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정맥 종주를 통해 1년여에 걸쳐 예향 전라도와 호흡을 함께했다. 토박이들이 고향 찾은 이방인들을 너그러운 품으로 받아줌에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호남인들은 자신이 받은 그대로 꾸밈없이 살아 왔다. 삶 자체가 그대로 문화가 된 그 길을 붓 가는 대로 반추해 본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밤과 낮, 비바람, 눈보라, 강추위, 신록, 단풍, 야생화와 함께 했다. 표시된 거리로만 볼 때 1990년대 초반 이 길을 개척한 이들이 산출해 놓은 462km다. 물론 이 수치는 도상거리다. 여기에 고도차에 따른 상수를 산출해 더하면 실제 거리다. 이는 조물주만이 안다. 그러나 우리 자유인 레전드들은 각자의 몫이지만 자신만의 거리를 기억할 자격이 있다.
「영취산 → 송계고개(15.4km) → 오계치(29.6km) → 30국도(43.5km) → 모래재(63.9km) → 슬치(84.3km) → 불재(98.7km) → 염암고개(106.3km) → 구절재(128.3km) → 개운치(139.7km) → 추령(147.7km) → 천치재(181.5km) → 오정자재(191.4km) → 이목고개(211.7km) → 삼봉고개(220.4km) → 선돌부락(232.2km) → 노가리재(237.1km) → 백남정재(248.3km) → 장불재(254.3km) → 서밧재(274.3km) → 개기재(293.9km) → 가위재(306.4km) → 웅치(318.8km) → 곰재(347.4km) → 봇재(363.0km) → 그럭재(372.0km) → 이드리재(383.4km) → 석거리재(399.3km) → 굴목이재(412.2km) → 접치(417.0km) → 송치(435.6km) → 마당재(443.4km) → 백운산(462.0km)」
호남 정맥을 개관해 본다. 조석필 님의 ‘산경표를 위하여’에서 발췌했다.
「호남정맥이란, 산경표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고, 그것이 다시 금남정맥 및 호남정맥으로 나뉘며, 호남정맥은 그 시작점이 웅치라 적혀있다. 그렇게 보면 462km 중 63.3km는 금남호남정맥이고, 나머지 398.7km만 순수한 호남정맥인 셈이 된다. 그러나 금남호남정맥을 금남정맥이기도 하고 호남정맥이기도 하는 공통부분으로 보면 영취산에서 백운산까지의 462km가 호남정맥인 것이다.
호남정맥은 호남 땅을 달리는 산줄기이다. 시작인 영취산이 경남 함양과의 경계선일 뿐, 이후 모든 산과 고개가 전라도 행정구역만을 누빈다. 전라북도 땅에 157.3km, 도경계로 61.0km이며 나머지 243.7km가 전라남도 땅이다. 장수, 진안, 완주, 임실, 정읍, 순창(이상 전라북도), 그리고 장성, 담양, 곡성, 광주, 화순, 보성, 장흥, 승주, 구례, 광양(이상 전라남도)해서 16개 시군을 통과한다.
호남정맥은 섬진강을 에두른 산줄기이다. 정맥은 두 개의 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라 하듯, 그 중 한쪽이 언제나 섬진강이라는 말이다. 반대쪽은 구간에 따라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 기타 그렇게 된다. 한마디로 종주등반 도중 왼쪽 사면에 오물을 버리는 일은 언제나 섬진강물의 오염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호남정맥 총 462km를 수역별로 보면 안쪽 462km는 전부가 섬진강의 젓줄이고, 바깥쪽 462km는 ‘산경표’의 금남호남정맥 부분인 금강 63.3km(영취산~주화산)의 젓줄이 되고, ‘산경표’의 호남정맥 부분 398.7km(주화산~백운산) 중 만경강 50.9km, 동진강 40.6km, 영산강 168.5km, 탐진강 26.1km, 기타 112.6km(사자산~백운산)의 젓줄이 된다.」
레전드들은 온 몸으로 위 도시와 만났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연환경과 문화까지 아우르면서 전라남북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장정을 이어나갔었다. 시작은 이랬다
영취산 주인 독수리 신에게 입산을 고하고 나서 장안산을 오를 때였다. 갈대숲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상교 회장님은 우리에게 모두 누우라고 했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사노라면’을 직접 부르면서 모두를 공감각적 세계로 몰고 갔다. 처음부터 너무 큰 선물을 받았었다. 환상이 깰 무렵 나에게 물었다.
“호남정맥을 무어라 생각하느냐.”
순간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도 나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일 년여 만에 만나 나눈 반가움이 핵 펀치급 질문 한 방에 날아갔다. 지금 와서 실토하건 데 나는 이런 식의 질문을 정맥 내내 받았다. 맷집이 생겨 아픈 강도는 점차 덜했어도 대부분 기억이 현문에 우답이다. 브레인스토밍 자리라면 얼마든지 잔머리를 굴렸겠지만, 주로 삶에 대한 물음이라 내 무게로는 어림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돌아와 며칠 끙끙거리며 자료를 찾아 내공을 더할 뿐이었다. 이러면서 나는 시나브로 호남에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그때 질문에 대해 2박 3일 고민하며 내린 결론은 호남가였다. 후기를 통해서다.
「咸平 천지 늙은 몸이 光州 고향을 보려하고, 濟州 어선을 빌려 타고 海南으로 건너 갈 제, 興陽에 돋은 해는 寶城에 비쳐있고, 高山의 아침안개 靈岩에 둘러있다.
泰仁하신 우리 성군 예약을 長興하니 삼태육경은 順天心이요, 방백수령은 鎭安이라.
高敞城에 높이 앉아 羅州 풍경 바라보니, 만장 雲峰은 높이 솟아 층층한 益山이요.
백리 潭陽 흐르는 물은 구비구비 萬頃)인데, 龍潭의 흐르는 물은 이 아니 鎭安處)며, 綾州의 붉은 꽃은 곳곳마다 錦山인가.
南原에 봄이 들어 각색화초 茂長하니, 나무나무 任實이요. 가지가지 玉果로다.
풍속은 和順이요. 인심은 咸悅인데, 이초는 茂朱하고, 서기는 靈光이라.
昌平한 좋은 시절 務安을 일삼으니, 사농공상은 樂安이요. 부자형제는 同福이라
康津의 상가선은 珍島로 건너갈 제, 金溝의 금을 일어 쌓인 게 金堤로다.
농사하는 沃溝 백성, 臨陂 사의 둘러 입고, 井邑의 정전은 납세인심 淳昌이라.
古阜 청청 양유읍은 光陽 춘색이 팔도에 왔네.
谷城의 묻힌 선비 求禮도 하려니와, 興德을 일삼으니 扶安 제가 이 아닌가?
호남의 굳은 법성 全州 백성거느리고, 長城을 멀리 쌓고 長水를 돌고 돌아
礪山 석에 칼을 갈아 南平樓에 꽂았으니
삼천리 좋은 경은 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살아보세.」
2014. 07. 27. 장안산에 들어 2015. 06. 14. 백운산(白雲山 1,228m)에 점안식을 가졌다. 백운산은 낮은 산이 주류를 이루는 남도에서 드물게 장엄한 산세를 뽐낸다. 서쪽으로는 따리봉, 도솔봉, 형제봉, 동쪽으로는 매봉, 남쪽으로는 억불봉이 자리한다. 호남 정맥 전체를 놓고 뫼 산(山)로 본다. 장안산이 시작이고 내장산이 가운데고 백운산이 끝이다.
