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문명의 유산을 찾아 남미(南美)의 Peru로
머나먼 여정(旅程)
오래동안 꿈꿔오던 가슴설레는 여행이었다. 여러 가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문명을 안고 있는 남미에 있는 Peru의 잉카문명을 찾아서 떠나는 대장정(大長程)의 길이었다.
이번에 떠나는 길은 미리부터 걱정스러움이 나를 긴장시켰다. 비행 시간이 중간 기착시간까지 합하면 꼬빡 하루를 넘겨야 하고, 또 그곳은 치안이 허술하다는 소문도 있는 데다, 특히 스페인어를 쓰는 곳이기 때문에 언어 소통에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긴장이 되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잉카 문명의 중심지인 페루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으로 수집했다. 대사관과 책방을 돌면서 Peru와 Inca 문명에 관련된 정보들을 보이는 대로 수집했다.
수집된 자료들을 가지고 여행 스케줄을 짜는 중에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곳의 언어였다. 스케줄을 짜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책방으로 달려가서 한(韓) 스페인어 사전과 실용 스페인어 회화 책을 한 권씩 사 가지고 왔다. 마음을 좀 안정시켜 보려고 책은 사 왔지만 그러나 잘 외어지지가 않았다.
맞추피추 기차역에서
Inca문명의 본산 Peru로
출발은 언제나 홀가분한 마음이다. 2월의 쌀쌀한 겨울 날씨이지만, 여름철의 날씨인 그곳을 생각하면서 아주 춥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챙겨 입고 공항으로 행했다.
항공은 브라질 국적기인 Barig 이용했다. 직항로가 없어서 JAL을 타고 일본 도쿄에 가서 그곳에서 Barig 로 환승(transfer)을 하여 태평양을 넘어 미국 LA로 가서 그곳에 기착한 후 다시 페루의 Lima로향했다.
비행시간을 따져보면 날자변경선을 넘으면서 중간에 기착한 시간을 합하면 총 24시간이 넘는 비행을 한 셈이다. 장시간의 비행 후 목적지인 페루 Lima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밟으면서 공항청사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시간은 그곳 시간으로 새벽 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국절차를 끝내고 공항 Information Center에 가서 다음의 일정인 태양의 도시, Cusco에 가는 항공 schedule을 체크했다.
Cusco 행 비행기는 새벽 6시에 있었다. 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새벽 5시까지는 공항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숙소에 들어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다음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공항대합실을 둘러보니 공항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였다. 나도 편안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눈을 감고 아침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국내선 청사가 국제선 청사의 바로 옆에 있어서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새벽 4시가 되어서 항공권 매표소가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서 쿠스코 행 비행기 표를 살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Cusco행 비행기표는 이미 예매가 끝나 있었다. 쿠스코가 유명한 관광지임을 소홀히 생각한 탓에 여행 시작부터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우선 일정을 조정한 후, 다음날 Cusco 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서 대기자 명단에 1번으로 등록을 하고, 탑승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초초하게 기다려 보았다. 운이 좋았다. 그당시에는 리마공항의 국내선 청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
다. ticket counter 앞에서 창밖을 쳐다보니 국내선 중형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내려오더니 창구로 뛰어왔다. 창구에 와서 Mr.Kim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여석이 하나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행스럽게도 여행스케줄의 변경 없이 그날의 쿠스코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쿠스코로 향하는 국내선 중형 비행기가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하늘로 올랐다. 구름이 첩첩이 싸인 고산 지역을 향해서 약 1시간 동안을 날아올라서, 해발 3,400m의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태양의 도시로 불리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와서 내려앉았다. 쿠스코 도착으로 Peru를 찾아오는 비행기에서의 긴 여정은 일단은 끝이 났다.
