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87문
제 87문 따라서 감사치 않고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왜곡된 상태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안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바 대로 음란한 자, 우상 섬기는 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하는 자, 술 취하는 자, 토색(강도)하는 자 그리고 기타 다른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Non possunt igitur illi seruari, qui ingrati, et in peccatis secure persistentes, a sua pravitate ad Deum non convertuntur?
-Nullo modo. Nam, ut scriptura testatur, nec impudici, nec idolatrae, nec adulteri, nec fures, nec avari, nec ebriosi, nec conviciatores, nec raptores, herediratem regni Dei consequentur.
( 해 설 )
제 87문은 한편으로는 숙명론(宿命論)자들에게 쐐기를 박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다른 자연(自然)종교와 다름을 보여준다. 숙명론에 빠진 자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확보해 놓았으니 이제 후로는 이 세상 죄악의 낙을 즐기며 살자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자들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받은바 은혜에 감사해서 이제부터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려고 결심하게 된다. 즉 구원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숙명론에 빠진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상태에 어울리는 신분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활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밖으로 나간 사람이다. 감사하지도 않고 왜곡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는 자의 상태속에 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러 보건대 제 87문은 나의 구원문제를 점검하게 만드는 것이다.
1.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받은 자의 열매이다.
중생한 자는 선행과 감사의 삶을 통해 참 믿음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악한 행위는 곧 하나님 없는 삶은 육(肉)의 열매요 감사치 않음의 증명이요 불신앙의 표시이다. 주님도 마 7:16에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다.
2. 불신자의 부끄러운 죄악들
위의 답 부분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행하는 명백한 죄와 부끄러운 짓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 즉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는 자는 이런 일에 낙을 두고 살게 된다.
① 음란한 자: 성적으로 더러운 말과 행동을 통해 성윤리를 손상시키는 자.
② 우상 섬기는 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자, 돈, 재산 그리고 먹고 마심에만 낙을 둔 자(빌 3:19). 모든 죄는 바로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③ 간음하는 자: 부부의 순결을 깨는 자이며, 즐거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 쾌락에 둔다.
④ 도둑질: 가만히 남의 재산을 가져옴
⑤ 탐하는 자: 전체 관심이 땅의 속한 재물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골 3:5)
⑥ 술취하는 자: 도가 지나쳐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술의 노예된 자.
⑦ 讒訴(참소)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여 불명예스럽게 하고 사사로운 일로 중상 모략하여 他人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자
⑧ 토색(강도)하는 자: 무력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음
⑨ 죽도록 남을 때리는 자: 고전 6:9,10
이 아홉 가지는 십계명의 후반부 언급한 것으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악을 말한다. 그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을 모르거나 떠난 자들은 그의 사고방식이 병들어 하나님을 모독할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이런 죄악들이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하찮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의 매우 많은 부분은 이런 내용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까지 이런 못된 풍조가 침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이런 풍조에 물들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의식구조가 너무나 유물론적, 범신론적, 이원론적으로 타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전도가 거의 불가능하다.
3. 선행을 통해 또는 선행 때문에 구원 얻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 없이도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선행, 복된 삶이 없으면 참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7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은 거룩케 하심에 있다. 계 20:13은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4. 특히 무거운 심판을 받는 자
믿음을 외식하는 자, 그리스도 이름을 악한 행실로 부끄럽게 만드는 자. 벧후 2:2,3 호색을 쫓고 진리가 훼방받고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로 해침. 마 18:7 실족케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5.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 못 얻는다.
회개란 이런 악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죄 가운데 살아도 성령으로 회개하면 구원 얻는다. 고전 6:11. 따라서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자는 회개하는 일을 연기하지 말라. (눅 12:20 히 3:7,8)
제 88문: 인간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은 몇 단계로 이루어집니까?
답: 두 단계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는 것과 새사람이 살아나는 것 입니다.
