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모양 (hair set) >>> 남 ·녀 머리카락을 맺는 양식의 총칭.
머리모양은 신체를 장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얼굴의 형태나 유행(fashion)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양이 변화한다. 고대 이집트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는데, 고금을 통하여 남자보다 여자가 더욱 복잡하고 장식방법도 다양하다.
개민(gamine):뒤와 옆을 짧게 치켜 깎고 앞을 비스듬하게 깎은 스타일. 깜찍한 말괄량이에게 어울리는 귀여운 머리모양이다.
보브(bob):앞머리를 이마까지 내려오게 하거나 또는 이마가 보이도록 남자처럼 짧게 깎은 머리로, 흔히 단발머리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머리모양으로도 유명하다.
비틀 컷(Beatle cut):1960년대의 전위적인 록뮤직(rock-music) 그룹인 비틀즈가 소개한 남성 장발 스타일이다.
비하이브(beehive):뒤로 머리를 빗어넘겨 둥근 돔(dome)처럼 높게 과장시킨 머리모양이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런던의 테디 걸(Teddy girl)에 의하여 유행한 머리모양.
빙글(bingle):깎아 올린 짧은 단발머리를 말한다. 보브와 싱글의 혼형이다.
뱅스(bangs):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르고 옆머리를 늘어뜨린 스타일. 영국에서는 프린지(fringe)라고도 한다.
섀그(shag):길게 층이 나게 가르는 머리 스타일이다.
싱글(shingle):지붕의 경사처럼 밑에서부터 위로 차차 짧게 깎은 머리형태. 1920년대 여성에게 유행한 스타일이다.
새순(sasson):눈썹 밑까지 뱅을 이루며 뒤는 짧게 치켜 깎은 머리모양. 1963년 영국의 V.새순에 의해 소개된 스타일이다.
시뇽(chignon):뒤통수에 낮게 8자형이나 원형으로 머리를 틀어 쪽을 찌는 스타일. 가끔 장식적인 망사나 아름다운 핀으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아프로(Afro):1960년대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아메리카 흑인)들에게서 유행된 스타일. 고수머리를 짧게 말아올려 컬을 하거나 동그란 헬멧 스타일로 만든 모양이다.
업스위프(upsweep):중간 길이의 머리를 위로 빗어 올려 정수리에 묶어 고정시킨 다음 컬로 장식하는 스타일. 1940년대에 유행하였다.
이어머프(earmuff):가리마를 중심으로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땋아서 귀 옆으로 둥글게 말아 묶은 스타일이다.
콘로(cornrow):1970년대 흑인들에게 유행한 스타일. 여러 줄로 머리를 땋아 장식한다.
큐(queue):길게 하나로 땋아 늘인 머리모양. 한국의 땋은머리와 같다.
크루컷(crew cut):1940년대와 195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한 스타일로, 양옆과 뒤를 바짝 자른 짧은 머리형이다. 브러시 컷(brush cut)이라고도 한다.
포니테일(pony tail):머리를 뒤통수로 빗어넘겨 하나로 묶은 스타일인데, 리본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말꼬리같이 보인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퐁파두르(pompadour):앞머리를 뒤로 올려 빗어 템플(temple)처럼 높게 보이게 하는 스타일이다.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총희(寵姬) 퐁파두르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피그테일(pigtail):양 옆으로 땋아 끝을 리본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주로 소녀들의 머리모양이다.
핑거웨이브(finger wave):기름 바른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웨이브를 만든 짧은머리 스타일로, 흔히 보비 핀(bobby pin)으로 머리가 마르기 전에 고정하여 웨이브를 만든다. 1930년대와 1970년대에 유행하였다.
플립(flip):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밖으로 말아 웨이브가 밖으로 지도록 한 머리모양이다. 가끔 앞머리를 뱅스타일(bang style)로 자르기도 한다.
페이지보이(pageboy):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안으로 말아 웨이브가 안으로 지게 한 머리모양이다. 1930년대 후반에 생긴 스타일로, 플립형의 반대가 되는 스타일이다.
리전트컷(regent cut):남자의 헤어스타일로 포마드를 발라 앞머리 부분을 약간 높게 빗어넘기고 양측 옆머리에서 뒤쪽으로 매끈하게 빗어 붙이는 스타일이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한때 유행하였다.
한국 고유의 머리모양에서 미혼의 남자일 때는 묶은머리 ·땋은머리 ·쌍상투였고, 기혼일 때는 상투를 틀었다.
① 묶은머리:뒤에 늘어진 자연발(自然髮)을 흩어지지 않게 머리 뒤에서 끈이나 헝겊으로 묶어 늘인 머리모양으로 속발(束髮)이라고도 하며, 이것은 미혼녀의 머리모양에서도 볼 수 있었다.
② 땋은머리:머리를 뒤에서 3갈래로 갈라서 서로 엇걸어 땋아 1가닥으로 하여 뒤에 댕기를 드려 늘인 머리 모양으로 변발(폴髮)이라고도 하며, 이것도 미혼녀의 머리모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③ 상투:머리를 끌어 올려서 정수리 위에 틀어 감아 맨
머리모양으로 추계(孫몲)라고도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많이 보이고,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도제(陶製) 기마인물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이 상투를 옛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는 추계(孫結),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서는 추계(椎結)로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의 흉노족(匈奴族)이나 숙신족(肅愼族)은 다 변발이었고, 동호족(東胡族)은 곤두(멎頭:削髮)였으며, 묘족(苗族:越南族)과 우리 민족만이 추결을 하고 있었다. 상투는 트는 방법이나 머리 위에 동곳(상투에 꽂는 것)을 삽입하는 것 등에 다소의 변천이 있기는 하였으나 계속 전승되어 왔다.
④ 쌍상투:머리를 갈라 2개로 틀어 올린 상투로서 쌍계(雙명)라고도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는데, 이것은 미혼 남자의 머리모양이었다. 중국의 옛 글인 《시제풍(詩齊風)》에도 “총각관혜(總角볐兮)”라는 어구(語句)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도 있었던 머리모양인데, 조선시대에는 관례 때 쌍상투를 트는 풍습이 있었으며, 총각이 아닐지라도 정발(頂髮)이 많은 사람은 머리를 좌우로 나누어 각상(角狀)의 쌍계를 맺었다고 한다.
⑤ 개체변발(開剃폴髮):머리의 변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만 남겨 땋아 늘인 머리모양으로 몽골[蒙古] 풍속에서 전래된 것인데, 이를 몽골어로 케큘(kek犧l), 한자로는 겁구아(怯仇兒)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원(元)나라에 복속(服屬)되면서 약 1세기 동안 그들 풍속을 따른 데서 일시 유행한 머리모양이었다.
미혼여자의 머리는 미혼남자와 마찬가지로 묶은머리 ·땋은머리를 흔히 하고, 기혼일 때는 쪽머리 ·얹은머리를 주로 하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예장용(禮裝用) 머리모양으로 다양한 것이 있었다.
① 묶은중발머리:짧은 머리를 뒤에서 낮게 묶은 머리모양으로, 묶은머리, 즉 속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머리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며 요즈음도 소녀들 머리에서 볼 수 있는 형이다.
② 귓머리:양쪽 귀 위에 귓머리를 땋아 뒤에서 모두어 다시 땋아 늘이고 끝에 댕기를 드린 땋은머리이다. 귀밑머리라고도 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미혼녀의 머리모양인데, 양반가의 규수들은 귓머리로 귀를 가리고 일반 처녀들은 귀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③ 새앙머리:머리를 2갈래로 갈라서 틀고 이것을 다시 틀어 올려 머리 뒤에서 아래위로 두 덩어리가 지게 잡아 맨 머리모양으로, 조선시대 궁중의 아기상궁이나 상류계급의 처녀들이 예장할 때 하였다. 이를 새앙낭자 또는 생머리라고도 하였다.
④ 얹은머리:머리를 뒷머리로부터 앞머리로 감아돌리어 끝을 앞머리 가운데에서 감아 꽂은 머리 모양으로, 이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며 《북사(北史)》의 <백제조(百濟條)>에서는 출가녀(出嫁女)는 머리를 2갈래로 나누어 이것을 머리 위에 반(盤)한다 하였고
<신라조(新羅條)>에서는 변(폴)하여 머리에 둘렀다 하고 있어 이 머리모양은 기혼녀의 일반 머리모양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이에는 땋아서 얹은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얹은머리에 다리[다래:月子, 娘子]를 사용하여 고계(高몲)를 만듦으로서 이에 따른 사치가 심하였으므로 영조(英祖) ·정조(正祖)대에 체계금지령(渲몲禁止令)이 내려지기도 하였고, 쪽머리를 하도록 권장하였다.
⑤ 쪽머리:머리를 뒤통수에 낮게 트는 머리모양으로, 이것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수 있는 기혼녀의 머리모양이다. 이것은
북계(北몲)라고도 하여 얹은머리와 함께 한국 기혼녀의 머리모양의 기본형이 되었다. 이에도 다리를 사용하였으며 시속에 따라 쪽의 위치가 머리
뒤에서 위로도 붙고 아래로 처지기도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부인조(婦人條)>에 보면 추마계(戌馬몲)라는 것이 고려시대 기혼녀의 머리모양으로 나온다. 이것도 쪽머리의 일종이나 쪽머리와 같이 머리를 땋아서 묶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 틀어묶은 것으로, 명칭으로 보아 쪽을 머리 뒤에 붙인 것이 아니라 늘여서 어깨까지 처지게 한 것으로 본다.
⑥ 푼기명머리:머리를 3갈래로 갈라서 1갈래의 머리채는 뒤로 하고 2갈래의 머리채는 좌우의 볼 쪽에 각각 늘어뜨리는 머리모양인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이것이 남자 그림과 여자 그림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특수한 머리모양으로, 전해 내려오지는 못한 것 같다.
