만 구덩이에 술이 괴어 있었다. 그 술을 바가지에 담아 집으로 가 남편에게 드렸다. 그 이튿날 또 술을 사러 가는데 여기를 지나다가 어제 깨어진 항아리를 치우러 그 곳을 보니 또 술이 괴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가져다가 남편에게 드렸다. 이렇게 하기를 얼마간 지나가 이 소문이 인근 주민들에게 퍼졌다. 이 우물에서 나는 술을 한 그릇(한잔)을 마시면 술이 되고, 두 잔을 마시면 취하고, 세잔을 마시면 물이 된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경계 하면서도 오래도록 애용했다. 어느 날 이 고개 길을 넘나들면 한 나그네가 목이 말라 이 물을 한 그릇 퍼 마셨더니 물이 아니고 술이었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다시 한번 마셔보니 얼큰히 취했다. 그래서 욕심이 나 계속 마셨더니 샘에 있는 술이 모두 물로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최근 시멘트로 우물가를 발라 원형이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 지고개 포장공사로 흔적도 찾을 길이 없어졌다.


 명나라 장수 무례함 혼내 - 예천향교 대성전


  정유재란(1597)에 명나라 장수 마귀(痲貴)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길에 이 고을에 주둔하려고 하나 많은 군대를 수용할 만한 큰 건물이 없어 공자위패를 모셔 놓은 향교의 대성전으로 많은 장졸들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였다. 아무리 명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도와 준다고는 하나 당시 유림들은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공자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마장군에게 몇 번이고 만류하면서 다른 장소로 옮겨 갈 것을 간청하였지만 무인인 마귀에게 대성전이 금기의 장소로 통할 까닭이 없었다. 유림들은 부득이 대성전 안에 모셔 놓은 공자의 위패를 비롯한 모든 위패들을 정산서원으로 옮기고 말았다. 이때 마 장군은 휘하에 있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위세 당당하게 앞장서서 대성전 안에 제일 먼저 앉았다. 그런데 앉자마자 갑자기 대성전의 굵고 긴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 벼락치듯 하는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그렇게도 거만하고 위세 당당하던 그는 혼비백산하여 단걸음에 대성전 밖으로 뛰쳐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대성전 대들보가 너무 굵고 커서 평소엔 그 안쪽을 볼 수가 없었으니, 뒤틀어지는 바람에 그 안쪽을 살펴보니 `군수 이광준'이라고 쓴 글자 다섯자가 보였다고 한다. 마 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서 차츰 제자리에 놓여지게 되었으나 뒤틀어질 때 보였던 글씨는 그 후에도 희미하게 보였으며, 그 때 뒤틀려졌던 흔적이 지금도 대들보에 남아 있다.


 욕심과 과음을 하지 말라 - 밤나무고개 못


  밤나무지는 간들고개 위쪽에 있는 밤나무고개에 위치하고 있는 저수지로 이곳에 술을 많이 먹는 이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곳은 용문, 용산 사람들이 예천장을 오가는 길목으로 특히 밤나무고개는 산림이 울창하고 으슥하여 혼자 넘기에는 낮에도 두려움이 앞서는 곳이었다. 장날이나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술을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고개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는 벌써 밤이 깊고 이슥하여 인적이 드물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헛것이 보이고 이 저수지가 집으로 가는 길로 보여 물 속을 이리저리 헤메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달빛에 산그림자가 물에 비쳐 궁전이나 큰집 같은 것이 나타나 예쁜 아가씨가 나와서 물 속을 안내하기도 하고, 주막 같은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나타나기도 하여 물 속을 헤매다가 깊이 들어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술에 대한 욕심과 과음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한 가족이 단란하게 살아 - 누음골


  예천읍 백전2리 잣밭고개 북쪽 신라시대의 석실고분이 있는 골짜기 마을인 누음골 또는 능골(陵谷)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신라로 추정)에 어떤 전란으로 한 가족이 뿔뿔이 헤어졌는데 난리가 끝난 뒤 서로 가족을 찾아 헤매다가 이 곳 부모재(父母峴, 범우재)에서 부모를 만나고, 형제(兄峴)에서 형을 만났다. 그러나 만나지 못한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이 골짜기에서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여동생 소리가 틀림없으므로 가족들이 모두 달려가 보니 과연 여동생이 있었다. 여기서 집을 짓고 온 집안이 정착하여 단란하게 살아서 골짜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초기 왕릉이나 호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석실고분이 있어 능골이라고 한다. 조선 초 대학자였던 별동 윤상(1373~1455)의 묘도 이곳에 있다.


 예천읍의 수호신처럼 생각 - 흑응산 장군바위


  예천읍 서본리 뒷산을 흑응산이라 한다. 이 산 중턱에 넓이 10여m, 높이 4~6m의 넓은 바위를 일컬어 장군바위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읍민들은 이 장군바위가 매우 영검이 있다고 하여 예천읍의 수호신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금기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관민의 대표가 목욕재계를 하고 생돼지 머리를 위시하여 모든 제물을 날 것으로 장만하여 옛날 관복차림으로 정성들여 제사를 이 장군바위 앞에서 올리고 시장을 예천읍 앞에 있는 한천 강바닥에서 보게 한다. 그리고는 시가지 요소엔 황토를 뿌리고 여염집과 각 상점마다의 지붕과 출입문에 버드나무의 푸른가지를 비스듬이 꽂아두면 사흘 안으로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장군바위 밑에 묘를 쓰면 날씨가 가물어 일체 묘를 들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수백 년 동안 예천읍민들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때로는 욕심 많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명당이라는 장군바위 밑에 묘를 몰래 쓰고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지처럼 그 위에 띠를 놓아도 개들이 짖어대고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읍민들에게 발각 되어서 묘를 파헤쳐 버리기 때문에 묘를 못 쓰게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서 승리를 맹서 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예천군수가 여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아 - 용정마을