맞추피추를 배경으로
긴 여정 때문에 피로가 축적되고 있음을 느꼈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간이 식탁 위의 물컵이 쓰러질 정도로 비행기가 요동하여 심신이 매우 피곤해 있는 데다, 또 밤잠을 설치면서 계속해서 고산 지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 때문에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Lima의 어느 대학 교수와 함께 적절한 숙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찾은 숙소는 인정이 넘치는 소박한 숙소였다. 짐을 풀고 잠시 쉬는 동안 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또 그곳에서 페루의 산간 도시 Puno에서 여행을 왔다는 여대생 Magaly와 Zanet을 만났다. 순박한 여학생들이었다.
넉넉지 못한 방문 일정 때문에 그 날 오후부터 바로 tour를 시작했다. Magaly와 Zanet을 데리고 쿠스코 시내에 있는 여행사를 찾아가서 Cusco city tour를 신청했다.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온 방문객들과 함께 쿠스코 지역의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태양의 도시 쿠스코(Cuzco)
버스로 쿠스코 시내투어를 시작했다. 고색이 창연한 옛 건물들이 좁은 골목들을 사이에 두고 질서 있게 늘어서 있는 도시 쿠스코를 보는 순간, 마치 타임 머신(time machine)을 타고 먼 세계로 날아온 느낌이 들었다.
쿠스코는 옛날에 잉카 제국의 수도로서 태양신을 숭배한 잉카 사람들의 우주관의 중심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이곳을 침략하여 잉카 인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쫒겨 들어갔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이곳을 정복한 후 잉카의 초석 위에다 스페인식의교회나 저택을 지었다. 그래서 잉카와 스페인의 두 문화가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쿠스코가 더욱 특성 있는도시가 되었다.
맞추피추 전경
쿠스코 근교에는 잉카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돌 구조물은 그 정교함이 대단했다. 그 당시에 건조되었던 다리, 터널, 관개용 수로 등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서 그 기술의 우수함을 새삼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 쿠스코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잉카의 숨결이 아직도 생활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쿠스코의 중심에는 아르마스 광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광장 옆에는 서구 양식의 대성당이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잉카의 본 바닥에서 스페인의 위력을 과시하는 곳이었다.
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한 후 태양의 신전에 있는 금은 본국으로 가져가고, 신전의 자리에다 스페인식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페루는 지진대에 속해 있어서 가끔 지진이 일어나는데, 몇 번의 대지진 때에 스페인 사람들이 세웠던 교회 건물들은 지진에 무너졌는데도 잉카사람들이 건축한 돌 구조물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잉카의 문명은 태양의 문명이고 돌(石)의 문명이다.
잉카의 건물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들로 구축되어 있으면서 방향은 태양의 방향을 기점으로 하여 배열되어 있었다. 교외에 있는 성벽 유적으로 갔을 때 성벽에 사용된 돌의 크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쿠스코 Armas 광장
거대한 바위를 잘 다듬어서 작은 바위들과 섞어서 조금의 빈틈도 없이 쌓아 올려서 성벽을 구축해 놓았다. 탐보마차이 라고 불리는 곳에는 우기나 건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일정량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다. 이곳은 그들이 성스러운 샘이라 부르는 곳으로 잉카 시대에는 목욕탕으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물이 어디에서 흘러오고 있는지 근원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쿠스코에서의 첫날은 힘든 일정이었다. 장거리 비행이 계속된 데다 계속해서 고산
지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심신이 무척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짜여진 여행 일정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시내 투어를 진행시켰다.
오후 늦게 시내 탐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몸의 컨디션에 이상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행 시의 처신이나 건강에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막상 부딪치고 보니 여행 중에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두통이 시작되면서 속이 니글거리고 숨이 가뻐져왔다. 그러나 치료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미리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호흡과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물만 자주 마셨다.
