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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일 사장(맨위 오른쪽 네번째)이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역전 우승한 군산상고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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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무 창업주 이만수 사장의 넷째 아들 이용일 사장은 1957년 3월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하며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이만수 사장은 5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각각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일했고, 셋째는 경찰(경감)이었다. 그런데 1957년 셋째가 미국 경찰제도 시찰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이만수 사장은 넷째아들 이용일을 경성고무 후계자로 지목한다.
이용일 사장은 서울 경동중을 거쳐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인물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 군에 입대해 6년간 근무하고 1956년 3월 제1군사령부에서 육군소령으로 예편했다. 체격이 크고 활달한 성격의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에 입사한 후 열심히 일했지만, 몸집이 불어나는 것이 항상 거슬렸다. 경동중 시절부터 야구선수였던 이 사장은 기업 경영활동을 하느라 운동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 사장은 어린 시절에 국가대표 야구선수를 지낸 매부 유복린으로부터 야구 영향을 받아 경동중 시절 야구부를 만들만큼 야구에 빠졌다. 서울상대 야구부 시절인 1950년 6월 그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체육대회에 서울대 야구 대표선수로 참가했다. 그의 포지션은 1루수였다. 6월25일 연세대와 준결승전을 앞두고 터진 6.25전쟁 때문에 승부는 가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육군소위에 임관돼 입대했지만, 군에서도 육군야구단 소속으로 꾸준히 야구를 계속했다.
▲ 군산에 야구의 씨를 뿌리다
이용일 사장은 "너무 살이 쪄 전무로 취임한지 6개월만인 그해 9월부터 야구 동호인을 모집해 군산중·고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동호인 가운데서 발굴한 군산중 출신 김금현은 1963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김응룡 등과 함께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한 주역이 됐습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울은 일반인들이 학교 방과후 운동장 사용문제 때문에 싸울 정도로 야구, 축구 등 운동 열기가 후끈한데 반해, 군산은 학교마다 운동장이 텅텅 비어있었다. 그는 "당시 군산에 깡패가 많았는데, 학생들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동부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군산에 야구를 육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꿈나무를 육성해 중·고교 야구부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식의 야구단 육성 계획이었다. 그는 군산 4개 초등학교 교장을 설득했고, 그 결과 1962년 2월에 군산국민학교와 중앙·남·금광국민학교 등 4개 학교에 야구부가 창단됐다. 이들 4개 야구단은 봄·가을 리그전을 펼치며 실력을 향상시켜갔고, 1964년 졸업생부터 군산중에 입학했다. 이어 1967년 봄에는 군산중 야구부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군산고 야구부 창단 시도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 사장은 군산중 출신 졸업생 8명을 데리고 상경, 4명은 동대문상고에, 그리고 3명은 휘문고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그는 고교 야구단 창단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군산남중과 군산상고 야구부를 만들어냈다.
이용일 사장은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가 만들어지자 1년 전에 서울로 갔던 군산중 출신 2명이 내려왔고, 군산남중에는 전주북중 2학년이었던 김봉연(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정읍중 노석현 등이 제발로 찾아오면서 김일권, 송상복 등 제법 굵직한 선수들이 포진, 군산상고 등 군산 야구의 앞날을 밝게 했다"고 회고했다.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군산상고 야구부는 창단 5년만인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역전우승, 한국 야구사에 화려하게 등장하며 고교 야구의 전국시대를 열었다. 호남 연고 학생 야구팀이 정상에 오른 것은 광주서중이 1949년 제4회 청룡기대회였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4대 대회에서 한차례도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2년 7월19일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2만2000여명의 관중이 몰려든 가운데 전통의 야구명문 부산고와 신예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피말리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군산상고에는 1970년 청룡기대회와 71년 대통령기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주역들이 포진해 있었다. 스마일피처 송상복이 마운드를 지키고, 김일권과 김봉연, 김준환, 양기탁 등 불방만이 타선이 늘어서 있었다.
군산상고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1회말 먼저 1점 선취점을 뽑았다. 그러나 3회초 동점을 허용한 뒤 팽팽하게 맞서나갔지만, 8회 초 6안타를 얻어맞으며 대거 3실점을 했다. 1대 4로 뒤진 운명의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선 6번 김우근이 안타를 만들어냈고, 부산고 마운드가 흔들리면서 1사 만루 찬스가 됐다. 1번 김일권의 몸에 맞는 공으로 2-4가 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양기탁 선수가 깨끗한 중전안타를 쳤다. 두 명의 주자가 들어오면서 4-4 동점이 되며 야구장은 물론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리고 김준환의 천금같은 끝내기 좌전안타가 터졌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을 이끈 감독은 최관수.
이용일 사장은 "최 감독은 참 보기드문 참스승이었고, 그가 있었기에 군산상고의 신화도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이 사장은 "당시 야구부는 만들었지만, 좋은 감독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마침 1960년대 실업야구 최고의 투수 최관수(기업은행)가 1970년 3월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 당장 영입에 나섰습니다." 최관수는 인천 동산고 출신으로 1961 제13회 쌍룡기 결승전에서 부산상고를 노히트 노런으로 잠재운 야구천재였다. 이용일 사장은 마침 서울대 상대 선배인 정우창(전주 출신) 기업은행장을 찾아가 간청했고, 최관수는 1970년 7월 기업은행 군산지점으로 발령나 군산상고와 인연을 맺었다.
▲ 프로야구를 태동시키다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를 경영하며 군산 야구를 지원하고,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과 취업 등 진로까지 책임졌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감독들이 제일은행, 상업은행, 농협 등에 포진해 있었고, 국방부 정훈장교로 근무할 때 상관이었던 이선근 동국대 총장 등의 도움이 컸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 대어급 선수들과 함께 실력이 조금 뒤지는 선수들까지 취업 및 진학을 배려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80년을 전후해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가 너무 노동집약적인 업종이라고 판단, 마침 종합무역상사를 출범시키고 수출업종 다각화를 꾀하던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작업을 진행시킨다. 또 박정희 대통령 서거, 전두환 대통령 취임, 민주화운동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됐다.
이 때 5공화국 정권이 내세운 스포츠 정책의 중심에 있었던 프로야구 출범은 이용일 사장에게 인생의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야구계의 마당발 이용일 사장은 5공 정권이 프로야구단 출범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청와대와 문공부를 오가며 계획을 진행시켰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이 된 그는 서종철 초대 총재와 함께 프로야구의 기반을 다지고, 또 키웠다.
이용일 사장은 "1989년 제8구단 창단을 진행시키던 당시 급박했던 상황들이 기억에 남는다"며 "해태의 반발 속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팀을 호남에 유치해도 좋다고 밝히고, 쌍방울과 미원이 공동출자하는 등 조건하에서 제8구단 쌍방울야구단 창단이 급속히 진행됐다"고 회고했다.
이용일 사장은 1990년 12월,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9년동안 정들었던 KBO사무총장을 사퇴하고, 그 이듬해 쌍방울 구단주 대행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98년 쌍방울구단을 사임했다.
기업인으로서, 또 야구인으로서 일생을 풍미한 이용일 사장은 "내 나이 올해 80입니다. 돌이켜보면 멋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