백운산은 우리나라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4개의 큰 능선이 남쪽과 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성불, 동곡, 어치, 금천 모두 4개의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또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선 지리산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광양만에서는 따뜻한 바닷바람이 분다. 덕분에 이 산에는 온대식물부터 한 대식물에 이르기까지 1,080여 종이 넘은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1993년부터 자연생태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백운봉 상봉을 기점으로 본대는 정맥 줄기를 따라 매봉 방향으로, 힐링팀은 억불봉 방향으로 각각의 길을 달리했다. 억불봉은 한문희 총대장님이 “흰 구름 속을 거닐며 억불봉을 보라“했고 ”백운산의 하이라이트는 억불봉이다.“라며 정 회장이 몇 번을 강조한 곳이다. 지방방송까지 끄며 그를 만나러 갔다. 후기를 정리하다 ‘억불봉 정상 상봉에서는 한려수도와 광양만의 빼어난 절경을 볼 수 있다.’는 자료를 보게 된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땀깨나 흘리며 찾은 억불봉은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미인이 자기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듯 억불봉이 그랬다. 너와나 님의 밧데리가 소진되기 직전 우리는 억불봉 0.7km 앞에 섰다. 거기엔 한 대장 님과 대연 형 화성 형과 다른 한 분이 계셨다. 이런 만남은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다.
“여기서 만나다니”
“억불봉을 다녀오는 길이다. 어렵게 세 봉우리를 넘어 하산 직전 직벽 30m에 밧줄이 철거되었다. 이러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다. 길을 되돌리는 게 맞다.”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거스르면 안 된다. 오늘은 여기서 하산하자. 기다린 이유다.”
억불봉 선계에서 정상주로 대미를 장식하려던 계획이 이곳으로 수정되었다. 정 회장이 지난번에 이어 죽력고를 꺼내며 술 향기의 진수를 재방송 한다. 이번에는 귀한 손님 한문희 총대장이 자리해 격이 배가 되었다. 백운산 정상에서 팀원들의 간곡한 부탁에 끄덕도 하지 않았던 정상주였다.
여기까지 오기 전 힐링 팀은 산주인의 허락 하에 백운산 정상에서 한 시간 가까이 자리를 폈었다. 남산 타워 돌 듯 4위를 돌았다. 눈도 돌고 몸도 돌고 가슴도 돌았다. 운무 속에서 무대는 명과 암이 수없이 교차되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듯 똑같은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 1초 단위로 바뀌는 무대에서 60분에 60을 곱해 360가지가 넘는 변화를 한 자리에서 만끽했다.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찰라를 살아가는 인간이다. 신선의 자리에서 이런 1시간을 가졌다는 건 축복이다. 7인 모두 모든 걸 내려놓고 하나로 동화되어 그간 사회에서 찌든 속을 정화했다. 호남정맥이라는 뜻밖의 자리에 초대된 나의 대미는 이랬었다. 나는 복 많이 받은 놈이다.
‘김장호’ 선생님은 백운산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다.
「‘백운산’이란 이름은 산 이름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 중 하나이다. 게다가 ‘백운대’, ‘백운봉’ 등 ‘백운’을 얹은 봉우리들까지 합치면 그것은 수효로 쳐서 한국에서 단연 으뜸갈 것이 분명하다. 가까이 일본이나 중국 등 같은 한자문화권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런 사례는 한국인의 얻던 상황에서 비록된 것일까. 조선 효종 때 명필 허목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백운사 스님에게
스님이 백운산에 돌아오니
흰 구름이 지팡이 따라 절에 왔네.
절에 또한 무심한 늙은이 한 분 있으니
흰 구름 함께 세상 시비 모르네.
이 짧막한 단련짜리 칠언시에서 세 번이나 겹쳐 나오는 ‘백운’은 ‘무심’과 ‘무시비’에 그 뜻이 걸려있다. 국내에 수 없는 백운사 가운데 여기 백운사가 어는 절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대로, 이번에는 절이 게재하지 않는 또 하나, 정조 때 실학자 정 다산에게도 ‘백운’이라 제한 오언시가 있다.
가을바람 일어 흰 구름 날리니
파란 하늘에 티끌 한 점이 없구나.
어이타 가벼운 이 몸이여
훨훨 이 세상 벗어나려나.
여기서도 매양 ‘백운’은 ‘티끌 한 점 없이’, ‘이 세상 벗어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백운 혹은 백운산을 읊은 대표적인 이 두 편의 시에서 우리가 건져내는 감회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는 첩첩 산주름 안에 갇혀 사는 한국인의 눈에 산 너머로 시원스레 흘러 다니는 흰 구름은 분명히 자유의 표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흰 구름이 안겨주는 청결감, 그 표일한 정감은 한국의 지리, 특히 기후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어서 이런 심리적 투영에 바탕하여, 그들은 나아가서 그 흰 구름처럼 집착에서 벗어나듯 속세간 이해타산에서 떠나 무심으로 이르는 길을 생명의 이상으로 살았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런 사상은 불교와 함께 자연에서 인간의 도리를 터득하는 노장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테지만, 그것은 유독 한국인의 가슴 밑바닥에 숨 쉬는 그들 논리와 감정의 기본 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운산’이란 산 이름은 한국인의 고매하고도 청결한 성품으로서 모든 산에 대한 정서를 대변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 지금부터 우리가 걸어온 구간별로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제1구간은 영취산에서 신무산까지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호남정맥 산줄기가 분기한다. 이 산 북쪽으로 덕유산의 크고 넉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백운산과 지리산도 보인다. 동쪽으로는 기백산과 황석산이 있다. 영취산 아래 무령고개에서 장안산(長安山 1,236.9m)을 오른다.
호남 정맥의 시작이자 진산인 장안산은 영취산으로부터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 받아 금남호남정맥을 통해 충남과 전라도 방면으로 광활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산이다. 이 산 북쪽에서 발원하는 계류는 대지를 따라 흘러 금강 상류가 된다. 또한 남쪽에서 흐르는 물은 백운천을 이룬 다음 섬진강 상류가 된다.
제2구간은 자고개에서 30번 국도까지다.
이 구간 최고봉인 팔공산에서 성수지맥과 천황지맥이 갈라진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을 지난다. 데미샘은 임실, 구례, 화개장터를 거쳐 광양만 바다로 흘러들기까지 500여리를 남하하는 섬진강의 발원지다. 1구간에 만난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다.
이 구간에서 나온 중국 명주 수정방은 먼발치에서 봐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복통이 원인이었다. 오랜 기간 게으름을 떤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구간이기도 했다. 이후로 호남정맥 길은 사투의 연속이었다.
제3구간은 30번 국도에서 모래재까지다.
이 구간에서는 말 귀를 닮았다는 마이산(馬耳山 685m)을 지난다. 이 산은 금남호남정맥 상에 위치하며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단단히 이어준다. 또한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물줄기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수마이산(678m)과 암마이산(685m)으로 불리는 두 봉우리가 특징이다.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이산 일대는 국가문화재다. 세계 최고 권위의 여행안내서 프랑스 미슐랭그린가이드에서 만점 별 3개를 받았다.
