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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스크랩 금강역사상의 석인상 당간지주(만복사지)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아
김문배 추천 0 조회 19 10.02.08 15: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분노한 금강역사상의 석인상 당간지주(만복사지)를 옮겨 온 까닭

 

남원하면 광한루가 으뜸으로 찾아가는 관광지이다. 좀 특이한 당강지주가 있는 만복사지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 곳엔 석인상 당간지주가 서 있다. 원래부터 만복사지에 있지 않았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지금도 사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석인상 당간지주는 근처 도로공사 때문에 만복사지로 옮겼다. 2009년 8월 발굴하여 옮겼으니 2009년 8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더욱 혹하여 자세히 보았다.

 

원래 두기였다고 한다. 동남쪽 다른 석인상은 머리는 향토사료관에 있고 몸체는 현재 땅속에 묻혀있다. 현재 만복사지 입구에 큰 키(전체 높이 5.5미터이지만 지상에 드러난는 부분은 3.7미터이고, 나머지는 지하에 묻혀 있다.

 

길쭉한 직사각형 돌기둥을 조각하여 조성하였다. 용도는 절의 당간지주 역할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얼굴을 살펴보면 분노형이다.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상으로, 인왕상(금강역사상)으로 여겨진다. 사찰이나 불법 수호신인 인왕상, 이왕,이천상, 금강역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만복사지는 고려문종(1046~1083년)때 창건된 사찰로 한 때 수백의 스님들이 거처하던 큰 가람이었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매미' '중상골' 등 여러지명이 있어 전성기의 사찰 규모를 추정하는 지명들로 여겨진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며 승려들의 빨래 널었던 곳이었다. 빨래가 온통 하얗게 널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썩은 밥매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만복사 기거 승려의 수가 엄청났음을 간접으로 알려주었던 지명이다.

 

정유왜란 남원성 전투 당시 왜병에 의해 소실되어 복원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로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동탑서전' 방식의 유구가 남아 있어 고려시대 가람연구의 대표적 사료가 되고 있는 절터이다.

 

석인상 당간지주까지 입구 뜰에 버티고 있어 관람객들이 애호하게 될 사찰터가 될 수 있겠다. 

 

<만복사지 4가지 보물문화재와 석인상당간지주/촬영:정광산인 글돋선생/2010.01.25 월 남원 만복사지에서> 

 

 

근처 땅속에 묻혀 있다 , 만복사지로 옮겨와서 주인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석인상 당간지주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에서 분노한 인상을 볼 수 있다. 군의무늬가 물결치듯 선명히 흐른다.

만복사지-1탑 3금당의 가람배치이며 동탑서전 방식의 유구가남아있다.  

 석인상 당간지주

 사진

 

 

 만복사지 당간지주

 만덕사 당간지주-윗쪽 도로 제방 때문에 당간지주가 불안전하게 보인다

 웬지 불안전하게 보이는 만복사지 당간지주

뒷면 홈을 보아 당간지주 용도로 보인다 

한쪽 면은 직각 단면으로 또 한쪽 당간지주는 머리는 자료관에, 몸통은 땅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웬지 머리부분과 몸통부분 방향성이 어색하다. 머리가 너무 뒷편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 

 

만복사지엔 보물이 4개가 있다. 석인상은 발견된지 얼마 되지않아 아직 보물 지정이 않됐고,

보물 제32호 당간지주. 보물31호 불석좌, 제 30호 오층석탑. 보물 제43호 석불입상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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