쿠스코에서 만난 여학생들
여행의 목적은 삶의 현장을 체험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쿠스코 에서의 숙소도 배낭 여행자들이 주로 묵는 평범한 곳으로 정했다. 그곳에서 이틀간을 머물면서 정말 값지고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비록 말은 통할 수가 없지만 감정의 교환으로 체험한 그곳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 생김새가 우리와 닮아서인지 어느 외국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따사로운 정이 쿠스코를 떠나올 때의 이별을 더욱 슬프게 했다.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생 Magaly 와 Zanet 은 쿠스코 시내여행을 같이 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평생의 숙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씩 그 약속이 나의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잃어버린 도시 마추 피추(Machu Picchu)
쿠스코에서 2일째의 날이다. 오늘은 불가사의 공중도시 Machupichu 탐방을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맞추피추로가는 기차역으로 갔다. 색색으로 예쁘게 단장을 한 맞추피추행 기차에 올랐다.
색색으로 단장한 아담한 협궤열차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숨이 차는듯 기적 소리를 길게 뿜으며 산 위를 향해서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올라갔다. 쿠스코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그림 같은 계곡을 약 4시간을 달리니 깍아지른듯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아있는 사이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산간 역에 와서 닿았다. 맞추피추 역이다. 기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산들이 깍아지른 듯이 솟아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열 구비 이상의 지그재그식 도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산 위에 오르니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맞추피추의 유적들이 눈앞에 펼쳐졋다. 돌로 축조된 부분만이 정연하게 보존되어 있는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이곳이 바로 공중 도시, 또는 잃어버린 도시로 불려지는 마추피추 였다.
이곳은 잉카 사람들이 스페인이 침략을 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어 와서 험준한 산 위에다 만든 비밀 도시였다. 그러나 이 비밀 도시의 수수께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잉카 사람들은 이 도시를 불태우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폐허가 된 채 신비의 지역으로 숨어있던 이곳을 1911년 미국인 하이람 빙검 이라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안데스산맥을 넘다가 예사롭지 않은 지역이 있어 탐험을 해본 결과 이 비밀 도시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추 피추는 높이 솟아 있는 산들과 절벽 그리고 무성한 열대 우림에 둘러싸여 아래에서는 볼 수가 없고 공중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있다고 하여 공중 도시란 이름이 붙여졌다.
맞추피추 주변의 산세
공중에서 본 마추 피추의 총면적은 약 5평방km이며 절반 가량이 경사면으로 되어 있다. 주위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건축물은 돌로서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다. 경사면은 식량을 생산하는 계단식 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시가지에는 군데군데 양수장이 있고, 그리고 목욕터, 묘, 태양의 신전, 궁전, 기술인 거주지, 일반인 거주지, 중앙 광장, 태양의 문, 독수리 신전, 감옥 등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들이 잘 배치되있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정복했을 때 잉카의 다른 도시들은 모조리 파괴당했지만 이곳만은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잉카 시대의 잃어버린 과거가 외침에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곳이어서 그 귀중함이 더해지고 있다.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마추 피추의 시가지를 걸을 때에 이상야릇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고 돌면서 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사진 곳의 계단식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잉카인 농부들, 정교한 기술로서 석벽을 쌓는 기술자들, 태양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의식, 목욕 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뇌리를 스치면서 역사의 의식 속으로 나 자신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한없는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이러한 저력을 가진 잉카인들이 왜 그들의 제국을 보존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을까? 그들은 이곳을 버리고 또다른 찬란한 비밀 도시를 어디엔가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기술이 어느 정도였기에 그 옛날에 이렇게 웅장하게 또 정교하게 석조물을 건조했단 말인가? 의문의 꼬리가 계속 이어졌다.
고산 지대이어서 일기의 변화가 심했다. 치솟은 산봉우리에 안개구름이 감아 돌더니 빗방울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떠너기 전에 한 골목이라도 더 다녀 보기 위해서 비를 맞으면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부지런히 다녔다.