[더구지머리]⑦ 큰머리:조선시대 궁중에서 의식 때 하던 머리모양으로,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라는 나무로 만든 큰머리를 얹어놓은
것이다.
정조는 선조(先朝)에서 매듭짓지 못한 체계금지를 위하여, 등극하자마자 우선 궁중에서부터 이를 금하고 다리 대신 나무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나무로 된 대용물이 떠구지였다. 큰머리를 떠구지머리라고도 하였고, 한자로는 거두미(巨頭味/擧頭美)라고 하였다.
⑧ 어여머리:조선시대에 예장할 때 머리에 얹은 다리로 된 커다란 머리를 말하며, 머리에 어염족두리(솜족두리)를 쓰고 그 위에 다리로
된 커다란 머리를 얹어 옥판(玉板)과 화잠(花簪)으로 장식하였다.
또야머리라고도 한다. 한자로 어유미(於由味/於汝美)라고 한다. 이것은 큰머리에 버금가는 예장용으로서, 궁중에서나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사용하였다.
⑨ 대수(大首):오늘날 가발과도 같은 것으로서, 궁중의식용 가체(加渲)의 하나였다. 이에는 여러 가지 수식(修飾)을 더했으며, 이를 쓰고 그 위에 또 수식(首飾)을 더하였다.
⑩ 조짐머리:조선시대에 외명부(外命婦)가 궁중을 출입할 때 하던 가체의 일종으로서 다리, 즉 낭자(娘子)를 소라껍데기 비슷하게 크게 틀어 쪽머리에 가식(加飾)한 것이다. 이 머리모양은 정조의 발제개혁(髮制改革) 이후 얹은머리 대신 쪽머리를 함에 따라 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⑪ 첩지머리:조선시대의 예장할 때의 머리모양으로, 첩지(疊地)라 함은 왕비는 도금(鍍金)으로 봉(鳳) 모양을, 내명부(內命婦)
·외명부는 도금 ·은(銀) 또는 흑각(黑角)으로 개구리 모양을 만들어 좌우에 긴 머리털을 단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가리마 가운데에 중심을
맞추어 대고 느릿느릿 양쪽으로 땋아 뒤에서 머리와 한데 묶어 쪽을 찐 것이다.
이 첩지의 장식은 화관이나 족두리 같은 것을 쓸 때 이를 고정시키는 구실을 하기도 하고, 신분의 구분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는 평시에도 첩지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궁중법도에 따라 어느 때 갑자기 족두리나 화관을 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여자머리 모양에는 풀머리 ·코머리 ·바둑판머리 ·종종머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화관머리] 대궐에서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양반집에서는 혼례
때나 경사 때에 대례복(大禮服) 또는 소례복(小禮服)에 병용
상투 >>> 성인 남자가 꾸민 머리 모양.
옛날에는 총각들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르면 머리털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삐죽하게 만들고 거기에 동곳을 꽂아 고정시킨 다음 망건을 썼다.
상투는 남자가 성인이 된 하나의 표징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조혼의 풍습이 퍼지면서 10세 안팎의 소년이 관례를 치르고 상투를 틀어올리면 머리가 무겁고 머리 밑이 당겨 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리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 하는 유교사상을 내세우고, 머리를 깎은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 '까까중'이라고 하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켰으나, 결국은 신시대의 사조에 밀려 상투를 깎게 되었다.
머리장식 (hair
accessory) >>> 머리를 묶거나 고정하거나 꾸미는 데
사용하는 장식물.
신분 ·직업 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도 있다.
【서양】 머리장식에는 생화 ·조화 ·깃털 ·빗 ·레이스 ·보석 ·리본 ·핀 등을 비롯하여 머리분(powder), 베일 ·터번 ·두건 등의 헤드커버링(head covering), 가발(위그 ·헤어피스) 등이 포함된다.
이를 형태별로 구별하면 ① 머리핀류(hair pins), ② 리본 ·끈류(hair band), ③ 장식관 ·관대(冠帶)류(crown, hair ring), ④ 기타로 나눌 수 있다. 머리핀은 머리를 고정하는 액세서리로, 고대이집트 ·그리스 ·로마 ·게르만인 여성도 애용했다. 금속제가 대부분이었으며, 조각을 하거나 보석을 박았다.
고대 그리스의 디아데마나 티아라(tiara)는 귀금속으로 만든 예장용 머리장식으로, 이마 중앙의 뾰족한 부분에 보석을 장식한 해어밴드 형태이다. 오리엔트에서 시작되었고 고대문명에서는 지위를 상징하였다. 헤어네트도 청동기시대 유물에서 발견되었으며, 실용성과 장식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중세의 헤어네트는 금사제로 다채로운 자수를 놓았다. 르네상스시대에는 당시의 이탈리아 회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개 진주나 보석을 박았다. 모직물 ·비로드 ·얇은 견으로 만든 헤어네트는 장발의 부활과 함께 20세기에 다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장식적인 헤어네트와 함께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나일론으로 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용적인 헤어네트가 사용되었다.
【한국】 예로부터 부녀자들이 머리치장에 사용한 것으로는 비녀 ·뒤꽂이 ·떨잠 ·댕기 ·첩지 ·떠구지 ·다리(다래:月子) 등이 있다. 각종 노리개 ·가락지 ·귀고리 등 기타 장신구와 더불어 여인들의 겉모양을 꾸몄다.
① 비녀[簪]:쪽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막대[棒] 모양의 물건. 10cm 이내 길이의 것에서 30cm가 넘는 것도 있다.
재료나 잠두(簪頭)의 수식이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하면서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인 영조(英祖) 이후의 일이다. 부녀자들이 다투어 다리를
사용함으로써 머리가 크고 사치해져 폐단이 심해지자, 1756년(영조 32)에 큰머리 ·어여머리 등을, 머리를 뒤로 모아 둥글게 서린 후에 비녀를
꽂는 쪽찐머리로 개혁하였다. 재료에 따라 금비녀 ·은비녀 ·백동비녀 ·놋비녀 ·옥비녀 ·비취비녀 ·산호비녀 ·목(木)비녀 ·죽(竹)비녀
·각(角)비녀 ·골(骨)비녀 등으로 나뉘고, 잠두의 문양에 따라서 용잠 ·봉잠 ·원앙잠 ·죽잠 ·매죽잠 ·목련잠 ·죽절잠 ·석류잠 ·국화잠
·호두잠 ·말뚝잠 ·민잠 등으로 구분한다.
② 뒤꽂이:쪽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물.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외에 실용성을 겸한 귀이개 뒤꽂이, 빗치개 뒤꽂이가 있다.
③ 떨잠:어여머리 ·큰머리의 중심과 양 옆에 하나씩 꽂는다. 원형 ·각형, 나비 모양의 옥판에 칠보 ·진주 ·보석 등으로 꾸몄다.
④ 댕기:머리를 장식하는 자주색 ·검은색의 헝겊. 쪽머리에 장식한 쪽댕기, 궁중에서 큰머리 ·어여머리를 할 때 잡아맨 매개댕기,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예장(禮裝)할 때 사용한 큰댕기 ·앞댕기, 미혼녀의 땋은머리에 장식한 제비부리댕기, 어린이용인 도투락댕기와 말뚝댕기 등이 있다.
⑤ 첩지:부녀자가 예장할 때에 쪽머리 위에 꾸미는 것. 흔히
은으로 개구리처럼 만들고 양쪽에 긴 머리털을 달았다. 개구리처럼 생긴 몸체를 가리마 위에 대고, 양측의 긴 머리털은 좌우의 머리와 함께 두 귀를
살짝 눌러 뒤에서 한데 묶어 쪽을 쪘다. 첩지는 영조의 발제개혁(髮制改革) 이후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궁중에서는 평상시에 사용하였고 일반에서는
상류계층이라 하더라도 예장을 갖출 때에만 사용하였다.
⑥ 떠구지:어여머리 위에 장식한 나무 틀. 다리를 사용하여 머리를 크게 장식하는 대신 다리와 비슷한 모양을 나무로 만들어 예식 때에 사용하였다.
⑦ 다리:머리를 땋을 적에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 조선 후기에는 지나친 치장으로 인하여 폐단이 커지자 1756년(영조 32) 정월 부녀자 체계금지령(渲몲禁止令)을 내렸고, 이후에는 궁중 예식에 다리 대신 떠구지를 사용하였다.
떠구지 >>> 어여머리 위에 장식한 나무틀.
어여머리 위에 장식한 가체(加渲) 대용의 나무틀. 떠구지가 장식된
어여머리를 큰머리 또는 떠구지머리라고 하는데, 궁중에서 의식 때에 했다. 원래 머리를 꾸미는 데는 큰 다리를 사용하였으나, 떠구지로 대용하게 된
것은 조선 영조 때 가체금지령을 내린 이후부터이다.
변발 폴髮 >>>
중국 북방 민족의 남자들이 앞부분만 깎고 뒷부분은 땋아 늘인 머리 모양.
치발(善髮)이라고도 한다. 몽골족[蒙古族]은
‘개체(開剃)변발’이라 하여, 앞머리와 좌우 양쪽 머리를 남기어 양쪽 귀 뒤에 2가닥으로 땋아 늘였다. 만주족은 후두부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의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남은 후두부의 모발을 1가닥으로 딴 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여진족도 만주족과 같은 변발이었다. 금(여진족)과
원(몽골족)의 지배를 받은 한민족도 변발을 했는데, 특히 청은 철저하게 강요하였다. 중국을 정복하고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정한 청의
세조(世祖)는 1644년 체두변발령(剃頭폴髮令), 즉 치발령(善髮令)을 내려 전 중국민에게 만주족의 두발형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변발은 청대를
통하여 일반적인 풍속으로 굳어졌다.
