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진(沙門津)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고향(고령군 다산면)가는 길에 사문진 나루터를 자주 만났다. 대구 화원유원지쪽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 후 모래사장을 30분 이상 걸어가야 고향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중의 대소사때 마다 나에게는 멀고도 먼 길에 사문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문진(沙門津)은 경북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화원읍 성산리의 낙동강변에 위치한 나루터로 조선시대에 낙동강의 중요한 하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왜의 상인과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까지 부산 구포로 부터 경상북도 안동 사이를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 과거 경상도 관아와 대구지역 일원에 낙동강 하류로부터 유입되는 물산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낙동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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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면 호촌리에서 본 사문진 전경(강 건너편이 화원읍 성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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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금호강에 대한 설명 가운데 처음 등장한다. "금호강이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으로 들어간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문(沙門)‘이란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된 호촌리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리워졌다고 한다. ’진(津)‘이란 나루터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지명중에서 진(津), 주(洲), 도(渡), 포(浦)가 있는 곳은 대부분 과거에 도진취락(渡津聚落)에 해당한다. 사문(沙門)이라는 이름은 호촌리의 사문마을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사문진(沙門津)의 중심지는 다산면 호촌리 사문마을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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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은 낙동강 전체의 약 30%에 이르는 55km 정도의 연안을 끼고 있어 예부터 왜관과 함께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물류의 중심 지역이었다. 고령군에는 나루터가 15곳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사문진이었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왜물고(倭物庫)가 사문진에 설치될 정도로 교역되는 물산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대일 관계는 교린(交隣) 체제에서 비정기적인 사행이 오갔고, 무역도 회사(回賜)·답례(答禮)·하사(下賜)를 바탕으로 하는 공무역과 사행의 왕래에 부수하여 허용된 사무역 외에는 민간 차원의 사무역을 일체 금지하였다. 공무역만 허용하는 대일 통교 정책으로 부산의 왜관과 서울을 오가는 막대한 물량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지자 부산과 서울 간의 교통 요충지인 사문진(沙門津)이 있는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에 왜물고가 설치되었다.
사문진에 왜물고가 설치되면서 삼포에 들어온 일본 상품은 모두 국비로 매입되어 나룻배로 옮겨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7~8일 만에 사문진에 도착하여 왜물고에 보관하였다. 보관된 물품 일부는 서울의 왕실 관아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들에게 매매하였다.
그러나 왜물고에 넣을 때 조금이라도 전량(錢兩)이 부족하면 수량에 맞추어 추징(追徵)하기 때문에 영수하여 받는 관원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인마(人馬)를 뽑아서 정하여 짐을 실어 수송하게 하여 농민에게 피해를 주었다. 또 거액의 관비로 사들인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 소실되거나 썩는 등의 폐해가 많아서 결국 사무역이 부활하였다. 사무역이 부활하여 삼포에서 직거래가 성행함에 따라 사문진의 왜물고는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하여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사문진도 쇠락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남해안에서 올라온 돛단배와 범선이 드나들며 소금, 미역, 김, 해산물을 내려놓고, 고령에서 생산되거나 집산된 물산을 싣고 떠났다. 또한 대구와 교류가 활발했는데, 1940년 초반의 기록에 따르면 한 해에 사문진에서 대구로 간 물자가 쌀 20만 섬, 콩 10만 섬, 우피 40만 근, 소금 10만 섬,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에 이른다고 전한다. 여기에 약재와 잡화 등을 포함하면 엄청난 양이 사문진을 통해 대구로 보내진 것이다.
대체적으로 남해안에서 올라온 물산과 고령에서 생산된 것은 일단 대구로 보내지고 그 가운데 40% 가량을 대구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유통망을 통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사문진은 1900년 3월 26일 미국선교사 ‘사이드 보탐’에 의해 그 당시 “귀신통”이라 불린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유입된 곳이다. 또한, 1932년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와 1939년 김유영 감독의 ‘애련송’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령 지역이 대구와 교류가 활발했던 것은 대구가 고령과 인접한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문진은 대구의 화원면과 강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그래서 사문진 나루터는 늘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는 주막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여인숙이 많았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물자 수송이 수로에서 육로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사문진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광복후에는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을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왕래한 기록이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게 되어,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왕래하였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으며,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는데,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을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화원유원지가 유명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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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사문진의 도진(渡津. 나루터)기능이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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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4대 강 살리기 사업(2008년-2013년)으로 사문진 나루터의 기존 식당가가 철거되는 등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2013년 사문진 주막촌 복원 등 도심형 수변 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하여 사문진 역사공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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