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고
이장일•이옥주 가정
1. 착하신 부모님 2. 울산으로 이주 및 유년 시절 3. 중‧고 성화학생 시절 4. 몽시로 본 예수님과 참아버님 5. 울산여상시절과 청년회활동 6. 시련과 은사 7. 약혼과 축복 그리고 엄청난 눈물 8. 시댁 할머니가 몽시로 보여주신 나의 미래 9. 청송 임지생활 10. 기대와 전혀 다른 축복가정 생활 11. 다시 동원 활동 12. 목회 발령 13. 가족의 결단 및 미래 비전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이옥주, 일제 강점기와 6‧25 전란, 손해를 보면서 이웃을 도아주신 부모님, 갑작스런 장님이 될 뻔한 위기 극복, 내성적 성격 심화, 울산 여상 졸업 및 은행 취업, 통일교회 입교, 흰 수레를 타고 다가오신 예수님과 참아버님, 우수 학생, 교사로부터 고난을 당함, 교회부흥의 중심인물, 은행을 사직하고 약혼, 목회자 남편을 만나기 위한 철저한 준비, 주체와 갈등, 나를 위로해 주신 시댁 할머니, 청송 임지생활, 칡과 같은 가정 출발, 슈퍼우먼 동원 활동, 만학도, 160가정 축복 승리, 수술, 미래 비전
1. 착하신 부모님
나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서 부친 이원칠과 모친 정수복 사이에서 2남 4녀의 셋째 딸로 195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이주하셨다. 거기서 작은 아버지 두 가정과 5촌 당숙 두 가정 그리고 고모와 할머니 등 대가족이 한 지붕아래에서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지방의 가옥은 추운 날씨를 이겨 내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담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리고, 내부는 한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 옆으로 방을 여러 개 만들어서 한가정이 한 칸씩 사용하였다. 그 중에 한 칸을 공동 부엌으로 쓰고 거기서 불을 지피면 화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가옥 구조는 같이 살면서 외부로부터 침입자도 막아내고, 어려움을 쉽게 이겨내며, 확대된 혈연공동체의 장점을 가졌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온 부락민들의 촌장과 같은 중심역할을 하면서 봉사하셨다. 해방 이듬해 부락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권고하였다. 그때 돌아온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지만,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입교 이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내용을 들었을 때, “우리도 참부모님의 명령대로 따르면 생명길로, 따르지 않으면 사망길로 갈수 있구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때로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 그 때에 판단을 잘 해야 한다. 신앙길에서는 선택 결과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왔다갔다 할 중요한 시점이 더러 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고, 영양 산골 마을에도 북한군이 들어와서 점령하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총칼로 위협하면서 부역에 동원시켰다. 북한군이 물러가고 부역에 동원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마을의 이장(里長) 일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안동을 오가면서 형무소에 갇힌 그들을 나오게 하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모든 경비를 자비로 감당하시다 보니 달라($)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빚잔치와 더불어 고향을 떠 날 수밖에 없었다. 안동역에서 소지한 돈을 소매치기에게 몽땅 뺏기고, 가지고 있던 옷가지를 팔아서 돈이 있는 데로 차표를 끊어서 도착한 곳이 농어촌이 혼재 해 있는 작은 시골인 울산이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가족보다 이웃과 남을 위해 오로지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선한 공덕을 쌓는 삶 덕분에 내가 뜻 앞에 부름 받을 수 있었고, 울산으로 이주한 것도 하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사 배후에는 선조의 공덕과 하늘의 인도하심의 손길이 늘 함께 하고 계셨다. 빚을 지워주는 아버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남의 빚을 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남을 위해 손해 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선하다. 인생에 있어서 빚을 지고 죽는 사람은 후손이 마른다. 주위 사람이 자꾸자꾸 싫다고 떨어져 나가니까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빚을 지워 주고 가게 되면 자꾸 다가오고 엉기니까 커지게 마련이다.”(《말씀선집》 제41권, 89~92쪽)
2. 울산으로 이주 및 유년 시절
울산에 도착한 것이 내가 6세 되던 때였다. 그런데 7세 때에 아무 이유 없이 한쪽 눈이 흐려지더니 곧 다른 눈도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되었다. 멀쩡하게 잘 보이던 가족들과 사물들이 갑자기 안 보이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형편이라서 병원에 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장님으로 평생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내 눈동자는 까만 동공에 하얀 막이 덮여서 눈동자가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때 이웃에 있던 아주머니가 예전에 이런 것을 고치는 것을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한번 고쳐 보겠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가 제시한 치료방법은 눈에 먹물을 떨어뜨리고서는 바늘로 거미줄처럼 얇은 하얀 막을 거둬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늘을 눈에 넣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부모님은 “고치면 다행이고, 바늘에 눈이 찔려서 완전히 실명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아주머니에게 치료를 맡기기로 결정하셨다.
