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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산행 사진방 스크랩 영광 불갑산에서 애절한 그리움을 잉태한 꽃무릇을 만나다.(2007.9.16)
킬리만자로 추천 0 조회 146 07.09.17 23:10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 가을엔...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최백호는 노래한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고.


현실은 늘 어수선하다.

TV에 비친 뉴스는 어지럽다. 경기는 여전히 불황이다.

추석 명절 준비에... 학원비에.. 아이들 공부 걱정을 남겨놓고

훌쩍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잠시 떠나보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사는게 의무라면 때론 세상사를 잊을 권리도 있다.

한없이 걸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카피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순간 당신을 어딘가로 떠나게 만들어준다.


유체 이탈하여 먼저 떠나가는 영혼, 그것을 뒤쫓아 당신의 육체는

황급히 자동차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서두르자. 가을의 저녁 햇살은 너무 짧다.


여행은 일단 나서면 돌아서기 어렵다.

그게 여행의 매혹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고....

비오는 가을 속으로 길을 나선다.


차는 호남고속도로에서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로 빠져나간다.

그곳에 불갑산이 있고 꽃무릇이 있었다.

끝도없이 펼쳐진 붉은 그리움의 성감대를 어루만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었다.

 

 

 

아니다. 또 있었다.

새우가 제 철 아닌가.

염산포에 가기도 전에 이미 꽃무릇에 취해 취흥이 돈 상태였다.


엄청난 크기의 민어와 보리새우 오도리(おどり). 

민어는 7kg에 가까운 자연산 大物이라 45만원을 호가했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오도리(おどり)는 살아있는 싱싱한 새우를 뜻하는 일본어다.

우리말로는 보리새우라고 한다.    

대하는 말 그대로  '큰새우' 혹은 '왕새우'를 뜻한다.

거기에 유난히 달디 달은 호남의 잎새소주가 빠질소냐.

 

 

▲저멀리 원두막이 작게 보인다. 온통 사방이 하얀 물결이다.

 

웰컴투 동막골, 도마뱀, 만남의 광장을 촬영했던 곳이다.

영화를 보면서 참 궁금했었는데...이곳일 줄이야...


# 그대 고창의 학원농장을 아는가?

 

그대 고창의 학원농장을 아는가?

음, 제발 모른다고 답하길 바란다.

다시 묻건대 그대 학원농장을 아시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을 헛살았다.


아마도 수학여행과 가족나들이로 동물원이나 가보았겠지.

당신의 일상이 늘 액셀러레이터의 긴장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꼭 가보시길 권한다.


이제는 돌아오는 길.

아뿔싸...온종일 꽃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비에도 취하고...

결국엔 흥을 못이긴다.


어느 한 때, 그럴 필요가 있는 법.

그것을 위하여 여행을 떠난 게 아닌가.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떠날 때든 돌아올 때든, 울고 싶을 때든 웃고 싶을 때든,

산이든 사찰이든 늘 당신의 친구는 무엇입니까?

 

 

  

# 불갑산에서 애절한 그리움을 잉태한 붉은 꽃무릇을 만나다.


▲ 언 제: 2007.9.16(일)

▲ 간 곳: 영광 불갑산 용천사, 불갑사, 염산면 염산포구, 고창 학원농장 메밀꽃밭

 

 

단풍을 말하기엔 아직 이른 9월 중순.

가을의 들머리에 위치한 전라도 영광 불갑산 자락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며 흐르고 있다.

온 산을 휘감고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이야기다.


전남 영광하면 누구나 머리속에 먹음직스러운 '굴비' 한 두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광의 산과 들에는 온통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고 있다.

 

9월 중순이 되면 불갑산은 골짜기나 산자락 또 산비탈까지 붉고 아름다운

꽃무릇으로 뒤덮여 별천지를 이룬다.

불갑산 아랫도리는 온통 붉은 색이 철철 넘쳐 흐를 정도였다.

단풍보다도 더 붉은 꽃이 한창인 탓이다.



 ▲애달퍼라, 엇갈린 우리의 운명.

 

꽃무릇은 꽃이 필 때 잎은 이미 말라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꽃.


상사초(화)라 부르기도 하는 이 꽃은 꽃과 꽃대가 지면

땅에서 난초 잎 비슷한 잎이 나와 눈 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잎이 지고 나면 또 꽃대가 나와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잎과 꽃이 각기 때가 다르게 나오고 피기 때문에 한 뿌리이면서도

잎과 풀이 서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잎과 꽃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화엽불상견 상사초

(花葉不相見 想思草·꽃과 잎이 서로 보지 않고 서로 그리워하는 풀)라

부르는 것이다


한 몸 한 뿌리에 나서 일평생 꽃과 잎이 해후하지 못하고

그리움만 붉게 차올라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다.


