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히스기야가 주는 교훈
본문 : 이사야 38장 1-8절
『오늘은 38장입니다. 오늘 말씀은 1절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그때’는 ‘37장에서 일어난 일후’를 말합니다. 37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1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쳐들어 왔는데, 남 유다에는 저들과 싸워 이길 군사와 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수개월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바람에 성 안의 백성들이 굶주려 자기의 오줌과 똥을 먹으며, 심지어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일 때, 히스기야가 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본인이 직접 성전에 올라가 눈물로 기도를 하자, 그날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앗수르의 십팔만 오천 명의 대군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자기 아들에게 피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그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히스기야 입장에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사야 선지자가 직접 와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살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말을 합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중한 병으로 죽는다고 하니, 참으로 절망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심히 통곡하며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것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주시겠다’는 증표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다’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오늘 기도하라는 설교를 하겠구나’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말씀을 기록한 목적도 ‘하나님을 찾으라, 기도하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지금까지 이사야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남 유다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찾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도 저들이 깨닫지 못하니까 저들이 잘 아는 히스기야 왕을 예를 들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기도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1. ‘오늘 우리가 히스기야가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를 묻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기서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로 시작하고 있는데, 왜 느닷없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말씀을 하셨을까요? 분명 37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히스기야가 기도하였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2-3절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르게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히스기야에게 병들어 죽게 하셨을까? 왜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5절에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말씀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장 죽어야 할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앞으로 15년 동안 히스기야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장 왕이 죽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당시 히스기야의 나이는 39살로 아들도, 후계자도 없는 상황입니다. 아직 다른 나라와 싸워 이길 군사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시려고, 이런 일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3절 하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여기서 ‘심히 통곡하였다’는 말은 일찍 죽어 억울해서 울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앞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살아왔음을 후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나이가 이제 39살이라,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죽는다고 하니 난감한 것입니다. 당장 아들도 없는데, 자신이 죽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전쟁 준비한 것도 없는데, 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이대로 자신이 죽으면 남 유다는 그대로 망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길 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이 죽고 났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셨나요? 직접적으로는 ‘오늘 밤이라도 여러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면, 여러분은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는가?’ 말입니다. 또 지난 주일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여러분이 죽고 난 후에 여러분의 남겨진 가족들은 어찌 될 것이라 생각을 하십니까? ‘평소에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며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살지 못하니까,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남 유다에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고, 제사장과 서기관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이들을 통해 나라를 구할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도 히스기야가 되어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닌데, 나는 목사님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닌데,’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히스기야가 되어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죽으면 과연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느냐?’입니다. 1절 하반절에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하였는데, 여러분이 죽을 때에 여러분 자녀에게 어떤 유언을 하시겠습니까?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너희 모두 신앙생활 잘하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유언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여러분이 깨달으라고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하여 괜히 겪지 않아도 될 쌩고생 하지 마시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히스기야가 되길 소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오늘 여러분이 히스기야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장차 하늘나라를 갈 준비를 하는 히스기야!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언을 할 수 있는 히스기야! 가정을 살리는 히스기야가 되길 소원합니다. 목사님이 있다고 미루지 마시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미루지 마시고, 여러분이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는 히스기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히스기야 때문에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았듯이, 그런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이 살고, 또 이 교회도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8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아하스의 해시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하스’는 ‘히스기야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아하스는 히스기야가 왕이 되기 전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이었는데, 더구나 아하스가 해시계를 만든 것도 아닌데, ‘그 왕궁 앞에 있는 해시계’라고 해도 될 텐데, 왜 아하스의 해시계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히스기야와 그의 아버지 아하스를 비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사야 7장에 보면, 아하스가 왕이었을 때,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라는 나라가 연합하여 남 유다를 침공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오직 했으면 그때의 상황을 “왕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했겠습니까? 마치 히스기야 때 앗수르가 침공해 온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 7장 11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나님께서 아하스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겸손한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나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듣지 않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 할 것이니, 괜히 징조를 보여주어 제 마음이 흔들지 마세오.” 뜻입니다. 왜냐? 아하스는 이미 앗수르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아하스가 왕으로 있는 날 동안 임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하스의 해시계’라고 하는 것은 ‘멸망을 향해서 치달려가는 시계’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어요?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게” 한 것입니다. 말이 어렵나요? 쉽게 설명을 하면, 아하스 때문에 남 유다 나라가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십 년후에 나라가 멸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히스기야가 해 시계의 그림자, 즉 멸망하기로 한 시기를 늦추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십 년 후인 2034년도에 멸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히스기야 때문에 수년이 더 늦어져 2050년까지 늦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몇 년이라 말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고,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실족한 사람을 회복시키고, 시험에 든 사람을 위로하여 다시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혹시 아하스처럼 자신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까지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교회가 복을 받아 부흥해야 하는데, 혹여 걸림돌이 되게 하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죽어가는 영혼,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죄악으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을 하신다고 하실 때에 그 멸망을 멈추게 하려고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가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히스기야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멸망으로 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절대 우리들 중 단 한 사람도 아하스의 해 시계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악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천만 명의 성도가 있고, 수십만 교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은 날로 악해질 뿐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아하스의 해시계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악의 길로 달려가야 할까요? 심지어 잘 믿고 있는 사람들까지 실족케 하진 않으십니까? 이때,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아하스의 해시계를 다시 돌려놓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 한 사람 기도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그런 약한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히스기야가 된다면,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여러분으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오게 되고, 이 나라 역사까지도 바꾸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겟습니다.
오늘 말씀은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가 기도를 하였더니, 그가 15년을 더 살게 되었다’는 말로 흘려 넘길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또 기도하라고 하는가 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의도는 ‘성경을 읽는 우리들이 히스기야가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히스기야라면, 여러분이 병들어 곧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만 바로 선다면, 여러분의 문제는 물론이요, 죄악된 길로 치닫고 있는 아하스의 해시계도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느냐? 질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히스기야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는 히스기야가 되어야 하고, 자녀들에게 단호하게 믿음의 유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정리하면 살까?’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하스처럼 죄악으로 달려가는 자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돌이키게 하는 히스기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처받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성도들을 찾아가 그들을 온전한 길로 인도하는 히스기야 될 때에, 그런 여러분으로 인해 잘못된 나라가 바뀌게 될 줄 믿습니다. 하여 우리 모두 히스기야처럼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