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대전고(歷代典故) | ||
백제(百濟) |
백제(百濟) |
| ||
부상개황고(扶桑開荒攷) | ||
미추(彌鄒) |
| |||||||||||||||||||||||||||||||||||||||||||||||||||||||||||||||||||||||||||
가을 바람 소슬하게 배 봉창 때리는데 / 秋風淅淅打船篷 옛 나루 어가 소리가 새벽 종소리와 번갈으네 / 古渡漁歌替曙鐘 황새는 사람처럼 별저에 시름겹게 서 있고 / 野鸛似人拳別渚 그림같은 화려한 산은 기봉을 드러내누나 / 華山如畫露奇峯 해평군의 옛집은 계돈이 다 흩어졌고/ 海平舊宅雞豚散 온조왕의 남은 터엔 초수만 무성하구려 / 溫祚遺墟草樹濃 이미 왕성과의 거리가 삼십 리나 지났으니 / 已去王城三十里 백장으로 가는 길 재촉하게 하지 말라 / 莫敎百丈促行蹤
[주D-001]계돈이 다 흩어졌고 : 향인(鄕人)의 결사(結社)가 해체되었음을 뜻함. 한유(韓愈)의 《남계시범시(南溪始泛詩)》에 “원컨대 같은 마을 사람이 되어 봄가을에 계돈으로 잔치를 했으면[願爲同社人 雞豚燕春秋]”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七》
부평초 같은 신세 백구가 훌쩍 지나가듯 / 浮萍身世白駒催 동서남북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였는고 / 南北東西幾往來 위례성 앞 호해의 길 걸은 것만 세어 봐도 / 慰禮城前湖海路 벌써 열 번 하고 세 번이나 더 되는걸 / 經過已是十三回 [주D-001]부평초 …… 지나가듯 : 떠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세월이 다 지나가 노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천지 사이에 사람이 사는 것이란, 마치 흰 망아지가 틈 사이로 훌쩍 지나가듯 그렇게 순식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있다.
○ 진한(辰韓)에는 성책(城柵)과 가옥(家屋)이 있다. 《후한서》 ○ 부여(夫餘)의 백성들은 토착 생활(土着生活)을 한다. 목책(木柵)을 둥글게 쌓아서 성(城)을 만들며, 궁실(宮室), 창고(倉庫), 뇌옥(牢獄)이 있다. 《상동》 ○ 《삼국지》에, “부여는 성책을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뇌옥과 같다.” 하였다. ○ 고려(高麗)는 오직 왕궁과 관부(官府), 불려(佛廬)만 기와로 덮었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고구려의 왕궁 안에는 수정성(水晶城)이 있는데, 사방이 1리가량 되며, 날씨가 좋지 않아도 밝기가 대낮과 같다. 갑자기 성이 보이지 않으면 문득 월식(月食)이 일어난 것이다. 《양사공기(梁四公記)》 살펴보건대, 삼국(三國)의 궁실에 대한 자취가 중국인이 기록한 서책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지금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에 실려 있는 것을 상고하여 여기에 대충 기록한다. 고구려의 경우, 동명왕(東明王)이 구제궁(九梯宮)을 건립하였고, -평양(平壤)의 영명사(永明寺) 안에 있는데, 통한교(通漢橋), 연우교(延祐橋),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등 4개의 다리가 있다.- 유리왕(琉璃王) 3년(기원전 17)에 양곡(涼谷)의 이궁(離宮)을 건립하였고, -동궁(東宮)과 서궁(西宮) 두 궁궐이 있어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22년(3)에 위나암성(尉那巖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도읍을 옮겼고, 29년(10)에 두곡(豆谷)의 이궁을 지었다. 산상왕(山上王) 2년(198)에 환도성(丸都城)의 궁실을 축조하여 도읍을 옮겼고, 동천왕(東川王) 21년(247)에 평양성(平壤城)의 궁실을 축조하고서 도읍을 옮겼으며,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에 동황성(東黃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또 도읍을 옮겼다. -옛터가 평양의 목멱산(木覓山) 안에 있다.- 양원왕(陽原王)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의 안학궁(安鶴宮)을 건축하였다. -평원왕이 옮겨 도읍한 옛터가 지금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 구룡산(九龍山) 위에 있다.-
백제(百濟)의 경우는, 시조(始祖) 원년(기원전 18)에 위례성(慰禮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도읍하였고, 13년(기원전 6)에 또 한산(漢山)의 궁실을 건축하여 옮겼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남평양성(南平壤城)의 궁실을 건축하였고, -진사왕(辰斯王), 개로왕(蓋鹵王), 문주왕(文周王) 세 왕이 중수하여, 모두 아주 장대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문주왕 원년(475)에 또 웅진(熊津)의 궁실을 건축하였고, 성왕(聖王) 16년(538)에 사비성(泗沘城)의 궁궐을 영건하여 도읍을 옮겼다. 또 신궁(新宮) -시조(始祖)가 건립하였다.-, 남궁(南宮) -고이왕(古爾王)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구원궁(狗原宮) -진사왕이 건립하였다.-, 임류각(臨流閣) -동성왕(東城王)이 건립하였다.-, 망해정(望海亭) -의자왕(義慈王)이 건립하였다.- 등이 있다.