▲ 온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남을 그리움

 

꽃무릇은 9월초부터 피기 시작해 보름 정도 만개한 뒤 꽃잎을 떨군다.

꽃잎이 모두 떨어진 뒤 비로소 푸른 잎이 하나 둘 돋는다.


한 몸이건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만 하는 꽃.

꽃무릇을 '상사화(相思花)'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잎 하나 달리지 않은 마른 줄기에 얹힌 둥근 꽃이 위태위태하고,

무거운 꽃을 지탱하고 꼿꼿하게 선 가녀린 꽃대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꽃무릇의 붉은 빛은 더욱 애잔해 보인다.


불갑사의 꽃무릇은 9월 중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10월 초까지 조금씩 조금씩 불갑산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하루 하루는 별 차이가 없지만 간격을 두고 다시 보면

불갑사 입구에 피었던 꽃이 어느덧 산 중턱까지 차올라 있다.


꽃무릇의 본래 이름은 석산화(石蒜花)이다.

인도 사람들은 지상의 마지막 잎까지 말라 없어진 곳에서

화려한 영광의 꽃을 피운다 하여 피안화(彼岸花)라고도 했다.


 ▲ 애절한 그리움을 잉태하는 꽃무릇

 

꽃무릇은 '꽃이 무리지어 핀다'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꽃무릇은 여름에 잎이 다 말라죽고 난 후, 가을에 꽃이 피므로

그냥 상사화(相思花)로 잘못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꽃이다.


두 가지다 입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은 같다.

줄기까지 비슷해 구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개화 시기와 꽃의 색깔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상사화는 칠월 칠석을 전후로 해서 피고, 꽃무릇은 백로와 추분(9월8일~23일)

사이에 핀다. 

상사화는 연분홍이나 노란색 꽃이지만 꽃무릇은 붉은색에 가깝다.


특히 꽃무릇은 상사화나 개상사화, 백양꽃 등과 달리

꽃술이 꽃잎보다 훨씬 길어서 거의 두 배 정도 되는데,

마치 자그마한 새장을 연상케 한다.


꽃을 빙 둘러 싼 채 빨간 그 색을 보호하는 수호천사처럼 호위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해 보여서 살풋 미소를 띠게 한다.


그러나 예쁜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무릇 역시 강한 독성을 품고 있다.


영광이나 함평에서는 꽃무릇을 '눈에피꽃'으로 부른다.

가까이 하면 '눈에서 피가 난다'는 뜻이다.

충청남도나 전라북도에서는 '상여꽃'이라 부르며
아이들이 가까이 하는 것을 막았다.


꽃무릇은 불갑산,내장산,선운산 일대에 무리지어 자생하며,

서해안 중부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


울창한 숲이나 계곡 등 습한 음지가 서식지다.

한두송이 피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이룰 만큼 무리지어 핀다.

꽃무릇 국내 최대 자생지인 불갑사 일대에는 군락지가 3만평도 넘는다.


불갑사 꽃무릇 자생지로는 부도밭과 대웅전 뒤편, 불갑저수지,

동백골 일대가 손꼽힌다.

 

 

 

 

수천번의 

애틋한 인연으로도

갈려버린 우리의 운명


기나긴 기다림에

그리움만 붉게 차올라

온통 노을 진 세상


솜털같은 바람결에

제 한몸 가누지 못해

그대를 목놓아 부르다가

그늘처럼 흔적없이 지리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내가 그대를 이루고

그대가 나를 이루는

한 사랑 크게 맺어 보리니


- <상사화> 한석종

 

 

 

 ▲꽃무릇의 본래 이름은 석산화(石蒜花)..고목에도 피어났다.

 

함평군 용천사도 꽃무릇 터널로 이름이 높다. 

용천사 주변으로 20만평이 형성돼있다.

세계 최대의 꽃무릇 자생지라는 용천사 주변에서는

해마다 9월 중순이면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


가을이면 숲에는 하나 둘씩 홍등을 켜 놓은 듯 꽃봉오리가 피어난다.

꽃무릇 사이로 정갈하게 서 있는 1천500여기의 돌탑도 볼만한 구경거리다.


용천사 들머리 2㎞ 주변에서부터 서성거리며 길손을 맞는다.

절 들머릿길 양쪽 산마루에 약 2천평씩의 군락지를 이루었고

절 뒤쪽 야생차밭과 왕대밭 속에 선홍빛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널려 있다.


