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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4일, 오후 4:48
47. 감사제목 ⑥: 학교
백혈구 촉진주사가 어제로 끝났다.
온 몸이 쑤시고, 특히 고관절 부위가 아픈 것이 뼈를 강제로 일하게 하여 백혈구를 생산토록 하기 때문이란다.
일종의 아이들이 키 클 때 성장통을 앓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가정방문 간호사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알고 나니 덜 무서우나, 피할 길은 없단다. 잔잔히 스며오는 고통이 삶을 모호하게 만든다:
나는 삶을 원하는가? 무고통을 원하는가?
이제 여섯 싸이클 중의 두 싸이클이 지났다.
언제 . . .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그저 지금을 되도록 적은 고통과 안심된 마음으로 지나가는 것뿐이다.
이론으로는 잘 알지만 실행으로는 잘 안 된다. 바깥출입을 어렵게 할 정도로 체력에 자신이 없다.
어제도 학교에 나간다고 조교에게 연락하였다가 포기하였...다.
도저히 나가서 책을 정리할 기력이 없다. 감정과 뇌에 대한 책들을 정리하여야 하는 데.
생각해보면, 만 6세 이후, 학교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고등학교 때 이후의 휴학, 정학, 휴학, 취업 때를 제외하고는.
그러고 보니 거의 50년 정도를 학교에서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4년 (1년 휴학), 신학교 5년 (1년 정학), 대학원 2년 반 (1학기 휴학), 취업 3년,
에모리 캔들러신학교 3년, 에모리 대학원 5년 반, 협성 2년, 감신 20년}.
그런데 이번 휴직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학교를 떠나보는 것이다.
아, 다음 학기에 복직할 수 있을까?
조부모가 계신 본가를 떠나, 30리 정도 떨어진 신평초등학교 근처에 우리 가족은 살았다.
내 때의 대부분의 아이가 그리하였을 듯, 유치원이라는 것은 들어보지도 알지도 못하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나이가 된 나를 아버지는 그래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생일이 늦다는 이유로 입학을 연기하려 하셨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와 형을 따라가 억지로 입학하였다.
아마도 내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손수건을 명찰처럼 가슴에 차고, 교실이 없어 운동장에 모여 수업을 하던 첫 기억들. 책, 책가방, 공책, 필통이 어디 있는가!
운동장에 쭈그리고 앉아 사금파리나 나뭇가지로 네모 칸을 그리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써보곤 하였다.
얼마 후, 교실 수업이 시작되고, “영희야, 철수야, 놀자” 이런 것들을 읽고 배우면서 한글 철자 수업이 있었다.
ㄱ, ㄴ, ㄷ, . . . 그런데 ㅊ 이후부터는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ㅌ이 먼저인지 ㅍ이 먼저인지 헷갈려 할 때가 있다.
‘ㅐ’가 ‘ㅔ’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을 헷갈리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중학교 이후일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는 좋은 데 나와야 한다. . .”는 것인가?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아파서 결근하신 날, 아버지가 대신 수업에 들어오셨다.
교과서를 펴고 읽는 과제가 있었는데, 나를 시켜 일어나 한 페이지를 읽게 하였다.
왜 그랬을까? 더듬거리면서 읽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고 회초리를 가져오라 하셨다.
나는 영문을 몰랐다. 당신의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일까?
그렇다고 아버지가 집에서 아들에게 글자 한 자 가르쳐주신 것은 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없었다.
신평초등학교 - 신촌초등학교 - 합덕 초등학교에 대한 나의 기억은 참 좋다.
남녀 아이들이 서로 섞여 화목하게 지냈고, 누구를 놀리거나 서로 편지어 싸우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전학 간 초등학교는 달랐다. 남녀 아이들이 서로 갈라져 있었고, 같은 성의 아이들도 끼리가 있는 듯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이들 간의 관계도 폐쇄적이었다. 더욱이 이 마지막 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멀었다.
면 소재는 다르나, 합덕초등학교는 집에서 20분 거리, 그 학교는 집에서 거의 1시간 거리였다.
이제는 본가에 들어와 살면서 동네 아이들 (집성촌이지만 다른 성의 아이들도 꽤 많았다)과 하나가 되어서 학교를 오가야 하였다.
가장 큰 실수는 먼저 학교에서 그렇게도 재미있게 지내던 아이들하고 “안녕”을 못하고 떠나와야 했다는 사실.
새로이 친구가 되어야 할 동네아이들과 먼저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어디에 우정과 충성을 바쳐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영원히 풀지 못하였다.
