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전 (略傳) (1世~15世祖) 始祖 본관은 평산(平山).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 시호(諡號:돌아가신 후에 생전의 공덕을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던 이름)는 장절(壯節:절의가 굳세다).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始祖).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고려사열전에는 광해주(현재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태조가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하니 신숭겸이 “제가 쏘아 보겠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활과 화살, 안장과 말을 주니 신숭겸이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거늘 태조가 웃으며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였다. 신숭겸이 명령에 따라 쏘아서 과연 꼭 적중시키기를 명한 바와 같이 하니, 태조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옛이름)로 관향(貫鄕:시조의 고향)을 삼게 하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전답 3백결(三百結)을 아울러 하사하여 대대로 그 조세를 받아먹게 하였으며, 그 땅을 궁위(弓位)라고 이름하였다. 927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현재 영천)를 습격한 뒤 신라 왕도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 묘정(廟庭)과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고, 태사사(太師祠) 덕양사(德陽祠) 동양서원(東陽書院) 표충사(表忠祠) 도포서원(道浦書院) 율리사(栗里祠) 경백사(景白祠) 순절단(殉節壇) 용산단(龍山壇) 영각유허(影閣遺墟) 춘천방동영당(春川芳洞影堂) 장군단(將軍壇)에서 향사(享祀)한다. 탄생지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용산단(龍山壇) 경내, 순절지(殉節地)인 대구 동구 봉무동 파군재(破軍재) 삼거리,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경내에 동상(銅像)이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삼국사기』,『민족문화대백과사전』,『평산신씨문헌록』,『표충사지』. 二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 十一世 十二世 자명(自明) 봉익대부(奉翊大夫)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냈다. 헌주(憲周)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十三世 군평(君平) 좌대언공의 둘째 아들로서 충숙왕(忠肅王)때 과거에 급제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 어사대부(御史大夫)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으며 공민왕(恭愍王) 13년(1364)에 별세했다. 현(
중전(仲全) 고려사(高麗史)에 중전(仲佺)으로 기록되고 혹은 중전(仲詮)이라고도 한다. 호는 만은(晩隱)인데 충혜왕(忠惠王) 元年(1340) 과거에 장원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원동지밀직사사(樞密院同知密直司事)를 지냈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훈공(勳功)으로 은산백(殷山伯)에 피봉(被封)되었다. 중해(仲諧) 은산백(殷山伯) 중전(仲全)의 아우로서 검교(檢校)를 지냈다. 욱(昱) 상호군(上護軍) 헌주(憲周)의 아들로서 진사(進士)가 되고 정국공(靖國公) 평원군(平原君)으로 피봉(被封)되었다. 十四世 이(彛) 전리판서공(典理判書公)의 둘째 아들로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안(晏) 고휘(古諱)는 전(
규(珪) 어사(御史) 군평(君平)의 맏아들이요 참판을 지냈다. 혹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開城尹)이라고도 한다. 혼(琿) 어사공(御史公)의 둘째 아들이요 한림(翰林)을 지냈다. 수(璲) 어사공(御史公)의 셋째 아들이다. 금오위(金吾衛) 정용장군(正勇將軍)을 지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조참의에 제배(除拜)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 우(瑀) 어사공(御史公)의 넷째 아들이요 유수(留守)를 지냈다. 혹은 판사(判事)라고도 한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순(珣) 어사공(御史公)의 다섯째 아들이요 소윤(少尹)을 지냈다. 용희(用羲) 국자진선(國子進善) 현(