외손자 돌잔치 당일에 참석한 강화 님에게 평생 빚을 진 구간이기도 하다. 탈출을 결정하고 내리다 가시나무에 긁히고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고 계곡물에서 막혔다. 탈진 직전에 극적인 생환을 했다. 오히려 산 경력이 일천한 강화 님의 침착함으로 헤쳐 나온 두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늦게나마 행사에 참석했다는 거다. 그때를 돌이키다 보니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제4구간은 모래재에서 실치재까지다.
실질적인 호남정맥 1구간의 시작이다. 산경표에 의하면 조약봉 분기점을 출발한 백운산에 이르러 그 맥을 다한다. 주화산, 모래재, 곰재, 만덕산을 지난다. 만덕산은 정맥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있다. 이 구간에서는 곰재를 지나며 웅치전투에 관한 기념비를 만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7월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벌어진 큰 전투다.
이 구간 아침식사 자리가 일품이었다. 시계도 완벽했다. 거기에 정 회장의 명쾌한 설명이 있었다.
“저게 전주 시내다. 익산 왕궁 쪽이다. 저쪽은 부안이다. 아래는 완주다. 그 아래는 광주다. 다시 동쪽을 보자. 마이산과 성수산이다. 서쪽은 내장산이다. 남쪽은 무등산이다. 북쪽은 대둔산이다.”
하산 후에는 전주식 비빔밥을 먹었다. 목이버섯이 곁들어진 밑반찬도 정갈했고 맛도 좋았다. 여기에서 ‘의리’라는 건배사가 처음 나왔다. 완전 지친 몸으로 마지막 도착한 회원을 배려하는 이형도 팀장의 모습을 본 정 회장의 순발력이다.
‘호남정맥을 위하여’
‘의리’
제5구간은 실치재에서 염암재까지다.
슬재, 장재, 갈미봉, 쑥재, 옥녀봉, 경각산, 불재, 염암재를 지난다.
이번 구간부터는 ‘경각 내장 추월산’군(大)으로 든다. 이중 먼저 ‘경각산 군(小)’을 보면 갈미봉(540m), 쑥재(380m), 경각산(660m), 불재(310m), 염암부락재(310m), 365봉(365m), 오봉산(513m), 293봉(293m), 초당골 국도(190m)다.
이 구간에는 전북 완주군과 임실군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경각산이 있다. 고래 등에 난 뿔처럼 생긴 산이라는 명칭은, 산 아래 마을에서 보면 모악산 방향으로 머리를 향한 고래의 모습이고, 정상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고래 등에 솟아난 뿔의 형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역에서는 구이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경각산과 모악산을 아버지와 어머니 산으로 부른다.
경각산을 앞에 두고 중국의 시선 이백의 ‘홀로 경정산에 앉아(獨坐敬亭山)를 경각산으로 고쳐 읽어 보기도 했다. 새들마저 아득히 사라진 그 자리, 홀로 유유히 떠가는 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衆鳥高飛盡 뭇 새들은 높이 날아 사라지고
孤雲獨去閑 외로운 구름 혼자서 한가롭구나.
相看兩不厭 서로 봐도 둘이 다 싫증 안 남은
只有鯨角山 다만 경각산이 있을 뿐일세.
그때 후기를 다시 읽어 보니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산중대작(山中對酌)도 있었다.
問余何事棲碧山 어이하여 푸른 산에 사냐고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 웃고 대답 아니 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나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또 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다.
兩人對酌山花開 둘이서 대작하는 사이 산꽃이 피네
一杯一杯復一杯 한 잔 한 잔 다시 또 한잔이라.
我醉欲眠君且去 나는 취해 자고 싶으니 그대 돌아가도 좋으리
明朝有意抱琴來 내일 아침 오고프면 거문고 안고 오게나.
제6구간은 염암재에서 구절재까지다.
‘경각산군’ 중 염암부락재(310m), 365봉(365m), 오봉산(513m), 293봉(293m), 초당골국도(190m)이며, 이어지는 ‘묵방산군’인 분기점3(350m), 묵방산(538m), 가는정이(190m), 성옥산(389m), 왕자산(444m), 구절재(230m)다.
힐링 팀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구간이기도 하다. 뜻밖의 구절초 축제도 보고 언젠가는 만나게 될 능교를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새벽에 옥정호반 정자 옆 식당 주인을 깨워 너와나 님의 생일잔치를 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케익은 쵸코파이에 성냥이었다. 옥정호는 말 그대로 옥같은 호수였다. 여행전문가의 소감이다.
「정읍과 임실에 걸쳐 있는 호수가 있다. 섬진강 젖줄인 옥정호(玉井湖)다. 여느 호수와는 풍경부터 다르다. 물줄기는 넓게 퍼져 있지 않고 뱀이 유영하듯 산자락 굽이굽이 에둘러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가을이면 그야말로 동화 같은 가을 색에 흠뻑 젖어들 수 있다. 옥정호 물안개는 선경을 펼쳐내고 눈꽃처럼 활짝 피어난 구절초는 청초한 향기로 그득하다. 산하가 온통 붉고 화려하게 물들어 갈 때 구절초는 소박하면서도 아담한 모습으로 피어나 가을을 이야기 한다.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난 구절초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면 자연의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제7구간은 구절재에서 추령까지다.
구절재(230m)를 들머리로 ‘경각 내장 추월산군’ 중 고당산 소군 전체로 476봉(476m), 굴재(310m), 고당산(640m), 개운치(340m), 두들재(410m), 435봉(435m), 추령(380m)이다.
정 회장이 탯줄을 묻은 정읍시를 지났다. 정읍시는 전주와 광주의 중간지점인 전북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692.78㎢에 지난해 말 기준 인구는 118,328명이다. 인구밀도는 ㎢당 170명으로 16,700명인 서울에 비해 약 1/100 정도다.
정읍은 동학혁명의 성지다. 전봉준 장군이 14세 때 옮겨와 훈장을 하며 살던 고택(293호)과 동학군이 최초로 크게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적지(제295호) 역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만석보터(기념물 제33호), 동학혁명의 진원지 고부관아 등 동학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8구간은 추령에서 밀재까지다.
추령(380m)를 들머리로 ‘경각 내장 추월산군’ 중 내장산 소군과 추월산 소군 중 밀재까지다. 추령(380m), 내장산 신선봉(763m), 분기점4(530m), 백암산 상왕봉(730m), 곡두재(280m), 감상굴재(310m), 대각산(528m), 도장봉(459m), 520봉(4520m), 밀재(380m)다.
내장산은 ‘김장호’ 선생님의 ‘한국백명산기’를 발췌해 본다.
「내장산은 단풍으로 이름난 산이다. 이 산 이름을 가장 신빙성 있게 뒷받침해 주는 것은 근세 한국사의 깊숙한 비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 이 산 용굴에 왕실족보와 실록이 내장되어 전란을 모면하게 된 일에 까닭이 있다.