청 말에 반청(反淸) 단체 등이 장발로 청조에 저항하는 뜻을 나타냈다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때 단발령으로 변발은 사라졌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에 원나라의 영향으로 개체변발한 일이 있었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세자 때(1272) 원나라에서 개체변발하고 돌아온 것이 시초이다. 공민왕 때에 다시 예전의 머리 모양으로 돌아갔다.
가발 假髮 (wig) >>> 대머리를
감추거나 분장 ·장식을 위해 머리에 덧얹어 쓰는 제 머리가 아닌 가짜머리.
서양에서는 분장용이나 장식용, 위엄을 나타낼 때, 무대용
·연예용 ·의례용 ·법관용 등 특종 직업용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BC 30세기경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장식은 물론이고 머리를 햇볕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최고(最古)의 재료로는 사람의 머리털을 사용하였으며, 양(羊)의 털이나 종려(棕櫚)잎의 섬유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빛깔은 검은색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BC 12세기경에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 여러 가지 빛깔이 출현하였으며, 헤나 염료(henna 染料)나 인디고(indigo) 등으로도 염색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가발은 대개 밀랍 등으로 굳힌 컬(curl)과 변발을 만들어 낸 것이 많았고, 남녀가 함께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자기 머리를 깎고 사용하였으나 여성은 자기 머리 위에 가발을 썼다.고대 로마 때에 남성은 대머리를 감추거나 변장을 하기 위해서 가끔 사용하는 정도였으나, 여성의 경우에는 머리의 모양과 빛깔이 다양화됨에 따라서 폭넓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3세기에는 보편화되어서 변발이나 아이론으로 머리털을 곱슬곱슬하게 컬을 하고, 또 웨이브를 짓는 것이 유행하였다. 질이 좋은 가발은 그 심(芯)에 양피(羊皮)를 사용한 것이었는데, 블론드(blond) 계통의 빛깔이 크게 인기가 있었다.
북쪽의 갈리아 사람들에게서 구입한 머리털을 가발로 쓴 것은 문헌상의 기록으로도 알 수가 있으며, 16세기 무렵부터 가발이 재등장하였는데 이 때의 것은 주로 부분가발이었다. 17세기 초에는 프랑스 궁전에서도 가발을 쓰는 것이 유행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유럽 전체에 보급되었다. 이 때의 재료로는 사람의 머리털처럼 컬이 잘 되는 말[馬]이나 양의 털을 사용하였다. 여성의 경우는 주로 부분가발이나 붙임털을 사용하였으나, 남성의 가발은 부채처럼 끝이 넓어진 가발(full bottomed wig)을 사용하였다.
18세기에는 더욱 활발하여 주머니 가발 ·결발(結髮) ·피그테일(pigtail) 등 새로운 양식이 생기면서 17세기에 시작되었던 잿빛 ·블론드 등의 가루를 뿌리는 일이 18세기에 더욱 유행하였다. 19세기 후반에도 복잡한 머리 모양을 즐긴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가발이 크게 유행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모(人毛)나 화학섬유의 가발 및 헤어 피스(hair piece)가 사용되고 있다. 남성의 가발은 18세기 전성 후 점차 사라져 갔으나, 19세기 전후에 다시 사용되었다.
탕건 宕巾 >>> 조선시대에 벼슬아치가 망건의 덮개로 갓 아래에 받쳐 쓴 관(冠).
모양은 앞쪽이 낮고 뒤쪽은 높아
턱이 졌다. 사대부 계층에서 평상시 쓴 것으로 망건보다 늦게까지 보급되었다. 탕건의 재료로서 중국에서는 마포나 사(紗)를 이용했으나 조선에서는
말총을 사용하였다. 탕건의 재료는 예로부터 평안도의 정주 ·안주, 호남의 완주, 제주에서 생산되었다. 제주는 오랫동안 목마지(牧馬地)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얻는 말총으로써 총모자 ·망건 ·탕건 등을 만드는 마미(馬尾) 공예가 발달하였다. 탕건을 만드는 장인을 탕건장(宕巾匠:중요무형문화재
67)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탕건 만드는 기술이 제주의 몇몇 여성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관모 冠帽 >>> 머리에 쓰는 쓰개의 총칭.
좁은 의미로는 벼슬아치들이 쓴 모자를 말한다. '관(冠)'은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쓰는 것으로, 영어의 크라운(crown)에 해당된다.
크라운은 신분을 상징하는 머리에 쓰는 것의 총칭으로 리스(wreath)·코로넷(coronet)·티아라(tiara)·미트라(mitre)·디아뎀(diadem) 등이 포함된다. '모(帽)'는 모자·두건(頭巾)의 뜻으로 예의를 지키고 더위·추위·먼지 등을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의 총칭이다. 즉, 관을 제외한 모든 쓰개류를 말한다. 모는 영어의 해트(hat)에 해당하며,
해트는 크라운(crown:대우)과 브림(brim:양태)이 있는 것과 크라운만 있는 것이 있다. 광의의 해트는 베일(veil)과 후드(hood)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해트는 영어의 크라운(冠)을 제외한 쓰개의 총칭으로 캡(cap)·보닛(bonnet)·후드·베일 등을 포함한다.
[사모]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 재질은 검은 사로 만들었는데, 시대에 따라 높이나 사모뿔의
크기와 방향이 달라진다.
[백사모]
지름 19.5Cm, 높이 16.5Cm. 관모.
사모 紗帽 >>>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
모체(帽體)의 전면(前面)이 2층으로 둥그렇게 턱이 지고 뒤는 밋밋하며, 뒤 중심에서 양옆으로 날개[翼·角·脚] 모양이 달려 있다. 날개는 처음에는 연각(軟角)이었다가 점차 경각(硬角)으로 변화하였다. 1387년(고려 우왕 13) 5월, 사신 설장수(乾長壽)가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명 태조로부터 하사품으로 처음 착용한 데에서 비롯하며, 다음달인 6월부터 1∼9품 관인들의 관모로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8년(태종 18) 1월부터 백관이 사용하였으며, 26년(세종 8) 2월에 상복(常服)의 부속 관(冠)으로 제정된 후 1900년(광무 4) 문관복이 양복으로 바뀔 때까지 조신들의 공식복장에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모는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엮어 2층으로 모체를 턱이 지게 만들고, 흑칠을 한 후 위에 가는 비단실로 짠 흑사포(黑紗布)를 발랐다. 경각의 날개는 앞쪽으로 약간 굽어 있는 형상인데, 대나무나 철사로 윤곽을 잡고 공간은 무문(無紋) 또는 유문(有紋)의 흑사포로 채웠다. 오늘날에는 한식 혼례 때, 신랑이 예모로 착용하며, 사모관대란 신랑의 정식예장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갓 >>>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관모.
기본적으로는 방립형(方笠型) ·평량자형(平凉子型)의 2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용구로서
입형(笠形) 관모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나중에 재료 ·수식(修飾) ·제작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조선시대에 여러 종류의
갓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 흑립(黑笠)은 갓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마지막에 정립된 입제(笠制)로서, 조선시대 500년을 이어오는 대표적
관모이다. 따라서 갓이란 광의로는 방립형 ·평량자형에 해당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협의로는 흑립을 지칭하는 것으로, 후세의 ‘갓’이란
흑립을 말한다.
[흑립]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관모. 그중 흑립은 마지막에 정립된 입제로서, 대표적인
관모이다.
[갓]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관모
[갓]
각부의 명칭
형태상 대우와 양태의 구분이 분명하다. 평량자 ·초립(草笠) ·흑립(黑笠) ·백립(白笠) ·전립(戰笠) 등이 이에 속한다.
⑴ 평량자:폐양자(蔽陽子) ·차양자(遮陽子) ·패랭이라고도 한다. 댓개비로 대우와 양태를 성기게 엮은 본래 색 그대로의 것이며, 평량자형 입제의 가장 초기의 것으로 모정이 둥글다. 평량자에서 초립과 흑립이 형성되어 조선시대 초부터 사서(士庶)가 착용함에 따라 평량자는 역졸 ·보부상 ·백장 등 천한 사람이나 상주만이 착용하였다.
⑵ 초립:발전 과정으로는 평량자에서 흑립(후세의 갓)으로 이행하는 중간기의 것이다. 평량자보다 대우와 양태가 분명하며, 모정도 편평하여 만든 상태로 보면 평량자보다 한층 흑립에 가까운 모양이지만 크기가 작고, 흑립의 양태가 아래로 우긋함에 비하여 초립의 양태는 위로 버드러져 올라갔다. 재료는 주로 강화에서 나는 황색초(黃色草)를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족오십죽초립(士族五十竹草笠)’ ‘서민삼십죽초립(庶民三十竹草笠)’(經國大典 禮典 雜令條)이라 하여 조선 전기에 이미 대의 정조(精粗)에 차이를 두어 사서가 같이 착용하였는데, 흑립이 일반화함에 따라 관례(冠禮)를 끝낸 소년이 흑립을 쓰기 전까지 착용하는 중간물이 되었다. 관례를 마친 나이 어린 사내를 초립동(草笠童)이라 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별감(別監)도 상복(常服)에는 황초립(黃草笠)을 착용하였고 장식으로 호수(虎鬚)를 달았다.