맞추피추 석조 유적들
어느덧 하루의 해도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쉬움을안은채 서둘러 귀로를 재촉했다. 버스를 타고 내려와서 쿠스코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은 부딪치고 만나고 기억하고 헤어짐의 연속이다. 숨가쁘게 산기슭을 오르는 열차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의사를 통하면서 아쉬운 시간들을 엮었던 칠레에서 왔다던 부녀(父女)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쿠스코에 돌아왔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저녁을 맞이했다. 고산병의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데도 내일이면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는 Magaly와 Zanet을 데리고 쿠스코 시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Armas 광장으로 갔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쿠스코의 밤을 구경하면서 선물도 사주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지금도 예쁜 소녀 Magaly와 Janet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으며 떠오른다.
Good Bye! Boy
Good Bye! Boy, 지금도 그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10여년이 넘었으니까 이제는 그때의 소년들은 청년으로 성장해있겠지...
기차를 내려서 맞추피추 에 오르려면 열두 구비의 지그재그길을 버스를 타고 올라야 한다. 맞추피추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탈 때에 10여세의 소년들이 같이 올랐다. 그들도 같이 맞추피추 구경을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맞추피추 탐방을 끝내고 내려오기 위해 버스를 탓는데 올라올 때 탓던 같은 또래의 소년하나가 버스에는 타지 않고 버스 앞에 서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출발하자 그 소년은 지그재그 버스길을 질러가는 인도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탄 버스가 지기재기 길을 돌아 다음 지기재그 출발 지점에 다다르니, 인도로 뛰어내려간 그 소년이 먼저 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탄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Good Bye!를 외치고는 다시 지름길 인도로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버스가 다시 다음 지그재그 지점에 다다르면 또 그 소년이 먼저와서 기다리다가 우리가 탄 버스를 향해 해서 손을 흔들며 Good bye!를 외치고 다시 지름길로 향해 달려내려갔다.
열두 구비마다 그렇게 Good bye!를 외치고 마지막 종착 지점에 버스가 다다르니 그 소년은 먼저와서 우리가 탄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가 멎으니까 이번에는 버스에 올라와서 Good bye!를 공손하게 하며 인사를 했다. 그래서 이 소년들을 Good bye! Boy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tip을 주기도 했다.
Cusco를 떠나던 날
쿠스코를 떠나는 날이다. 아쉬움이 가슴 가득했다. 그러나 짜여진 일정은 쿠스코에서의 더 이상의 시간을 허락지 않았다.
다시 리마로 가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Nasca Line을 보기 위해 Nasca 로 가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Lima로 내려가는 비행기 시간이 새벽 6시여서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Magaly와 Janet도 공항에 같이 간다고 했다. 고마웠다.
공항까지 따라온 Magaly와 Zanet은 출국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디오스(Adios!)'하며 아쉬워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려는지.......
쿠스코 공항에서
신비에 싸인 나스카 라인(Nazca Line)
리마에 도착한 후 바로 Nasca로 향했다. 리마에서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거의 사막으로 이어진 평원을 7시간 정도를 달려서 다다른 곳이 수수께끼의 지상 그림으로 알려진 나스카(Nasca) 라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도시에 들어서니 얼마전 지진에 의해서 파괴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고, 한편에서는 부서진 집들을 다시 세우는 작업들이 한창이었다.
나스카에는 신비에 싸인 갖가지 거대한 지상 그림들이 광대한 대평원에 그려져 있다. 공중에서만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직선, 삼각형 도형, 동물, 새, 물고기, 곤충, 식물 등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들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 가설로서 우주인설, 하늘을 나는 사람설, 성좌를 나타내는 달력설 등이 있다.
그림은 검은 돌이나 모래를 치워서 흰색의 지면이 나타나도록 하여 그려져 있는데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지역이어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그림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큰 것은 그 길이가 300m 이상이며, 그 수는 200여개로서,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거대한 대지의 캠버스에 그려져 있다.