내 생애 최초의 고민 중의 하나였다.
당시 학교에는 늦게 들어온 학동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미리 자란 신체와 지능 때문에 아이들을 압도하는 대장들이 되곤 하였다.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도 바로 이런 학교 풍경 속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공부로나 운동으로나 놀이로나 모든 것이 이들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키도 작고 몸도 가냘프고, 생긴 것도 얌전하게 생겼는데,
시험을 치면 1등을 하는 이 전학생을 저 대장들은 자기편에 넣고 친구삼아 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폐쇄적인 문화의 학교는 꺼리만 있으면 서로 놀리고 욕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려 2년 반의 따 아닌 따가 시작되었다.
한 번도 신체적으로 구타를 당하거나, 언어적으로 폭언을 받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꺼리만 있으면 그들은 나를 놀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뒷말로 우스갯거리 삼았다.
그럴수록 나는 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5학년 학급 반장을 뽑는 데,
아이들은 멋모르고 공부 잘하는 나를 투표로 뽑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노리갯감이었다.
대장들이 판치는 데, 반장이라니. . .
나는 이 해에 급성신장염에 걸려 학교를 1달 넘게 결석하였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었다.
6학년이 되어서 그 대장들과 다른 반이 되었을 때, 나는 해방되었고,
공부에 열중하여 촌이지만 인근 열서너게 초등학교 졸업생이 몰리는 합덕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분명 나는 겁 많고 수줍은 아이였다.
무서움을 많이 타서 밤중에 혼자 변소를 가거나 이웃집에 놀러갈 생각을 하지도 못하였다.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은 고1때 예수 믿고 찬송을 부르게 된 이후이다.)
그러나 나의 학교생활이 수줍음이나 겁 많음으로 특별히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의 교우관계나 학교문화 교실문화 놀이문화가 나의 성격을 결정짓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특히 어떤 책임 맡는 일 (반장, 회장, 단장 등)을 싫어하는 것에는 이 학교에서의 경험이 매우 컸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내내 반장을 해야 했고, 담임이 유고인 반을 맡아 담임선생을 대신해야 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고 길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분야기 미술 분야인데, “환경미화”를 책임지고 해야 하는 경우이다.
반 교우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일인데. . . 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에 장애를 입고 있었다.
진학과 교우관계의 중압감 속에서 서울 청와대 근처의 고등학교로 진학하였을 때, 나의 해방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나를 반장으로 추대할 학생도, 나를 놀려먹을 학생도 없었다.
오로지 공부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기대충족이란 짐뿐이었다.
이때 교회는 얼마나 꿈과 이상과 새로운 세계의 상징이었던가.
나는 쉬바이처만 읽고, 어설픈 실존철학책만 읽고, 교회경험을 거의 없는 채 신학교 행을 결정하였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고3 초겨울, 감신을 방문했던 때를. 내 고등학교와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서대문 산골짝에 숨어 있는 학교였다.
교문을 지나 언덕길을 오를 때, 좌우로 예쁘고 작은 3층 정도의 빨간 벽돌집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언덕 끝에 가니, 조그마한 채플이 하나 있고, 그 앞마당 끝의 계단을 오르니 3층짜리 작은 양식 석조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건물 앞 작은 운동장 가로는 아름들이 은행나무들이 서 있었고,
그 아래에 화강암으로 된 벤치들이 그 건물을 보고 일렬로 놓여 있었다.
벤치에 앉아 그 건물을 바라볼 때,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아, 작다.”
내가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 교정을 미리 알고 동행해 준 친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였다.
“이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학교에 누가 다니는 가가 중요하데이,
니가 이 학교에 들어와 다니므로 이 학교가 좋아질 수 있데이. . . ”
고등학교 기독교학생클럽을 같이하였고 홍제감리교회 고등부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우리 반 반장이었다.
나의 신학교 진학을 주위 모두가 반대하고 (시골 교회의 담임목사님까지도)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반대하는 데,
그래도 내 결정을 지지하여 주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감신이 내게 지금까지의 학교와 달랐던 점은 졸업 이후로도 피할 수가 없는 학교였다는 점이다.
나는 전학을 많이 다녀서였는지, 아니면 수줍은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내 무의식 깊이 숨어있는 경험과 행동의 패턴 때문인지,
어디론가 떠나면 그 전 것은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태를 보여 왔다.
이는 애착이론에 의하면 일종의 <회피성 avoidant> 성격과 관계가 깊은 것이었다.
아주 어려서는 이런 행태가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곳과 연관되어 있는 기억이나 사람이나 인연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신학교도 그와 비슷하였다.