⑶ 흑립:평량자 ·초립 등의 단계를 밟고 마지막에 정립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입제이다. 후세에 ‘갓’ 또는 ‘입자(笠子)’라고 하면 곧 흑립을 지칭한다. 고려 말 1367년(공민왕 16) 7월 원(元)의 제도를 버리고 군신과 백성의 의관(衣冠)을 다시 정할 때 정3품 이하 외방(外方) 각 관원들이 품수에 따라 정자장식(頂子裝飾)을 달리한 흑립(이 때 흑립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으나 입첨이 있는 평량자 계통임은 분명하다)을 착용하였고, 다시 9월에는 공복(公服)에 복두(프頭) 대신 입자(笠子)를 착용하고 조알(朝謁)하였으니(高麗史志 권26), 이것이 조신(朝臣)들이 흑립을 착용한 시초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도 한때 백관 조복(朝服)에 사용한 적이 있으며(太宗實錄:태종 17년 12월, 권34), 나중에 사서의 통상 관모로 말기까지 착용되었다. 위보다 아래가 조금 더 넓은 원통형의 모자집과 아래로 우긋한 양태로 이루어졌는데, ‘싸기’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眞絲笠) ·음양사립(陰陽絲笠) ·음양립 ·포립(布笠) ·죽저모립(竹猪毛笠) ·마미립(馬尾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흑립은 시대에 따라 모체의 높이와 양태의 크기에 변화를 보인다.
⑷ 백립: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써 흑립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다시 그 위에 베를 입힌 백색의 입자이다. 백포립(白布笠)이라고도 한다. 대상(大祥)을 지낸 후 담제(앙祭)를 지내기 전까지 상인(喪人)이 쓰거나 국상 때 일반 남자가 착용하였다. 1454년(단종 2) 12월 모든 벼슬아치들은 백립을 착용하고 궐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음력 3월에도 대소행행(大小行幸) 때 시위인원(호위병)의 백립 착용을 금하였다. 1469년(예종 1)에도 일반의 백립 착용을 일절 금지하고, 반면에 국상 때의 착용은 허락하였으니, 이로 보면 조선 전기에는 평상시 백립을 착용하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대체로 예종(睿宗) 이후는 상용(喪用)으로 용도가 한정되었다.
⑸ 전립:짐승의 털을 다져서 담(았)을 만들고, 그것을 골에 넣어 위는 높고 둥글며, 전이 편평하고넓게 되어 있는 쓰개이다. 원래는 호족(胡族) 계통의 것인데, 한국에서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실록》에는 1499년(연산군 5) 7월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에게 내린 단자(單子) 중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후 군한(軍漢)이 많이 사용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무인은 물론이고 사대부도 착용하여 한때 군민 공용의 입모(笠帽)가 된 적도 있다.
전립(氈笠) ·모립(毛笠)이라고도 함은 재료가 모제품인 데서 비롯된 것이며, 널리 사용된 명칭은 전립(戰笠)인 바, 군인의 입자임을 가리킨다. 특히 품등이 높은 무신이 쓰는 전립은 품질이 좋은 모제품으로 만들었는데, 둥근 모자집 꼭대기에 금 ·은으로 만든 증자(蚤子)를 직품에 맞게 달고, 여기에 다시 보라색 공작미(孔雀尾), 빨간색 상모(象毛, 刻毛) 등을 달아맨 끈을 고리로 연결하였다. 모자집 밑부분에는 양 옆에 매미 모양의 밀화(蜜花)를 달고 밀화 갓끈[纓]을 달았다.
특히 양태 안쪽에 남색 운문단(雲紋緞)으로 안을 올렸는데, 때문에 ‘안올림 벙거지’라고도 하였다. 모제품의 전립(모체는 검정색)을 본으로 하여 붉은 전(氈)으로 만들고, 증자에 청전우(靑轉羽)를 단 홍전립과 주전립이 있어 군뢰(軍牢)가 군장(軍裝)할 때에 착용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 이후 모체를 댓개비나 말갈기를 사용해 만든 죽전립(竹戰笠)이 있었다.
전고종 갓 傳高宗- >>>조선 후기 고종이 사용하였다는 갓.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45호
지정연도 : 1979년 1월 23일
소장 :
세종대학교
소재지 : 서울 광진구 군자동 산2번지
시대 : 조선 후기
크기 : 1점
면적 :
분류 :
복식
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햇빛이나 비를 가릴 때 쓰던 관모(冠帽)로 기법이 정교하여 진사립(眞絲笠)으로 보인다. 진사립은 죽사(竹絲: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를 재료로 대우와 양태를 4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씩 입혀 옻칠한 것으로 극상품이다.
모정(帽頂)의 정 부분에 임금의 신분을 알려주는 4마리의 박쥐무늬와 4개의 구름무늬가 촉사로 촘촘히 짜여져 있다. 은각 부분에는 눈에 잘 띄지 않게 박쥐무늬가 짜여져 있다. 둥근 모양과 봉 모양의 밀화를 교대로 꿰어 갓끈을 만들었고 갓끈 가운데 부분에 납작한 원통 모양의 밀화로 장식되었다.
전립 戰笠 >>> 조선시대 융복(戎服) 또는 구군복(具軍服)에 병용한 갓.
모립(毛笠)이라고도 한다. 무신이 착용할 때는 품계(品階)에 따라 장식이 달랐다. 대관(大官) 전립에는 공작미(孔雀尾)·삭모(刻毛)·옥로(玉鷺)를 달고 양태(凉太) 안쪽은 운문단(雲紋緞)으로 꾸민다. 이러한 전립을 안울림벙거지라고도 부르며 끈에는 밀화패영(密花貝纓)을 단다.
죽전립 竹戰笠 >>> 대오리로 엮어서 만든 전립.
전립에는 모전립(毛氈笠)과 죽전립이 있으며, 무신(武臣)은 대관(大官)까지 전립을 착용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보면 왕의 행행(行幸) 때 호종하는 승(承) ·사(史) ·각신(閣臣) ·문장신(文將臣) ·문총관(文摠管)은 죽전립을 착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모전립이 정식이라 하여 모전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속칭 ‘패랭이’라고 하는 평량자(平凉子)도 죽전립의 일종이나, 평량자는 나중에 상인(喪人)과 보부상 ·역졸 등의 관모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남성들이 외출할 때 가장 위에 입는 겉옷인 두루마기와 머리에는 갓을 쓰고 있다.
삿갓 >>> 갈대나 대오리로 거칠게 엮어 비나 볕을 가리기 위하여 쓴 갓.
노립(蘆笠) ·사립(加笠) ·두봉(斗핸)이라고도 한다. 원료가 흔하여 값이 싸고,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으므로 대개 농군들이 많이 사용하여 농립(農笠)이라고도 하였다. 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내외를 하기 위한 삿갓은 더 크고 깊게 만들어 썼다. 중앙이 뾰족하게 위로 솟고 둘레는 둥글거나 6각으로 만들어 아래로 숙이게 하여 얼굴을 덮어 가리고 속에 미사리를 넣어서 머리에 쓰기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비올 때나 여름철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쓰는 모자로 대나무나 질이 좋은 갈대로 만든다
망건 網巾 >>>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른 운두 10cm 가량의 그물처럼 생긴 물건.
정식 관(冠)의 밑받침 구실도 하였다. 말총을 엮어 만들고(馬尾網巾), 곱소리(가늘고 부드러운 코끼리의 꼬리털), 머리카락으로도 만든다. 신분에 따라 망건에 달린 관자(貫子:망건고리)와 풍잠(風簪)의 재료가 달랐다. 망건은 중국에서 당(唐)나라 때부터 사용하여 명(明)나라 때에는 일반화되었다. 처음에는 실[絲]을 엮어 만들었고 나중에는 실 대신 말총을 썼다.
한국에서는 1419년(세종 2) 명나라 사신에게 마미망건(馬尾網巾)을 준 사실이 있고, 1451년(문종 2)에 재료로 말총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 《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488년(성종 19) 사신으로 온 명나라의 동월(董越)도 그의 《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의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한국에서는 조선 초에 말총으로 만든 망건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망건은 형태가 감투와 비슷하고 꼭대기에 구멍이 있어 그곳으로 상투가 나온다. 용도도 한국의 것과는 달리 염발(斂髮:머리를 쪽찌거나 틀어올림)과 함께 관의 용도를 겸하였다고 한다.
망건은 망건당 ·망건편자 ·망건앞 ·망건뒤의 4부분으로 구분된다.
① 망건당:말총으로 고를 맺어 두른 망건의 윗부분이다.
② 망건편자:망건을 졸라매기 위하여 말총으로 띠처럼 굵게 짠 망건의 아랫부분이다.
③ 망건앞:앞싸개라고도 하는, 이마에 대는 부분으로 그물처럼 성기게 얽어 만든다.
④ 망건뒤:말총으로 촘촘히 얽어맨 망건의 양 끝으로 뒤통수를 감싸는 부분이다. 망건의 사용법은 먼저 망건당에 걸린 윗당줄로 뒤에서 머리를 졸라 상투에 잡아맨다. 편자 끝에 달린 아랫당줄은 뒤에서 서로 엇바꿔 좌우 관자에 꿰어 내린 후 다시 망건 뒤로 가져가 좌우를 엇결어 매고, 두 끝을 상투 앞으로 가져다 동여맨 다음 상투에 동곳을 꽂는다.
〈부속물〉 ① 관자:망건의 아랫당줄을 꿰는 지름 1.2cm 내외의 고리. 편자의 귀 부근에 달려 있고 관품에 따라 재료 ·새김장식이 다르다. 1품은 조각 없는 질이 좋고 작은 옥관자(민옥관자 ·도리옥이라 함), 정2품은 조각 없는 소형 금관자(도리금), 종2품은 조각한 대형 금관자, 정3품은 조각한 대형 옥관자이다. 그 밖에 대모(玳瑁:거북이 등딱지) ·마노 ·호박 ·골 ·각 등으로도 만들었다. 조각한 무늬는 주로 화(花) ·죽(竹) ·연(蓮) 등이다.