그것은 태인현 사람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 선비가 왜놈들의 말발굽이 전주로 들이닥치자 머슴 수십 명을 이끌고 경기전(慶基殿)으로 달려가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이태조의 초상화와 사고본(史庫本)들을 거두어, 그때 용굴암이란 암자가 있었던 이 산 후미진 바위굴 속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얼핏 들으면 전란 속에서 사직을 지키려 든 시골 선비의 한갓 충성심을 드러낸 일화로만 여겨질지 모르는 이 일은 그러나 그 사고본으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있게 한 근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내장산은, 입을 남동쪽으로 배시시 벌리고 조붓하게 오므라 붙은 안고샅을 둘러싼 아홉 개의 봉우리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동그랗게 원무(圓舞)를 벌이는 시늉이다.
그러나 한편 그 맷줄기의 이음새를 감안하여 1971년 11월 17일자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테두리에는 이 산 남으로 벌어지는 백암산 일대까지 총면적 76.03㎢를 아우르고 있으니 그로써 보면 이 산 전체는 흡사 제비 한 마리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까치봉(717m)으로 잡으면 몸통은 이 산 정상인 신선봉(763m)으로 이어지지만 두 다리는 거기서 오른쪽으로 문필봉(675m), 연자봉(675m), 장군봉(696m)으로 뻗고, 왼쪽 것은 화양리와 봉덕리 사이의 줄기로 흐른다.
어깻죽지는 물론 오른쪽에 연지봉(670m), 망해봉(650m)이요, 왼쪽은 소죽임재와 새재가 된다. 따라서 오른쪽 날개가 불출봉(610m)과 서래봉(622m)으로 쳐지듯이, 왼쪽으로는 백암산의 상왕봉(741m)과 백학봉(722m)이 떠맡게 된다.
서쪽으로 날아가는 듯한 이 산 제비꼴은 연자(燕子)봉과 서래(西來)봉이란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연자봉의 ‘연’자는 물론 제비를 말하는 것이지만, 서래봉의 서래는 모양이 논에 흙을 고르는 ‘써레’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장사 스님들은 서방정토세계를 그리는 시늉이라 주장이니, 그것은 이 산의 제비꼴 모양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된다.」
제9구간은 밀재에서 장안리까지다.
경각내장추월산 군에서 추월산 군 나머지와 광덕산 군 일부다. 이중 추월산 군인 밀재(380m)를 들머리로 하여 추월산(729m), 710봉(710m), 인산밭재(330m), 391봉(391m), 천치재(290m)를 지나 광덕산 군인 532봉(532m), 용추봉(560m), 508봉(508m), 오정치재(240m), 510봉(510m), 광덕산(584m)이다.
이 구간은 백두대간을 함께한 권영우 시인과 강화 님 셋이서 마쳤다. 추월산은 경향신문 기사에서 옮겨 본다.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을 걸쳐 둥지를 튼 추월산(秋月山·731m) 정상에서 바라본 담양호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거기다 단풍을 보는 맛도 좋다.
산세가 급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언뜻 악산처럼 보인다. 등산객들은 그러나 다가가면 어느 명산 못지않게 ‘포근한 산’이라고 입을 모은다. 초보자도 오를 수 있는 높이여서 사시사철 등산객들이 몰린다. 남쪽 담양읍에서 바라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닮아 ‘불심(佛心)’을 키우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추월산은 전체가 전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돼 있다. 추월산은 이름에서부터 가을 냄새가 잔뜩 묻어난다. 가을밤 산꼭대기에 보름달이 걸려 좀체 기울어지지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 추월산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거대한 담양호가 받쳐줘 계절 분위기를 더욱 살려낸다. 낮에는 만산홍엽의 산 그림자가 호수에 빠져 물빛이 원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단풍산’으로 널리 알려진 인근 내장산보다 단풍이 더 곱고 아기자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10구간은 장안리에서 방아재까지다.
장안리에서 방아재까지다. 장안리를 출발하여 262봉, 332봉, 덕진봉(384m), 88 올림픽 고속도로를 지나 봉황산(236m), 서암산(450m), 시흥부락도로(210m), 설산어깨(400m), 삼봉부락재(210m), 무이산(305m), 과치재(130m), 남해고속도로(130m), 연산(505m), 방아재(290m)까지다.
이 구간에서는 정 회장, 불고 님, 강화 님과 설산을 올랐다. 힐링 차원에서다.
「주옥같은 명산이 줄지어 이어지는 호남정맥 능선길. 무명에 가까운 산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높지 않지만 소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아기자기한 바위능선이 뒷마무리를 한다. 높이 441m의 정상부는 거대한 바위성벽, 철옹성을 연상케 한다. 해가 산에 걸렸다는 뜻의 괘일산(卦日山)이다.
설산(雪山)은 괘일산과 이웃해 있다. 호남정맥에서 살짝 비껴난 산으로 전남과 전북의 경계에 솟았다. 곡성군과 담양군, 순창군의 경계가 되며 담양의 산성산에서 맥을 이어받아 광주의 무등산으로 이어 주는 명산이다. 해발이 526m로 곡성 팔경에 동악조일(動樂朝日), 설산낙조(雪山落照)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곡성의 10명산 중에 동악산 다음으로 설산의 경승이 손꼽힌다.」
이 구간 내려와서 백미는 창평읍내 슬로시티다. 그러나 장 구경을 마치고 우연히 들른 대폿집에서 예상하지 못한 큰 선물을 받았다. 슬로시티로 향하기 전 막걸리로 출출함을 달래자며 포장마차로 들었다. 일부러 이 지방 색깔이 강한 곳을 물어 찾았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아닌 60대 후반에 손톱만 예쁘게 물들인 아주머니가 반겨줬다.
두부 한 모를 시켰다. 감자채 볶음과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덤이다. 배보다 배꼽이 컸다. 막걸리 병이 하나 둘 늘어갔다. 이런 저런 얘기에 친근함을 느낀 주인이 합석했다. 1948년생이란다. 막걸리를 권하니 맥주를 마신다며 유리잔과 병을 가지고 온다. 몇 순배 돌고 흥이 더해졌다. 한 잔을 걸친 할머니 아니 아주머니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불나비 등을 구성지게 불러댔다. 노래만 70년대가 아니라 모든 분위기 자체가 그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양철 원탁에다 젓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뽕짝, 폴카, 고고 리듬이 섞여 나온다. 완전히 째즈 페스티벌이다. 정 회장이 왕년의 솜씨를 발휘하며 젓가락을 두드리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아주머니 손을 잡고 육박자로 돌렸다.
결국 아들이 사왔다는 낙지젓이 추가 서비스로 나오고 빈 접시에 안주가 더해지고 막걸리 병도 보태지면서 유랑극단의 막은 내렸다. 다음에 다시 오라하다가 언제 또 오겠냐는 아주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 아주머니와는 다음 구간에서 다시 만났다.
주점에서 나와 슬로시티를 걸었다. 고택과 돌담사이로 시간도 쉬어가는 삼지내 마을이다. 백제 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동편의 월봉산과 남쪽의 국수봉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쳐 감싸안은 형국이다.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이 마을 아래에서 모인다하여 삼지내라고 한다. 전통가옥과 아름다운 옛 돌담장이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다. 아늑한 돌담길을 걷다보면 장말로 시간마저 쉬어 갔다.
제11구간은 방아재에서 유둔재까지다.
방아재(290m), 만덕산(575m), 451봉(451m), 선돌부락(330m), 국수봉(558m), 노가리재(330m), 429봉(429m), 새목이재(370m), 457봉(457m), 무등산 지척 887지방도(270m) 유둔재다.
