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목포교도소 특별사동 13방에서 장영달이 써서 교도소 교도관에 맡겨둔 것이다. 참으로 하늘이 통탄 할 일이다. 그 때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장영달은 직접 취사반에 가서 주 ․ 부식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런 후에 주식은 지금까지 먹었던 주식과는 다른 하얀 쌀밥이 나왔다. 진작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면 누가 교도소에 항의하고 투쟁을 했겠는가! 무언가 잘못이 되어 있다. 이러기 전에 한 번만 뒤돌아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장영달이 감옥에 갇힌 후에 장영달의 아버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내내 그것을 슬퍼하시며 아버님에 대한 죄송함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어찌 자기 혼자만의 일이겠는가? 대한민국의 국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수감하는 동안 정부로부터 반성문을 쓰면 내보내주겠다고 여러 차례 제의를 받았지만 그 제의를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교도소소장이 사방을 순시하다가 장영달 방 13방에 멈추었다. 그리고 반성문을 쓰면 바로 출소를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장영달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그것은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그것을 성사시키면 교도소소장의 실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장영달에게 여러 번 소장이 부탁했었다. 그래서 한번은 반성문을 썼다. 그 내용을 교도소에 제출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면 이번에 출소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있다가 소장이 다시 왔다. 이런 반성문으로는 곤란하다며, 반성문을 다시 주고 갔다. 그러면서 다시 쓰기를 제의했으나, 장영달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장영달이 대전으로 가고 나는 특별사동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장영달이 있었을 때는 부식도 좋았다. 그가 직접 취사반에 가서 제대로 적당한 양의 주 ․ 부식이 들어가는 지 감시도 했기 때문에 주식도 좋았고 부식도 다른 때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식은 도로 옛날 같이 되어 버렸다. 나도 이제는 만기도 다가오고 해서 조심하다 출소할 양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만기 출소를 했다. 그 당시 전과자는 심사를 해서 출소 후에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삼청훈련을 받는 곳으로 가기도 했다. 문제수는 거의 다 삼청훈련을 받는 곳으로 보내어졌다. 다행하게도 나는 삼청훈련을 교도소 안에서 받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지는 않았다. 마지막 수감생활 동안에 자숙한 것이 교도소에서 잘 보아준 탓일까?
징역 3년 6월과 감호 10년
출소해서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농장에 가서도 한 3개월 쯤 일을 했고, 그곳에 나와 고물상 가게에서도 일을 했지만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6 개월 만에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이 사회에서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호까지 있었다. 감호는 10년, 7년짜리 두 개가 있었다. 아마도 나에게는 10년짜리 감호가 붙으리라고 짐작했다. 지방법원에서 감호 10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항소해서 감호10년,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 네가 교도소에 들락거린 이후에 이렇게 감형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고법판사의 말로는 형량은 적정하지만 판사의 직권으로 상습을 빼겠다고 하여 징역 3년 6월을 언도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장소에서 범행을 했다. 한 곳은 대학생 둘이 거하는 집이었다. 그 집에서 이화여대 대학생과 이야기하고 돈이 없다고 하여 아침 4시 그냥 나왔다. 남학생은 서울대생이었고 여학생은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돈 15,000원인가 그 여학생이 주는 돈만 가지고 나왔다. 그 여학생과 이야기하면서 내가 목포교도소에서 장영달과 지내면서 범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야기까지 한 것으로 생각이 난다. 그 여학생은 자기 아버지에게 말을 해서 나에게 취직을 시켜 줄 테니 이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까지 나에게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 때, 이를 거절했다. 만일 내가 그곳에 취직했다가 사고를 내면 어쩔 것이냐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나올 때는 착실하게 살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 또한 지키지 못했다. 또 다른 한 곳은 지금도 얼굴도 모르지만 준강도로 그 집에서 75만원 가지고 나왔다. 처음에는 도둑질만 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찾아도 돈을 발견할 수 없어 부엌의 칼을 가지고 안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을 자고 있는 부부를 깨우고 돈을 달라고 하자. 경대 위에 있는 봉투를 가리키면서 그것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봉투를 가지고 나왔다. 사실 봉투에 75만원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가지고 나와서 보니 75만원이었다. 그래서 신설동 모 다방에 40만원을 맡겨두고서 찾아가라고 한 것이 형기를 줄이는 이유가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판사의 모친이 교도소선교를 한다고 했다. 아무튼 좋은 판사를 만나 나는 징역 3년 6월, 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감호는 2년마다 심사가 있으니 처음 심사에는 떨어질 것이고 두 번째 심사에는 패스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적어도 7년 동안 교도소에 있으면서 내가 무언가를 확실한 것을 붙잡지 못하면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언가 확실하게 붙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나는 문제수로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에 조금 잘못해도 처벌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정말 조심스럽게 생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