-Quot partibus constat conversio hominis ad Deum
-Mortificatione veteris, et vivificatione novi hominis.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개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 때 다시 살아 나셨듯이, 우리의 회심도 일차적으로 죽는 단계와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2000여 년 전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문제 토의)
1.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완전히 변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2.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스스로 완전히 착한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3. 당신은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되어 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경험을 이야기를 해보자
4. 다른 종교에서는 회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5. 지금까지 당신은 회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해설)
I. 회심과 회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회개와 관계하여 여러 가지 용어들이 사용된다. 칼빈은 일관성 있게 한 단어만 사용했다. 그런데 나중 개혁파 신학자들은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보다 더 세밀하게 표현했다. 칼빈의 경우 “회개”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용어도 개신교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그 의미하는 내용은 다르다.
1. 회개(Buße)
예수께서 “회개하라”(Buß tun)고 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돌이키라는 말이다. 즉 이전의 잘못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라는 말이다. 독일어 Buße의 의미는 원래는 불의한 행위에 대한 보상 또는 상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정용어로는 벌금을 의미하며 틈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범한 불의를 형벌을 받음을 통해 다시 보상하고 회복시킨다는 말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회심의 이 개념을 받아들여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으려면 교회가 지정해 준 벌을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다. 이를테면, 금식, 특별기도, 구제, 금욕, 성지 순례 등인데 이것은 모두 공로를 통한 구원의 사상과 연관된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 의하면 회개이란 생각(마음)의 방향이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Meta; de; to; paradoqh'nai to;n !Iwavnnhn h&lqen oJ !Ihsou'" eij" th;n Galilaivan khruvsswn to; eujaggevlion tou' qeou'@ 1:15 kai; levgwn o{ti Peplhvrwtai oJ kairo;" kai; h[ggiken hJ basileiva tou' qeou': metanoei'te kai; pisteuvete ejn tw'/ eujaggelivw/.)
이 구절은 회심의 두 가지 단계를 말한다. 먼저 과거의 죄로부터 돌아서고 그 다음은 미래를 향해 무엇을 붙잡는 것이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Pevtro" de; pro;" aujtouv", Metanohvsate, [φhsivn,¼ kai; baptisqhvtw e{kasto" uJmw'n ejpi; tw'/ ojnovmati !Ihsou' Cristou' eij" a[fesin tw'n aJmartiw'n uJmw'n kai; lhvmyesqe th;n dwrea;n tou' aJgivou pneuvmato".!)
이 구절도 회개하고 과거의 죽음의 행실로부터 벗어나 성령을 받는 상태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 중간 과도기가 세례이다.
2. 회심, 회개(Bekehrung)
우리 말 성경에는 “회심”과 “회개”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 두 단어를 구별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 단어를 주목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슥 1:4; 사 55:7). 말하자면 삶의 방향을 정 반대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3. 회개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더러는 단순히 “후회하는 것”으로, 더러는 “죄에 대해 아파함”, 또는 믿음의 개입으로 인한 변화, 맨 나중 의미에서는 회개(Buße)과 회심(Bekehrung)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죄인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죄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아래 구절들을 일고 분석하라. (사 1:16-17; 행 3:19; 엡 4:22-24)
-우르시누스: “참된 회심 또는 참된 생각의 변동 또는 참된 회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일어난 변화 또는 인간의 ‘새롭게 됨’(Erneuerung)이다. 인간은 이 새롭게 됨 속에서, 율법과 복음 속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뜻 그리고 자기의 부패성과 죄책을 알고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정죄로 인해 질식하며, 자기가 죄를 통해 하나님을 모독했고 지금도 모독하고 있음을 후회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순종하고 삶을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약속 안에 머문다.....”
II.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
1. 옛사람의 죽음 그리고 새사람. 이것은 순전히 성경 용어이다.
ㄱ) 여기 “죽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 원통에서 떠나 말라죽은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옛사람”이란 “인간의 죄적인 삶의 방식”(die sündliche Art des Menschen) 또는 “죄를 향한 욕구”(die Lust zur Sünde). 즉 자연인이 지니는 삶의 방식이다. 인간은 옛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그 이유는 이 옛사람이 영육에 아울러 全人을 채우고 지배하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옛”이라 불리어지는 것은 그것이 아담으로부터 왔고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원인은 바로 이 옛사람이다.
ㄴ) “새사람”이란 성령이 역사한 결과로 생긴, 선을 행하려는 인간의 의향과 성향을 말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새사람이란 전 인격을 장악하고 영과 육을 다스리는 것이다. “새”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의 자연적이고 죄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살 5:23).