그 꽃무릇 붉디붉은 머리칼들 위로 나비고을의 상징

산제비나비가 고색창연한 흑진주 드레스를 걸친 듯

날아다니는 모습은 나비와 꽃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색깔

대비의 극치다.


꽃무릇 때문에 ‘한국 100경’에 뽑힐 만큼 꽃무릇의 자연군락이 넓다.

 용천사에서 꽃무릇을 감상하고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모악산 정상.

이곳에서 불갑사쪽으로 내려오는데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소요시간 1시간 30분.

이코스는 산책로라 표현하는 게 나을 정도로 산길이 부드럽다.  

 

 

불갑사에서 고개를 넘어가는 함평군 용천사도 꽃무릇 터널로 이름이 높다.


 

 

 

 

용천사는 현재 남아있는 함평의 유일한 고찰이다.

창건 연대가 분명하지 않는 용천사는 ‘행사존자가 당나라로부터 건너

들어와 불갑사를 중창하고 나서

산 너머 함평 용천사를 개창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중엽 백암 성총의 용천사 숙석루계권문에 나타나있는 것으로 보아

700~74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6.25때 완전 소실되어 절의 역사에 대해 이렇다 할 기록이 없었던

용천사에서, 몇해전 12~1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불두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몇 만평인지 알 수 없는 꽃마당 사이로 난 산길을 천천히 오르다보면,

길은 곧장 불갑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꽃에 취해 짧은 시간 산행을 하고 싶다면 용천사에서 시작하는

산행을 권하고 싶다.

 

또한 용천사에는 조선조 석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용천사 석등이 있다.

오래된 석등의 동그란 구멍은 구부러진 산의 능선을 무척이나 닮아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안정감이 있고, 빈틈이 없어 볼만하다.

석등의 구멍 사이로 바라본 용천사는 고즈넉함 그대로이다.

절 앞의 장승 공원도 볼만하고, 함평 읍내에 있는 ‘곤충 연구소’와

‘자연 생태 공원’도 권할만한 곳이다.

 

 

▲ 그리움이 붉게 차올라 온통 노을진 세상

 

 

▲함평 용천사 꽃무릇 자생 군락지.

 

꽃무릇은 9월부터 이듬해 5∼6월까지 자라다가 갑자기 시들어 버린다.

말라죽었다고 생각하면 땅을 뚫고 다시 연푸른 꽃대가 올라온다.

그리고는 붉은 꽃봉오리가 한없이 많이 피어난다.


 

▲ 무리지어 끝내 그리움의 바다를 이루다.

 

 

▲불갑산 꽃무릇 자생지로는 부도밭과 대웅전 뒤편, 불갑저수지, 동백골 일대가 손꼽힌다.


 

▲ 저 아이는 무슨 소원을 빌길래 저리 간절히 절을 하는가...

 

 

 

 

 

▲ 얼마나 그리움이 깊으면 계곡마저 저토록 붉게 물들여 놓았을까?

 

 

 

 

▲ 무리지어 바다를 이룬 꽃무릇

 

 

 

 

 

 

  

 

 

 

 

 

 

 

 

 

 

 

 

 

 

 

 

 

 

 

 

▲ 지금 불갑산에는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십만평의 초원위에 피어난 붉은 상사화꽃 만발....

 

 

 

 

 

예로부터 영광은 산수가 아름답고 쌀, 소금, 목화 등 농수산물이 풍족하여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기에 한국 불교의 고향 영광 불갑사는 전국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로 그 명성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영광군과 함평군에 걸쳐 있는 불갑산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불교적인 색채가 베어 있는 산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첫 도래지라는

의미의 불(佛)자와 육갑(六甲)의 천간(天干)인 갑(甲)자를 따서

불갑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따라서 산 이름도 불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갑사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일주문 주위의 난대 상록수림이 눈에 띄는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천연림을 형성하고 있다. 

 

♣ 불갑산 불갑사


노령산맥의 서남쪽 끝자락에 솟아 있는 영광 불갑산은 산림이 울창하고

다양한 식물들이 자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이 산자락에 들어앉은 꽃무릇으로 더 유명해진 불갑사는

우리 나라 불교의 고향이다.

서기 384년에 백제 침류왕(384년)때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일부에서는 백제 22대 문주왕(600-640)때 행은(幸恩)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또한 도선국사가 도갑사·봉갑사·불갑사 등 호남 3갑(甲) 가운데

하나로 창건하고 그 중 으뜸이라는 의미로 불갑사(佛甲寺)라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아직까지는 불갑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꽃피워 일본 불교의 모태가 된 백제 불교.