이번 차로 호남정맥 절반을 지났다. 우리는 그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청명한 날엔 산정에서 무수히 줄기를 찾았다. 무등산도 보았었다. 그 무등산이 이젠 바로 코앞에 있다. 담양 산줄기를 걸었다.
나는 지금껏 남도에서 가장 많이 내려 본 곳이 담양이다. 남도를 빼닮은 선배의 고향으로, 그와 인연이 닿은 후 일손을 돕는 다는 구실로 해마다 담양을 찾았다. 이럴 때마다 들른 소쇄원과 주변 정자는 늘 나에게 다른 그리움이었다. 동행하는 후배들은 내가 억지로 숙제를 내준 정철의 장진주사를 외우는 게 고역이라는 말을 지금도 농담 삼아 하고 있다.
제12구간은 유군재에서 묘치까지다.
갑오년 마지막 산행이다. 나에게 2014년은 어떤 해였을까? 유군재를 들머리로 하여 448봉(448m), 백남정재(390m), 북산(780m), 신선대(680m), 무등산(1187m), 장불재(910m), 안양산(853m), 둔병재(410m), 623봉(623m), 어림고개(380m), 오산(687m), 묘치(230m)다.
이번 구간은 친구 김진원, 시 쓰는 권영우, 강화 님, 나 넷이 마쳤다. 무등산이 워낙 명산이라 버스 자리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기차를 택했다. 광주 후배 이형민의 도움으로 편하게 이동하고 경비도 절약되었다. 고생하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후배 소식이다. 장불재에서 너와나 님, 규철 대장, 부뜰 님, 변사또 님과 만나 천리타향봉고인(千里他鄕逢故人)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소감 일부다.
「돌로 이만큼 기이한 것은 무론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어니와, 그 밖에도 이 대상(臺上)에 서서 전남 일대의 곡진무미(曲盡嫵媚, 아리따울 무, 풍치가 아름답다 미)한 천산만수(天山萬峀, 산봉우리 수) ‘쫙’ 내려다보는 원경은 진실로 아무 것하고도 얼른 바꿀 수 없는 일대활화(一大活畫)이다. 이때까지 일컬어 온 운문(雲門)의 그것, 불출(佛出)의 그것은 여기 대면 다 어린애들이라 할 것이다.
청랑(晴朗, 맑고 화창)한 때에는 바다도 무론 내다보인다 한다. 이 기절(奇絶)한 물형과 장절(壯絶)한 한계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심상한 물건이 아니다. 조화의 장난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배포가 숭엄 장대함을 느낀다. 이론을 쑥 뽑고 이것이 하느님의 이궁(離宮) 자리이다 하는 직감이 생긴다.」
김장호 선생님의 소감은 이랬다. 선생은 무등산을 ‘어지간히 비슷하거나 해야지 더할 나위 없이 커버린 산, 아예 견줄 데가 없으니 등수조차 매실 수 없다는 이 고답적인 이름의 무등산은, 그 이름에 값할 만큼 호남에서 둘도 없는 큰 산’이며 시작한다.
「무등산은 의젓하고 당당하되 소탈하여 둥글고, 무겁고 두껍되 어질고 너그럽다. 들판이 넓어서도 그렇지만, 그래서 무등산은 호남평야의 어디서나 쳐다보이는 그 호남의 얼굴이다.
신라 때 전라도가 무진주(武珍州)였다 하여, 이 산 이름도 무진악(武珍岳)이었다고 더러 일컬어지지만, 신경준의 산경표에만 일명 그렇게도 부른다고 나와 있을 뿐 그 보급도는 약하다. 그 무진악에 비하여, 오히려 서석(瑞石), 서석산이란 이름은 ‘동국명산기’ 등 문헌에 즐비하다. 그것은 물론 이 산 정수리 일대를 치장하고 있는 바위들에서 취한 이름이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6.25 상처와 물질적 궁핍이 극심한 가운데 무등산의 크고 의젓한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시를 썼다.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그 속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바탕에 자리 잡았다.
무등을 보며/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맷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 난 살결 타고 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의 일생 시우(詩友)였던 다형 김현승(1913~1975)은 미당의 ‘무등을 보며’를 “이 시에는 육체적 곤궁과 물질적 궁핍에 처하여 그를 이기고 극복하는 시인의 의젓한 정신적 긍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궁핍 속에서라도 높은 정신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이 시인의 인격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제13구간은 묘치에서 말머리재까지다.
해가 바뀌었다. 을미년 첫 산행이다. 묘치에서 말머리재까지다. 어느새 ‘무등산군’을 벗어나 ‘계당산 제암산 군’으로 들었다. 묘치(230m), 386봉(386m), 천왕산(424m), 구봉산(320m), 서밧재(170m), 천운산(602m), 돌재(310m), 태악산(530m), 노인봉(530m), 성재봉(514m), 말머리재(330m)까지다.
힐링 팀이 알바를 한 구간이다. 새벽 산길에서 허탈감을 너와나 님의 순발력과 재치로 오히려 기를 받기도 했다. 강화 님은 길을 되돌려 스틱을 찾아와 박수를 받았다. 정 회장은 지금도 이 사건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
이 구간 아래는 운주사와 조광조 선생 유허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김병종 교수는 그의 화첩기행에서 운주사를 ‘천년의 바람이여, 운주의 넋이여’로 표현했다. 명문장이다.
「전라남도 화순군에 자리한 운주사는 경내에 지어진 천 개의 석탑, 이른바 ‘천불천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운주사에 관한 기록은 16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다. ‘운주사는 천불산 속에 있는데 절 좌우 허리에 해당하는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 기씩 있으며 또 석실이 있어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는 내용으로, 그 당시만 해도 석불석탑이 일천 기씩 실존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다. 그러나 현재는 석탑 17기, 석불 80여 구만이 보존되어 있다. 이중 석조불감, 9층 석탑, 원형 다층석탑, 와불 등이 대표적이다.
운주사의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에 비로자니불(부처님의 빛, 광명을 상징함)을 주불로 하여 모여 있다. 크기도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도 불렀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을 표현한 듯 소박하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절의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엄함과 달리 독특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명하지 않았던 운주사는 황석영의 ‘장길산’에 등장하고 나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길산’은 조선조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에 관한 이야기를 당시 미륵 신앙과 관련시켜 쓴 역사소설이다. 그 중심에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모든 백성이 해방되는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운주사 설화가 있다. 황석영의 문학적 상상력이 담긴 ‘장길산’은 80년대에 집단적으로 분출되던 사회변혁의 정서와 맞아떨어져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불러모았고 이와 함께 운주사 역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장길산’에서도 천불산 계곡의 수많은 불상과 부처는 귀족이나 왕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백성들의 간절한 꿈과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운주사의 와불을 통해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던 민중들의 염원을 그려내고 있다.」
제14구간은 말머리재에서 큰덕골재까지다.
말머리재(330m), 촛대봉(522m), 두봉산(631m), 469봉(469m), 개기재(290m), 계당산(580m), 예재터널 위(330m), 고치(290m), 봉화산(465m), 가위재(350m), 고비산(397m), 큰덕골재(290m)다.