2.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남
r) 여기 죽는 것은 질병으로 또는 늙어서 자신으로부터 생명적인 것이 떨어져 나가 마침내 죽음에 떨어지는 것(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죽여 버리는 것(Ertötung), 죽음에 넘겨줌, 죽여 버림을 의미한다. 옛사람에 속한 요소들을 잘라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살아남이’란 ‘생명 있게 만드는 것’이다. 생명이 커가고 자라나는 것은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ㄷ) 이것은 롬 6:4-6에서 가져온 그림이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세례를 통한 개인의 자아의 죽음과 중생과 일치시킨다. 한번 써보고 분석해 보자:
III. 참 회개와 거짓 회개
1. 거짓 회개
거짓 믿음이 있듯이 거짓 또는 외식적인 회심이 있다. 거짓 회심이란 회개의 열매가 없고 외적인 유리한 조건 때문에 형식적으로 일어나는 회개이다.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할 뿐이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또 마음은 여전히 옛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외적으로만 율법을 이루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의 회개를 말한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그러했다: “호 7:16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또 예수께서도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읽으셨다. “마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리고 바로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이적을 통해 손해를 당하자 순간적으로 회개하는 듯했으나 다시 철회한 일이나(출 8:8,15) 시몬 마구스가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사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때 형식적으로만 회심한 것이다. 가룟 유다가 후회했다고 할 때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 참된 회개
참된 회개란 우리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의 선하심을 행동으로 모독한 죄에 대해 바르게 그리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런 회개는 우리의 삶 또는 생명 속까지 파고 들어간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회개한 일이나(마 26:75) 탕자의 회개가 여기에 속한다(눅 15장).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돌아온 탕자)
3. 참된 회개 방법
참된 회개의 방법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회개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경험이다. 회개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러는 천천히, 더러는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야곱은 서서히 성화 되었고, 사울(바울)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어거스틴도 갑자기, 칼빈도 갑자기 생애의 큰 획을 그었다.
IV. 참된 회개는 누구에게 필요하나?
1. 아직 죄와 사망의 상태속에서 살고 있는자
죄와 사망의 권세와 지배 아래에 있는 자, 다른 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자연인)은 회개해야 한다. 이들은 사망의 상태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곳에 머무는 한 구원이 없다. 이들은 회개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을 당한다.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2. 그리스도인의 회개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도 매일 범죄하기 때문에 매일 회개하며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 죄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데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육신 안”에 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범죄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자신과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매일 기도함을 통해 성령 충만하면 육의 정욕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Toigarou'n kai; hJmei'" tosou'ton e[conte" perikeivmenon hJmi'n nevfo" martuvrwn, o[gkon ajpoqevmenoi pavnta kai; th;n eujperivstaton aJmartivan, di! uJpomonh'" trevcwmen to;n prokeivmenon hJmi'n ajgw'na)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4 ajlla; e[cw kata; sou' o{ti th;n ajgavphn sou th;n prwvthn ajfh'ke". 2:5 mnhmovneue ou&n povqen pevptwka" kai; metanovhson kai; ta; prw'ta e[rga poivhson: eij de; mhv, e[rcomaiv soi kai; kinhvsw th;n lucnivan sou ejk tou' tovpou aujth'", eja;n mh; metanohvsh/".)
3. 아이들고 회개해야 한다.
아이들도 회개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삶 가운데 사는 것은 의무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4. 우르시누스(Ursinus)의 정의
“우리의 회개는 이 땅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고 하늘나라 생명가운데 완성될 때까지는 그 과정이 계속된다(고전 13:9). 이러한 사실은 성도들이 부르짖고 간구하며 회개하는 자세에서 드러난다(시 19:13; 롬 7:24; 마 6:12). 롬 7장과 갈 5장이 다루는 영과 육 사이의 싸움이 그것을 증거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회개한 자는 계속 회개할 것을 권고한다(계 22:11). 또한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육이 완전히 죽고 영이 완전히 소생하는 것 그리고 완전한 회개가 이 생애 동안 성도들 속에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육의 죽임(Abtötung)은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계속해서 육의 정욕과 싸울 뿐 아니라 이 싸움에서 자주 패배하며 더러는 범죄하고 타락하며 하나님을 모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변명하지 않고 멸시하며 울부짖고 그리고 피하려고 노력한다. ‘생명 있게 만듦, 또는 중생’(Lebendigkeit)이 이 생애 동안 완전히 완성되지 않음도 이 싸움이 증명한다. 진리를 아는 일이 단계적으로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 감정의 새롭게 됨도 서서히 일어난다. 우리의 의지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따르는 것이다. 회심한 자의 의지가 이 생애 동안 불완전한 상태로 선을 지향하는 이유는 ⑴이 생애 동안 인간성은 신인식과 관련하여 또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성향과 관련하여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큰 은총을 받은 바울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내게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고 말했다(롬 7:18이하). ⑵ 두 번째 이유는 회심한 자들도 늘 성령의 지배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더러는 시험 당하고, 더러는 치리 당하는 일을 하며 더러는 스스로 비열해 져서 일시동안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 다시 회개한다(막 9:24; 겔 16:61)”.