② 풍잠(風簪):망건의 당 중앙을 꾸미는 장식품으로 갓을 고정하는 구실을 한다. 갓모자가 풍잠에 걸려 바람이 불어도 갓이 뒤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상류층에서는 대모 ·마노 ·호박 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은 골 ·각을 사용하였다.
〈망건장〉 망건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하였다.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른 운두 10cm 가량의 그물처럼 생긴 물건을 망건이라고 하며, 망건을 넣어 두는 곳을 망건집이라고 한다.
옥관자 玉貫子 >>>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가 쓴 옥(玉)으로 만든 망건(網巾)의 관자.
종1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것은 조각을 하지 않고, 정3품 이상 정2품까지의 당상(堂上)의 것은 조각을 하였다.
정3품의 당하관에서 같은 정3품의 당상관이 되면 전에 흑각(黑角)을 쓰던 망건의 관자를 옥으로 바꾸어 영귀(榮貴)의 표상(表象)으로 삼고, 공사간(公私間)에 영감(令監)이란 경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당하관(堂下官)과 당상관의 차등을 엄격히 구분하기 위한 제도이다.
건 巾 >>> 관모(冠帽)의 원시 형태로서 헝겊 등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물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민서(民庶)는 조건(輩巾)을, 진사(進士)는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농상(農商)은 오건사대(烏巾四帶)를, 정리(丁吏)는 문라두건(文羅頭巾)을, 공기(工技)는 조건을, 방자(房子)는 문라두건을, 민장(民長)은 문라건을, 구사(驅使)는 오건(烏巾)을 썼다고 되어 있고, 국관(國官) ·귀인(貴人)도 사가(私家)에서는 양대(兩帶)의 두건을 착용한다 하였으니, 국관 ·귀인과 이민(吏民)은 건에 달린 대(帶)에 차이를 두어 두루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에는 또 “남자의 건책(巾汕)은 당제(唐制)를 조금 모방하였다” 하였으니, 당건(唐巾)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건의 종류가 다양하였는데 궐내의 말직(末職)에서 쓰는 자건(紫巾) ·청건(靑巾) ·조건과, 유생(儒生)들의 유건(儒巾) ·복건(幅巾), 상인(喪人)들이 쓰는 두건 ·굴건(屈巾), 서리(書吏)의 평정건(平頂巾) 등이 있었다.
【자건 ·청건 ·조건】 대궐의 하리(下吏)들이 착용하였으며, 소속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별감(別監)은 자건, 세자궁(世子宮)은 청건, 인로(引路)는 자건, 나장(羅將) ·조례(輩隷)는 조건을 썼다고 하였고, 《속대전(續大典)》에는 “별감은 자건, 세자궁 ·빈궁은 조건, 수복(守僕)은 조건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다.
【유건】 유생인 생원 ·학생 ·사인(士人)들이 관중(館中)에서 착용했다. 검은 베[緇布]로 만든 것으로,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것은 대나무로 결어 검은 베로 싸거나 종이를 덧붙이고 칠을 하여, 모습이 단정하고 뾰족하지도 않다. 조선시대의 유건형태는 중국의 것과 비슷하며, 대부분 흑저(黑紵)로 접어 만들었다.
【복건】 명제(明制) 유생복(儒生服)의 ‘조조연건수대(輩魄軟巾垂帶)’를 본떠 조선 전기에 치포건(緇布巾:검은 베로 만든 건)이라 하여 학생들의 관으로 제정된 것이다. 검은 색 비단 6척을 가지고 키 모양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고 드림은 뒤로 늘어뜨린 다음, 위는 둥글고 뾰족하게 만들면서 양 옆(귀 부분)의 끈으로 귀를 거쳐 뒤통수를 잡아맨다. 원래는 중국 고대로부터 관을 대신하는 간편한 쓰개였는데, 후한(後漢) 때부터 유행하고 진(晉) ·당(唐)에 걸쳐 은사(隱士) ·도인(道人)의 것이 되었으며, 송(宋)나라 때에는 유생들 사이에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모습이 괴상하였기 때문에 일반화되지 못하고 극소수의 유생들만이 썼다. 주로 미혼 남자가 통상 예복에 사용하였고, 지금은 어린 사내아이가 명절이나 돌, 기타 경사스러운 날에 쾌자(전복)와 함께 쓰는 것이 상례이다.
[복건](전면) 진사복 또는
유복에 갖추어서 쓴 남자들의
쓰개.
복건(후면)
진사복 또는 유복에 갖추어서 쓴 남자들의 쓰개.
【두건】 남자 상제나 어른이 된 복인(服人)이 상중(喪中)에 착용하는 베로 만든 건이다. 효건(孝巾)이라고도 한다. 긴 네모꼴의 천을 반으로 접어 솔기가 뒤 중심에 오도록 꿰매어 붙인 다음, 양 옆에 주름을 잡아 넣고 다시 위를 꿰맨 긴 네모꼴의 자루 모양이다.
【굴건】 상주(喪主)가 두건 위에 쓰는 건이다. 손가락 셋 정도 나비의 베오리를 세 솔기지게 하고, 뒷면에 종이를 덧붙여 만든다. 위에는
수질(首批:짚에 삼껍질을 감은 둥근 테)을 눌러 쓴다.
[굴건]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
【평정건】 서리(書吏) ·녹사(錄事)들이 착용한 건이다. 파리머리라고도 한다. 고려 말, 명(明)나라의 ‘사방평정건(四方平頂巾)’에서 유래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 명제(明制)에 따른 의관 개혁 때, 성균생원(成均生員) ·경외학생(京外學生) ·권무(權務) ·무직사인(無職士人) ·제사서리(諸司胥吏)의 관으로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명사(明史)》 <여복지(輿服志)> 중의 “1370년(洪武 3) 유생 ·생원 ·감생(監生) 건복(巾服):사방평정건” 및 “1391년 사자건복(士子巾服) 무이이서(無異吏胥)”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재학생은 치포건으로, 서리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 녹사는 무각평정건(無角平頂巾)이었다가 《경국대전》 이후 《속대전》에는 다시 오사모(烏紗帽)로 바뀜으로써 말기에는 서리 계급만 착용하였다. 검정 무명 2겹 사이에 심을 넣어 빳빳하게 한 형태로, 모정(帽頂)은 편평하나 앞쪽으로 약간 비스듬하며 각이 져 있다.
호건 虎巾 >>> 돌쟁이부터 5∼6세까지의 사내 아이가 머리에 쓴 건.
모양은 복건과 거의 같으나 다른 점은 복건의 머리부분에 호랑이 모습을 수놓은 것이다. 머리부분에 호랑이의 눈 ·눈썹 ·수염 ·이빨을 수놓고 귀는 검정과 붉은색 감으로 만들어 붙였다. 머리부분 아래에는 길상어문(吉祥語文)을 금박으로 새겨 기원을 나타내고 있다. 호랑이 머리부분에 끈이 달려 있어 머리 뒤로 묶게 되어 있다. 재료는 검정 사(紗)이며 남색 사로 안을 받쳐 색의 조화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의 관모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벽화 ·문헌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건(巾):건은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감싸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오래 사용한 소박한 쓰개이다. 건은 원래 중국 고대의 학자나 문인, 관직을 떠난 사람이 주로 착용한 쓰개로 한폭의 옷감을 주머니처럼 만든 형태이다. 남자가 20세 성인이 되면 관리는 모두 관을 썼지만 일반 서민도 관 대신 건을 사용하였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일반 남자들이 검은 헝겊을 머리에 둘러서 뒤로 매어 늘어뜨린 모양의 건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⑵ 책(汕):책은 건에서 출발한 두건 형태이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한국의 책은 대개 윗 부분이 없고 목에서 매어 고정시키며 중국의 책과 달리 후두부의 수식포(垂飾布)인 수(收)가 없는 형태이다. 책은 고구려 때 일반용 두건이 아니라 절풍(折風)보다 상위계급의 관모였다.
⑶ 절풍 ·소골(蘇骨):절풍은 변(弁) 모양의 관모이다. 즉 모자의 끝이 뾰죽한 원뿔 모양의 관모로 변의 우리말인 고깔과 같은 형으로 생각된다. 절풍은 고구려에서 일반이 썼는데 사인(士人)은 여기에 2개의 조우(鳥羽)를 장식하였다. 소골은 고구려에서 귀인이 쓴 모자로 절풍과 같은 원뿔 모양의 관모지만 자라(紫羅)로 만든 것이 특징이며 귀인이 흔히 사용했다. 절풍 ·소골 등과 같은 고깔 모양의 관모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에서도 사용한 한국 고유의 관모의 기본 형태이다.
⑷ 조우관(鳥羽冠):조우관은 절풍 ·소골 등의 고깔 모양의 관모에 새깃[鳥羽]을 장식한 것이다. 이것은 수렵시대의 유풍으로 북방 유라시아 기마민족이 옛날부터 쓴 관모이다. 금속제 조우관이나 조우장식은 자연물을 장식하는 원시단계에서 변천된 것으로 귀족계급의 쓰개였다.
⑸ 금관(金冠):금관은 관모에 자연물을 장식하던 풍습이 변천한 것으로 본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내관은 변형모(弁形帽)의 형태이며 외관은 대륜(臺輪)에 입식(立飾)을 장식한 통수식(統首式) 관으로 내관과 외관이 하나의 관을 이룬다. 경주 금관총 등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뿐만 아니라, 관장식으로 사용된 진파리의 금제 관장식, 당서(唐書)에 기록된 것과 같은 무녕왕릉의 금화(金花) 등 삼국시대의 화려한 문양의 관을 통하여 삼국이 서로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⑹ 입(笠):입은 한국 고유의 관모 형태이다. 더위와 비를 막는 실용적인 용도에서 서민 계층에서 썼다. 한국의 입에는 방립(方笠) 계통과 폐량립(蔽陽笠) 계통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인물은 대우와 차양이 있는 폐량립과 삿갓같은 방립계통의 나제립(羅濟笠)을 쓰고 있다. 방립은 전통을 고수하는 승려와 농민의 ‘삿갓’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며, 폐량립은 평량자(平凉子), 흑립(黑笠) 등으로 조선시대에 이어졌다.
