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8차시 습작품 첨삭(2023년 4월 22일 토)
1. 신이 꼭 주신다는 3가지 재능/ 백복순1
①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러니까 큰아들이 고1, 작은아들이 중2가 되면서 나의 막중했던 가사 역할이 아주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두 아들이 커갈수록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의”,“식”,“주”를 엄마가 해주는 것에서 돈만으로도 간편하게 해결이 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것을 혼자 주문할 수 있었고, 입고 싶은 옷을 온라인으로 사입기도 했으며, 입은 옷들은 세탁바구니에 넣고, 아침마다 옷장에서 스스로 옷을 찾아서 입기 시작했다. 하물며 혼자 씻기도 잘한다.
②그맘때쯤 나는 직장에서 평생교육 관련 업무를 보게 되면서 우연히 「유기농업기능사」라는 자격증 따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집과 직장에서의 틈새여유를 오롯이 “나”를 위한 것으로 찾는 데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③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는 50여년 동안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 채 살아온 것이다. 올 6월이면 법적으로 나이가 두 살이나 줄어든다는 들뜬 뉴스와 100세 인생이라는 노랫말은 내년이면 쉰이라는 나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에겐 여전히 쉰이라는 나이는 서글픔이었다.
④어느 영화제목 “첫사랑 찾기”처럼 “나의 재능찾기”를 시작했다.
먼저, 사이버대 사회복지상담학과에 편입했다. 심리학 공부를 해서 사춘기인 둘째 아들의 심리도 이해하고, 덤으로 정년 후를 생각해서 사회복지자격증도 챙겨두기 위해서....
그러나, 타인의 마음을 읽고 위로를 해준다는 심리학공부는 정말 깊이가 깊었다. 재빨리 목표를 바꾸어 사회복지2급 자격증이라도 건지자 하는 마음으로 “상담”이 아닌 “사회복지” 수업 위주로 들으면서, 사회복지상담학과 졸업증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해 여름 현장실습을 하며 깨달음이 있었다. 나에게는 사회복지의 봉사정신과 인내력이 많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이 일은 나에게 즐거움이 주지 않는다는 것을..
⑤예전부터 정년퇴직을 하고 해가 하루종일 비추는 산골마을에 단층짜리 집을 짓고, 남편은 밭일을 하고 나는 틈틈이 유기농법으로 기른 채소로 소박한 저녁식탁을 근사하게 차려내는 모습을 꿈꿔왔다.
유기농업능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농업관련 수업을 80시간 이상 수료하면 “농업관리사” 국가자격증을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수업료를 내고 신청했다. 지난해 가을은 온통 “도시농업”과 “유기농업” 수업으로 꽉 찼었고 또 하나의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유기농업이라는 것은 베란다에 화초를 키우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고 우아하지 않았다. 거름과 벌레와 쓰레기를 등을 일단 참아야 했다. 집 안 구석구석 깔끔을 떠는 내 성격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⑥이것저것 도전하는 모습을 보던 직장 동료들이 너무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칭찬으로 들었다. 이번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잘할 수 있는 재능을 찾자고 결정하고, 멋지고 폼나는 수영과 골프를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하는 수영은 매번 반 사발 이상 락스물을 먹고 끝이 났고, 자꾸 가라앉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바람에 왼팔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머리를 고정하고, 팔에 힘을 빼고, 몸통만 돌리면 된다는 골프수업 역시 나에게 재미난 일은 아니었다.
⑦큰아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우아하기로는 피아노만한 게 없었지만 우선 작은 악기부터 시작했다. 주 1회 내 또래의 선생님이 집으로 오셨다. 아들은 매주 실력이 나아가는데 나는 매번 그 자리였다. 아들에게도 자존심이 상했다.
퇴근하자마자 허둥지둥 악보를 보며 내 또래의 선생님 앞에서 넉 줄의 줄을 더듬거리며 움직여야 하는데 정말 주눅들고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삐질삐질 났다.