부처님 말씀을 백제인에게 들려준 서역승 마라난타가 백제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인근의 영광 법성포이다.

 '법성포'라는 지명도 성인이 법을 가지고 들어 온 포구였다고 해서

아무포->부용포라는 이름에서 바뀌었다 한다. 

 


 ▲영광 불갑사  계곡을 붉게 물들인 그리움의 선율

 

불갑사 인근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는 꽃무릇은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섬뜩하리만큼 붉게 피어난다.

한두 송이 피는 것이 아니라 무리 지어 끝없는 바다를 이룬다.

꽃무릇의 국내 최대 자생지인 불갑사 일대에는 그 군락지가 3만평을 웃돈다.


불갑사에서는 한철 간격으로 상사화와 꽃무릇이 피어난다.

아쉽게도 개화기가 달라 한꺼번에 두 가지 꽃을 모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여름에는 상사화, 가을에는 꽃무릇이 산사를 감싸고 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숲길이

작은 내를 따라 이어진다.


▲온통 불야성... 꽃의 천국... 불갑산의 명물...

 

 

 

▲불갑사 사천왕상


자연스러운  돌계단을  올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천왕문 안에는

목조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상도 평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 크기부터 기존의 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원래 불갑사의 사천왕상이 있던 곳은 고려초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북 흥덕 소요산 연기사에 있던 조선 중기때 작품인데,

고종 7년에 설두선사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폐사된 연기사에서

목선 4척을 동원하여 옮겨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천왕상에서는 1987년 월인석보 등 귀중한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백제 최초의 절 불갑사 (위치: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번지)


불갑산(516m) 기슭에 자리잡은 불갑사는 때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 이름을 부처불, 첫째갑, 불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불갑사의 여러 문화재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불갑사 대웅전(보물 제 830호)이다.

대웅전은 가장 눈길을 끈다. 

 

특히 대웅전 처마조각과 연꽃문양을 세련되게 조각해 끼워 맞춘

대웅전의 문살 등은 옛 선인들의 정성어린 손길을 엿보게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

그밖에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166호로 지정된 만세루 등이 있다.


 

▲ 용마루 지붕꼭대기 한가운데의 귀면보주(鬼面寶珠·도깨비 얼굴 형상의

보주로 ‘보주’란 악을 제거하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며 재난을 없애는

한편, 원하는 것을 갖게 하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지는 탑 꼭대기에 올려두는 장식)

가 눈길을 끈다.

 

대웅전 용마루 한가운데 귀면 형의 보주(寶珠)를 얹은 것이 특색있다.

귀면 머리 위에 사리를 간직한 작은 탑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불갑사 대웅전 문살에도 꽃무릇의 그리움이 물들고 있다.

 

건물 외벽을 언뜻 보면 소박하고 단조롭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매우 화려하다.

 

특히 정면과 측면의 중앙 삼분합문에 장식된 연꽃무늬와 국화무늬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면과 측면 모두, 가운데 칸의 세짝문을 연화문과 국화문, 보상화문으로 장식했고

좌.우칸에는 소슬빗살 무늬로 처리하여 분위기가 매우 화사하다.


대웅전의 연화문과 국화문 꽃문살은 세월이 흐르면서 닳고 또 닳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문살이 눈에 띈다


대웅전 꽃문살에는 남모르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느 이름 없는 목수가 절로 찾아와 대웅전 문살을 조각했단다.

는 자신이 작업하는 동안 절대 안을 들여보지 말라는 부탁을 남기고

칩거하듯 작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공양주가 결국 안을 들여다보자

목수는 그만 피를 토하며 죽었고 그 핏속에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대웅전의 꽃문살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 대웅전 한켠 꽃문살은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불상 뒷벽에는 까치가 그려져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최근에 단청을 새롭게 하여 옛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대웅전(보물 제830호)의 문을 여니 세 분 부처님이 오른쪽(남쪽)으로

 돌아앉아 계신다. 정문이 옆문인 셈이다.

 남방불교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란다.

 

  

▲ 불갑사를 번창시킨 고려 말기 각진국사(覺眞國師) 부도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인

불갑사는 법성포에서 남쪽으로 19km 거리다.

크지 않은 이 절은 여러 차례 화재로 중건한 탓에 조선후기 양식의 당우만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1600여년 전 그대로다.


불갑사가 번창한 것은 고려 말기 각진국사(覺眞國師; 송광사 16국사 중

제13조)가 머무르면서 500칸 규모의 당우(堂宇)를 세운 뒤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승려만도 수백명에 이르렀으며, 사전(寺田)이 십리에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건물은 대부분 정유재란 때에 전소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보물 제830호)를 비롯해 절 안에는 만세루, 명부전,

일광당, 팔상전, 칠성각, 향로전 등이 있다.