지상 그림중 크게 부각된 것들은 고래, 길게 뻗어 있는 이등변 삼각형, 외계인의 모습, 개, 원숭이, 독수리, 벌새, 거미, 도마뱀, 나무, 펠리칸, 앵무새, 물고기 등이다. 활주로 모양으로 뻗은 많은 선들은 무엇 때문에 새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선들의 끝부분이 모두 동남부의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나스카로 향하는 버스속에서 떠오르던 또하나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스카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머물면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다가 음료수가 쏟아져서 나의 옷에 젖어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웃음을 먹으므면서 자기의 보따리 속에서 갈색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어서 닦아주었다. 아마도 시골로 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 순수한 모습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나스카행 버스에서 만난 이태리 청년
나스카 지방에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 900년 정도에 걸쳐서 다양한 문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지상 그림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9년 폴 코소크 라는 학자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사막의 평원에 새겨진 선들이 단순한 도로의 유적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항공기로 확인해 본 뒤에 지상 그림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항공 측량을 했었지만 그림의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몇 개의 그림은 손상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나스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곳은, 사막 속의 공동묘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따가운 모래 벌판을 한참 동안달리니 하얀 모래 위에 유골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모래 벌판에 도착했다. 얼마나 긴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굴된 묘지에는 머리카락과 더불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갖가지 미라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 옛날의 천을 둘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스카에서의 이틀, 그러나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들이었다. 신비에 싸인 잉카인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마음은 수수께끼에 싸인 지상 그림을 보면서 점점 더해졌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발달한 기술을 가졌을까? 지식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왜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까? 등등 의문에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나스카의 사막 공동묘지의 미라
나스카의 여행시 언어 소통에 힘들어하는 나를 진심으로 도와 주던 이탈리아 청년 삐에로,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해주던 덴마크 아가씨들 모두가 아련한 추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여행 중에 만난 외국 친구들과
Lima를 둘러보면서
나스카 탐방을 끝내고 리마로 돌아왔다. 리마의 탐방은 페루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다 두었다. 며칠간이지만 페루에 좀 익숙해진 후에 수도인 리마를 둘러보고 싶어서였다.리마는 잉카의 한(恨)을 안고 있는 도시였다.
리마를 탐방할 때에는 시골 도시보다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곳이기에 좀 긴장이 되었다. 혼자서의 여행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이 쓰여졌다. 먼저 적당한 숙소를 정해야 했는데 대도시인만큼 위치와 가격 면에서 적당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운이 좋게도 내가 생각한 것에 걸맞는 도심에 있는 중급 호텔을 하나 찾아냈다.
숙소를 정한 후 숙소에서 휴식을 좀 취한 다음, 걸어서 숙소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침 숙소가 시내 중심지여서 주변에 큰 호텔이 있었다. 큰 호텔의 로비에 가서 영어가 통하는 카운터 직원에게 궁금했던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영어를 하는 카운터 직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음날의 시내 관광을 예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곳은 특급 호텔이 아니면 영어가 통하지 않아서 무척 불편했다.
리마는 남미로 가는 북쪽의 현관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근대적인 도시였다. 또 이곳은 남미에서 제일 가는 근대적인 공항이 있는 곳이어서 남미의 관문의 역할을 하는곳이었다. 시가지는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리마의 시가지를 둘러볼 때에는 이상하게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우람한 식민지 풍의 건물들과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로 형성된 시가지에는 곳곳에 정복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동상들의 사이를 그들과는 모습이 다른 인디오들과 메스티조들이 밝지 않은 표정으로 오가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그들의 표정에는 무언가 한스러운 감정이 서려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곳 리마는 사계절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는데 5월이 되면 약간의 안개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들은 이것을 잉카의 눈물이라 불렀다. 스페인식의 도시들은 대개가 도시의 중심부에 아르마스 광장을 가지고 있다. 리마도 역시 구시가지의 중심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하나의 중심인 산 마르틴 광장이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정부 청사, 시 청사, 대성당, 중앙 우체국 등이 있어서 관청 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 광장들은 낮에는 관광객들로 메워지고 저녁이 되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었다.
이곳 관청 거리의 특징은 정부 청사 주변이라는 권위적인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공 기관의 건물 앞에는 대개 광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광장을 막론하고 저녁이 가까워지면 시민들이 휴식을 위해 모여들었다.
