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두껍고 한문도 많고 시간도 많지 않아서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하시길...............
책이름 : 완담지
발 행 : 1992년 완담종중소
始祖
安逸戶長公 鄭繪文
儒理王朝(西紀三十二 壬辰)에 賜姓된 신라 육부의 姓貫이 모두 경주로 비롯하여 영남에 가장 많지만 정씨가 동래로 처음 著籍한(저적) 때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며 공의 선계사적과 생졸년대와 배위와 묘소가 모두 미상이다.
우리 족보가 1585년(선조18년 乙酉)에 비롯되지만 8년 지난 1592년 임진란후로 전함이 없으며 을유로부터 71년지난 1655(고종6년 乙未)년에 이루어진 乙未譜에서는 공을 시조로 하고 一世라 했었는데 을미보가 간행된지 얼마 안되어 (1656-1659사이) 文安公 沆(항)의 誌石이 나타났고 거기에 甫尹公(보윤공)之遠까지만 系代가 밝혀졌으므로 이것을 微信하여 丙申譜부터는 공을 시조로 하고 보윤공을 일세로 해서 이제 까지 한결같이 병신보를 따르며 1928년 발견된 僕射公(복사공) 목(穆)의 墓誌에도 또한 보윤공까지만
系代되었다.
호장은 鄕職의 가장 윗자리이고 麗史選擧志(려사선거지) 鄕職考(향직고)에는 여러대에 걸쳐 優美(우미)한 가풍을 지닌 자손에게는 처음에 兵史나 倉史부터 임명하여 호장에 이르게 하고 가풍이 不及한 집안은
公須 나 藥店 등 까지만을 시켰으니 이로써 미루어 系代以前에 着積이 오래되고 또한 가풍이 뿌리 깊었음을 알게 한다.
金石集에서는 923(新羅 景哀王 4년)11월에 있은 甄萱(견훤)의 난에 아버님이 殉節하고 가족이 害를입어 孑孑(혈혈)한 어린이가 거리를 방황하다가 이듬해 928(경순왕 일년 戊子)년에 당으로 가던 신라 使臣의 도움으로 동래에서 자라나고 만년에 안일호장이 되었으니 안일호장의 제도가 마련된 998(고려 목종 1년 戊戌)년 3월 까지를 헤아린다면 공은 신라 경명왕 무렵에 탄생하시어 팔십여세의 수를 누렸을 것이라 고하고 이어 古史撮要(고사촬요)와 姓譜들을 인용하여 “어린공의 형제가 당으로 가던 신라 시신에게 구제되어 동래에서 자라나 형은 동래의 호장이 되고 아우는 延日로 옮겨가 그곳 호장이 되었다” 고 했으며 동래촌지에서는 공이 서울(경주)태생인데 어려서 난리를 만나 이곳 동래로 와서 호장으로 팔십여세를 누리고 안일호장에 이르렀으며 동래정씨 시조가 되었고 그 후손이 번창하여 온 나라 안에 퍼졌다고 했다.
一世
甫尹戶長公 之遠
보윤은 고려사 향직고에서 향직 팔품의 계라 했으며 공을 僕射公墓誌에서는 郡長이라 하고 文安公墓誌에서는 호장이라고 했는데 같은 뜻이며 또 시조 안일호장공과의 系代는 알 수 없고 生卒과 配位의 姓氏와 墓所를 모두 모른다. 子 文道
二世
安逸戶長公 文道
족보에 안일호장이라고 하고 복사공묘지에 郡長이라고 하고 문안공묘지에 호장이라고 했으며 생졸년대를 모르나 아드님 복사공이 1057(고려고종 11)년 팔십세로 어버이곁을 떠나 공부(辭親遊學:사친유학)하여 1066(문종 20)년 이십칠세로 성균시에 급제하는 사이까지 칠십세이상의 수를 누려 안일의 품계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니 成宗年間(981-997 재위)쯤에 탄생했을 듯 하다.
묘소는 東來華池山 左旋乾亥龍(좌선건해룡) 丑艮回頭(축간회두) 壬坎轉身(임감전신) 壬入首 子坐午向 인 정남향의 金鷄抱卵形局(금계포란형국)이 기여가가 이르는 용절과 좌향이며 예부터 천하명당이라고 이르는 우리의 성지인데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가 그곳이며 배위의 성씨와 生卒과 合祔(합부) 여부는 미상이나 묘제에서 雙酌(쌍작)을 올리며 尊香(존향)은 정조,한식,단오,추석,동지등 일년에 다섯 번 (오향정)이다.
一子 : 穆(목) 二子 : 先祚(선조) 戶長
족보에서는 호장공의 옛집터가 황령산 기슭 羊亭村 黑岩里인데 거기 두 덩이 바위가 있는곳을 고을 사람들이 지금껏 가리켜 공의 옛집터라고 하는데 묘소의 동쪽 이십리 쯤이라 한다. 묘소는 재황령산하의 양정촌 흑암리 이니 村址에 有兩岩 이라 邑人이 모두 至今히 指其兩岩間 하여 傳爲舊基云하다. 황령산은 又稱居漆山(우칭거칠산)인데 在府南 하니 自墓所로 二十里許云하다.