 

 

 

 

 

♣ 불갑산(515.9m)과 불갑사


전남 영광과 함평의 경계를 이룬 불갑산(515.9m)은 백제 불교 도래지로

이름난 불갑사를 품고 있는 산이다.


모악산(母岳山)이라 불리다 불갑사가 들어선 이후 불갑사쪽

산을 따로 떼어 불갑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보다라도

불갑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편에 불갑산은 모악산(母岳山)으로 되어 있다.

그 설명에는 ‘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함평현에서도 보인다.

산중에 용굴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로 써있다.


산의 이름이 모악산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산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신령스러워서 마치 어머니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언제인가 산 이름이 이 산에 있는 불갑사의 이름을 따서

불갑산으로 바뀐 것이다. 


불갑산 골짜기에 있는 불갑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불갑사(佛岬寺)로 되어 있다.

산허리 갑(岬) 자를 썼는데, 언제 뫼 산(山)자가 떨어져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 불교가 처음 자리잡은 전남 영광의 불갑산(516m) 은

서해안고속도로 영광나들목에서 30분이면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인기가 한층 높아지고 경인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강원도 일원의

등산인들까지도 찾아들고 있다.



 

  

▲절 밖의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 자생지가 있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불갑사에서 구수재로 이어지는 등산로에는 비자나무와 동백나무,

참식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12호)이 자생하고 있다.


참식나무는 울릉도에서 서해 덕적도까지 분포되어 있는 난대성 상록수로

해발 100-400m 사이에서 많이 자라는 수종이다.

제주도에서는 해발 1,100m에서 자생하고 있다.

높이 10m, 지름 40㎝까지 자라는 참식나무는 목재가 단단하고 향기가 좋아

건축재나 가구재로 이용된다.

 

 

▲ 불갑산 자락을 온통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인 꽃무릇

 

꽃무릇 뿌리는 마늘쪽과도 같다.

뿌리를 절구에 빻아서 풀을 끓일 때 같이 넣어서 끓여 사용하면 방부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스님들이 탱화를 그려 보관을 할 때 풀과 같이 끊여 겹겹이 부치면

곰팡이가 안 난다고 한다.

그래서 절 뒷마당에 꽃무릇을 많이 기른다는 말도 있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절 중에는 이곳 불갑사와 나주의 불회사가 있는데,

그 절들은 이상하게 꽃무릇들이 많다.

 

 

▲ 꽃무릇은 무리를 지어 끝내 바다를 이룬다

 

 

불갑산은 구수재를 기점으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달리 불리기도 하지만,

산세도 전혀 다르다.

불갑산은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연실봉을 비롯한 기암괴봉이 곳곳에 솟아

암팡진 모습이라면,

모악산은 산 어느쪽을 보든 부드럽고 아늑하기 그지없는 산세를 지니고 있다. 

 

정상 주변은 거대한 암봉으로, 동쪽은 10여m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의를 요하는 곳이다.

정상을 관을 쓴 것 같다하여 관모봉(官帽峰) 또는

연꽃 열매 모양같다하여 연실봉(蓮實峰)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산은 불갑사 남쪽의 불갑호수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명산 치고 피비린내 나지 않았던 곳은 없는데, 이곳 불갑산도

현대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은 곳이다.

불갑산도 6·25 때 빨치산의 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인민군 전라남도 유격사령부는 한때 광주·노령·유치·보성·불갑지구 등

5개의 지구대로 편성,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때 불갑지구의 근거지가 이곳 불갑산이었다.

그런 까닭에 불갑산 인근 마을 주민들은 토벌군에 의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불갑산에 접해있던 전라남도 함평에서는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해 524명(월야면 350명,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 서있는 사람은 모두 오시오...나는 빈의자...

 

불갑산은 단풍도 화려하다.

불갑사 앞의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자리한 불갑사저수지 앞에서

골짜기와 산비탈을 오색으로 물들인 단풍을 바라보는 것은

가을철 불갑사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다.

 

저수지 위쪽의 평탄한 오솔길을 따라 이어지는 동백골의 단풍도 감상할 만하다.

정읍 내장산이나 담양 추월산의 단풍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수하고 운치있는 길로 사색을 겸한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불갑사 입구의 왼편에 위치한 작은 부도밭은 온통 꽃무릇으로 둘러 쌓여

  극도의 비애미를 자아낸다

 

 

 

 

▲대규모 염전이 많은 염산(鹽山) 포구..