⑺ 건귁:당서와 고구려 벽화를 통하여 부녀자들은 건귁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녀자들이 일할 때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머리수건을 둘러 맨 것이다.
⑻ 기타:여자용 쓰개로는 삼국시대 통용된 건귁뿐만 아니라,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금제관장식(금관)으로 왕실, 귀족계급의 관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흥덕왕 복식제도에 나오는 진골녀와 육두품녀만이 쓸 수 있는 관모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화관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데 여자가 혼례 때 활옷을 입고 머리에 쓰는 화관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한 흥덕왕 복식제도에 진골녀의 슬슬전(瑟瑟鈿)을 금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당시에 여왕 ·왕비 ·진골녀가 슬슬전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머리에 장식하는 화잠(花簪)의 하나로 슬슬은 페르시아어 ‘세세(sese)’에서 온 말로 세세는 에메랄드를 뜻한다.
[금관의 부분 명칭] |
[금관] |
[서봉총금관] |
[황남대총 북분 금관수하식]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191호. 신라 5세기. 경주 황남대총 출토. |
[가야 금관] |
[양관] |
금량관 金梁冠 >>> 조선시대에 문무신이 조복(朝服)을 입을 때 쓴 관.
징두리의 앞이마 위의 양(梁)만 검은 빛으로 두르고
나머지는 모두 금빛으로 만들었다. 품계에 따라 양의 수가 달랐는데, 1품관은 5량, 2품관은 4량, 3품관은 3량, 4품∼6품은 2량,
7품∼9품은 1량이었다.
원유관 遠遊冠 >>>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임금이 조하(朝賀) 때 쓰던 관.
검은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아홉 양(梁)의 앞뒤에 5색으로 된 아홉 개의 옥을 붙이고 금잠(金簪:비녀)과 주뉴(朱紐:옥으로 만든 붉은 단추)를 갖추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복식을 버리고 명나라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낸 이듬해인 1370년(공민왕 19)에 명 태조가 처음으로 공민왕에게 면복(冕服)과 함께 원유관을 보내왔고, 조선시대에도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통천관 通天冠 >>> 임금이 정무(政務)를 보거나 조칙을 내릴 때 쓰던 관.
오사모(烏紗帽)와 비슷하면서 앞 뒤에 각 12솔기가 있고 청 ·황 ·홍 ·백 ·흑의 5색 구슬을 12개씩 꿰어달고 홍영(紅纓)에 옥잠(玉簪)을 꽂았다. 통천관을 쓸 때는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하였다.
적관 翟冠 >>> 왕비의 예복에 착용한 관모.
원래 중국의 관제(冠制)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조선 태종(太宗) 3년(1403)이며, 명(明)나라에서 왕비 법복(法服)과 함께 칠적관(七翟冠)이 들어왔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로는 착용하지 않았고, 1897년(광무 1) 관복을 제정할 때 황비 예복에 구적관(舊翟冠)을 착용하도록 한 바 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유물이 없으므로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수식(修飾)을 보면 호화 찬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충정관 沖正冠 >>> 조선시대 사대부가 집에서 평상시에 쓴 관.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7년 공경(公卿)과 고관(高官)이 연거복에 착용하도록 창안한 것으로 충정관(忠靜冠 ·忠靖冠)이라고도 쓴다. 한국에서는 조선 예종 때 관례 전 세자의 두건으로 언급이 되었으나, 예관(禮冠)이 아니므로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널리 사용되었으며 말총으로 만들었다. 형태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방건(方巾) 모양의 충정건(沖正巾) ·양관(梁冠)과 비슷한 충정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립 戰笠 >>> 조선시대 융복(戎服) 또는 구군복(具軍服)에 병용한 갓.
모립(毛笠)이라고도 한다. 무신이 착용할 때는 품계(品階)에 따라 장식이 달랐다. 대관(大官) 전립에는 공작미(孔雀尾)·삭모(刻毛)·옥로(玉鷺)를 달고 양태(凉太) 안쪽은 운문단(雲紋緞)으로 꾸민다. 이러한 전립을 안울림벙거지라고도 부르며 끈에는 밀화패영(密花貝纓)을 단다.
죽전립 竹戰笠 >>> 대오리로 엮어서 만든 전립.
전립에는 모전립(毛氈笠)과 죽전립이 있으며, 무신(武臣)은 대관(大官)까지 전립을 착용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보면 왕의 행행(行幸) 때 호종하는 승(承) ·사(史) ·각신(閣臣) ·문장신(文將臣) ·문총관(文摠管)은 죽전립을 착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모전립이 정식이라 하여 모전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속칭 ‘패랭이’라고 하는 평량자(平凉子)도 죽전립의 일종이나, 평량자는 나중에 상인(喪人)과 보부상 ·역졸 등의 관모가 되었다.
족두리 >>> 의식 때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관(冠).
족아(簇兒) ·족관(簇冠)이라고도 한다.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아래는 둥근 원통형이고 위는 분명하지 않게 6모가 졌으며, 솜이 들어 있고 가운데를 비워서 머리 위에 얹는다. 쓴다기보다는 얹어놓고 비녀를 질러 고정한다. 최남선(崔南善)의 《고사통(故事通)》에 “의식용 복식은 몽골풍[蒙古風]을 가장 많이 가미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자의 예장에 쓰는 족두리는 몽골에서 사부녀(士夫女)가 외출할 때 쓰는 모자이고, 신부 복식으로 산호주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는 몽골 기혼녀의 두식(頭飾)으로 쓰는 도톨이라 하는 것이며…”라 하여 족두리가 몽골풍의 것임을 말해준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동국부녀수식변증설(東國婦女首飾辯證說)>에서 보면, “고려사(高麗史)에 원(元)에서 왕비에게 고고리(古古里)를 사(賜)하니, 즉 관명(冠名)으로 세상에 전하는 지금의 족두리(簇頭里)는 고고리의 음에 가까워 와전된 것이 아닌가 보며, 칠보로 된 화관(花冠) ·운관(雲冠)의 제(制)가 있다”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족두리는 고려 후기 이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와 홍봉한(洪鳳漢) 등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보면, “조극선(趙克善)이 말하기를 족두리는 광해군(光海君) 중년부터 모두 현금(玄錦)으로 거죽을 하고 자주[紫]로 안을 하였으며, 속은 비었고 머리 위에 올려 썼는데 한때 좋아하여 국속(國俗)으로 변했다” 하였으니, 광해군 때에 이미 사용한 것이 영조(英祖) ·정조(正祖) 때에 가체(加渲)를 금지하고 족두리 사용을 장려하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
검소한 생활을 위하여 장려한 족두리에도 화관과 같이 지나치게 많은 패물을 장식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족두리에 아무 장식이 없이 검은 비단으로만 된 것을 ‘민족두리’라 하였고, 옥판(玉板)을 밑에 받치고 산호수와 밀화구슬 ·진주를 꿰어 만든 것을 ‘꾸민 족두리’라 하였다. 어여머리의 밑받침으로 쓰는 것으로 솜을 채워 부피를 크게 만든 ‘어염족두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모로서의 족두리는 아니다.
화관 花冠 >>> 부녀자의 예장용 관(冠).
대궐에서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양반집에서는 혼례 때나 경사 때에 대례복(大禮服) 또는 소례복(小禮服)에 병용하였다. 옛날에는 궁중 내연(內宴)에서 기녀 ·동기(童妓) ·무녀(舞女) ·여령(女伶)들이 썼으며, 모양이 약간씩 달랐는데, 대체로 5색 구슬로 장식하고 날고 있는 나비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댕기 >>> 머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한 자줏빛 ·검은빛의 헝겊.
좁은 뜻으로는 미혼자의 땋은머리 끝에 드린 헝겊을 가리킨다. 헝겊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습속은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에 “여자는 아름다운 머리 띠를 머리에 둘러 아름다운 구슬과 빛깔 좋은 비단[珠綵]으로 장식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댕기는 용도에 따라서 쪽댕기 ·큰댕기 ·앞댕기 ·도투락댕기 ·말뚝댕기 ·제비부리댕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쪽댕기:쪽찐머리를 곱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댕기이다. 젊은 사람은 빨강, 나이든 사람은 자주, 과부는 검정, 상제는 흰색이었다. 얹은머리의 자적댕기, 의식 때의 큰머리 ·어여머리를 할 때의 매개댕기도 쪽댕기에 속한다. 매개댕기는 자줏빛 명주에 솜을 넣어 길고 통통한 끈처럼 만든 댕기이다.
② 큰댕기:궁중 ·양반집에서 신부가 예장할 때에 사용하는 댕기이며 도투락댕기라고도 한다. 짙은 자줏빛 비단이나 사(紗)로 만들어 뒤에 길게 늘이기 때문에 뒷댕기 ·주렴(朱簾)이라고도 한다. 나비는 10 cm 정도로 두 갈래이며, 윗부분은 삼각형으로 붙어 있고, 길이는 치마 길이보다 약간 짧다. 전체에 금박을 박아 화려하며, 위에는 석웅황(石雄黃)과 옥판을 달고 밑에는 석웅황 ·밀화(蜜花) 등으로 만든 매미를 5마리 정도 달아 두 갈래의 댕기를 연결하였다. 경기 이외의 남쪽이나 북쪽 지방에서는 금박 대신 비단색실로 장식하고 칠보꽃을 화려하게 둘레에 돌려 붙이기도 하였다. 북서 지방에서 혼례에 사용하였다는 고이댕기도 큰댕기의 일종이다.