⑧지금은 집에서 한 시간을 운전해서 오영수문학관을 다닌다.
요즘은 휴대전화기를 보물처럼 끼고 사니, 종이에 적힌 글을 읽을 기회가 드물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을 가끔이라도 골라 읽지는 못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글로 된 것을 보고, 책장을 넘기고 싶었다.
⑨내년이면 오십 살 “지천명”의 나이다. 하늘의 명을 알기는 커녕 여태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모른 체 여전히 폼나 보이는 것들 주변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중이다. 도대체 신이 주신다는 내 3가지 재능은 뭐지...
⑩오늘은 여섯 번째 수업을 끝이 났다
수업 시간마다 같은 반 수강생의 글을 교재삼아 보면서 “쿠~웅”하는 울림과 또 까끔 “찡”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것을 표현할 재간이 없다.
⑪편의점에서 4캔 1만 1천 원짜리 곰표 캔맥주를 사왔다.
차안에서의 걱정은 그새 까먹고, 주부로, 엄마로 돌아왔다. 집 청소와 싱크대 정리, 냉동실 비우기, 거실가구 재배치, 봄옷 넣고 여름옷 꺼내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베란다에 수북한 화분들에게 물까지 흠뻑 주었다. 중간중간 곰표맥주로 목을 축이면서...여기저기 제라늄 꽃들이 싱그럽게 살아올랐다.
⑫매주 반복되는 가사 일을 끝내고, 정돈된 거실 쇼파에 앉았다....주변이 말끔했다. 곰표 캔맥주를 하나 더 따서 습관처럼 폰을 들고 두 개의 단톡방(여고 동창 4명, 직장 절친 4명)에서 하루 있었던 일과 내일 할 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내일은 혼자 가지산 산행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누구 한마디에 따뜻한 댓글은 이 공간이 주는 情이다. 나의 주말 스케줄에 대해 친구들은 이번에도 똑같은 댓글을 달아 주었다. “이야. 너는 정말 부지런하다...”라고.
⑬재능..내가 생각하는 재능이란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 국가대표 같은 운동선수, 예술가 뺨치는 악기실력, 가수, 전문 댄스... 이런 것들이었나보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빛이 나는 내 집, 그리고 주말마다 옹골차게 시간을 보내는 나의 근면·성실.. 이것들이 어쩜 그토록 찾던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나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청소대장, 노력대장...
⑭법적으로 올해 하반기부터 나이를 깎아준다니, 진짜진짜 쉰이 되기 전까지 신이 주신 나머지 한가지의 재능을 곰곰히 찾아봐야겠다.
2. 직진과 후진 – 김영자(1)
-직진 본능
1) 이제껏 나는 앞을 향해 달려왔다. 하나의 목표가 생기면 오직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불도저처럼 앞을 향해 나아갔던 집념 덕분에 보험 챔피언 자리에도 여러 번 오를 수 있었다.
2) 지난 연말에 열린 연도 대상에서 내 자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치였다. 이제부터 인생을 정리하고 천천히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기 때문에 전에 내가 이루었던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성적표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목표를 채우지 못한 아쉬움에 진저리를 쳤을 텐데 지금의 나에게 등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지냈던 시간이라서 예전보다 못한 내 성적표 대한 큰 아쉬움이 없었다. 전과 다르게 성큼성큼 성장해가는 후배들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선배의 자리도 나름의 보람이 있었다.
3) 행사가 시작되고 사장님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이 ‘김영자’였다. 오랫동안 챔피언으로, 여왕으로 무대에 올랐던 나를 칭찬하면서 변함없는 열정과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사장님의 뒤를 이어 시상식의 주인공으로 단상에 오른 수상자들도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나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며 경의와 감사를 아낌없이 표현해 주었다.
