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총회선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6월 09일(주일)
고린도전서 1:18-3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가 무슨 뜻일까요?
바울 서신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는 알겠는데 그리스도란 말은 사실 명확히 잘 모를 거예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히브리어 '마쉬아흐'(mashiach), 아람어 '메시아'(meshicha)와 같은 말로써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의 음역(音譯)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메시아’가 신약성경의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와 영어 ‘크라이스트’(christ)를 거쳐 한글로 번역된 말이지요.
이를테면 구약의 메시아는 장차 올 왕으로서의 구세주를 뜻하고, 신약의 그리스도는 예수를 가리키는 거예요.
원래 그리스도란 말이 쓰이게 된 계기가 있어요.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지요. 하여 그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 불렀어요. 크레스투스는 헬라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를 라틴어로 음역(音譯)한 거예요.
그런데 크리스토스를 라틴어로 제대로 음역한다면 크리스투스(Christus)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수에토니우스(2C초)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크리스투스(Christus)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크레스투스(Chrestus)로 음역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곧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는 헬라어 동사 크리오(χρίω)에서 왔지요. 이 동사는 기름 붓다(anoint), 혹은 기름 바르다(smear)는 뜻이에요. 당시 로마 사람들은 히브리어인 메시아(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기름칠한 자(nointed one)라는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크리스투스(Christus)가 아닌 뜻도 통하고 발음이 비슷한 크레스투스(Chrestus)로 음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크레스투스는 곧 헬라어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를 연상시키지요. 이 단어의 뜻은 대체로 탁월한(excellent), 유용한(useful), 도움이 되는(helpful), 좋은(good), 친절한(kind), 온화한(mild) 등의 뜻을 가집니다.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는 대체로 ‘좋은, 선한’이라는 히브리어 토브(טוֹב)를 번역할 때 쓰였어요(렘 24:2).
이런 점에서 크레스토스는 도덕적 선함(moral goodness)을 뜻해요.
그러니까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밝혀주는 말이지요. 선하고 착하게 살고, 관용과 친절을 베풀고,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한 게 바로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입니다.
하여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 역사가들이나 관리들, 로마 시민들은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유하고 사랑 어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요.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렀던 거지요. 그래서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이 된 거예요.-(”크레스토스/χρηστός에 대하여“, IBP 일점일획, ibp.or.kr)
그리스도라는 말은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더욱 많이 등장하지요. 바울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연안을 다스리고 있었지요. 고대 로마의 공용어는 라틴어였어요.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의 식민지에 속한 모든 지역은 라틴어의 문화권에 있었던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크레스투스라고 불렀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은 거예요.
바울 시대의 고린도는 기원전 27년 로마제국 아가야 주의 총독이 머물 정도로 번창한 도시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로마 출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해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행 18:1~17).
그런데 바울은 오늘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 경쟁적인 파벌(派閥)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접합니다(고전 1:11). 그 분파가 바로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파에요(12절). 이 분파들은 각각 추종하는 사람의 이름을 앞세워 분파를 이루었지요.
그러나 여기서 네 분파를 말하고 있지만 분파의 실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의 맥락에서 보면, 바울파와 아볼로파의 대립만이 날카로울 뿐입니다. 게바, 곧 베드로는 고린도에 온 적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게바파를 언급한 것은 바울파와 아볼로파의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를 언급한 것은 경쟁적인 파벌이 더 이상 크게 번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울의 수사학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나누는 사람이란 거예요. 이를테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하여 저는 고린도 교회 공동체 분쟁의 실제 모습은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따른 사람들의 분파라고 봅니다.
고린도전서 1~4장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면 결국 바울파와 아볼로파의 대립, 곧 두 파의 갈등이 중심임을 알 수 있어요.
더더욱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뒤 고린도를 떠나지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그러면 누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왔을까요?
그렇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 그리스도인인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당시 문화적으로 가장 번창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유대인 학자 필로의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아볼로의 특징은 지혜로운 말로 가르친 거예요. 더더욱 그는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가이기도 했지요.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지혜로운 말로 가르치고 청중을 매료시키는 언변으로 그들에게 호감을 주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뒤에 아볼로는 자기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를 장악하기에 충분했을 겁니다.-(『바울과 고린도 교회』, 김판임 지음, 동연, P.35~37)
그러니 아볼로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 사이에 아볼로가 최고라고 말하는 교인이 생겨났을 거예요. 이에 바울을 따르고 존경하던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건 당연한 거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고린도는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지요.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 지역은 마게도니아, 곧 그리스 지역과 더불어 수백 년 동안 그리스 문화권의 속한 까닭에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고 있었을 거예요.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언변도 뛰어나고 게다가 지혜로운 말로 전하는 아볼로의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나는 아볼로파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거예요. 아볼로를 따르던 사람들은 아볼로를 통해 지혜를 얻은 것을 자랑했어요.
이에 반하여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바울파라고 주장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지혜를 자랑하는 아볼로파에 대한 바울의 반박(反駁)입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아볼로 추종자들에게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31절)고 했지요. 그리고 그들의 자랑거리인 ‘지혜’는 어리석은 거라고 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반박했던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분쟁 원인은 아볼로가 전한 지혜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바울과 고린도 교회』, P.39)
오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이미 2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에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바울의 반박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참으로 죽비와 같은 매서운 일침(一鍼)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졌습니까?“(고전 1:13/표준새번역)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라는 거예요. 서로 대립하거나 분쟁하거나 분열하지 말라는 경고인 셈이지요.