신라(新羅)의 경우는, 시조(始祖)가 금성(金城)의 궁실을 영건하였고, 자비왕(慈悲王)이 명활성(明活城)의 궁실을 축조하였으며, 소지왕(炤知王)이 월성(月城)의 궁실을 건설하여서 모두 도읍하였다. 또 성남(城南)의 이궁(離宮) 및 요석궁(瑤石宮), 영창궁(永昌宮), 본피궁(本彼宮), 선천궁(善天宮), 월지궁(月池宮), 청연궁(靑淵宮), 병촌궁(屛村宮), 부천궁(夫泉宮), 갈천궁(葛川宮), 홍현궁(弘峴宮), 선평궁(善坪宮), 이동궁(伊同宮) 등이 있었고, -또 신궁(新宮), 회궁(會宮), 양궁(壤宮), 수궁(藪宮), 대궁(大宮), 양궁(梁宮), 예궁(穢宮)이 있었다.- 조원전(朝元殿), 강무전(講武殿), 임해전(臨海殿), 숭례전(崇禮殿), 서란전(瑞蘭殿), 평의전(平議殿), 동례전(同禮殿) 등의 전(殿) 및 망사루(望思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의풍루(倚風樓) 등의 누(樓)가 있었으며, -또 고루(鼓樓)가 있다.- 천천정(天泉亭), 포석정(鮑石亭), 금송정(琴松亭) 등의 정자가 있었고, -또 남구당(南口堂), 월정당(月正堂)이 있다.- 문(門)에는 임해문(臨海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창건한 시기와 명명(命名)한 뜻은 모두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이상은 모두 고구려 이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통전(通典)》에, “삼한은 조선(朝鮮) 동남쪽에 있다. 진ㆍ위(晉魏) 이후로는 오한(五韓)으로 나눠졌는데 이는 신라와 백제를 합쳐서 오한이라 한 것이다.”라고 했다. 마한(馬韓)은 54국이나 합쳤는데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준(箕準)은 위 만(衛滿)에게 공격을 당하자 그의 측근과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쳐 들어와서 마한을 쳐서 격파한 다음, 자립하여 한왕(韓王)이라 하였으니 기준보다 먼저 이미 이 마한이란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 나라에서 망명한 사람이라 했는데, 마한이 그 동쪽 접경을 갈라 주었다는 것이다. 기준이 바다로 들어온 것은 효혜(孝惠)와 고후(高后)의 시대이니 진 나라를 피해 동쪽으로 왔다는 것도 이미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이고, 마한이 그 동쪽 접경을 갈라 주었다는 것도 분명 기준에게 준 것이 아닐 것이다. 진(秦) 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때부터 효혜ㆍ고후까지는 겨우 30년이 조금 넘으니 진한이 기준보다 먼저라 하더라도 역시 아주 오래지는 않았던 것이다. 변한(弁韓)은 또 별도로 한 나라로서 마한은 서쪽에, 진한은 동쪽에, 변한은 남쪽에 위치하여 왜(倭)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으니 그 지대는 반드시 남쪽 바다 옆이었던 것인데 이는 지금 진주(晉州) 등 몇 고을인 듯하다. 기준이 처음에는 비록 마한을 쫓아내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해도 나중에는 다시 또 진왕(辰王)이라 하였으니, 대개 진한과 변한은 모두 마한에 소속되었던 것이다. 그 왕들은 모두 마한 사람이었는데도 자립할 수 없었던 때문에 기준이 삼국(三國)을 통일하여 왕으로 된 다음, 그대로 진왕이라 칭했던 것인 듯하다. 신망(新莽) 시건국(始建國 왕망(王莽)의 연호. 9~13) 원년에는 마한이 백제(百濟)에게 멸망을 당했다. 그러나 후한(後漢) 광무(光武) 건무(建武) 20년(44)에는 한인(韓人)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으로 나아가 공물을 바쳤다. 그러므로 제(帝)가 소마시를 한 나라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봉하고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이 후 79년 만인 한 나라 연광(延光 후한 안제(安帝)의 연호. 122~125) 무렵에는 고구려(高句麗)가 마한ㆍ예맥(濊貊)과 함께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 유송(劉宋) 때에는 왜왕을 봉해서 왜ㆍ백제ㆍ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 칠국제군사(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七國諸軍事)라고 하였다. 