4) 올해의 나는 챔피언도 아니었고 전국 18위의 평범한 참가자일 뿐인데 이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했다. 수상자로 무대에 오를 때보다 나의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되다니 희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서 박수를 치다가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깜짝 놀라서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자꾸만 내 이름이 불리니 얼굴이 달아올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5)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제껏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목표를 향해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신발 밑창이 닳도록 뛰어다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런 나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얼굴도 차례로 스쳐 갔다.
6)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나는 지금 정상에 자리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지만 후배들의 눈에는 여전히 챔피언 김영자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 일인가.
7) 아까와는 다른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이제까지 나를 이곳으로 끌어주었다. 목표를 향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내 안의 직진 본능이 다시 힘차게 꿈틀거린다.
-후진 – 김영자(1)
1) “이제 뒤로도 제법 잘 가네요.”
2) 주말마다 방문하는 문학관의 관장이 나를 향해 건넨 인사다. 차를 뒤쪽으로 주차할 때마다 고개를 쭉 내밀고 핸들을 풀었다 감았다 하는 서툰 내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 하는 말이니 내 실력이 조금은 나아진 것일까. 후진으로 주차하는 내 모습을 누가 봐도 영락없는 초보 운전자 김 여사다.
3) 놀랍게도 내 운전 경력은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 면허를 땄다. 운전대를 잡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아마도 울산에서 운전을 오래 한 여성 운전자로서는 내가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름 베테랑 운전자이다. 보험 계약을 하겠다는 고객들을 만나러 갈 때는 카레이서 부럽지 않은 솜씨로 고속도로를 날아서 가다시피 한다.
4) 핸들을 잡아본 시간만 넣고 보면 눈 감고도 차를 움직일 정도로 능숙해야 할 텐데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이상하게도 후진 기어만 넣으면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이 난다. 특히 좁은 공간에서 후진을 할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긴장을 하곤 한다.
5) 요즘은 자동차 옵션이 다양해져서 후진에 약한 내 약점을 보완해 줄 후방카메라가 생겼다. 차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떡하니 보여주니 전보다 무서울 게 없어야 정상인데 문명의 도움도 큰 소용이 없었다. 화질이 선명한 후방카메라로 보여주는데도 내 시선은 늘 불안해서 후진을 할 때면 여러 번 왔다갔다 해야 했다.
6) 생각해보면 나는 전진하는 본능이 더 강한 사람인가 보다. 직진밖에 모르던 지난 시간들이 후진하는 법을 잊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차의 후방 카메라조차도 뒤를 보지 말라고 나에게 말하나 보다.
7) 한동안 직진만 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며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직진보다 후진이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인생에서도, 운전에서도 후진을 모르는 나에게 이제는 후방 카메라가 있으니 안심하고 믿어보라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만 여전히 직진보다 후진이 더 어렵다.
8) 주변 동료들과 우리 회사 사장님이 잠시 쉬는 나에게 “왜 자기 잘하는 직진 하지 않는 거야?”하며 물음표를 날리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부터 내가 더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되는 거야. 앞을 보고 전속력으로 직진하는 거야.
3. 관계 / 이숙희
1. 나의 친구는 사랑받는 여인이다. 정확히 말해 큰애의 학교 동기 엄마다. 그러나 지금은 엄마들은 친구가 되었고 애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 친구다. 초등학교 2학년 이후에 같은 반도 안 되고 상급학교에서도 같은 학교가 아니니까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친구와 내가 더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2. 친구는 30대에 우울증이 찾아와 잠도 잘 못자고 힘들어서 부산 큰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도 시부모님, 시누이들, 시댁식구 모두가 곰국을 끓여 오고 너무 살갑게 챙기는 것을 보고 옆 환자들이 너무 부러워
했다고 한다. 친구도 아플 때 가족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많이 느껴서 더 시댁에 잘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3. 그 친구는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남편이 자녀에게 이렇게 애기 했다고 한다. “ 나는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너희 엄마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못 참는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먹먹하게 아파왔다. 어쩌면 부부간의 사랑이 넘치고 신뢰가 쌓인 진정한 부부사이라고 생각되었다.