그런 까닭에 오늘 본문을 이끌어가는 바울의 반론이 얼마나 주도면밀한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언급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곧 십자가의 말씀(로고스/λόγος)이에요. 이 말씀은 복음입니다. 하여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거지요.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이 어떻게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 방법을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허튼소리로 들렸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치욕적인 죽음을 통하여 죄와 곤경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이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하나님의 능력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바로 예수, 곧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까닭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어서 그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 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한다고 강조해요(고전 1:17). 그러니까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복음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거예요.
사실, 바울도 지혜가 십자가 처형보다 더 유익하다고 여기고 실제 자신이 복음을 배척했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랬던 그가 어리석은 게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은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지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사 29:14)
그러면서 현자, 학자, 세상 변론가가 어디에 있는지 물은 뒤에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다고 답하고 있어요(20절). 다시 말해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내신 거지요.
그러니까 19~21절에서 바울은 지혜를 자랑하는 아볼로파를 강하게 반박하는 거지요. 세상 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아볼로파의 주장에 바울은 반대해요.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1절)고 한 말이 그런 뜻이에요. 21절 하반 절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전도는 헬라어 케리그마(κῆρυγμα), 곧 말씀, 설교, 선교란 뜻이에요. 이것을 바울은 ‘복음’이라고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소식이 인간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은 거지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게 바로 말씀이요 설교요 전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하여 바울과 동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22절). 하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했어요.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지혜(σοφία)를 찾았어요. 여기서 지혜, 곧 소피아는 세속적인 인간의 지혜를 뜻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라는 표징을 찾고,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거예요.-(『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 C.K 바레트 지음, 번역실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P.77)
그러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scandal/염문, 추문)으로 나타납니다. 거리낌이란 뜻의 스칸달론은 주로 ‘걸림돌, 넘어지게 하는 것, 실족, 올무’ 등을 뜻해요.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과 같다는 거예요.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이방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나요. 그 까닭은 그들이 지적인 자기중심의 실존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려고 지혜를 찾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현실에 오셨기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지혜를 자랑한들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 실없는 소리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는다고 말해요.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신다고 깨닫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거예요(24절).
여기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반어법적 화법이에요. 말하자면 그것은 역설인 거예요. 이를테면 이방인들이 찾는 지혜(σοφία)를 사용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를 변론하고 있기에 그래요. 바울은 이방인들의 지혜든 하나님의 지혜든 소피아를 언급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역설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21절b)는 말이 하나님의 행위가 역설적이란 뜻이에요. 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일을 떠올리게 해요.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말해요.
26절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판단기준과 인간의 판단기준이 확연히 다름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분이 특별하다고 할까요? 곧 지혜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권력 있는 사람들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린도전서 7장 21절을 보면, 당시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는 노예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진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와 고린도 시의 지도급 인사 재무관 에라스도가 있었지요. 두 사람은 바울을 도와준 동역자들이에요(롬 16:23). 사실, 그리스보나 에라스도를 제외하면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의 신분이 주로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교는 그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전파되었던 거지요. 하여 지혜를 숭배하던 당시 사회 현상에 비춰볼 때 공동체를 구성하던 낮은 계급의 신분이 그리스도교가 비난받게 된 한 가지 요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현명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자들을 선택하셨어요. 또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자들을 선택하신 거예요.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던 사람들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곧 하나님은 지혜 있고, 권력 있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비천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약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을 택함으로써 인간의 자랑과 교만을 없앤 거예요. 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 거예요(29절).
그렇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던 아볼로파에 대한 바울의 반박이 상대에게 어떤 빈틈도 보이지 않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참으로 주도면밀(周到綿密)한 바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분의 선물입니다.“(30절a)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게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贖良), 곧 구원이 되셨어요(30절).
여기서 지혜(σοφίας)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유행하던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혜라는 거예요. 곧 그리스도가 이방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던 바로 복음인 거예요.
또 의로움(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곧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한 의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말입니다. 그리고 거룩함(하기아스모스/ἁγιασμος)도 역시 그리스도란 거예요. 그리스도가 곧 우리를 위해 거룩함이 된 거예요. 우리가 참 지혜인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의롭게 되고, 거룩함을 입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속량(아폴뤼트로시스/ὰπολύτρωσις)이 된 거예요. 곧 구원함이 되신 겁니다.
그러니 바울은 누구든지 자랑하는 사람은 주를 자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31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자랑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삶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삶의 토대요 근거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분쟁의 원인이 된 지혜를 자랑하는 이들에게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31절) 하는 바울의 반박이었습니다.
바울의 반박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바울이 전한 복음이지요. 복음은 또한 ‘십자가의 말씀’(18절)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강조합니다(24절). 지혜를 자랑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 약한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셨다고 바울은 강조하지요(26~27절).
그러니 바울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고 일침(一針)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결코 자기 힘과 지혜를 내세워 분쟁하거나 분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내세우고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교회 공동체가 서로 분쟁하고 분열하기 때문이에요. 이 지점을 바울은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거예요.
그리스도만이 참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구원함이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합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자기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혜롭게 하는 게 아녜요. 의롭게 하는 것도, 거룩하게 하는 것도, 구원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최근 『영성 없는 진보』란 책을 낸 김상봉 철학자는 ”내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릴 때 전체 속에서 나를 되찾는 것“이라고 했어요. 영성이란 결국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거지요.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나를 희생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지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영성 없는 진보』, 김상봉 지음, 온뜰, P.13~15)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는 할 수 없어요.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나와 전체가 하나다는 믿음과 타인이 또 다른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지요. 나를 희생하여 그리스도만 자랑할 수 있기를 빕니다.
기도 / 하나님의 선물이 되신 주님!
그리스도는 나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권력과 힘을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교회 공동체가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이것이 참 자기를 되찾는 길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