부모님은 일하러 가시고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매일 다녔는데, 바늘로 하얀 막을 걷어 내기를 8일째 되는 날,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을 마당에 세우고 “저기 서 있는 내 아들이 보이니?”라고 물었다. 그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깜깜하게 지냈는데, 시야에 뿌연 막대기 같은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아주머니는 “이제 나아지겠다.”며 아주 기뻐하셨다.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너무나 감격의 순간이라서 지금도 나는 그 당시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로부터 8일을 더 다녔는데 눈동자를 덮고 있던 흰 막을 다 제거해서인지 사물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마을에 나보다 두 살 많은 아이도 나처럼 눈이 안보였는데, 그 부모들은 “위험한 일을 할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다가 치료시기를 놓쳐서 영원히 장님이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그것이 무슨 병이었는지 궁금하였으나 현재까지 병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아마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런 시련을 겪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기적을 너에게 주셨으니 항상 감사하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8살 어린 마음이지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암의 운무를 헤치고 나서니 광명한 새 세계는 완연히 빛나네.”(성가 1장) 나는 성가 가사처럼 흑암 속에서 광명을 찾게 되었다.
그런 신비한 경험 때문에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나의 성품은 말이 없어졌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친구들이 뛰어 놀 때, 나는 한쪽에 앉아서 뛰어 노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동작과 얼굴표정, 말하는 입모양을 보면서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긴 것을 관찰했다. 움직이는 팔과 다리, 입모양에 따라 말이 다르게 나오는 것, 웃고 울고 싸우고 떠드는 친구들을 보면서 “너무나 신기하다.”고 느꼈다.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2학년 때 앞자리의 애가 돈을 훔쳤는데, 들키게 되니까 내 책상 밑으로 몰래 돈을 던져 놓는 바람에 내가 도둑 누명을 쓴 일이 있었다. 아니라고 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한마디 항의도 할 줄 몰랐고 나를 변호해줄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이런 속사정을 부모님께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우리 6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주야로 일하시는데, 내 문제로 고통을 더하여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억울함과 분통함을 고스란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으므로 더욱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어린 가슴에 한(恨)의 검은 덩어리가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원리를 알고 나서, 아담 해와를 사탄에게 빼앗기고서 누구에게 하소연 하지 못한 하늘부모님의 억울했던 심정과, 아무런 죄도 없이 죄인의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억울한 심정이 함께 느껴졌다. 도둑누명을 쓰고도 아무에게도 하소연 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내 억울함이 하늘부모님의 억울함과 예수님의 억울함이 함께 겹쳐져서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실컷 울고 나니까 그 동안 억눌려 왔던 억울했던 마음이 시원해졌다. 억울해서 울면 눈물 속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빠져 나와서 치유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보았다.
3. 중‧고 성화학생 시절
가정형편은 어려웠지만 공부를 잘 했던 덕분에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고, 2학년 때부터 소방서장 부인이 초등학교 3학년생인 자기 아들과 친구 5~6명을 모아 주셔서 공부를 가르치면서 수고비를 받았다. 그때부터 알바로 자립을 하는 강한 정신을 길렀다.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교육대학교에 갈수 없는 집안 형편이어서 실업계고교로 진학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울산은 특별 공업도시로 지정되어 공단이 계속 지어지던 때였다. 그래서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생은 각 회사에서 총무과나 회계과에 취직이 100%되었다. 재단이시장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었기 때문에 전교 10위권에 들면 은행에 취직이 된다고 전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던 때였다. 학생들 간에 공부가 치열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에 대한 것이 궁금하였고, 깊이 사색을 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0년 6월, 나는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종교를 가지기로 결심하였다. 같은 반 친구 중에 마음이 끌리는 친구가 기성교회 학생부회장이라는 말을 듣고 그 친구를 따라서 토요일에 교회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 대화를 뒤에서 들은 최해식(6천가정 조규조교구장 사모)이 “오늘 영어를 공짜로 가르쳐 주는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따라 갔다. 가보니까 울산 시내 북정동에 있는 한옥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된 통일교회였다.