4. 친구와 나는 아이들 학교 보내고 사회여성대학도 같이 다니면서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신울산 시장에서 먹은 수제비 맛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수료 후 우리는 잔디밭에서 한복을 입고 예쁜 추억 사진도 찍었다.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5. 친구가 이사를 가고 한참 잊고 지냈는데 올해 봄 동문회 역사기행 ‘밀양을 찾아서’를 다녀와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가 여주이씨 라고 했는데 그 때 나는 여주이씨를 잘 몰랐다. 나는 월연정과 금시당에 다녀왔노라고 하면서 여주이씨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나에게 친구의 본도 기억하고 있었냐면서 기뻐했다. 친구는 월연정 종중이고 금시당은 우리 작은집이라고 했다.
6. 나는 친구가 너무 상대방도 배려할 줄 알고 마음도 따뜻하여 내가 믿고 좋아했다. 올곧은 가문에서 자라 그대로 배우고 익힌 성품이 나타난 것 같다. 시어른들도 양반 가문이라고 더욱더 예뻐하였고 친구도 사랑 받을 생활을 했으리라 믿는다.
7. 친구와는 반대로 나는 신혼 초부터 남편과 크게 싸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자연적으로 시댁 식구와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로봇처럼 감정 없는 인간으로 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애정을 가지고 키웠다. 큰 딸은 일기장에 ‘큰집 식구들이 엄마에게 잘 대해 주세요.’하고 기도문을 썼다. 엄마로서 성숙되지 못한 모습만 보여 줘서 지금도 많이 나의 과거를 반성한다.
8.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봐야한다 어른의 눈으로 아이를 꾸중하고 벌줬다. 아이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에게 아픔을 주지 말아야 했고 원인도 묻지 않고 결과로서 평가했다. 나는 함량 미달인 엄마다. 다시 육아를 하라하면 조금 더 좋은 친구 같은 마음 터놓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9. 지금은 어느 정도 묵은 감정을 삭혀서 나를 미워한 사람도 내가 미워했던 사람도 다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은 지금도 누가 나한테 화를 내면 너무 아프다. 칼로 베인 상처보다 더 아프다. 옛날에는 누가 화를 내도 이렇게 까지 아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몸이 민감해서인지 몰라도 한 동안 너무 아프다. 마음을 추슬러 원인이 나인 것을 깨닫고 위로하고 가슴을 토닥여 주고 나를 더 감싸 안는 버릇이 생겼다.
10. 사랑을 받는 것도 미움을 받는 것도 다 자기 자신이 만든다. 친구를 한없이 부러워하기만 했지 내가 친구의 좋은 점을 따라 하지 않았다. 친구는 본성과 환경이 잘 맞아서 잘 적응되어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고 나는 본성과 환경이 잘 맞지 않아 꿈 뜬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11. 한편 곰곰이 생각하니 내 생활도 사랑받던 기억은 있다. 시아버지께서 전주이씨 양반이라고 산소에 인사시키러 가서 잘 설명도 해 주셨고 남편도 해외여행 때 보석상회서 예쁜 반지와 목걸이도 사 줬다. 그때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기억도 있다. 친구남편들은 보석을 사 주지 않으려고 바깥에서 맴돌았다.
12. 그러므로 글은 참 좋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미운 오리새끼로 낙인 찍혀 살았다고 느꼈는데 캐고 캐니 나에게도 관심을 받고 살던 때도 있었고 지금도 나는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는 가족, 남편일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젠 덜 아파하면서 용감해져야 하겠다. 내 가슴을 꼭 끓어 안아 주고 싶다.