아르마스 광장의 한구석에는 이곳을 정복한 피사로의 동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광장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 대성당의 위용은 식민지 시대의 권위를 상상케 해주었다.
많은 교회 중에서도 특히 산프란시스코 교회는 주성전, 많은 예배실, 카타콤베 라는 지하 묘지, 수도원, 종교 예술 박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관과 내부의 장식이 아름다웠고, 또 그림, 책, 조각 등 많은 유물들 보존하고 있었다.
리마의 황금박물관 앞에서
교회 지하에 있는 묘지는 유골들을 관에다 질서 있게 보관해 두고 있으면서 관광 코스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국립 박물관, 국립 미술관, 황금 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설 박물관인 황금 박물관에는 잉카 시대는 물론이고 잉카 이전 시대의 유물들, 특히 황금 부장품과 도자기로 빚은 인간상들이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전시품들은 찬란했던 잉카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미라의 머리 유골 표면의 일부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당시의 의술을 짐작해 보았다. 또 도자기로 빚은 인간의 상에 나타난 성(性)의 표현은 그 당시의 성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리마에서의 시간은 상당히 긴장된 시간들이었다.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사전의 충고들을 생각하면서 잠시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확인한 것은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보이지만 않으면 서로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이야기해 주고 싶다.
숙소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던 직원들, 숙박객도 아닌데도 여러 가지로 도와주던 쉐라톤 호텔의 여직원, 의사 소통이 잘 안되어 어려워하면서도 항공권 확인을 해주던 여행사 직원, 박물관 견학을 친절히 안내해 주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안내인 .... 모두가 그리워진다.
다정다감한 인디오의 후예(後裔)들
육대주 탐방의 마지막 지역인 남미의 탐방을 마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세계의 문화를 비교해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족한 느낌이 든다. 물론 앞으로도 문화 탐방은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번의 남미 방문은 색다른 감회를 안고 왔다.
여행이 끝난 후에 이렇게도 아쉬워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어떤 지역을 여행할 때보다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고, 비록 말은 거의 통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으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그들의 외모와 감정에서 우리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과 대하면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소하지가 않았다.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때 한국에서 왔다는 말은 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꼬레아 최고라는 표현을 해줄 때에는 고맙기도할 뿐더러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그곳의 전통 음료를 사서 먹을 때 반잔을 더 부어 주는 인심에 이곳이 우리의 시골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쉬워하며 언제 또 올건지 물어 왔을 때에는 차마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내년에 또 오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대답으로 그 들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 줄 수밖에 없었다.
쿠스코 숙소앞에서
물론 그곳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게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거스름돈을 모르는 체하고 있는사람에게 매정스럽게 거스름돈을 요구하기도 한 적이 있었고, 또 자기 호텔의 숙박객이 아니라고 간단한 부탁을 거절할 때에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쿠스코에서 고산병 증세로 먹지도 못하고 두통을 앓고 있을 때에 낯선 거리를 안내하면서 시간을 같이해 주던 학생들,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면서 버스에 내려서도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떠나지 않던 어느 인디오 여인, ... 국경을 초월한 인정을 느꼈다.
순탄치 않은 역사를 가진 페루, 그러나 이제는 정복자의 오만도 인디오의 한스러운 과거도 모두 옛날의 흘러간 역사 속에 묻어 버리고, 낙후된 이 나라가 하루빨리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멀고먼 귀로의 길을 재촉했다.
세월이 흐른 후에 보내온 Magaly 사진
Peru Photo Gallery
리마의 해변에서 쿠스코 공항에서 마추피추 유적을 돌아보면서
마추피추행 기차에서 기차에서 만난 칠레 여인 에서 한국에 간 동생 안부를 묻던 인디오여인
알파카와 인디오여인들 쿠스코 아르마스광장에서 쿠스코 유적지에서 Magaly, Janet
첫댓글 너무 좋군요 ,자주 여행 관련 글을 많이 오려 주세요 매우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