③ 앞댕기:혼례 때 큰댕기와 짝을 이루어 양쪽 어깨 위에서 앞으로 늘이는 댕기이다. 큰 비녀의 양쪽 여유분에 적당한 길이로 맞추어 감아 양 어깨 위에 드리운다. 나비는 5 cm 내외이며 금박을 박았고 양끝에는 진주 ·산호주 장식을 하였다.
[도투락댕기]④ 도투락댕기:혼례 때에 신부가 드리는 큰댕기를 지칭하기도 하나,
흔히 그와 형태가 같은 소형의 어린이용 댕기를 일컫는 예가 많다. 긴 직사각형의 댕기를 2폭이 나란하도록 반으로 접되, 접힌 위가 세모꼴이 되게
한다. 여기에 조그마한 끈을 달아 머리가 채 자라지 않은 어린이의 뒤통수에 바짝 달아맨다.
⑤ 말뚝댕기:어린이용 댕기로, 도투락댕기를 맬 시기는 지나고 제비부리댕기를 드리기에는 아직 이른 때에 사용하였다. 긴 직사각형의 댕기를 반으로 겹쳐 접어 윗부분에 끝을 달아 뒤통수에 달아맨다. 도투락댕기와는 달리 반으로 접힌 윗부분이 네모꼴이다.
⑥ 제비부리댕기:미혼자의 땋은머리에 드리는 댕기이다. 처녀들은 빨강, 총각은 검정을 사용하였는데 크기는 연령에 따라 다르다. 말뚝댕기 다음 시기에 사용하였으며 처녀들의 댕기는 화려하게 금박을 박았다.
쓰개 (headgear) >>> 한서(寒暑)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 맵시를 내주며 때로는 신분을 표현하거나 감추기 위해 머리에 쓰는 물건의 총칭.
기원은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일정한 형을 갖춘 것과 손수건 같은 것을 자유로운 착장법(着裝法)으로 쓰는 것 등이 있다. 또 사용법은 머리 위에 얹는 것, 머리에 감는 것, 머리로부터 얼굴을 싸는 것, 머리로부터 상체까지를 덮는 것 등이 있으며, 또 단독으로 착장되는 것과 다른 쓰개에 병용되는 것도 있다.
재료로는 주로 포백(布帛:베와 비단) ·종이류 ·피혁 ·밀짚 등이 쓰이고, 그의 제작법으로는 재봉 ·편성 ·형만들기 등의 여러 방법이 있고, 옻칠을 하거나 기름을 바르는 등 여러 가지 손질을 해서 만들므로 종류는 고금을 통해서 수없이 많다.
【서양】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어의 헤드기어(headgear), 헤드드레스(headdress) 등의 용어가 쓰인다. 복장 중에서 가장 자유롭게 조형되는 것으로서 그 형(形)과 종류가 다종다양한데, 대체로 크라운(crown, 冠) ·베일(veil) · 후드(hood) ·캡(cap:브림이 없는 소형의 모자) ·해트(hat:브림이 있는 모자) ·보닛(bonnet) 등의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쓰개의 연혁 >>>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남녀가 머리를 짧게 깎아 밀고 그 위에 매를
상징하는 바구니 같은 모양의 쓰개를 썼는데, 쓰개의 뼈대 사이에 털을 달아 머리와의 사이에 공간이 뜨게 하여 통풍이 잘 되게 하였다. 왕족의
경우에는 그 위에 신분을 나타내는 관을 썼으나 일반인들은 두건을 쓰고 천을 머리에 얹어서 끈으로 동여매기도 했다.
그리스시대 초기, 여성들은 머리를 길게 땋아 머리 뒤에 묶거나 리본 또는 금속제의 끈으로 감아올리고 그 위에 삼각형의 작은 캡을 쓰거나 넓은 천으로 머리를 싸게 되어 있었는데, 이 형태는 로마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여행자들이 햇빛 가리개로 사용한 페테소스(petesos:크라운이 낮고 브림이 넓은 밀짚모자)와 펠트로 만든 모자가 해트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서 4세기 그리스도교시대에 이르면서 여성들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는데, 상류계급은 관을 쓰고 일반인은 베일을 쓰게 되어 비잔틴시대는 베일의 시대가 되었다.
12세기에는 늘어뜨리는 머리형이 없어지고 다시 감아 올렸는데, 흰 천으로 턱을 가리고 핀으로 징근 위에 베일이나 캡을 썼다. 13세기에 이 형은 더 많이 유행해서 고젯(gorget)이라는 천으로 턱에서부터 이마까지를 싸고 코이프(coif)라는 납작하고 둥근 모자를 썼다. 이 형태는 현재 가톨릭 수녀에게서 볼 수 있다. 중세 후반에는 쓰개가 매우 커져서 헤닌(hennin)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15세기의 여성용 삼각형 모자였는데, 머리카락 전체를 집어넣어 핀으로 고정하고, 신분이 높을수록 길어서 1m 이상 되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벨벳으로 겉이 장식되고 끝에는 베일이 달려 있었다.
한편 12∼16세기에 걸쳐 사용된 남자의 쓰개는 거의 샤프롱(chaperon)이라는 두건인데 이것은 중세기 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천하며 여성의 모자형과 경쟁하는 듯했으나 르네상스에 와서 자연스러운 모양이 되었고, 복장에서의 악센트가 깃과 소매로 옮겨졌다. 16세기 말, 에스파냐 문화의 영향으로 모자다운 모자가 쓰이면서 남녀간에 토크(toque)가 유행되었다. 이것은 검정 벨벳제로 가느다란 금속제 테두리와 깃털 장식이 있는 모자로 프랑스에서도 썼으며 차차 챙이 넓어지고 남녀용으로 발달해갔다.
17세기 말에는 여성용 캡이 나타나고 루이 13세 때에는 남녀가 가발을 달고, 특히 여성의 큰 머리형 때문에 컬래시(calash)라는 모자가 탄생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거추장스러운 유행은 사라지고 여성들은 보닛을 썼는데, 19세기에는 남녀가 모두 경쾌한 모자를 즐겨 써서 현재에 이른다.
쓰개의 종류 >>> 쓰개의 종류를 살펴본다.
⑴ 각 지방의 쓰개:쓰개는 기후 ·풍토 ·생활습관 ·생산물 등에 따라 종류와 형상이 각양각색이다. 쓰개를 사용하는 목적은 장식성과 생리적 욕구, 종교적 관습 등에서 비롯된다. 특이한 것은 새의 깃털이나 아름다운 꽃을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에 장식하는 것으로, 미개인일수록 이와 같은 종류를 많이 쓰는데, 깃털 장식이 달린 인디언의 쓰개는 인상적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양산과 우산이 쓰개로서 발달되어 사용되고 있다.
⑵ 아바(abah, aba):사각형의 두건이 달린 망토(manteau)의 하나로 이라크 여성의 외출복이다. 머리까지 전체적으로 덮어 쓰고 눈 부분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레이스로 장식해서 시야만 가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견직의 아바는 상류계급에서 입으며 이슬람교 여인들이 사용한 종교적인 민속의상이라 하겠다.
⑶ 야슈마크(yashmak):이슬람교도 여성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쓰는 베일이다. 얼굴을 싸고 눈만 내놓도록 되어 있으며, 폭은 좁고 길이가 긴 두 겹의 흰 천으로 되어 있다.
⑷ 터번(turban):이슬람교도 남자들의 쓰개인데, 긴 천을 머리에 감아 천 끝을 속으로 넣든가 뒤로 늘이게 되어 있고 귀부인 앞에서도 벗는 일이 없다.
⑸ 사리(sari:saree):인도의 힌두교도 여성의 의상으로 큰 천을 허리에서 어깨로 감아 남는 천을 머리에 쓰는 쓰개의 일종이다.
⑹ 만티야(mantilla):에스파냐 ·멕시코 ·이탈리아의 일부 지방 여성들이 사용한 베일과 비슷한 레이스의 쓰개로서, 얼굴만 내놓고 어깨 뒤로 늘어뜨려 착용한다. 17세기 이후 에스파냐 상류여성들이 의례적으로 쓴 것을 전승해 온 것으로, 18∼19세기에는 에스파냐의 상류여성들이 외출시 망토로 입었고, 레이스 ·견직 ·벨벳으로 만들었다.
⑺ 커치프(kerchief):어원은 머리를 덮는다는 뜻의 프랑스어인데, 장식효과를 위하여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사각형의 큰 천이다. 행커치프(handkerchief) ·네커치프(neckerchief) ·헤드커치프(headkerchief) 등이 있다. 용도에 따라 면 ·마 ·견 등으로 만들며 프린트 무늬, 줄무늬의 것, 자수한 것 등이 액세서리용으로 사용되나, 보통 실용적인 천으로 만들어 유럽에서는 지방색 풍부한 농민들이 복장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쓰개 >>>
한국 관모(冠帽)의 형태는 머리의 모양을 먼저 고려하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고구려의 고분(角溟塚)
벽화를 통해 역사(力士)의 머리가 근래까지 볼 수 있었던 상투의 형태이며, 관모는 이 상투가 들어갈 용기인 동시에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효과와
신분을 표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관모의 원시 형태는 건(巾)인데 이것은 상투를 틀고 머리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감싸주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 된 소박한 두식이었다. <여인의 쓰개> 적관(翟冠) ·화관(花冠) ·족두리를 비롯하여 각종 난모(暖帽)를 포함한 관모류와
입모 ·너울[羅兀] ·쓰개치마 ·장옷[長衣] ·처네[薦衣] ·수파(首캔)에 이르기까지 머리에 쓰는 것을 말한다.