4. 빨강 스타킹 / 우진숙
1. 내게 고모는 단 한 분뿐이다, 할머니에겐 첫 자식이고, 고모 바로 밑 남동생이 우리 아버지다. 고모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몇 번 친정집에 다녀가셨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모는 이혼한 상태였고, 고모에겐 두 딸이 있었다. 새살림을 차린 고모부는 두 딸은 거두지 않고 내팽개쳤다. 가족들 몰래 딸들을 따로따로 고아원에 맡겼다. 뒤늦게서야 고모가 이 사실을 알고 사방팔방 수소문해 겨우 찾아낸 큰딸을 직접 거두지 못해 친정에 데려다 놓았다. 그 후에도 작은딸의 행방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2. 당시 고모는 폐결핵이 걸려 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고종사촌 언니는 외가인 우리 집에서 생활했다. 언니는 고아원에서 겼었던 심리적 불안과 곁에 엄마가 없어 기가 죽은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보였다. 언니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 다녀서 언니가 입던 교복과 쓰던 책을 고스란히 내게 대물림했다. 중학교 시절 내게는 새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할머니는 우리 가족보다 고모네 식구가 더 마음에 걸리고 애련했을 터이다.
3. 출가외인은 더구나 이혼한 딸이 친정을 드나드는 걸 탐탁지 않게 보고 남들 눈에도 띄지 않게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고모는 딸이 보고 싶어 가끔 친정에 와서 조용히 며칠 묵고 가곤 하셨다. 나는 초등학생이라 말주변도 없고 눈치코치도 없는 철부지였다. 고모를 다정하게 대하지도 못했고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소소한 대화도 주고받지도 않았다. 어린아이가 무슨 시건이 있어 집안 분위기를 살피고 그에 적절한 화젯거리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고작해야 ‘언니하고 잘 지내거라.’고 당부하는 것밖에는 고모 역시 어린 조카에게 무슨 할 말이 있었겠나 싶다.
4. 고모는 큰 올케인 우리 엄마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시면서 빨강 스타킹을 선물로 내게 주셨다. 당시 시골에선 보기 드문 계집아이들이 선망하던 빨강 팬티스타킹이었다. 보는 즉시 기뻐서 동공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면서 그 빨강에 물들어 내 얼굴이 단풍처럼 붉어졌다. 다른 아이들이 흰색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것만 봐도 부러웠는데 게다가 한창 유행인 신상 빨강 스타킹은 시골뜨기에겐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이고 자랑거리였다.
5. 지켜보던 사촌 언니가 제 것은 사 오지 않았다고 고모에게 몹시 투덜대고 칭얼거렸다. 마지 못해 고모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방금 준 빨강 스타킹을 이번에는 언니에게 주고 다음에 네 것을 사 오마하며 조곤조곤 나를 꼬드겼다. 어린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주었다가 뺏으면 엉덩이 털이 난다.’ 는 말도 있는데 그런 고모도 무척 민망했을 것이다. 그날 언니에게 빼앗기고 만 빨강 스타킹은 그 후로 영영 다시는 내게로 오지 않았다. 그땐 언니가 정말 밉상스럽고 얄미웠다. 고모가 큰맘 먹고 엄마에게 줄 뇌물을 제3자인 내게 찔러 준 것을 도로 가져갔으니 말이다. 경제적 여력이 안 된 건지 미처 딸 생각을 못 했는지 스타킹을 하나만 준비한 고모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지만 우리 엄마 속은 또 얼마나 상했을까?
6. 그 이후로 고모를 다시는 뵐 수 없었다. 우리 집에도 한참 동안 발걸음을 끊으셨다. 아마 병세가 깊어지면서 다시 오시지 못한 거였다. 그러고 나서 하늘나라로 훌훌 떠나셨던 모양이다. 평소 냉정하신 할머니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는 데다가 어른끼리만 공유하는 고모의 부음을 아이들은 알 턱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고모가 빨강 스타킹을 사 오는 그날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가 끝내 지키지 못한 나와의 약속이 깨진 일도 세월이 지나면서 희석되어 까맣게 잊고 지냈다.