이 모한이란 나라는 바로 마한인 듯한데 왜와 방음(方音)이 이와 같았던 때문이다. 가라와 임나는 주에, ‘모두 삼한 지대로서 수 문제(隋文帝) 이후로 신라에게 섬멸되었다.’ 하였다. 이로 본다면 가락(駕洛)ㆍ가야(伽倻) 이외에는 그런 지대가 없으니 이때 삼국 후예들이 오히려 신라와 백제 중간 지대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준보다 먼저였는데 도읍은 어느 지대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신라가 진한 육부(六部)의 내에서 일어났으니 아마도 신라에 가까웠던 것인데 신라가 일어난 후 바로 없어졌는 듯하다. 그러나 진 무제(晉武帝) 태강(太康 진 무제의 연호. 280~289) 무렵에 세 차례나 조공을 바쳤으니 전한 대수는 역시 오래 되었던 것이다. 변한은 원제(元帝) 영광(永光 한 원제(漢元帝)의 연호. 서기전 43~39) 5년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진주(晉州) 등 몇 고을은 모두 백제의 소유였으니, 변한도 결국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웅천(熊川)에 책문(柵門)을 세웠을 때, 마한왕(馬韓王)은 사신을 보내 꾸짖기를, “왕이 처음 하수(河水)를 건너왔을 때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동북쪽 1백 리나 되는 지대를 갈라 주었다.”라고 하였고 또, 《통고(通考)》에도, “삼한(三韓)은 모두 78국이었는데 백제(伯濟)가 그중 하나이다.” 하였다. 마한이 통합한 54국에도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이 백(伯)과 백(百)은 섞어 일컬었던 것이다. 추측컨대 온조(溫祚)가 맨 처음에는 이 백제에서 살다가 나중에 도읍을 옮길 때 땅을 마한에 빌었던 것인 듯하다. 지금 직산(稷山) 위례성(慰禮城)이 바로 마한 동북쪽에 있는데 백제의 도읍이 되었던 곳이다. 이 백제란 옛날 칭호 그대로 일컬은 것이고 십(十)에서 백(百)에 이르는 숫자를 이른 것은 아니다. 삼한 중에는 오직 진한 풍속만이 가취(嫁娶)를 꼭 예로써 하고 남녀의 구별이 있어서 길에서 서로 만나면 모두 멈추고 서서 길을 양보하였다. 지금 영남(嶺南)이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부고(府庫)가 된 것이 이런 유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기자(箕子)의 봉강(封疆)이 된 후로 경계가 호맥(胡貊)이 닿게 되었고, 위만(衛滿)이 또 퇴계(椎髻)로 와서 점거하자 옛날 풍속이 다 변경되었던 것인 듯하다. 그리고 천하가 이미 진(秦) 나라에 병합되자 중국 백성이 부역을 피해 삼한으로 투입하여 동남쪽에서 나라를 세웠다. 중국 풍속을 오히려 제대로 지키고 오랑캐에게 변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직 영남 지대였던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주C-001]삼한 시종(三韓始終) :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의 시종. 《通典》 卷185 邊防條.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 1. 여주 도호부 1. 이천 군 1. 양근 현 5. 지평(砥平)ㆍ음죽(陰竹)ㆍ양지(陽智)ㆍ죽산(竹山)ㆍ과주(果州) 【관원】 목사 1인, 종 3품이다. 여러 목도 같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鎭)이 같다. 판관(判官) 1인, 종 5품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이 같다. 교수(敎授) 1인, 종 6품이다. 여러 도의 도호부 이상은 같다. 『신증』 연산군(燕山君) 11년에 이 주의 사람으로 난언(亂言)한 자가 있어 본주(本州)를 혁파하였다가, 지금 임금 초년에 복구하였고, 6년에는 주가 잔악하고 피폐함으로써 판관을 폐지하였다. 【군명】 남한산ㆍ한산주ㆍ한주ㆍ회안(淮安)ㆍ봉국군(奉國軍).
<< 인천도호부 >>
【고적】 미추홀(彌趨忽) 주몽의 두 아들 중에 맏아들은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인데, 졸본부여(卒本夫餘)로부터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오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드디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한남(漢南)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비옥한 소택(沼澤)지대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천연(天然)의 험함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오랜 뒤에 비류가 미추홀은 땅이 비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정리되고 백성이 안정되었다. 