또 先山記實에서는 舊基가 본디의 東來西面栗北里로서 동래군 동래면 연산동이라고 했으며 현재의 부산 동래구 연산동이 그곳인데 1937년에 이십육대손인 전중구원 의관 희조가 이 일대를 매입하여 지금의 연산동 산 186의 1번지 삼통오반에 安逸戶長東來鄭公遺墟卑를 세웠다고 했으나 비석만 길가에 쓸쓸하고 그 자리가 다시 남의 소유가 되었다. 또 이곳은 호장공의 유허일 뿐 아니라 복사공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邑誌는 文安公 沆의 아드님 司丞인 敍의 舊居는 십리에 있으니 과정이라고 한다고 했고 여지승람에서는 과정공이 귀양와서 외를 심던 터가 남아 있다고 했다.
瓜亭이 歸田里 하여 築亭種瓜하더니 亭基가 至今存焉云이라고 한다.
동래 군지에서는 공이 고려 현종(1010-1031)때의 동평현 안일호장인데 공이 흑암리(지금의 양정동)동쪽에 살았으며 연만하여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관가에서 나팔소리가 들리면 관장이 초하룻날 그 달의 집무를 시작하는 신호인 줄 짐작하고 문득 뜰에 내려가 절을 하고 엎드렸으며 또 손수 무우(菁根)를 심고 가꾸어서 길섶에 그것을 쌓아 두고 굶주린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요기(療飢)하게 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무우를 먹게 해 주어 고맙다는 뜻의 노래인 신청사를 지어 노래하더니 後孫들이 모두 명망이 높으고 뛰어나서(顯達) 조정에서는 世臣이 되고 향당(鄕黨)에서는 세족이 되었다고 했으며 그 原文은 東來郡誌에 鄭文道는 高麗 顯宗朝의 東平縣 安逸戶長인데 公이 居하기를 黑岩里하니 今의 楊亭里 東이라 老而退去하여서도 聞吹角聲하면 輒下庭拜伏하고 手栽菁根하여 積置路傍하고 以賑行人之飢者하니 人이 感祚 賑菁詞 하더니 後孫이 皆顯達 하여 在朝 하여는 爲世臣하고 在鄕하여는 爲世族한다(人物條)
또 같은 책에 “馬飛峴(新左水營)과 巨伐里(巨堤里)중간 지점인 화지산 경내에 下馬亭이 있는데 鄭墓앞이므로 이 하마정 앞을 지나갈 때 모두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경내를 벗어나서 다시 말을 탈 수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또 夢軒 洪萬宗의 筆記에서는 “鄭氏의 시조는 호장이니 옛 아전위수임으로서 한나라의 主吏와 같은데 연만하여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매향 개아(開衙)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득 뜰에 내려가 부복했으니 그 공손하고 근간(勤幹)함이 이와 같았다. 돌아가시자 아드님 僕射公이 상여를 받들어 화지산에 이르니 범이 WN그리고 앉았던 자리가 눈이 녹아 기이하므로 거기에 장사지낸 다음 연달아 자손의 벼슬이 혁혁하니 하늘이(그 공손하고 근간함에 감동하여) 복된 묘자리를 주어 자손으로 하여금 음덕을 입게 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리요 옛날에 공자의 조상인 정고부(正考父)라는 분이 춘추시대에 송나라의 上卿(상경)으로서 대.무.선(戴.武.宣) 세 임금을 섬겨 벼슬자리가 높았으되 더더욱 공손해서(三公歷佐 位高益恭) 그 후예에 어진 자손(賢者賢孫)이 많이 태어났으니 호장공이 스스로 몸을 단속하고 공손하며 삼가서(律已恭謹) 그 후손에 이름 높은 벼슬자리들(巨卿名公)이 대대로 서로 이어져 빛났으니 그 갚음이 사리에 어그러지게 아니함이 이와 같았도다. (주) 원문은 생략합니다.)
또 선대사적에서도 자손이 번창하고 명공석덕이 대대로 이어지니 이 어찌 덕을 쌓은 갚음(보답)이 아니리요“ 라고 했다. (주) 원문은 또 생략합니다.
墓表 譯
앞면에 동래정씨시조호장정공지묘라고 썼으며 뒤쪽(陰記)에
공의 이름은 문도이고 정씨의 시조이며 무덤은 동래의 화지산 정남향(子坐午向)에 있으되 상세를 고증할 문적이 없더니 효종(1650-1659)때 경기도 장단 고을 송림산하의 옛무덤이 허물어져 誌石이 나타났는데 예부상서 문안공 鄭沆의 무덤이더라 거기에 “그 손대는 동래인이고 아버지 穆은 섭대부경이며 할아버지 문도와 증조부 지원은 모두 본부의 호장이라 항은 이십삼세인 고려 숙종 임오(110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병진(1136) 곧 송나라 紹興六年에 돌아 가셨고 항은 형이 세분인데 濟는 일찍 돌아가시고 경과 택은 모두 문장과 재헌으로 조정에 이름이 널리 알려 졌었다” 고 했으니 공의 년대는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므로 삼가 비석의 뒷 쪽에 적어 후손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하노라
皇明崇禎甲申後 五十八年辛己(1701 숙종 27) 冬至日에 이십대손인 密陽府使 是仙은 改竪 하노라.