  3백년 전 청복리 마을에 밀양 박씨와 김해 김씨 양 씨족이 용정(龍井)이란 골짜기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으나 첫째는 식수요, 둘째는 의식주 문제였다. 그래서 두 씨족은 서로 힘을 모아 샘을 파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 샘을 아무리 파도 물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서 제일 고령자 되는 박씨 노인의 꿈에 어떤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이곳 중간 마을 가운데 논을 깊이 파면 물이 콸콸 쏟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꿈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샘을 팠다. 과연 그 자리에 샘을 파니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물이 용솟음쳤다고 하여 이 샘을 용정이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용정이라고 하였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은 상수도가 설치되어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무심바우


  예천읍 왕신1리 무심바위 마을 앞에 무서운 느낌이 들만큼 커다란 바위가 있다. 오래 전 이 마을에 정이 깊고 우애가 돈독한 몇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 중에 방울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방울장사 나간 남편이 반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혼자 남은 부인은 걱정이 되어 매일 마을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몸이 쇠약하여진 부인은 언제나 기다리던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 후 1년이 지나자 부인이 죽은 자리에 평평한 큰 바위가 생겨났다. 그 형상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기 위하여 앞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이 바위가 되어 끝까지 기다렸는데도 끝내 그 방울장사가 돌아오지 않자, 그 바위를 무심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위치:예천읍 왕신리


피부병이 없어진다고-옻샘


  예천읍 남부초등학교 뒤에 있는 오성바위에서 산능선을 타고 내려온 골짜기에 청복1리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큰 샘이 있는데 처음 이 샘 이름을 매화낙지(梅花落池)라고 하였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두천(龍頭泉)'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이 샘물을 마시면 피부병이 없어지고 옻이 오르지 않는다고 하여 `옻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샘 제일 밑바닥에는 사람의 몸통 만한 옻나무 둥치 4개가 기초를 하고 있으며 물의 오염을 막기 위해 은이 박혀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의 우물을 마시기 위하여 전국 곳곳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며칠을 묵으면서 몸의 병을 치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샘물은 먹을 수가 있으나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철조망으로 가려져 있으며, 매년 양력 8월 15일에는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샘물 청소를 하고 풋긋 먹기 행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을 주민은 이 샘물을 먹기 때문에 어린이가 태어나고 옻에는 면역이 되었다고 한다. ▲ 위치 : 예천읍 청복 1리


 화재를 예방한다고 알려져 - 돌자라


  예천읍 남산에 있는 팔각정(옛 관풍루 터) 옆에 길이 1m 남짓한 돌로 투박하게 다듬어진 돌자라 한 마리가 남쪽을 향해 놓여져 있다. 이 돌로 다듬어진 자라가 처음 놓여진 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예천군지」에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호명면 본리 뒷산인 검무산과 종산리 뒷산이 예천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 두산이 모두 예천읍의 화체(火體)가 되어 예천읍에 화재가 자주 났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 위에 돌로 자라를 다듬어 앉히게 되면 이 두산의 화기(火氣)를 막게 되어 예천읍의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하여 돌로 자라를 다듬어 남산 위 관풍루 주변에 앉혀 놓았다고 한다. 그 후 이 고을에 군수로 있었던 1570년대의 예천군수 이귀수의 송덕비를 세우고자 돌자라를 비석 받침으로 삼기 위해 끌어내려 빗돌을 세울 만큼의 홈을 그 돌자라 등에 파니 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돌자리는 예천읍 서본리 비선거리(예천초등학교와 굴모리 중간지점)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예천읍에 자주 불이 나자 다시 다른 돌로 자라를 다듬어 놓은 것이 현재 남산 위에 앉혀진 `돌자라'라고 한다. 돌자라가 있는 이 곳 남산은 산책코스와 체육시설이 있어 예천읍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호국영령의 혼이 깃들여 있는 충혼탑, 국궁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무학정 등이 있다.(위치:예천읍 남본리 남산공원 경내)


 꿈에서 얻은 용의 알 - 약포 대감에 얽힌 일화


  약포 대감이 태어나기는 용문면 하금곡리인데, 예천읍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하였다. 꿈짝 놀라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용문면 금당실에 볼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 전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도포소매에 집어넣고 고평으로 돌아와서 꿈에 용이 시킨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우물 밑에 떨어지자 한 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차례씩 우물을 헹구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위치:예천읍 고평리 466 정충사)


 예천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샘-주천(酒泉)


  옛날 우리 고을 담 밖 관혁동에 주천(酒泉)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울산 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고을을 지나던 양호라는 명나라 장수가 이 샘의 물을 마셔 보고 감탄한 나머지 ‘과연 예천의 이름처럼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예천의 지명은 이 샘 때문에 얻게 되었구나.’라고 극찬 하였다. 또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이라는 행정이름이 생겼다는 설(說)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속칭 군방골) 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군방골샘은 깊이가 8m나 되며 지하에서 용출하는 자연수로 이름만큼이나 달고 차서 지역민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하는 감로수(甘露水)였고, 또한 한과 애환을 함께 한 곳이기도 하였다. 군방골이란 조선 중기까지 관아와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군방골샘 또는 궁방골샘이라 구전되고 있다. 고을의 지명 유래와 주민들의 애정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샘이기에 상수도 보급으로 폐정 하였던 것을 지난 90년에 목조와가 사각 지붕의 보호각을 세우고 샘을 복원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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