왜 하나님은 비록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생애 동안 회개를 완성시키지 않으신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⑴ 이는 성도들이 겸손히 믿음과 인내 기도와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중에 연단되기 위함이다. 고난 속에서 겸손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즉 스스로 완전하다고 교만하지 않고 계속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마 6)라고 매일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⑵ 또 이들로 항상 더욱 완전한 것을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⑶ 또 아들이 다음의 사실을 알면 알수록 세상을 멸시하고 항상 하늘 나라의 생명을 사모하고 손을 뻗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는 되는 것이 아직 보관되어(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골 3:2; 요일 3:2).
5. 칼빈의 회개이해
“이 성화는 한 순간에 또는 하루에 또는 일년 내로 완성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자기의 택한 백성들 안에 있는 육의 정욕을 파괴시키고 더러움에서 깨끗이 하며 그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때 이들의 생각을 진실로 깨끗하게 소생시키시는데 성도들은 일생동안 회개해야 한다. 이들은 이 영적인 전쟁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끝남을 안다.” 한 마디로 칼빈의 경의 회개는 한 가지는 죽이고 새 것은 살리는 삶을 의미한다.
6. 루터의 이해
첫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자기 성도들이 지상에 있는 전 생애동안 계속 끊임없이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이것은 칼빈의 이해와 일맥상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V. 회개는 누구의 사역인가?
1. 성령의 사역이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참된 회개를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 본성이 완전히 부패해 있고 회개케 할 수 있는 능력인 신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그 처음 그리고 그 진행과정 그리고 그 마침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만일 요엘과 같은 선지자나 사도들이 회개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러한 요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겨냥한다. 요엘 2:12; 행 3:19을 읽어보고 분석하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알도록 하나님의 율법을 지니며 이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靈을 통해 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아우스부르크 고백서는 성령께서 회개를 주도하심을 가르친다. 제 5항: “성령께서는 자기가 원하는 장소와 시기에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여 복음을 듣게한다”.
2. 회개는 인간의 사역이다
이방인의 경우 바울은 회개를 요구하기 전에 복음을 설교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명령한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7-18). 회개하도록 요구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하나님이 그들 속에 회개를 일으키시는 사람에게만 효과를 발생한다(요 6:44; 롬 9:18; 빌 2:13; 히 13:20-21).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회개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시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는 회개할 수 없음을 안다. “렘 31: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 31:19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우르시누스(Ursinus): “모든 택한 백성들은 이 생애동안 진심으로 회개하고 육에 대항하여 영적으로 싸우는 일에 마침내 승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참 회개가 시작된 사람은 비록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고 또 옛사람 또는 죄로 인해 이 생애 동안 붙어 다니는 것으로 인해 실수도 하지만 결코 그 회개가 완전히 중단되지 않는다. 따라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마침내 구원을 얻는 것이다(마 7:24; 빌 1:6; 요일 2:19; 3:9)......”.
제 89문: 옛사람의 죽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답: 진심으로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당신이 당신의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또 점점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미워하며 거기서 피하는 것입니다.
-Quid est mortificatio veteris hominis?
-Vere et ex animo dolere quod peccatis tuis Deum offenderis, eaque magis ac magis odisse et figure
(문제토의)
1. 지금까지 당신은 옛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나? 우리 몸속에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2. 옛사람이 죽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나?