4. 몽시로 본 예수님과 참아버님
영어는 30분 정도 가르치고, 3시간 원리강의를 했다. 주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에 대한 것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 왔던 나로서는 너무나 놀라운 내용이었다. 하나님을 내 손에 꼭 쥐어주는 시원하고 통쾌한 강의였다.
모든 우주 만물을 내외(內外), 양성과 음성, 성상과 형상으로 구분하며 모든 만물의 최초 근원은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로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눈앞이 환히 밝아왔다. 나를 감싸고 있던 무지의 껍질이 떨어져 나갔고, 답답했던 심정이 탁 트였다. 정말 하나님이 내 안에 실존해 계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 군상(群像)들이 원리(原理)라는 한 올의 실로 꿰어져서 아름다운 보석목걸이가 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같은 놀라운 감동을 받았다. 내 발 밑에 있는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느꼈다
교회 나가서 강의 들은 지 3일 뒤에 한건수 지역장의 방에 갔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고 까무러치듯이 놀랐다. 3일전에 꿈에서 보았던 분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거기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왁자지껄 더들며 마을의 돌담길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다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나 혼자 남았다. 멀리서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두 마리의 흰말이 이끄는 수레가 와서 내 앞에 멈춰 섰다. 흰 옷을 입은 남자 두 분이 타고 있었는데, 나보고 타라고 하면서 두 분의 가운데 앉게 하셨다.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예수인데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분이 앞으로 대신 하실 것이니 인사를 드려라.”고 해서 꾸뻑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내 인사를 받았던 바로 그 분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사진에 걸려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몽시로나마 참아버님을 처음 영접했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교회 출석을 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3개월 정도 다니던 중에 또 한 번의 꿈을 꾸었다.
형광등처럼 빛이 환한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땅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어디서 까만 고양이가 와서 그 십자가를 입으로 훅 빨아들이니까 절반 이상이 까만 고양이 입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빨리 뱉어내어라.”고 소리를 치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고양이는 삼키고 있던 십자가를 전부 뱉어내고는 도망가 버렸다. 십자가는 다시 땅에 박혀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과 참부모님과 십자가와 관련하여 두 번의 꿈을 꾸었다. 나는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에 결심을 했다. “내가 참부모님의 대신자가 되고 방패가 되어야 한다.” 그 이후로 나는 참부모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에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직진하는 생활을 하였다.
5. 울산여상 시절과 청년회 활동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70년 12월이 되었다. 북쪽 시베리아의 추운 겨울이 냉기를 잔뜩 품고서 한반도를 덮었다. 울산은 바닷가라서 체감온도가 낮아져서 더 추웠다. 그런 추위 속에서 갑자기 부인 전도 대원들이 왔다. 아기를 떼어두고, 가사를 남편에게 맡기고, 전적으로 교회에서 헌신하는 생활을 하였다. 보리밥과, 라면에 국수를 넣어 끓이든지, 보리밥에 김치를 넣어 죽을 쑤든지 해서 먹었다. 그런 음식들이 왜 그렇게 꿀맛처럼 달콤했는지 지금도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교회는 날마다 금식과 통성기도로 너무나 은혜가 넘쳤다. 그런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끌려서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알바생의 일과를 졸업 무렵까지 했다.
2학년 때 부산에 참부모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7명이 부산 집회에 갔다가 귀가하기가 늦어서 교회에서 잤다. 아침이 되어도 딸이 집에 오지 않으니까 같이 갔던 학생 중에서 1학년 학부모가 학교로 전화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단체로 없어졌다고 난리가 벌어졌다.
