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지방장로회 순교유적지 답사기]
일제의 만행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수필가
문화씨티교회 장로
김 종 범
지난 12월 10일 감리교 당진지방 장로 수련회가 있었다. 장로님들의 사기진작과 친목 도모를 위해서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당진시청 정문 앞에서 70여 명의 장로님들이 대기하고 있는 두 대의 버스에 분승하였다. 몇몇 목사님들이 격려차 나오셔서 참석한 장로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셨다. 출발에 앞서 박용선 감리사님의 인사말씀이 있었고 당진교회 방두석 목사님께서 당일 행사를 위한 기도를 해주셨다. 많은 분들의 후원과 성원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예정된 시간 아침 8시에 출발하였다. 차중에서 회장님 인사가 있었고 총무의 당일 일정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수련 장소는 감리교 교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의 총칼에 무참하게 순교당했던 성지,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제암리감리교회였다. 한 시간 남짓 걸려서 참혹하고 잔인했던 일제 만행의 현장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제암리감리교회 학살사건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기념관이 건립되고 교회가 새롭게 세워졌다. 교회 건물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는 당시 제암리 교인들의 순교 혈흔과 독립의 염원이 서려 있는 듯 하였다.
먼저 기념관에 들렀다. 기념관은 3.1운동 정신과 지역 주민들의 독립 만세운동 참여 현황을 널리 알림으로써 선열들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건립했다고 한다. 시청각교육실과 제1기념관, 제2기념관으로 나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우측에 시청각교육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약 20분 동안 영상을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현장을 목격하고 참상을 당했던 증언자들의 이야기와 두렁바위의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그 당시 사건 현장에 있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영상을 통해서 국권을 침탈 당했던 일제 강점기에 이곳 주민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얼마나 참혹한 수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 제1전시관은 사건의 총체적인 배경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또한 화성시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제암리 마을이 일본군에 의해서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집이 불태워진 모습은 너무도 처참하였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전시물을 보고 잔악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지나간 역사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교훈을 주고 있는 제1전시관 관람 후 제2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2전시관은 국외 독립운동과 3.1독립운동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조국에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눈물겨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던 순국열사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전시관을 나왔다.
다음은 전시관과 별동으로 이어져 있는 제암리감리교회에 들렀다. 예배실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70세가 넘은 듯한 목사님이 단상으로 올라가셨다. 인사말씀 중에 2년 전 본 교회 담임목사로 계시다가 은퇴하셨다고 하셨다. 5km 쯤 떨어진 곳에 사시면서 교회 방문객들이 찾아올 때마다 교회에 오셔서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에 대한 증언을 하신다고 했다. 말씀을 조리 있고 현장감 있게 잘하셨다.
1919년 4월 15일 일본 경찰들이 제암리교회 신자들 21명을 교회에 몰아넣은 후 문을 폐쇄하고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거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 남편을 부르며 울부짖는 두 아낙네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뇌리에 그 참상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일본 경찰은 제암리의 가옥 30여 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여 시채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감리교회 교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고 했다.
1919년의 3.1운동 당시 개신교는 천도교, 불교와 함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시위 중 상당 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피해가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시의 제암리감리교회다.
일제강점기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역사,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원한을 후손들이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독일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만행을 속죄하고 용서 받기 위해서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세워진 유태인의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에도 독일 대통령과 총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일본의 역사 인식은 다르다.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으며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일본군 개입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야만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강제징용과 학도병징집 및 위안부 징발 등 전쟁노예로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 동포들의 원혼(冤魂)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우리 후손들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웠던 신앙 선배님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도록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2015년 12월 28일
당진신문 오피니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