드디어 부끄럽고 분하여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유(兪)ㆍ백(白)ㆍ조(趙)ㆍ전(全) 모두 촌성(村姓)이다. 경양(慶陽) 김(金)ㆍ조(趙)ㆍ백(白)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천안부(天安府)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봉황(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시조(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聖居山)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馬]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孔子)의 상달(上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평택(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 『신증』 신원(新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명환】 본조 이영구(李英耈)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인물】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찬(匝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恭愍王)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효자】 본조 봉유지(奉由智)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戲)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噪古墟幽)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방면】 동변(東邊) 끝이 5리. 서변(西邊) 끝이 5리. 일동(一東)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동(三東)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일남(一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남(二南)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서(一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서(二西)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삼서(三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북(二北)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경양(慶陽)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언리(堰里) 서북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 외야곶(外也串) 수원(水原) 서남쪽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진의 북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주D-001]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 : 입술과 이, 볼과 잇몸[輔車]은 서로 의지하여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신라의 9주(九州) :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757)에 비로소 9주를 두고 주(州)와 군(郡)의 이름을 고쳤다. 상주 왕성 동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사벌주(沙伐州)고, 군 10과 현 31을 거느렸다., ○ 충청도 : 동북쪽은 강원도와 경계요,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로 동남쪽은 경상ㆍ전라 양도의 경계로, 남쪽은 전라도와 경계로 서남쪽 및 서쪽ㆍ서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다. 54고을 좌도 21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옛 마한(馬韓)의 땅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웅주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이 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를 두었는데, 예종이 관내도(關內道)에 합쳐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 다시 명종이 나누어 2도를 만들었고, 충숙왕이 다시 합쳐서 1도로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공민왕이 충청도라고 불렀다.