학교에 갔더니 부산 통일교회 집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방송으로 호명하면서 “당장 학생지도과로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최해식, 이옥주, 차경애, 이명희, 이영선, 최영선,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1학년 1명을 합하여 7명이 지도과 선생에게 불려갔다. “자퇴서를 써라”, “부모님을 학교에 오시게 하라.”는 등 엄청나게 혼이 났다. 그 사건의 여파로 인하여 교회에 30~40명 나오던 많은 학생들이 발길을 뚝 끊었다. 학교생활에 문제를 일으켜서 학교장이 추천서를 써 주지 않으면 취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7명만 남고 모두 신앙을 포기하였다.
3학년 때 윤영태 교역장께서 울산으로 오셨다. 매일 저녁 원리강의를 하셨다. 일요일 예배 때도 원리강의를 하셨다. 원리 강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생활가운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적절한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고, 신앙생활에 대한 생활적인 지도도 많이 해 주셨다. 한창 새로운 진리 습득에 집중할 나이이고, 감수성이 큰 때인지라 나에게는 그런 교회 분위기가 너무나 은혜가 충만하게 와 닿았다.
특히 교역장께서는 성일(聖日) 예배 엄수를 강조하시며 절대 신앙을 전수해주셨다.
“하늘 앞에는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하고 순수하고 맏 것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주일(성일)은 하나님의 날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쓰면 하나님 앞에 도둑질한 것이 된다. 도둑질하면 복을 못 받고 오히려 벌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주일을 철저히 지키도록 강조 하셨다. 울산공고 학생들도 많이 나왔고, 우리학교 후배들도 전도가 되어 학생들이 많이 전도 되었다.
최해식과 나는 전교 10위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하였다. 졸업할 즈음에 은행에 추천이 되었으나 학교장이 추천서를 거부했다. “통일교회 다니면서 물의를 일으킨 학생에게 추천서를 써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히 나는 우리 담임께서 보증을 서 주셨고, 최해식은 영어 선생께서 보증을 서주셔서 추천서를 받았다. 나는 한일은행에 다녔고, 최해식은 국민은행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에 은행 취직은 요즘 말로 하면 일류대기업에 취직하는 것과 같은 영광이었다.
한일은행 대구 지점에 1973년 3월 2일자로 발령 받고 근무하게 되었다. 3주는 대구 인교동교회에 나갔고, 집에 오는 1주는 울산교회에 다녔다. 1974년 6월에 대구에서 울산지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울산으로 돌아 온 후, A탑 성전건축에 동참하였다. 날마다 직장 퇴근 후에는 교회 건축 일을 도왔다. 축복 받을 때까지 한일은행 울산지점에 근무하면서 국민은행에 근무하는 최해식과 단짝을 이루어 퇴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들러서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5년 무렵에 박판남 경남교구장께서 초창기 참부모님께서 부산에 계시면서 거쳐 가신 곳을 모두 성지로 매입하시던 중에 일화 사건이 터졌다. 교단 차원에서 경제적 곤경도 생겼다. 교구장께서는 계약한 성지를 놓칠까봐 동분서주 하셨고, 부산 경남지역내의 식구들에게 동원할 수 있는 돈을 모두 동원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만원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교구장께서 22살 어린 아가씨인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가 은행에 다니고 있으니까 “혹시 돈이 없을까?”하고 물으셨다. 나는 “참부모님께서 거쳐 가신 역사적인 성지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특별정기 가계예금 1년짜리 100만원을 중도 해지하여 가져다 드렸다.
그 돈은 큰언니가 아이들을 울산 할머니께 맡기고서 서울에서 열심히 일하여 모은 돈이었다. 큰 언니는 1년 뒤에 헤어져 살던 가족들과 함께 살려고 오로지 적금을 한 돈이었다. 그 당시 여자 은행원 월급이 5만원이었으니까 100만원은 엄청 큰 액수였다. 월급을 전액 저축해도 20개월을 모아야 되는 돈이었다. 특별정기가계예금 이율이 18%이라서 매달 이자 15,000원으로 적금을 들고 있었다. 내가 월급에서 이자 15,000원 적금을 내고 나면, 35,000원이 월급으로 주어져서 집에 가져다 드릴 돈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께서는 나더러 돈을 헤프게 쓴다고 크게 걱정을 하셨다.