이번 구간에서 억새가 정상을 점령한 계당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행한 하늘비 작가가 바쁜 날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움직이고 어디에 서 있어도 그의 눈에는 다 작품이 되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잘 빠진 소나무와 기암 하나가 알맞게 자리 잡고 있으니 장면은 무한대다. 자연은 연출도 스스로 그러하게 한다. 이럴 땐 누구나 연출가가 되고 모델이 된 착각에 빠진다. 정 회장이 새로운 건배사 “봄이 오는 길목에서, 좋은 사람들과”가 탄생한 곳이다.
제15구간은 큰덕골재에서 피재까지다.
큰덕골재(290m), 군치산(412m), 수캐봉(496m), 봉미산(506m), 웅치(290m), 국사봉(499m), 분기점(430m), 삼계봉(504m), 가지산(510m), 피재(200m)다.
월간산의 이번 구간 소감이다.
「숫개봉을 지나 어른 키만 한 잡목을 헤치고 진행하면 폐 헬기장에 이른다. 이때쯤 웅치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웅치다. 내장산 구간에서 영산 기맥 갈림길을 지났는데, 이번에는 또 하나의 기맥인 땅끝기맥 갈림봉을 지나게 되는 아주 의미 있는 구간이다.」
장흥군이다. 장흥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그에 필적할 만한 시인이자 동생인 백광훈을 시작으로 귀향형소설의 전범인 이청준,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 토굴에 거주하는 작가 한승원 등이 나고 자란 곳이다. 홈피를 보면 이곳에 태를 묻은 작가 100명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면적 대비 고급 승용차가 제일 많은 곳은 이천, 다방이 제일 많은 곳은 강화 이런 식으로 보면 장흥은 명실상부한 문향이다.
제16구간은 피재에서 골재까지다.
피재(200m), 514봉(514m), 용두산(551m), 339봉(339m), 폐목치(시목치, 감나무재, 210m), 제암산(779m), 곰재(510m), 사자산(666m), 562봉(562m), 골치(440m)다.
제암산 정상에서 오랜만에 정 회장의 설명이 있었다. “저 아래 장흥군 뒤가 강진이고 영암이다. 고흥 팔영산도 볼 수 있으나 아직은 시야가 트지 않았다. 저게 천관산이다. 두륜산, 월출산, 무등산 등 호남 일원의 산을 다 볼 수 있다.”
제암산에서 평생 기억하고 싶은 일출을 맞았다. 나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랬다.
「제암산(807m)과 억불산(518m)과 함께 장흥의 3산으로 불리는 사자산은 장흥읍을 굽어보고 있는 장흥의 진산이다. 특히 호남정맥 다음 구간으로 넘겨지는 큰 맥의 꼭짓점처럼 마지막 힘 있게 높이 솟아있다.
정상 서쪽의 두봉(560m)이 사자 머리, 사자 두봉에서 정상가지 이어지는 능선이 사자의 허리, 정상 남릉이 사작의 꼬리로 사자가 하늘을 우러르는 사자앙천형(仰天)의 산으로 사자가 도약하는 형상이다. 장흥읍을 지키는 스핑크스와도 같은 모습의 사자산을 일본인들은 일본의 후지산을 닮았다하여 ‘장흥 후지산’이라 부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산 뒤에 호남정맥 안전산행을 위한 제가 있었다.
「산을 사랑하고 즐기는 저희 자유인 산악회 회원들은 2015년 3월 8일 이곳 제암산에 올라 이 땅의 모든 산천을 굽어보시며 그 안의 모든 생물들을 지켜주시는 산신령님께 고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희 산악회 회원들을 온갖 위험에서도 지켜주시며 보호해주시니 진정 감사하옵고 감사합니다. 여기 간소한 술과 음식으로 정성을 모아 산신령님께 분향하오니 어여삐 여겨 흠향하시옵고 올해에도 저희들의 걸음걸음을 지켜주시며, 저희들이 한 마음이 되어 산을 오르며 산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생업에 종사하여 그 가족들을 살피시며 소원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성취될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기를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단기 4348년 3월 8일 회원 일동」
제17구간은 골재에서 오도치까지다. 제18구간은 오도치에서 석거리재까지다. 제19구간은 석거리재에서 접치까지다. 나는 이 구간을 혼자 마쳤다. 소설 태백산맥 중심으로 보성과 벌교를 누볐다.
영국 CASSELL 출판사에서 전 세계인인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을 발표했었다. 서기 850년경에 씌여진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 동안 발표된 전 세계의 소설을 대상으로 평론가·학자·작가·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전문가 집단이 참가하여 1001편을 가려 뽑았다. 우리나라 작품으로는 ‘태백산맥’과 ‘토지’가 선정되었다.
이런 태백산맥이어서라기보다는 괜히 끌렸다. 태백산맥 줄거리 요약이다. 보성군에서 벌교읍에 조정래 선생을 기념하고 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제1부 한의 모닥불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주동은 좌익사상을 지닌 하급 지휘관들이었다. 여수와 순천이 그들 손에 넘어가고,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민간 좌익세력이 벌교를 장악한다. 그들은 인민재판을 열어 악질 지주들을 비롯한 이른바 반동세력을 공개처형한다.
하지만 토벌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밀린 반란군은 산악지역으로 퇴각하고,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도 안창민, 하대치 등과 함께 입산, 빨지산 투쟁에 돌입한다.
그 즈음 대학생 정하섭은 남로당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순천 지역에 파견되었으나, 상황이 불리해져 퇴각하면서 고향 벌교로 숨어든다. 그는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제각에 살고 있는 무당의 딸 소화를 몰래 찾아든다. 소화는 정하섭이 요구하는 비밀스런 심부름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엔 애틋한 사랑이 싹튼다.
벌교로 다시 돌아온 경찰은 남아 있는 좌익세력과 부역자를 샅샅이 찾아내 총살시킨다.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감찰부장으로 있는 청년단은 좌익세력 처단에 앞장서고, 염상구는 빨지산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여러 가지 흉악한 짓을 일삼는다.
한편 인민재판에서 아버지를 잃은 젊은이들은 빨치산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무차별 보복을 가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하대치의 아버지는 목숨을 잃는다.
순천중학 교사 김범우는 무고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 최학승을 만나,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으며, 사적인 보복행위도 막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좌익을 두둔하는 빨갱이로 몰려 경찰에 체포되고,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순천으로 넘겨진다. 그의 아버지는 문중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그를 풀려나게 한다.
빨치산들이 벌교 읍내에 잠입, 총격전이 벌어지고 부상을 당한 안창민이 병원을 찾아든다. 의사 전원장은 안창민의 애인 이지숙과 함께 비밀리에 그를 치료해준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원장과 이지숙은 재판을 받는다. 정하섭의 심부름을 한 소화도 모진 고문을 당한다.
김범우는 반란사건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소작인 집에 피신한다. 그때 소작인 문 서방으로부터 “나라가 공산당을 만들고 지주가 빨갱이를 만든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해방 이후 염상진과 김범우는 ‘이념 우선’, ‘민족 우선’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태백산맥」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제2부 민중의 불꽃
해방 이후부터 소작농민들은 농지개혁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친일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지주들이 반대하는 농지개혁을 쉽사리 단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농민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북에서는 이미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럼에도 많은 지주들은 친척 앞으로 명의변경을 하거나 남에게 팔아넘기는 수법으로 농지를 빼돌린다. 반면 양심적인 지주이면서 무교화주의자인 서인영은 자기 땅을 소작농민들과 공유하여 협동농장을 세우고,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한다. 그리고 계엄사령관 심재모에게 농민들의 농지개혁 요구로 빚어지는 사건들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설득한다.