○ 직산(稷山) : 본래는 위례성(慰禮城)이니 백제가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이라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직산으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태종 신사년에 다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때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중종 때 복원하였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3리이다. ○ 경양(慶陽)은 폐현이다. 고려 때 하양창(河陽倉)이다. ○ 천안 : 본래 동서(東西) 도솔(兜率)의 땅이니, 고려 태조가 병합하여 천안부를 만들었고, 성종이 환주(歡州)라고 고쳤는데 뒤에 영주(寧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영산군(寧山郡)이라 고쳤다가 조금 후에 천안으로 고쳤다. ○ 임환(任歡)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19리이다. 풍세(豐歲)는 폐현이다. 백제 때 감매현(甘買縣)이니, 또는 제천(稊川)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순치(馴稚)라 고쳤다. ○ 진천(鎭川) : 고구려 때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니, 만노(萬弩)라고도 하며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흑양(黑壤)으로 고쳤는데 또는 황양(黃壤)이라고도 한다.고려 초기에 강주(降州)라 일컬었다가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창의(彰義) 의령(義寧)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계사년에 진천현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는데 중종이 복원하였다.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 온양 : 백제 때의 탕정군(湯井郡)이니, 신라 때 주로 승격시켰고 고려 초기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신창(新昌)과 합쳐서 온창(溫昌)이라 일컫다가 병신년에 그전 이름을 회복했고, 세종 임술년에 온양군으로 고쳤다. ○ 온천(溫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아산 : 백제 때의 아술현(牙述縣)이니, 신라 때 음봉(陰峯)으로 고쳤는데,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ㆍ아주(牙州)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 5)에 군(郡)을 줄여서 온양(溫陽)ㆍ평택(平澤)ㆍ신창(新昌) 세 읍(邑)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을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영인(寧仁)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 안성 : 고구려 때의 제혜홀(祭兮忽)이니, 신라 때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안성현(安城縣)이라 고쳤다. 뒤에 수주(水州) 천안에 예속시켰다가 또 현을 두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홍건적의 난리에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하니, 여러 고을이 항복했으나 오직 안성(安城) 사람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잔치를 베풀어 취한 것을 이용하여 괴수 6명을 목베어 죽였다. ○ 1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 양성(陽城) : 고구려 때의 사복홀(沙伏忽)이니, 신라 때 적성(赤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고쳤다. ○ 사파을(沙巴乙)이라고 한다. ○ 1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평택 : 고하팔현(古河八縣)이니, 고려 때 평택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이속시키더니 중종이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팽택(彭澤) 《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은 선조 병신년에 혁파하였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3리이다.
○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성에서 동남으로 40리 되는 한수(漢水) 남쪽에 있으며, 북으로 광주 옛 고을과 5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다. 동쪽은 백제(百濟) 옛 도읍이니, 온조왕(溫祚王) 13년(B.C.6)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성곽과 궁궐을 세웠으며, 위례성 민호(民戶)를 옮겨와서 12세 3백 80여 년을 지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191)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 으로 옮겼다. 초고왕이 옮긴 뒤부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의 성의 흥폐(興廢)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으며, 이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성에 뜻을 많이 두었으나 당국(當國)한 사람이 건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곡집(谿谷集)》,《남한성기략(南漢城記略)》
○ 천안(天安) 왕자산성(王字山城) 군의 동북쪽 12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시키니, 윤계방(尹繼芳)이 아뢰기를,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 하였다. 인하여 보루를 쌓고 군사를 점검했으며, ‘왕자성’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 직산(稷山) 위례성(慰禮城) 현의 동쪽 21리에 있는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토축 사산성(蛇山城) 현의 서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토축
○ 목천(木川) 흑성산성(黑城山城)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석축 안에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면 비를 빌었다
<<< 부소산 위례성...비류,온조를 생각함 >>>---오심죽 詩---
졸본땅 비류수에 송양왕 살았다네 소서노 도움받아 패업을 이루나니 대륙을 호령하는 주몽왕 고구려라
북부여 유리왕자 졸본땅 찾아오니 열 신하 데리고서 부아악 올라보네 바다가 보이는곳 위례성 이곳일세
마한왕 백리지경 흔쾌히 내어주어 거친 들 일궈내며 옥택을 만드나니 백성들 환호하며 백제라 이름하네
연어떼 돌아오니 숭어도 뛰는구나 부소산 위례성에 칠성별 반짝이니 물빛도 차가워라 세대박이 띄워볼까
<<< 직산고을 오심죽...백제초도 직산 위례성...부소산 탐방기...2008.1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