7. 딸 둘을 키우면서 스타킹을 볼 때마다 한번 신어보지도 못한 그 빨강 스타킹이 언뜻언뜻 생각났다. 그리곤 핼쑥하고 핏기가 없는 고모의 얼굴이 어렴풋이 겹쳐 떠 올랐다. 그때의 결핍 때문인지 은연중에 내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딸애의 스타킹을 사러 가면 이것저것 골라서 사와야 흡족했다. 딸들에게 옷에 맞추어 색상과 무늬가 다른 스타킹을 코디해주며 대리만족 같은 걸 느꼈다.
8. 나 또한 직장 다닐 때 스타킹에 대한 욕심이 많아 신상이나 특이한 걸 보면 충동 구매를 많이 했다. 아직도 신지 않은 스타킹이 바구니에 가득하다. 직장 일을 그만두니 이제 정장을 차려입고 외출할 일도 멋을 부릴 일도 없어졌다. 그러니 늘 편한 복장에 손이 가고 옷을 갖추고 스타킹을 찾아서 신을 일도 번거로워 피한다.
9. 그때 고모에게 품었던 서운한 생각이 세월지나니 추억으로 숙성되었다. 사촌 언니는 엄마도 할머니도 안 계시니 외가도 없어져 우리 가족과 왕래도 하지 않는다. 오래 떨어져 살아도 피붙이란 늘 혈육의 정이 흐르는 영원한 가족인데 나이가 드니 모든 게 무색해졌다. 언니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프고 안부가 궁금하다. 다들 바쁘게 사느라 일가친척 간 왕래도 하지 않아 이제 남처럼 돼버렸다. 살아생전 고모와 살갑게 지낸 시간은 별로 없어도 어릴 적 고모가 그리워진다.
5. 봉숭아 꽃물/ 박희곤3
1방학이 되면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것은 외가에 가는 것 이였다. 어린 내가, 이틀을 걸어서 가야하는 길이지만 언니와 손잡고 갔던 길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사주신 된장 주먹밥을 들고 걸어서 재를 넘어 외가로 가곤했다.
2외가로 가기 위해서는 운문재를 지나 중간에 있는 이모네 집에서 한밤을 자고 다시 외가로 가야 했다.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중간쯤 가면 이종 사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엄마는 외가에 가기 전 미리 5일장에 온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모네로 간다고 이야기를 해 놓는 것 이였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라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와 장난을 치며 놀았던 기억이 즐비했다. 한번은 여름방학에 외가에 가는 길에 홍수를 만나 강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일도 있었다.
3재를 넘어 겨우 도착하면 외할아버지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셨다. 마을 훈장님의 체면도 없이 당신의 무릎위에 올려놓고 한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그 당시 친 외할머니는 애기를 놓다 그만 돌아가시고 새 외할머니가 와 계셨다. 그래도 새 외할머니는 눈에 장애가 있었지만 친자식보다 더 어여삐 여기며 우리들을 보듬어 주셨다.
4보통 한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 머물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늘 우리들을 안아 주시고 또 맛있는 사탕도 주곤 하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꼭 봉숭아 꽃잎을 따서 내 손톱에 물을 들어 주었다.
외가댁 담장 밑에는 봉숭아 꽃잎이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직접 꽃잎을 찧어 실로 손톱에 묶어주는 것 이였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색깔도 곱고 예쁘기만 해서 그저 좋기만 했다. 그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엄마가 없는 자신의 딸에게 해 주던 것을 외손녀에게 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외할아버지 건강과 안부를 묻곤 하였는데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내 손을 잡고 그저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그 당시 나는 엄마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 “엄마 왜 울어” 하면 ”응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행주치마에 눈물을 훔치며 코를 팽하고 풀고 그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6엄마는 18세에 결혼하여 호랑이 할머니가 계시는 고된 시집살이에 자식을 여섯이나 낳고도 친정 한번 가보지 못했다. 한 많은 시집살이 심정을 어린 내가 알 수는 없었다. 외가댁을 다녀온 하루는 한밤 중에 소변이 보고 싶어 일어났는데 엄마가 내손을 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그 당시 엄마도 우리와 같이 외가에 가고 싶고 또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생각에 우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 왔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친구들에게 서로 물 들인 손톱을 자랑하느라 지남밤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놀기에 바빴다.