윤공(允恭) 은산백(殷山伯) 중전(仲全)의 맏아들이다. 벼슬은 예조전서(禮曹典書)이며 혹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라고도 전한다. 윤안(允安) 은산백공(殷山伯公)의 둘째 아들이요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국(國) 검교(檢校) 중해(仲諧)의 아들이요 벼슬은 사정(司正)이다. 현(玹) 평원군(平原君) 욱(昱)의 맏아들이요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玎) 평원군(平原君)의 둘째 아들이요 현령(縣令)을 지냈다. 十五世 아(雅) 자(字)는 담수요 호는 한천자(漢川子)이며 이부상서(吏部尙書) 익지(翼之)의 아들이다. 공민왕조(恭愍王朝) 정유년(1357)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공양왕(恭讓王)때 평산(平山)으로 퇴거(退居)했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동양서원(東陽書院)에 배향되었고 밀직공파(密直公派) 파조(派祖)이다. 정도(丁道) 자(字)는 유지(由之)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이(彛)의 맏아들이요 봉상시윤(奉常寺尹)을 지내고 세종(世宗) 병인년(1446)에 별세했다.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파조(派祖)이다. 정리(丁理) 자(字)는 추지(推之)요 판전농시사공(判典農寺事公)의 둘째 아들이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으며 동양서원(東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장령공파(掌令公派) 파조(派祖)이다. 감(鑑) 종부시령공(宗簿寺令公) 안(晏)의 맏아들이요 선무랑(宣務郞)으로 서흥현령(瑞興縣令)을 지냈으며 현령공파(縣令公派) 파조(派祖)이다. 개(
효(曉) 호(號)는 서호산인(西湖散人)이요 우왕(禑王) 신유년(1381)에 종부시령공(宗簿寺令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太宗) 임오(壬午)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지냈다. 세종(世宗) 신사년(1461)에 별세하고 증손 우참찬(右參贊) 영(瑛)의 귀(貴)로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언공파(正言公派) 파조(派祖)이다. 건(虔) 종부시령공(宗簿寺令公)의 넷째 아들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사랑(承仕郞) 풍저창부승(豊儲倉副丞) 권지교서(權知敎書) 저작랑(著作郞)을 지냈다. 자손은 무후(無后)하다. 하(夏) 혹은 하검(夏檢)이라고도 한다. 참판 규(珪)의 아들이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파조(派祖)이다. 호(浩) 한림공(翰林公) 혼(琿)의 맏아들이요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세종(世宗) 임자년(1432)에 별세하니 사간(思簡)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사간공파(思簡公派) 파조(派祖)이다. 연(演) 한림공(翰林公)의 둘째 아들이요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냈다.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파조(派祖)이다. 기(淇) 한림공(翰林公)의 셋째 아들이요 온수감(溫水監)을 지내고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증직(贈職)되었으며 율리사(栗里祠)에 추배(追配)되었다.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파조(派祖)이다. 효창(孝昌) 자(字)는 성대(聖大)/우지(友之)요, 호(號)는 화봉(華峰)이며 금오위(金吾衛) 수(璲)의 아들이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세종(世宗) 경신년(1440)에 졸하니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 제정(齊靖)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제정공파(齊靖公派) 파조(派祖)이다. 호(灝) 유수(留守) 우(瑀)의 아들이요 벼슬은 전서(典書)이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동양서원(東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派祖)이다. 인기(仁錡) 자(字)는 인보(仁寶)요 소윤(少尹) 순(珣)의 아들이다. 첨의부찬성사한림학사(僉議府贊成事翰林學士) 이상(貳相)을 지냈다. 이상공파(貳相公派) 파조(派祖)이다. 득청(得淸) 자(字)는 징수(
소(紹) 전서(典書) 윤공(允恭)의 맏아들이요 현감(縣監)을 지냈다. 자손(子孫)은 전함이 없다. 유(維) 전서(典書) 윤공(允恭)의 둘째 아들이요 여조(麗朝)에 진사(進士)를 지냈다. 혹은 음(蔭)으로 창신교위(彰信校尉) 중랑장(中郞將)이라고도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派祖)이다. 강(綱) 전서(典書) 윤공(允恭)의 셋째 아들이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감찰공파(監察公派) 파조(派祖)이다. 시현(時見) 상장군(上將軍) 윤안(允安)의 아들이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판윤공파(判尹公派) 파조(派祖)이다. 도지(道之) 사정(司正) 국(國)의 아들이요 호조참판을 지냈다. 참판공파 파조(派祖)이다. 우방(佑邦) 군수(郡守) 현(玹)의 아들이요 군수(郡守)를 지냈다. 군수공파(郡守公派) 파조(派祖)이다. 우국(佑國) 현령(縣令) 정(玎)의 아들이요 군수(郡守)를 지냈다. 자손(子孫)은 전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