3. 범죄했을 때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생각 때문에 슬퍼해 본 적이 있는가?
4. 이전에는 즐거이 행한 죄를 이젠 점점 싫어지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5. 만일 그렇다면 어떤 경위를 통해 그렇게 되었나?
(해설)
제 89문은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옛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옛사람”의 정체를 모르면 그 처방도 알 수 없다. “옛사람”의 죽음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⑴ 그 첫째는 죄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
⑵ 죄를 미워하고 피하는 것.
I. 옛사람의 죽음
A. 죽음(Absterbung)의 의미
1. 정의
여기 “죽음”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Abtötung)이나 십자가에 못박는 것(Kreuzigung)을 의미한다. 죄의 지체를 사용하지 않아 그 기능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靈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여기 “죽이고” “못 박는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⑴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⑵ 옛사람의 죽음이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되고, ⑶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⑷ 또 그것은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새사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2. 이 죽임의 필요성
우리는 생애 마지막 곧 육체의 죽음을 당할 때,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죽지 않기 위해, 먼저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 사울왕은 “옛사람”을 죽이지 못해 영원한 멸망을 당했다. 사람나다 약점이 있는데, 이것은 옛사람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죽이기 위해 영적으로 전투하는 것이다.
B. 이 죽음의 두 단계
1. 소극적인 측면
“진심으로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당신이 당신의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속에 역사 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ㄱ) 죄인에게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그 죄의 엄청남과 끔찍함을 보임을 통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시 51:5). 이때 무척 마음에 아파한다. 현대 타락한 교인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문둥이처럼 되어서 죄를 범하고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그 영적인 신경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ㄴ) 죄인에게 지존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한 죄에 대해 벌을 받아 마땅함을 확신시킴을 통해 죄의식을 고취한다(렘 3:13). 중생한 인간의 특징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식한다는데 있다.
ㄷ) 이로써 죄인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후회한다(단 9:7; 요엘 2:13; 고후 7:10). 이런 부끄러움을 진작 맛보지 못하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ㄹ)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도록 역사한다.(시 32:3,5; 요일 1:9)우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범죄했고 그의 거룩하신 계명을 짓밟았으며 그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 우리는 또 이런 죄를 통해 우리의 이웃에 대항하여 범죄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할 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격려와 도고가 필요하면 도움말을 구한다.
2. 적극적인 측면
옛 사람 또는 옛 자아를 죽이는 두 번 째 단계는 “죄를 미워하며 거기서 피하는 것입니다.”
ㄱ) 죄를 미워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수치, 손해 그리고 형벌 때문에 죄에 대해 전율하는 것이 아니고, 죄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당하고 또 하나님 자신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전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은 죄가 혐오스러워 상대하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회심한 자들도 죄가 혐오스러워 멀리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체질상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시 119: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죄를 적극적으로 미워할 것을 워면한다.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롬 12:9( JH ajgavph ajnupovkrito": ajpostugou'nte" to; ponhrovn, kollwvmenoi tw'/ ajgaqw'/:)”
반면에 악인들은 죄악을 매우 즐겨함을 성경은 말씀한다. “시 52:1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시 52: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시 52: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시 52:4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ㄴ) 죄에 대해 전율하며 죄를 미워하는 자는 죄를 피하는 일에 진지한 자세를 지니며, 아이들이 불장난을 피하는 것 같이, 죄에 대해 조심하며 시험에 들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조심스럽게 피한다. 죄를 피한 대표적인 예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한 요셉의 경우이다. 시편의 복있는 자는 피할 것을 피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회심한 자들은 이전에 즐거이 추구하던 죄를 지금은 피한다는 말이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런 것들을 피해야 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은 결국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골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 곧 1) 붙잡지도 말고 2) 맛보지도 말고 3)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ㄷ) “점점 더 오래 점점 더 많이”. 하나의 죄인식은 회심의 시작이다. 그러나 죄들의 인식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태양이 높이 떠오를 때 새벽보다 삼라만상이 점점 더 분명하게 보이듯이 인식되듯이 죄인식도 그와 같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이 자신의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구원의 상태 속에서 이와 같은 죄인식과 또 연습을 통해 죄를 피하고 모면하는 능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소극적인 차원에서 점점 죽어야 할 부분은 죽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