7지금은 시간만 내면 언제든지 갈 볼 수 있는 거리이고 또 사회 환경이다. 그러나 전설의 고향같이 살아온 엄마는 대가족 종가 집에서 모진 시집살이 하느라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 장례식에 잠깐 다녀 온 후 평생을 친정에 가지 못했다. 살아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하며 살다간 부녀간의 애틋한 그리움에 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가 늙어 백세가 다된 지금, 가기 전 꼭 친정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형제들은 요양원 가시기 전 기억이 온전할 때, 엄마의 친정 나들이를 해주고 싶었다. 늦 가을 어느 날, 시간이 되는 형제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어릴 때 가 보았던 외가를 찾아 가게 되었다.
8그러나 50년이나 지난 시골마을에 찾아가서 외가를 찾기는 어려웠다. 엄마는 기억을 더듬어 겨우겨우 물어서 찾아갔다. 외가는 새마을 사업으로 형체는 달라지고 어릴 때 놀던 동네 길은 환상 속의 길이였다. 꿈속에서 그리던 엄마의 어릴 적 놀았던 길은 변하고 없어지고 해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이상타, 여기가 분명한데” 하시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요 아버지요 이제 저도 아버지 따라 갈 때가 됐심더”하시며 펑펑 우시는 것이었다. 그날 따라 엄마는 마치 손대면 톡하고 터져 눈물바다가 되는 한송이 봉선화 같았다.
9나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엄마 와이카노” 하며 엄마 어깨를 토닥거렸다. 속으로는 엄마! 엄마! 정말 미안해, 나는 내딸 하고 같이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진작 엄마 모시고 외가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네. 내 나이 육십이 넘어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엄마도 당신의 친정 아버지인데 평생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엄마! 우리엄마! 막내딸을 용서하세요" 라고 말했다.
10 한참이나 우시는 엄마는 “너희 할아버지 산소가 저 앞산에 있는 것 같다” 하면서 앞산을 처다 보고는 “아버지요 곧 당신한테 갈게요” 하면서 맨바닥에서 큰절을 올리는 것이였다. 외할아버지 산소 위치도 모르시는 엄마를 볼 때 나는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지 못 한 것 같아 마음 한곳이 아려왔다. 그러나 끝내 외삼촌이 살고 있다는 외가는 찾지 못하고 내려 왔다.
11엄마를 모시고 내려오는 길모퉁이에 철지난 봉숭아 꽃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옛날 외할아버지가 나에게 물 들어준 그 봉숭아 꽃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꽃잎과 잎은 떨어져 없고 마른 꽃대만 고개 숙이고 서 있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꽃대를 꺾어 내 손바닥에 문질러 보았다. 붉은 꽃잎의 색깔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 붉은 꽃물이 드는 것 같았다. 바싹 마른 봉숭아 꽃대는 마치 구십 여든이 된 수수깡 같이 마른 엄마 같았다.
12평생 일만 하시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엄마 손을 잡고 있지만 엄마는 손가락을 떨며 치매 끼가 있는 외로운 노인이 되어 있었다. 가끔은 깜박 깜박하는 당신은 아직도 외할아버지가 당신의 손톱에 물들어 주신 봉숭아 꽃물만은 기억하고 있을까? 엄마 손잡고 요양원으로 가는 길, 차창 가에서는 그 옛날 손톱에 붉게 물들었던 봉숭아 꽃물은 내 마음속에서 붉게 물들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첫댓글 선생님 죄송합니다. 22일은 사정이 있어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29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