  빗속에 젓갈축제가 한창이었다.

 

 

 

 

 

♣영광 법성포와 불갑산


영광 법성포와 불갑산은 우리나라 불교 서방전래설의 근거로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화상이 고구려로 들어와 처음 불상과 불경을 전했고,

그로부터 12년 뒤인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晉)으로부터

도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가 백제로 들어와 불교를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阿道-묵호자)화상에 의하여

불교가 전해졌고,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가 어디를 거쳐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몇몇 학자들과 영광군에서는 마라난타 존자가 동진에서 서해(황해)를 건너

법성포로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뜻하고, 성(聖)은 마라난타를 뜻하며,

불교의 도래지 법성포에서 가까운 모악산(현재의 불갑산)에

불교를 뜻하는 불(佛) 자와 천간지지의 첫째 으뜸을 뜻하는 갑(甲) 자를 쓴

불갑사를 창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굴비의 최대 집산지인 영광 법성포


아들을 낳아 지방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의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옥당골이 바로 지금의 영광군이다.

조선시대에 정이품 당상관, 곧 옥당(玉堂)의 자제들이 벼슬길에 오르면

처음 부임하던 고을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고려 성종 11年(서기 992)에 한수 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때 법성포에도 부용창이라는 조창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전남지역에는 나주와 영광에만 조창이 설치되어 운용되었다.

그나마 나주 영산창은 수로가 험하여 배가 전복된다는 이유로 폐쇄당하고

영광 법성창만이 전남 지역의 유일한 조창이었다.


법성포는 한때 서해안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900여 년간 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조창이 있으므로 해서 국가에 공헌한

바도 크지만, 반면으로는 대소 전란시마다 공격 목표가 되어

그때마다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엄청나게 컸다.


당시 27개 면과 12개 섬을 거느린 영광은 각종 산물이 풍부한

부자 고을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ㆍ남해안을 연결하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전라도 15개 고을에서 징수한 세곡(稅穀)을 갈무리하던

법성창도 이곳에 있었다.

법성창을 감독하던 법성첨사에게는 세곡 관리 업무말고도

행정적인 권한까지 주어졌다.

그 덕택에 영광군을 다스리던 수령보다도 더 큰 세도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육상운송이 발달함에 따라 조운이 쇠퇴해지자

법성포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토사의 유입과 해저의 융기로 인해 포구의 수심이 얕아진 탓에

작은 어선조차 마음놓고 포구를 드나들기가 어렵게 되었다.


또 예전에는 조기의 황금산란장이었던 칠산 앞바다에서 조기가 많이 났으나

요즘은 홍도와 흑산도 동지나해까지 나가서 조기를 잡아온다.

 

전라남도 북단 영광군의 법성포 앞 칠산 앞바다.

일산(一山)부터 칠산(七山)까지 산으로 이뤄진 섬 일곱 개가 모여 있는 바다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곡우 때면 북상하는 조기 떼를 쫓느라 바빴던 곳.

물고기 서식 환경의 핵심은 수온이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변화에도 물고기는 민감하다.

지구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올랐으니 칠산 앞바다에서 산란하기 위해 회유하던

조기 떼가 방향을 튼 것은 불문가지.

 

게다가 제주도 동남쪽의 남중국해까지 나가 배를 대고 잡아 버리는 기술의

개가로 칠산 앞바다 조기 어획량은 격감할 수밖에 없다.

작은 어선들은 출항을 포기했고 대형어선 6~7척만이 조기를 싣고 온다.

옛 영화에는 못 미치지만, 영광굴비의 본고장이라는 명성으로

여전이 살아 숨 쉬는 포구이다.

 

그래도 법성포는 살아 있다.

영화롭던 옛 시절에는 못 미치지만,

영광굴비의 본고장이라는 명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영광굴비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 때부터라고 한다.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1126)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부하인 척준경의 배신으로 실패한 뒤 법성포에 유배되었다.

귀양살이 중에 ‘석수어’(石首魚)라는 고기의 독특한 풍미에 반한 이자겸은

그 고기에다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掘非)라는 이름을 붙여서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그 이후 영광굴비는 조선시대까지도 진상품이 되었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만든다.

조기 중에서도 법성포 인근의 칠산바다에서 잡힌 참조기로

만들어야 진짜 영광굴비다.

 

법성포 선창에 부려진 칠산조기는 ‘섭장’을 거쳐 영광굴비로 거듭난다.

칠산조기가 ‘섭장’이라는 독특한 염장법(鹽藏法)에 의해

맛좋은 영광굴비로 만들어지는 것은 영광 일대의 대규모 염전 덕택이기도 하다.