심지어는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여럿 섬겼으나, 어느 한 교회로 가면 그 이전 교회와는 발길을 끊곤 하였다.
그러나 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의 생활은 바로 이 감신의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감신은 현재의 나에 모두 연관되어 있으므로 글로 쓰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또한 감신에 대한, 그리고 감신과 얽힌 모든 것에 대한 나의 감정은 모두가 양가적(ambivalent), 아니 다가적(multivalent)이다.
이는 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그리하였다.
수석입학자로 입학식 때 신입생 인사말을 읽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하고 있던) 하숙집에서 아침 신문을 펼쳤을 때,
사회면 한 중간에 <감신대생 총리원 점거 농성>이란 제목 하에 머리띠를 두르고 어떤 건물을 점령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감리교회 <경기연회 사건>의 한 장면이었다.
지금은 그 총리원 건물이 「광화문빌딩」으로 변하여 이제는 감리교 감독관계 시위와 농성 및 싸움으로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지만. .
학교에서 써준 인사말의 한 구절 “부정과 부패가 얼룩진 이 사회의 <한 모퉁이라도 붙잡고>” 를 읽을 때의 그 심정이
지금도 마음에 선연하다. 지금은 부서지고 없는 <웰치기념관> 안에서.
나는 그동안 그 한 모퉁이라도 잘 붙잡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왔는가?
첫날부터 실망한 나의 학교생활은 고뇌와 방황과 회의의 연속이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라는 느낌”이 거의 2년여 내 생각과 느낌 속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뛰쳐나오지 못하였던 것은 나의 약하디 약한 성격도 있었겠고, 사회적 혼란도 있었겠으며,
취약한 생활기반도 있었겠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내가 결단하고 내가 선택한 그 길을 나 스스로 던져버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조나단 시걸의 “갈매기의 꿈”을 도저히 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예수와 그 예수의 정신이 그렇게 값싸고, 얕고, 짧고, 가벼우며, 단견적일 수 없다는 어떤 믿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실망하고 방황하는 신학생들을 이해의 눈으로 쳐다보아주는 몇몇 선생님들이 계셨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라고 할 것이다.
예기치 않게 유학을 간 곳은 미국 애틀란타의 에모리대학교 캔들러신학대학원이었다.
한국에서 질풍노도를 겪은 내가 쉬지도 못하고 이 학교에 왔을 때, 나는 여러모로 지쳐있었다.
우울과 무의미 속에서 첫 1년을 겪고, 1년여에 걸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거킨 교수를 만나고, 비로소 유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감신과 다를 바 없었다.
학문의 내용이나 방향에 있어서. 다만 차이는 그 양과 질에 있었고, 실천적인 데에 있었다.
나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것들에 대하여 지쳐있었고, 실질적이고 실행적인 것들이 좋았다.
남들은 나를 보고 왜 이론적인 <조직신학>을 하지 않는냐고 하였지만,
나는 <주립정신병원>이 좋았고, <홈리스 피플을 위한 soup kitchen>이 보다 의미 있었으며,
<웨슬리 노인센터>가 더욱 맘에 들었다. 한국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배우고자 온 이유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드러프 중앙도서관>이 좋았다.
문학, 문학비평, 심리학, 심리치료, 종교학, 사회학, 동양학, 동양철학 그런 것들이 모두 있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당시 <Religin and Personality> 분야는 학교 내에서 만이 아니라,
전미국신학교 내에서도 이름 있는 교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에모리를 끝으로 나는 이제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서 <협성신대>와 <감신대>라는 학교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은퇴라든가 어떤 연유로 시간이 생기면,
「방송통신대학교」를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
전공은 「영문학」 아니면 「국문학」. 그
런데 이렇게 질병에 걸려서 휴직을 하고, 궁금해 하는 분들께 투병기를 쓰다고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생을 이 구석 저 구석 살피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들이 정말로 의미가 있을 사람은 바로 내 자식들일 것이다.
그러나 글이란 언제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지는 것이다.
자식들만 읽는다면 달리 쓸 곳이 어디 한두 군대랴.
그리고 언제나 삶은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않는 비밀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글 쓰는 자가 자신을 다 아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보다 독자가 그 글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해석학의 중요 명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이 글이 어떻게 끝날지를 아시는 원저자요 원독자가 계신데. . . .
이 정보 홍수의 시대에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그저 감사를 드리면서도 송구한 마음이 적지 않게 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바로 이 「학교」를 통해서 연결되기에 나는 참 감사한다. 내 삶에 <학교>가 중심이 된 것에.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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