소작농민 몇 사람은 몰래 논을 팔아치운 지주를 찾아가 항의하다가 ‘벌거지 같은 것들’이라는 모욕을 당한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강동기는 지주를 삽으로 내리치고는 산으로 도망쳐 빨치산이 된다.
염상진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는 군경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지형을 가진 율어면을 기습 장악한다. 이러한 율어의 변화는 목마르게 농지개혁을 기다리는 다른 지역 농민들의 부러움을 산다.
염상진의 빨치산 부대는 지주들에게 쌀을 빼앗아 인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심리전을 펴기도 하고, 군수품 수송열차를 습격하기도 한다.
농민과 지주 사이에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려 애쓰던 심재모는 벌교 유지들의 모함으로 용공 혐의를 뒤집어쓴 채 서울로 압송된다. 그의 후임으로 관동군 출신 친일 경력을 지닌 백남식이 부임한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간 김범우는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김구 암살 같은 암울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민족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한다.
지주들이 땅을 빼돌리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분노한 소작농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일으키고, 급기야는 대규모 항의 시위가 발생한다. 사령관 백남식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소작농민들은 무조건 잡아 들인다.
농민이 85%에 소작농이 85%였던 상황에서 해방이 되자 ‘농지개혁’은 가장 시급하고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농지개혁을 부지하세월로 늘이고, 지주들은 농지개혁을 피해 땅을 팔아넘기거나 불법적으로 농지의 용도를 변경하는 작태를 부린다. 그 사회적 갈등이 소작농들을 빨치산으로 내몬다.
제3부 분단과 전쟁
심재모는 서민영, 김범우의 도움으로 겨우 용공 협의를 벗고 풀려나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에 투입된다. 백남식도 산골짜기마다 병력을 투입해 빨치산 토벌에 나선다.
무기와 식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치산들은 수없이 죽어간다. 위기에 빠진 빨치산 부대는 적극적인 투쟁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살아남는 투쟁으로 돌아선다.
농지개혁이 실시되었으나 농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숭만 세력은 그 무렵 치러진 총선에서 크게 패배한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뜻을 외면한 정권이 어떻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준 이 땅 최초의 정치 보복행위였다.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인민군에 밀린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한다. 인민군이 남부지방까지 내려오자 벌교 경찰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소집한다. 그리고 벌교에서 철수하기 직전 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경찰이 떠난 뒤에 벌교는 다시 염상진, 안창민, 하대치 등의 좌익세력에게 장악된다. 그들은 읍면마다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위원회, 청년동맹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북식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많은 인민들이 환호한다. 그러나 대중들의 상식을 무시한 기계적 세금징수 방법으로 곧바로 곧 바로 냉정한 외면을 당한다.
오래전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던 김범우의 형 김범준이 인민군 고급장교가 되어 벌교에 나타나고, 김범우는 고향으로 가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전북도당 문화선전부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미군이 참전하면서 인민군은 북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그 와중에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는 미군의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를 가가이서 지켜보면서 이 전쟁을 우리 민족과 미국 사이의 싸움일 수도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이 미군을 위해 통역하는 것이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여기고 몹시 괴로워한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은 전면 후퇴하고, 벌교의 염상진도 후퇴 지령을 받는다. 좌익세력과 그들에게 협조했던 많은 사람들이 보복 당할까 두려워 염상진을 따라 벌교를 떠난다. 하지만 퇴로가 완전히 막혀 북쪽으로 후퇴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인민군은 북쪽 국경까지 밀려난다. 그때 엄청난 수의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밀고 내려온다. 중군군의 인해전술로 국군과 미군은 다시 남족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제4부 전쟁과 분단
미군 부대를 탈출한 김범우는 눈 속을 헤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이번에는 인민군의 통역관을 맡게 된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삼팔선 부근에서 남북의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는 소모적인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그런 상황에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부대는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투쟁을 계속한다.
후방에서 빨치산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던 일을 하던 소화는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는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토벌대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빨치산들은 그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근거지인 해방구를 자꾸 잃어간다. 그러자 그들은 투쟁방식을 기동성을 살린 산악 이동투쟁으로 전환하여 철도 파괴, 열차 습격, 교량 파괴 등을 감행한다.
겨울을 맞아 토벌대는 엄청난 화력과 병력을 동원해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에 동계대공세를 편다. 가혹한 추위 속에서 수많은 빨치산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어간다. 그러면서 빨치산 부대는 시나브로 소멸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항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사이 김범우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거기서 역시 포로가 된 제자 정하섭을 만난다. 포로 석방 때 정하섭은 북한을 선택하고, 김범우는 장기투쟁의 기반을 구출하라는 임부를 부여받고 남한을 선택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북한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이 숙청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 소식에 빨치산들은 충격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뒷날 인민해방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는 역사투쟁임을 인식하고, 목숨을 바치는 항전에 나선다.
토벌대의 공세가 다시 맹렬해지고 수많은 빨치산들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최후를 맞는다. 염상진과 빨치산 대원들도 퇴로가 막히고 총알마저 떨어져 막바지에 몰린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염상진의 머리가 벌교 역전에 내걸리고, 그의 동생 염상구는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빵갱이냐”며 경찰에 맞서 기어코 형의 머리를 풀어 내린 뒤에 장례를 치르게 한다.
이렇게 염상진이 염원하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를 따르던 하대치 등은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롭게 투쟁결의를 다지고 광막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다.」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에서 벌교 꼬막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꼬막이 이번 여행에서는 장삿속으로 변한 꼬막에서 실망만 받고 왔다.
「꼬막은 다른 조개들과 달리 다루기가 꽤는 어려웠다. 모래밭에 사는 조개들과는 달리 뻘밭을 집으로 삼고 사는 꼬막은 온몸에 거무스름한 갯뻘을 맥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는 씻는 것부터가 다른 조개에 빌해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들었다.
그 껍질의 생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개는 그 껍질이 매끈거리게 마련인데 꼬막의 껍질은 수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었다. 기와 지붕과 똑같은 골이 쥘부채의 살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골마다 갯뻘이 끼여 있으니 씻는 것만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이 삶는 일이었다. 솜씨는 이때부터 필요한 것이었다. 감자나 고구마를 삶듯 해버리면 꼬막은 무치나마나가 된다. 시금치를 데쳐내듯 핏기는 가시고 간기는 그대로 남아 있게 슬쩍 삶아내야 한다. 그 슬쩍이라는 것이 말 같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다. 알맞게 잘 삶아진 꼬막은 껍질을 까면 몸체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물기가 반드르르 돌게 마련이었다.
양념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댈고도 꼬막은 훌륭한 반찬 노릇을 했다.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은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그래서 어느 잔칫집에나 삶은 꼬막이 큰 광주리에 그득하게 담겨 있게 마련이었다. 술상머리에 한 사발씩 퍼다 놓으면 제각기 필요한 만큼 까먹는 것이다. 콩나물이 그러하듯 꼬막도 잔칫집의 흔하고도 소중한 반찬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편법이었다. 제대로 꼬막맛을 갖추려면 고추장을 주로 한 갖은양념의 무침을 거쳐야 한다. 이 단계에서의 꼬막맛은 제각기 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 꼬막맛도 제각각이었다.