다행히 10개월 정도 지나서 “해결이 잘 되었다.”고 하시며 교역장을 통하여 100만원을 돌려받았다. 100만원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받게 되니까 너무나 감사했다. 적금이 만기가 되었을 때에 언니 돈에서 한 푼도 손해나는 것 없이 갚을 수 있었다. 하늘 앞에 감사했다.
축복은 결코 공적이 없으면 못 받는다. 조상이 쌓은 공적이나 자기가 만든 선한 실적이 있어야 축복이 실현된다. 큰언니의 돈으로 형성된 공적 덕분에 나중에 큰언니의 장남이 3만가정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사정 보다는 하늘을 먼저 섬겨야 한다.”는 말씀대로 살면 하늘이 나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 시련과 은사
식구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을 무렵 교회에 큰 시련이 있었다. 청년 몇 명이 산상 기도를 다니면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말로 식구들을 회유하였다. 윤영태 교역장께서는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셨다. 참부모님 방에서 해식이와 나의 손을 꼭 잡고, 그 청년들이 하늘 앞에 바로 서기를 간절히 눈물의 기도를 하셨다. 퇴근하면 둘이서 날마다 교회에 들렀다
교역장께서 부모의 심정으로 식구들을 변함없이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를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이라도 힘이 되어 드리자.”고 다짐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는 신앙의 반듯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신앙이 성장하는 기간이었다.
비판하고 비난하고 참소가 난무했던 사건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영계에 갔을 때 참부모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해도 사탄이 참소하면 아무 말도 못하는 신세가 되겠구나. 일상생활 가운데 조건 잡히는 일은 절대로 안해야 되겠구나.” 사탄편과 하늘편의 심판의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22살 어린나이에 가슴 깊이 새겨진 사건이었다.
“하늘은 먼저 맞고 빼앗아 온다.”고 하였다. 교회가 완전히 흩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수습되고 나니까, 울산교회에 청년들의 전도가 불붙기 시작하였다. 오해가 풀리고 진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련 뒤에는 반드시 은사가 있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울산은 공업도시였고 공장들이 많아서 전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취직이 되어 울산으로 많이 이동을 왔다. 특히 현대자동차와 현대조선에 취직이 되어 오는 청년들이 많았다. 교역장께서는 “식구 자녀들이나 친인척 중에 울산으로 취직이 되어 온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의 연락처를 알려 주세요. 꼭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로 인도해 줄 것이며 축복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전국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셨다.
다른 교회에서 연락이 오면 교역장께서는 그 연락처를 최해식과 나에게 주셨다. 해식이와 나는 그 청년들에게 연락하여서 토요일 오후에 만났고, 그 다음날 바로 교회로 인도하였다. 그들이 또 회사원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예배 후에는 전도하러 다녔다. 청년들이 많아지다 보니 25세를 기준으로 그 이상 나이 든 청년회와 24세 이하 청년회를 이원화하여 운영하였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사는 존재이며, 집단이 되면 군중심리가 초래하는 힘이 생긴다. 기독교 초기에는 성령의 불길이 강림하여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처럼 울산교회에는 심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특히 청년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7. 약혼과 축복 그리고 엄청난 눈물
6000가정 축복에서는 울산교회에서 60명이 축복을 받았다. 단일교회 축복으로서는 최고였다. 1978년 10월 28일 범내골 개관식 때 참부모님께서 오셨다. 울산의 최해식, 이옥주, 차경애, 이정순은 부산 성가대 합창단에 2개월을 다니며 함께 연습해서 참부모님께서 떠나실 때까지 라이브로 성가를 불러드렸다. 그리고 그날 밤에 기차를 타고 약혼하러 수택리로 갔다. 이미 강당은 약혼 할 처녀 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맨 뒷자리에 있으면 참아버님께서 언제 나를 보고 매칭해 주실까? 축복을 못 받지 않을까? 좋은 신랑감을 놓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가지고 갔던 큰 옷 가방을 창문으로 던져 버리고 핸드백 하나만 소지하고 바짝 밀치고 들어가서 앉았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축복도 먼저 가지는 자의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회자가 줄을 맞추기 위하여 “일어나라.”고 하면 남들이 일어나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서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서 앉았다. 마침내 맨 앞에서 4~5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참아버님은 미국에서 오셔서 쉬지도 못하시고 우리를 약혼해 주시느라 장시간 서 계셨다. 그래서 다리가 퉁퉁 부어서 손으로 누르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다리에 오랫동안 자국이 남았다는 것을 약혼 이후에 들었다. 철없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당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위대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원리를 알고 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개성완성, 가정 완성이다.”라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개성완성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것은 원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며, 원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목회자이다.”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나는 목회자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도, 목회자와 축복을 받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랑감이 돈이 없고 학벌이 없으면 내가 돈을 벌어서 공부시켜서 훌륭한 목회자로 만들 것이다.”는 결심을 하였다. 목회자 신랑을 만나면 활동비로 주려고 봉투에 빳빳한 새 지폐로 한 달 월급의 절반 이상인 3만원을 준비해 갔다