 

특히 염산면에는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많다.

오죽하면 '소금 산’, 즉 염산(鹽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실제로 염산면의 맨 서쪽에 위치한 두우리로 가는 도로 옆에는

농경지보다 소금밭이 더 많다.

하지만 이곳의 염전은 대부분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값싼 수입 소금에 밀린 탓이다.


 

인근 염산면과 백수면의 염전에서 나는 질 좋은 천일염을 1년 동안 간수를

빼내어 조기에 직접 염장을 한 뒤 봄부터 말리기 시작해

6개월을 말린 뒤 영광굴비로 내놓는다.

 

칠산 어장의 조기 어획량 감소와 값싼 중국산 공세로

예전에 먹던 북어포처럼 쫙쫙 찢어지는 통굴비는 이제 찾기 힘들다.

냉장기술의 발달로 굴비를 잡은 뒤 곧바로 냉동을 시켰다가 물을 빼서

적게는 2~3일, 많게는 1주일 정도밖에 말리지 않는다. 

 

굴비는 한두름에 1만원부터 50만원대까지 가격이 다양하다.

요즘은 굴비를 찢어 넣은 고추장 굴비가 인기가 있다.

포구 주변의 식당에는 굴비음식 전문점이 많다.

굴비백반은 굴비의 크기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데 7,000~2만원 정도이다.

 

 

 

 ▲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

   하얀 메밀꽃으로 뒤덮인 마을의 풍경을 볼 수가 있다.

 

# 넘실거리는 초록과 하얀 메밀꽃의 물결...

  고창 학원농장에 가다.


염산면 염산 포구를 나와 고창방면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창엔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도 있고, 세계 문화 유산인 고인돌도 있고

읍성도 아름답고, 판소리도 또한 자랑거리다.


무장읍성이 있는 무장면에 다다른다.

무장면 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의

학원농장이 나온다.  

학원농장으로 가는 동안의 풍경에서도 온통 하얀 메밀꽃의 풍경이 보인다.

 

 ▲막대를 꽂아 줄을 매어 임의로 만든 길이 없어서 자연 그대로를 느낄수 있다.


학원농장은 국내 최대의 메밀밭이다.

총 20여 만평의 구릉지대에 조성된 학원농장은 민정당시절 진위종 전 국무총리의

장남 진영호 씨가 낙향해서 일군 관광농원이다.

鶴이 날라드는 곳이라 학원농장이라 했다고 한다.

1994년에 관광농장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진작가들의 소재가 되고,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많아졌다.


농장 안에는 부친과 모친의 유품을 모아놓은 백민박물관이 있고

농장의 식당에는 메밀묵, 메밀국수 등의 메밀요리를 판다.

메밀요리가 그러하듯이 별로 맛은 없다.


봄이면 20만평에 보리를 심어 가난한 시절의 추억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초록빛 융단처럼 깔린 청보리밭과 물결치듯 구불거리는 지평선은

마치 외국의 넓은 초원지대에 온 것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여름이면 해바라기를 심어 해바라기꽃밭을,

가을철에는 하얀 메밀꽃이 물결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계절별로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곳도 흔치않다..


 

▲비를 맞으며 달려갔어도 전혀 손해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장관이다.

 


오히려 비에 젖어 반짝이는게 말 그대로 소금을 뿌려놓은듯,

보석을 뿌려놓은듯 반짝반짝 눈이 부시다.


따로 길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이 지나가면 그곳이 바로 길이 되어 버린다.

고창하면 옛부터 보리농사가 잘 되어서인지...

과거 고창의 이름도 보리가 잘 자라는 뜻의 모양현이었다고 한다.

청보리는 4월부터 5월까지의 누렇게 변하기 전의 모습을 말한다.

 

학원농장에서는 11월에는 보리파종을 해서 6월초에 수확을 하고

7월 부터는 메밀을 심고 10월에 수확을 한다.

이땅은 한시도 그냥 있지 않고 쉼없이 순환을 한다.

 

요즘 메밀꽃이 한창 피기 시작했다.

 매해 4월이면 고창 청보리밭 축제를 열고 9월이면 메밀꽃 축제를 연다.   

 

 

▲봉평을 갈까 고창을 갈까 무척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순수한 메밀꽃을

  감상하려면 복잡하지 않은 고창이 낫겠다 싶었다.

 

 

▲안개꽃같다.

자잘한 꽃송이들이 모여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메밀꽃들... 

 

 하얀 지평선을 보셨나요?

 군데군데 길이 나있다.