벌교포구의 갯뻘이 끝이 없이 넓듯 벌교에서 꼬막은 흔해빠진 물건이었다. 그러나 감칠맛 있는 꼬막무침을 맛보기는 흔한 일만은 아니었다. 꼬막무침을 제대로 하는 처녀하면 다른 음식솜씨는 더 물을 게 없다는 말이 상식화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흥 쪽 해변에서도, 보성만 일대에서도 꼬막은 났다. 그러나 벌교 꼬막에는 그 맛이 미치지 못해 옛날부터 타지 사람들이 먼저 알고 차등을 매겼다. 벌교에서 물 인심 다음으로 후한 것이 꼬막 인심이었고, 벌교 5일장을 넘나드는 보따리장꾼들은 장터거리 차일 밑에서 한 됫박 막걸리에 꼬막 한 사발 까는 것을 큰 낙으로 즐겼다.」
제20구간은 접치에서 송치까지다.
접재, 오성산, 유치산, 노고재, 문유산, 바랑산, 송치다.
정 회장이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삶의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다”며 화두를 던지고 시작한 구간이다. 힐링 팀이 순천연수원 앞에서 준비를 마쳤을 때다. 우리는 문유산 3.5km, 바랑산 8.5km라는 이정표가 있는 입구를 찾고 들기 전 자유인산악회라고 적힌 낯익은 바닥지를 보게 된다. 반가움을 넘는 표정들이 어둠 속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과연 이 바닥지의 주인공은 누구고 언제 지나갔나가 동시에 나온 질문이다. 분분하던 의견이 블랙홀로 모아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간 만난 블랙홀의 진면목을 다시 보는 구간이었다. 그는 이날 멧돼지와 사투를 했다. 너와나 님은 그간 정들었던 사진기와 이별을 하게 된다. 청청무구 진솔한 그 자체인 산불감시 노인을 배려하다 그랬다.
하산 후 선암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선암사를 “내가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도록 한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온 남도답사의 필수처”라고 했다. “선암사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하기는 참으로 힘들다”고 하면서 “따지고 보면 미술사 유적으로 뛰어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가면 마냥 편해지는 절집이다”고 했다. 과연 그랬다. 감정을 아끼는 불고 님의 소감도 유 교수와 같았다.
제21구간은 송치에서 형제봉까지다.
송치, 농암산, 죽청재, 마당재, 갓꼬리봉, 미사재, 형제봉까지다.
이 구간을 앞두고 강화에서 만남이 근 일 년 만에 이루어진다. 처음엔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모르던 사이였다. 산을 좋아했기에 만나 우수마발을 논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다행히 금어기를 앞둔 최고의 사리 때를 맞춰 나도 처음본 솥뚜껑만한 7kg 광어에 알이 꽉찬 꽃게에 벤뎅이 구이에 밭에서 막 뜯어온 쑥갓, 상추가 푸짐했다.
‘나는 못난이’ 딕패밀리 드러머가 집으로 초대해 외포리에서 갈매기를 벗삼아 회포를 풀려던 계획이 변경되었다. 딴따라답게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전원 꽃 마당에서 우리는 그날 밤을 넘겨가며 즐겼다. 하모니카, 쎅서폰, 아코디언, 키보드, 기타소리가 울렸다. 경찰차도 다녀갔다. 다른 차원의 힐링이었다.
이 구간의 백미는 뒤풀이였다. 냉채, 가자미 구이, 갈치젓갈, 매실장아찌, 시래기무침, 머위대, 겉절이, 묵은지에 특이한 향이 나는 된장국이다. 이런 공간에 이런 상차림을 마련하는 이 팀장의 능력을 한 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번이 한 수 위였다.
함박웃음 님이 이런 기분을 살리려고 낸 토종닭이 추가로 나오고 임 팀장 님이 산행 능력과 생활력은 비례하는 걸 실천한 날이기도 했다. 아마 이날 빈병이 가장 많이 나왔을 거다. 대연 형의 브라보 콘 선물이 종지부를 찍었다. 모두가 넉넉하고 흐뭇한 산행이었다.
제22구간은 형제봉에서 토끼재까지다. 이 구간은 서두에서 백암산으로 정리한 것으로 대신하고 제23구간 토끼재에서 외망포구에서 대장정은 끝나게 된다. 나는 제22구간으로 호남 정맥을 마쳤다. 그간 함께한 이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부족한 모습을 이해해 준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호남정맥을 시작하는 날 정 회장의 “Because it is there.”와 한 대장의 “산행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다. 산은 도망가지 않고 언제나 제 자리에 있으니 서두르지 마라”가 우리가 산에 다니는 그날까지 금언이 아닐까 한다. 이런 금언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가 길을 무사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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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종주를 위해 2주 간격으로 배낭을 꾸리면서 정해진 구간에 대해 숙제하는 기분으로 닥치는 대로 읽고 찾았다. 덕분에 건강도 얻고 책 읽는 즐거움에 푹 빠졌었다. 틈만 나면 서점에 들렀다.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빗자루 만들고 1타 3피를 했다. 비록 주마간산 격이라도 그간 애타게 그리던 예향 전라도와 1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호흡했다. 이 기회를 주신 자유인산악회와 산우 여러분들에게 나가면서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동안 접한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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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을 다녀오고 산행기를 읽어야 비로소 산행을 마친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문감사하게 잘읽었습니다 우리집사람도 1시간30분에 걸쳐읽어답니다
책소게 고맙습니다
형님이 지금까지쓰신 산행기로 책 한권출판해도 되겠습니다. ㅋ
산행기 쓰시느라 산행하느라 수고많았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 인연에 감사드리고
그 많은 독서를 하심에 감탄과 존경을 드립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동안의 너~~무 멋진 산행 축하드립니다.
너무큰 자료들을 어떻게 감당 합니까
고맙고 고맙고 감사 드립니다
귀한자료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인연은 아직 ~~~이어지고 있습니다 ^^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좋은 추억꺼리 만들어주신것에 대한 감사인사드립니다
달리는 말위에서 산을 본다... 주마간산 ㅎ ㅎ 마음으로 마니 마니 느낌니다..
산이 주는 행복과 언제나 배려와 여유가 있는산행 안전하게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무사히 호남정맥 마치심에 축하드리고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한권의 책으로 마음에 고이 여미어 두겠음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수 없음은 아니지요 ? ^^ ^^
호남정맥
종착지를 앞두고 구간들을 꼼꼼히 챙겨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몽리면적은 넓으나 대지주들의 불법 횡포로
저항할수밨에 없었던 지리적 환경
농민 저항이 많았던 호남땅....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땀냄새 물씬 풍기는 곳 이었죠?
쓸데없는 말까지도 애교로 들어준 이영호 동지에게 감사합니다.
뭔가 기록하고 지역문화를 탐구해서 쓰는 산행기들
함께한 동지들에게 후기를 통해 많을걸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
모두 감사하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추억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깊이 간직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영호동지 애많이 썼습니다
호남정맥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행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네요, 다시 산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가끔 아니 많은 곳에서 사실 힐링팀의 멋진 산행이 부럽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전 기회가 없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과 말씀으로 가득한 후기글 계속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