三世
尙書都省 左僕射公 穆
자와 호는 없으며 1040(高麗 靖宗 6년 庚辰)년에 태어나서 1105(肅宗 十年 乙酉)년 오월십구일 乙卯에 卒한 朝散大夫 檢校禮實卿 行攝大府卿으로 紫金魚袋가 下賜되다. 1057(고려문종11 丙午)년 어버이 곁을 떠나 松都로 가서 공부하여(辭親淤學) 1066(고려문종20 丙午)년 成均試에 합격하고 1072(문종 26 壬子)년 봄에 廣殿試에서 御製와 相合하는 “書窺天子日이요 夜孕庶民星이라”는 시 한구가 있어 총애가 특별했고 급제하여 秘書省(비서성) 校書郞同正(교서랑동정)이 되고 이어 1076(문종 30 병진)년에 軍器寺主簿(군기사주부)로 高洲通判이 되었다가 임기 마치고 다시 내직에 들었다가(위패미상) 다시 1084(선종 1년 갑자)년 永淸縣令으로 나가 어진 정사를 베풀고 이년후 史館으로 영전되어서 宣宗實錄의 史草를 편수했고 1093(선종10 계유)년 監祭御使가 되고 그해 春夏番東北面 兵馬判官 甲仗別監으로 고주 화주 장평등 일곱 고을의 宣撫使를 겸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율하니 萬民이 安心하고 生業에 從事한 公으로 殿中內給事로 승진하고 金洲(金海) 刺使가 되어 요수(妖宗)를 근절시키고 삼년후 임기가 차매 내직으로 들어 左拾遺 智 制誥 가되고 이어 殿中侍御使가 되었으며 1097(숙종3 정축)년에 또 起居郞이되고 刑部와 禮部의 侍郞을 거쳐 1105(고려숙종10 을유)년 봄에 三品官에 이르러 육십육세를 누리고 이해 오월 십구일 을묘에 卒 하여 시월 이십일 甲申에 弘護寺의 서남 언덕(여기가 長湍君 大德山)에 모셨고 諡號가 文安이며 祭亨은 寒食과 冬至이다.
舊譜와 家牒(가첩)에서 공을 상서성 左僕射(좌복사) 攝大府卿(섭대부경)이라 하고 묘지문에서는 다만 대부경이라 했고 또 문헌 備考 諡號考(시호고)에는 “文安” 건에 고려 좌복사 정목이라고 먼저 쓰고 이어 知樞密事(지추밀사) 鄭沆을 썼으며 父子同諡條(부자동시조)에도 그대로 나타나며 東來纂要(동래찬요)에는 “공이 禮賓卿으로 攝行大府卿 하고 아들 넷이 모두 문과 급제했기에 예에 따라 銀靑光綠 大夫 尙書省 좌복사의 爵位(작위)가 더해졌다” 고 했으나 공의 誌文에는 濟는 吏術로 就仕라 하고 문안공 항의 묘지에는 제는 未顯이라고 했으니 四子가 등제한 것이 아니고 三子 등제이다.
공의 묘소가 실전된 년대는 미상이지만 오랫동안 선인들이 각지를 두루 탐사한 선산구방록이 상신록에 실렸고 1885(고종22 을유)년 겨울 정산 사대동(지금의 충남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서 광록대부 동래정공지묘 라는 십편의 묘지석을 얻어 공의 묘소로 믿고 1886년(병무)부터 10월10일을 정일로 ayd를 받들고 四山局內를 도의 원문과 군의 입지를 얻어 정계하고 수호하다가 43년만인 1928년 3월에 경기도 장서군 장도면 상리에 있는 대덕산의 子座原에서 묘지석이 발견되어 공위 묘소임을 확인하고 고쳐 모시다가 광복후로 휴전선이 막혀 다시 香火가 끊어져 화지산에서 동지일에 歲一事로 모신다.
配位는 복사공묘지와 문안공묘지에서 상당군부인 高氏이니 공이 삼십이세인 1071(문종25 신해)년에 檢校將作監 廣陵高公 益恭의 따님을 맞이한다고 했다. 高氏譜 上世扁에서는 高氏의 鼻祖 高乙那의 사십육세손인 中始祖 耽羅太子 末老의 後裔가 九派를 형성하는데 말노의 증손인 상당군 익첨의 후손이 상당군파라 하여 청주로 관을 삼는다. 上黨君 익첨으로 기일세하여 子에 송현이며 女에 鄭穆이라 했다. 부인의 祖父는 大基이고 曾祖는 綱이요 高祖는 末老이다. 또 생졸은 모르며 묘소도 공과 합장되지 아니했으므로 실전이다.
四子를 두었다.
一子 濟 通判公
二子 漸 御史雜端公
三子 澤
四子 沆 文安公
첫댓글 보석님 고마워요 ^*^
좋은 자료 발취해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