 딱히 길을 만들어놓지 않아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길이 생긴다.


 

 

  ▲조광지에 발표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원본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해와 감상> 

1936년 《조광(朝光)》지에 발표.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미묘한 운명을 드러내는 과정에  '길'이

등장한다.

그 '길'은 낭만적 정취를 듬뿍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물론, 그 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생업(生業)의 길목이지만,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이기보다는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세계이다.

 

온갖 각다귀,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산문적(散文的)인 현실과는 격리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일 듯이 들리는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의 세계이다.

여기에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김이 어우러지면서

한 늙은 장돌뱅이의 애환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방식에 있다.

생원이 술집에 들어가 충주집을 탐내고 있을 때,

그의 당나귀는 암놈을 보고 발정(發情)을 한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저놈의 짐승이….' 하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허 생원은 자신에 대한 조소처럼 느낀다.

 

  이것만이 아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허 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와 꼭 한번 정을 통한다. 평생 처음이요, 마지막 기회였다.

허 생원이 처녀에게 잉태시킨 것처럼 당나귀는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 개진개진한 눈은

허 생원의 외양(外樣)과 흡사하다.』

 

전편에 시적(詩的) 정서가 흐르는 산뜻하고도 애틋한 명작소설이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에서 애욕(愛慾)의 신비성을 다루려 했다고

그의 〈현대적 단편소설의 상모(相貌)〉에서 밝히고 있다.

 

 <줄거리>

 『왼손잡이요 곰보인 허 생원은 노름판에서 재산을 다 날려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가 된다. 그 허 생원이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 선달을 따라 충주집으로 간다.

그는 '동이'라는 애송이 장돌뱅이가 충주댁과 농탕치는 것에

화가 나서 뺨을 때려 쫓아버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그 날 밤 그들 셋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걷게 된다.

허 생원은 젊었을 때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개울가 물레방앗간에서

어떤 처녀와 밤을 새운 이야기를 한다.

'동이'도 그의 어머니 얘기를 한다.

자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지는 바람에

동이에게 업히게 되는데, 허생원은 '동이' 모친의 친정이 봉평이라는

사실과 '동이'가 자기와 똑같이 왼손잡이인 것을 알고는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발길을 옮긴다.』

 

 

9월이면 생각나는 노래...Try to remember

이 곡은 가을이 깊어갈 무렵,달콤하고 사랑스러웠던 9월의 나날을

추억으로 떠올린다는 내용입니다

 

 

 

Try To Remember

[Brothers Four]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9월의 그 날들을

삶은 여유롭고 너무나 달콤했었죠.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grass was green And grain was ye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9월의 그 날들을

초원은 푸르고 곡식은 여물어갔죠.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you were a tender And callow fe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9월의 그 날들을

그대는 여리고 풋풋했던 젊은 나날을

 

Try to remember and if you remember

Then follow, fo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할 수 있다면

그대의 추억을 따라가요.따라가요

 

Try to remember When life was so tender

That no one wept except the wi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삶이 평탄하고

버드나무 말고는 아무도 눈물짓지 않던 그날들을

 

Try to remember when life was so tender

That dreams were kept beside your pi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젊었었던 시절을

그리고 그대의 배게 옆에 있는 그 꿈을 유지하고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When love was an ember About to bi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9월의 그 날들을

사랑의 불씨같았어도 연기로 변할듯이

 

Try to remember and if you remember

Then follow, follow, follow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할 수 있다면

그대의 추억을 따라가요.따라가요

 

Deep in December It's nice to remember

Although you know The snow will follow

12월이 깊어갈 무렵 추억을 되새기기 좋은 시간

비록 너가 알고 있는 눈보라가 따라가더라도

 

Deep in December It's nice to remember

Without the hurt the heart is hollow

12월이 깊어갈 무렵 추억을 되새기기 좋은 시간

텅 빈 마음의 아픔을 제외하고

 

Deep in December it's nice to remember

The fire of September That made us mellow

12월이 깊어갈 무렵 추억을 되새기기 좋은 시간

우리를 녹여 내리던 9월의 화롯불처럼

 

Deep in December Our hearts should remember

then follow, follow, follow

12월의 깊은 우리 마음을 기억해야 해요.

그리고 그 추억을 따라가요, 따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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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9.19 09:21

    첫댓글 귀한 산행기를 이곳까지 올려주시고.. 종종 부탁드립니다. ^^*

  • 작성자 07.09.21 23:42

    댓글 달아주는 사람은 문님 밖에 없고...아는 사람도 문님 밖에 읍네....

  • 07.09.28 08:38

    자주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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