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투어 체험 정 장
안녕하세요. 함평을 찾아 주셔서 반갑습니다. 잠시 여러분을 안내할 사람 정장입니다.
옛날에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함평에서는 특이하게 팔아 먹을 것이 없어서 머리를 싸메고 고민하다가 나비를 팔아 먹게 되엇습니다.
현대 사회는 꾸준한 학습을 통한 아이디어 개발이 큰 자산임을 증명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방문할 사산서원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589년(선조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이 일어났다. 관군에 쫓긴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로 도망해 자결했다고 전해졌다. 무수한 소문과 폭력과 광기만이 휩쓸고 지나갈 뿐 앞서 가버린 망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 이들은 반역의 주모자도 없이, 변호해 줄 이들도 없이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인구 5백만의 조선에서 1천여 명이 죽었다. 전쟁과 다름없는 피의 살육전이요, 마녀사냥이었다.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광풍 속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호남의 사람들은 기축옥사로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동방의 진유(眞儒)로 이황(李滉)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던 함평의 대학자(大學者)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 마저 살육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반사건을 통해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어 동인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그는 정작 동서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은둔의 학자였을 뿐이었다.
그는 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웠고 홀로 절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을 널리 공부하여 깊은 경지를 체득했다. 이후 41세에 지금의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에 윤암정사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들을 길렀다. 제자들이 살았던 불암마을에서 바로 옆 동네의 윤암정사로 가는 길은 지금도 '제자거리'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이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그의 호 곤재(困齋)는 '곤란함으로 지은 집'이다. 곧 그에게 있어 학문과 삶이란 역경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닦아가는 의지실현의 경로이자 거처였던 셈이다. 문집 제목인 '우득록(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던 함평의 대학자(大學者)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 마저 살육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반사건을 통해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어 동인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그는 정작 동서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은둔의 학자였을 뿐이었다.
“내심에 아름다운 덕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말함에 신중히 하여 함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겸양하는 마음으로 그 미덕의 성정(性情)을 키워 총명함을 자처하지 않고 비록 사물의 이치를 변별하여 알아챔이 있을지라도 그 알아챔을 자의로 이용하지 말고 사물의 이치를 알아도 그 아는 바를 자의로 이용하지 아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곤재는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덕과 의를 사모하였고, 도(道)를 고명하게 본 것은 오직 존형 1인이 있을 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가 쓴 편지는 역모자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고 말았고 그는 옥중상소에서 "정여립과는 교정랑(校正郞)으로 처음 만났고 함께 강론하고 교정을 본 것이 겨우 10여일 이었는데 어찌 친밀함이 있었겠습니까? 무릇 편지는 친밀하면 말이 많으나 그렇지 못하면 공경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 격에 맞는 예의입니다" 고 했다.
그러나 서인 권력의 대표로 역모사건을 조사했던 송강 정철은 "개청은 아직 모반하지 않은 여립이고, 여립은 이미 모반한 개청"이라고 몰아 세웠다. 미수 허목이 쓴 '곤재 선생전'에는 "곤재가 본래 정철의 사람됨을 탐탁히 생각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이 그 청백한 지조가 취할 만 하다고 말해도 선생은 다만 답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정(正)을 꾸미고 거짓 행세를 하니 바른 사람이 아니다' 함으로 이 말을 듣고 정철이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철 스스로도 심문의 과정에서 곤재와 정여립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정철 개인의 사적 관계가 개입된 듯한 흔적을 보게 된다. 곤재는 결국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고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죽음 뒤 동생 대청은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또 그 스스로 14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으며, "형께서 도를 지키시다 원한을 머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능히 설욕을 못했으니 내가 죽은 뒤에는 제사에 어육(魚肉)을 쓰지 말라"는 한스런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굴곡진 운명은 사후에도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사후 26년이 지난 1616년(광해군8년)에야 역적의 누명을 벗고, 그의 사우(祠宇)가 함평에 세워졌으나 당쟁의 소용돌이는 지속되어 훼철과 복설이 반복되었다. 1616년에 건립된 사우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했으며 1988년에 복원되기까지 6번 건립되는 곡절을 거치게 되었다.
그의 곤(困)함이 자산서원의 운명을 예견했음일까? 자산서원은 조선 당쟁사의 굴곡진 자화상이기도 하며 현재의 우리를 비춰주는 소중한 거울이기도 하다. 제동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후학들이 오갔던 '제자거리'에 서서 이야기 한다.
"옛날에 곤재 선생이 저기 윤암산 꼭대기에서 천문을 연구하시면서 우역신(牛疫神)이 오는가도 보셨는디 오기만 허면 호통을 쳐서 내쫓았다고 합디다. 그래서 우리 마을 소는 병에 안 걸렸다지라. 삼사십년 전만 해도 동네 소에다가 '곤재우(困齋牛)'라고 부적을 붙여서 소한테 병 오는 거 막았지라."