적관이나 화관 ·족두리는 예장(禮裝)에 속하는 것이며, 각종 관모는 방한용이고, 입모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처네 등은 내외법이 심한 당시 얼굴을 가리기 위한 외출용이었으며, 수파와 건귁은 머릿수건이다.
① 적관:왕비의 법복인 적의(翟衣)에 쓰던 것으로 칠적관(七翟冠)을 말하는데, 유물이 없어서 그 구조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② 장옷:두루마기와 비슷한 것으로 주로 서민이 착용하였다.
③ 쓰개치마:치마와 비슷한 것으로 반인(班人) 계급의 부녀자들만이 착용했다.
④ 처네:장옷이 변형된 것으로, 장옷보다 길이가 짧고 소매가 없다. 다홍색 겉감에 연두색 안을 받치고 솜을 두어 만들었다. 주로 서민계층이 많이 이용하였는데, 서북지방에서는 방한용으로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난모에는 아얌 ·조바위 ·풍차 ·만선두리 ·남바위 ·볼끼 ·굴레 등 여러 가지가 있어 다양하게 착용되었다.
모자 帽子 >>> 추위나 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거나 장식적 또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 머리에 쓰는 것의 총칭.
플라스틱 ·펠트 ·모직 ·밀짚 ·가죽 등으로 만들며, 크라운(crown)과 브림(brim:테)이
있는 것을 총칭하여 해트(hat)라 하고 테가 없는 것을 캡(cap)이라 한다. 그런데 영어의 해트는 때때로 캡형도 포괄하는 모자의 총칭일 때가
있으나, 캡은 해트를 포괄하지 않고 한정해서 쓰는 것이 통례이다. 모자의 종류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베레모(b暴ret):1장의
울이나 펠트로 만들었으며, 머리에 밀착되는형태이다. 원래는 프랑스 남쪽에서 남성을 위하여 검정과 감색으로 만들어 썼으나 요즈음은 스포츠용으로
쓰고 빛깔도 다양하다.
(2) 보닛(bonnet):여성 ·아동 또는 유아를 위하여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며, 뒤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감싸고 주로 턱밑에서 끈으로 매며 모자 가장자리를 러플로 장식한다.
(3) 보터(boater or straw):편평하고 둥근
크라운과 브림이 있으며, 리본으로 장식하는 밀짚모자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남성들이 보트를 탈 때 애용하였다.
(4)
볼러(bowler):둥근 크라운과 양 옆이 약간 올라간 좁은 브림이 달린 형태로서 빳빳하며 주로 검정 펠트로 만든 모자이다. 원래는 영국의
비즈니스맨이 정장차림을 할 때 쓴 것으로, 미국의 더비와 비슷하다. 1850년경 W.볼러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5) 브르통(breton):주로 머리 뒤로 쓰며, 브림이 중간에서 휘말려 올라가 얼굴이 보이도록
된 스타일이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농민이 쓰던 모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6) 세일러 해트(sailor hat):미국 해군들이 쓰는
모자인데, 주로 흰색이고, 크라운이 여러쪽의 삼각형 천으로 되어 있으며 위로 꺾인 브림에 스티치를 박은 스타일이다. 거브 해트(gob
hat)라고도 한다. 또, 여성 또는 소년들의 밀짚모자로, 편평한 크라운과 스트레이트 브림이 달린 스타일도 있다. 1820년경~1890년경까지
운동용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리본이나 밴드로 장식하였다.
(7) 와토(watteau):납작한 크라운의 밀짚모자로, 브림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쓰며, 넓은
리본으로 턱밑에다 고정시키기도 한다. 주로 화가 와토가 그린 여인의 머리 스타일 위에 썼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8)
자키(jockey or riding):둥근 크라운에다 앞에 챙이 달려 있고, 크라운은 주로 2가지 색상의 새틴을 삼각형으로 잘라서 이어붙여
만든다. 운동 경기용, 특히 기수용으로 쓴다. 1960년 중반 여성용으로 유행하였다.
(9) 줄리엣 캡(Juliet or skull
cap):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쓴 데서 연유한 모자로, 크라운이 납작하고 브림이 없으며 정수리에 얹어 쓰게 된 작은
모자이다.
(10) 카우보이 해트(cowboy hat):콘형의 높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크라운과 크고 넓은
브림이 달린 펠트 모자이다. 양 옆에서 브림이 약간 휘어 올라가고 앞이 처지며 가죽끈이나 은줄로 턱에다 고정시킨다.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얼굴에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쓴다.
(11) 클로시(cloche):크라운이 높고 브림이 없거나 아주 좁게 달렸으며, 짧은 머리일 경우 모두
감싸도록 되었으며, 거의 눈썹아래까지 눌러 쓰는 것이 특색이다. 1920년대와 1960년대에 유행한 스타일의 모자이다.
(12)
태머섄터(tam-o’-shanter):전통적인 스코틀랜드의 모자로, 2겹의 원형 모직 천으로 가운데에 주름을 잡아 볼륨 있게 만든
캡이다.
(13) 탑(top):높고 편평한 크라운과 양 옆으로 약간 휘어 올라간 좁은 브림의 남성용 모자이다. 주로 윤기가 나는 검정
실크로 만든 정장 차림의 모자이다.
(14) 터번(turban):중동 아시아나 인도에서 쓰는 터번을 모방하여 서양 여성들이 이브닝
드레스에 맞춰 쓰는 모자이다. 1930년대와 1970년대에 많이 유행하였다.
(15) 토크(toque):작고 부드럽고 브림이 없으며
주름이 많이 잡혀 있어 머리에 꼭 맞도록 되어 있다. 19세기에 이브닝 드레스를 착용할 때 함께 썼으며, 꽃이나 베일로
장식하였다.
(16) 티롤모자(tyrolean hat):부드러운 펠트 천으로 만들며, 뒤의 브림은 휘어 올라가고 앞은 약간 내려졌으며
크라운에는 리본을 두르고 옆에 깃털을 꽂아 장식한다.
(17) 파나마모자(panama hat):곱고 옅은 빛깔의 파나마풀로 만든 모자가
본래의 것이나, 오늘날은 파나마풀과 비슷한 섬유로 만든 것도 이렇게 부른다. 여름에 쓰는 남성용 모자이다. (18) 페즈(fez):크라운의
중심에 길고 검은 비단실 술이 늘어져 있는 사다리꼴의 빨간 펠트 모자인데, 터키모자라고도 한다.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썼으며, 술 없이 여성용 모자로도 쓴다. 모로코의 페스(Fez)라는 도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19) 픽처(picture):브림이
넓으며 반면 크라운이 낮고 작은 여성용 모자이다.
(20) 필박스(pillbox):브림이 없는 고전적 둥근 여성용 모자로서 아무런 장식도
달지 않는다. 둥근 약상자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1) 헤드 타이(head tie):스카프나 천으로 머리를 감싸 목 뒤에서 묶어
고정시키거나, 머리에 맞게 모자 모양으로 박은 스타일이다.
(22) 후드(hood):보닛 모양으로 부드러운 천을 박아 머리 전체를 감싸
턱밑에서 끈으로 매거나, 케이프나 코트에 달아 방한용으로 덮어쓰는 두건 모양의 모자이다.
(23) 홈버그(homburg):부드러운 펠트
천으로 크라운의 가
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좁은 브림이 휘어 올라가게 만든 스타일의 모자이다. 1870년경부터 정장 차림을 할 때 남성이 착용한 모자이다.
중산모자 中山帽子 (bowler) >>> 19세기 초 영국의 W.볼러가 처음으로 만든 모자.
더비 경마장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더비 해트(derby hat)라고도 한다. 쫀쫀한 펠트를 소재로 하여 정수리를 높고 둥글게 만들고 테의 양 옆을 약간 말아 올라가게 했다. 남녀가 승마 ·수렵 등을 할 때 썼는데, 예복에 착용할 때는 검정색을, 승마나 산책에는 회색이나 갈색을 많이 썼다
[익선관]
임금이 상복(常服:평상복)으로 갖추어 정무를 볼 때
쓰던 관.
[카우보이모자]
미국 서부의 평원이나 캐나다,멕시코 등지의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이 얼굴에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는 모자.[캡틴의 모자] -
Captain's cap-Maritime museum
미국 샌디에이고 해양박물관 매리타임뮤지엄.[남바위]
[밀짚모자]
밀짚으로 만든 여름용
모자.[벙거지]
조선시대 궁중 또는 양반집의 군노나 하인이 쓴 털로 만든 모자.
헬멧 (helmet) >>>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모자.
11세기경 기사(騎士)가 금속제의 판과 가죽이나 천으로 머리 ·입 ·귀 ·코를 덮는
방호구(防護具)를 사용한 것이 기원이다. 일반적으로는 건축작업 ·갱내작업이나 오토바이를 탈 때의 사고방지를 위하여, 또 열대지방에서 방서용으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합성수지로 만든 것도 보급되어 소방수나 경관 ·스포츠 선수 등이 사용한다. [헬멧의 종류]
[헬멧]
[군사용 헬멧]
[해군조종사의 헬멧 ]- navy museum -해군 조종사의 helmet
한국전쟁 당시
미국 해군이 사용한 헬멧.
[우주복 헬멧] -
Intrepid-AstronautSuit4-NYC
진공상태의 행성공간에서 인체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의복과 헬멧. 헬멧 착용 상태에서도
식사와 통신이 가능하다.
[잠수헬멧 ]- Diving helmet-Maritime museum
미국 샌디에이고.
잠수시 공기 공급을 위하여 호스를 연결한 형태의 헬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