다음은 고막천 석교를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는 70여개의 옛 다리가 있습니다만 저마다의 사연이나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나다. 그중에서 최근에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하여 빛을보게된 광통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광통교는 태조가 원래 흙으로 만들었으나 큰 비가내려 떠내려간뒤 태종이 돌다리를 놓았는데 신덕왕후의 무덤을 정능에서 정능동으로 옴겨버리고 정능에 남아있던 무덤돌 병풍석과 난간석 바닦석 등을 모두 가져다가 다리를 놓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신덕왕후가 미워서 다니는 사람마다 밝고다니게 그리했다는것입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둘째부인인데 태조의 총애를받아 자신의 아들를 왕으로 세우려다 이방원에게 두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당대 최고의 석공들를모아 무덤돌를 조각하여 정능을 조성케하여 매일같이 돌보았다합니다.
그래서 광통교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다리가 되었습니다.
관광객 여러분께서 이번에 관광 하실곳은 고막천 석교 입니다. 이다리는 보물 제1372호로서 2001년 개보수 작업을 마치면서 연대를 측정한 결과 700여년전 고려시대의 다리로써 도로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졌습니다.
돌다리의 규모는 길이가 19.2Μ 폭이3Μ 높이2.1Μ입니다. 초기에 다리의 길이는 현제의 2배로 추정되나 동학혁명때 관군이 쳐들어오자 다리를 뜯어놓았다가 다시 복원하면서 축소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합니다.
또한 이 돌다리는 고려원종 14년 1273년 무안 승달산에있는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도술로 이 돌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있으며 일명 고막다리라고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관광객 여러 분께서 시간이 한시간 밖에 없다고 하셔서 두곳만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남은시간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마을 소개
안녕하십니까. 정장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신계리라는 조그마한 농촌마을 한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계리 마을은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광주-무안공창 고속도로 개설로 인하여 생곡마을이 이주하여 지금은 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화계마을은 450연전 고성김 씨가 사다리 방죽위에 이주하여 살았으며 시내에 아름다운 꽃이 무성하여 화계로 불렀다 합니다.
우평마을은 조선 성종1550년 병조참의를 지냈던 고성길씨 김익경이 무안에서 입항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그 후손과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있습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학으로 보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우평 이라 불리 운다 하며 마을에 우물을 파면 소가 죽는다 하여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계리는 무안과 가까워서마을 주생산 농산물이 양파 농사로 주소득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양파얘기가 나온김에 양파얘기 좀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양파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시대에 피라미드 건축에 동원된 노예들에게 강한 체력을 키우기 위한 스테미나 식으로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피로회복과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는데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는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중국요리하면 기름진 음식으로 유명합니다. 중국에서는 산둥성이 양파의 주산지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데도 심장병 발병율이 미국의 1/5 핀란드의 1/10 밖에되지않는 이유가 양파를 많이 먹기때문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하루 양파 섭취량이 200g정도라고 합니다.
양파의 유효성분이중의하나인 퀘르세틴(알맹이보다 껍질 부분에 10배정도 많이있음)은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능이 있으며, 또다를 성분인 유화프로필은 가열하면 트리슬피드와 세피엔이라는 성분으로 변하는데 이 성분은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작용을 함으로써 피를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좋게 함으로 혈압을 조절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양파의 유화프로필 이라는 성분은 혈당치를 낮추는 효과가 뛰어나 당뇨병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줍니다. 특이하게도 정상적인 혈당은 떨어트리지 않고 높은 혈당만 내려주면서 정상이 되면 작용을 멈추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화프로필은 생 양파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서울대 보건대에서 고지혈증환자 50명을 선정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만 양파즙 500mg을 섭취하게 한 후 4주후 검사를 해본 결과 중성지방의 수치가 비 섭취 그룹은 변화가 없고 섭취한 그룹은 감소했다는 결과를 보고한바있습니다. 양파는 암발생 요인인 니트로소아민의 생성을 억제 함으로써 항암식품 1위인 마늘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특히 양파는 체내의 니코틴 해독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양파는 어떻게 요리를 하든 그 성분의 파괴가 거의 없고 하루에 1/4개만 섭취하면 심혈관 질환의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양파는 여러자료를 통하여 심혈관 계통의 질환 치료와 예방에 아주 좋은 특별한 우리 함평의 농산물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함평사랑 양파사랑이 가족 사랑의 실천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자료:kbs 생노병사의비밀/비타민/.농촌진흥청/양파연구소./농업기술쎈타)
첫댓글 양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