그리고 매칭이 되었을 때, 혹여나 주체가 마음에 안 들면 파혼을 하고 귀가할 수 있는 마음의 유혹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아예 은행에 사표를 제출했었다.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아예 없애버렸다. 은행 지점장이 10일간 특별휴가를 줄 테니 약혼하고 와서 다시 근무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지점장이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돈방석 직장을 너무나 쉽게 던져버리는 내가 철없이 보였을 것이다.
참아버님께서는 목회자들 매칭이 다 끝나도록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 순간 “나는 목회자 사모가 될 자격이 안 되는가보다.”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침내 1978년 10월 29일 자정 무렵에 주체와 내가 매칭이 되었다.
친정 아버지께서 “효자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으니 부모에게 효자인지 아닌지만 확인해보라.”고 약혼하러 올라올 때 일러 주셨다. 주체는 나에게 “가정출발하면 부모에게 잘할 수 있겠어요?”라며 부모에게 효도 할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이 남자는 효자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다른 것은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약혼하기까지의 이런 사연이 있었기에 나는 약혼을 한 것만이라도 천만 다행이라고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협회에서는 “약혼한 상태이지 축복식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양가의 집에 서로 가지도 오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워낙 시어머님의 의사가 완고하였다. 황현수 광주교구장께서 보증을 서 주신다고 말씀하셔서, 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계시는 광주로 갔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주체와 만났을 때 심각한 트러블이 있었다. 주체는 “축복을 받겠다고 결정한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 파혼하자”면서 일어나서 가버렸다. 광주라는 낯선 곳에서 돌발사태가 생겼으니까 나는 그저 막막하고 이런 상황이 고통스러웠다. 부모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면서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나였기에, 자존감이 강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낯선 곳에 와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왔다.
교회고 뭐고 다 그만 두고 어디 가서 숨어 버리고 싶었다. 사직공원 전망대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은행에 사표만 안냈어도 집으로 돌아가서 은행에 다시 다니면 되었을 텐데, 이제는 되돌아 갈 곳도 없고, 환영해 줄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사랑하는 자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홀로 6천년 섭리 해 오신 하늘부모님과 예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도 이렇게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나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결과는 하늘 앞에 맡긴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를 가졌다. 한 사람을 뜻 앞에 세워 축복 받는 자리까지 인도 하시느라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저 집안의 조상들은 얼마나 애를 썼을까? 나 때문에 주체가 뜻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나는 평생 동안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축복받고 살지라도 항상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멍에를 지고 사는 것보다 오늘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주체와 대화로 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나는 축복을 지켜 주시려는 하늘부모님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고, 억울하게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으신 예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평생 동안 울어야 할 눈물의 절반을 다 쏟아 낼 정도로 나는 많이 울면서 나를 부정하는 자리에 섰다. 오로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가졌고,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리에서 나는 새로 태어 날수 있었다. 다행히 주체와 화해를 하게 되어 무거운 짐을 벗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축복 받는 자리는 사탄의 혈통을 하늘의 혈통으로 전환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완전 부정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하신 참부모님 말씀처럼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깨달았던 사건이었다. 더구나 축복은 아담 해와도 서지 못했던 하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자리이니 반드시 탕감조건을 세워야 확실한 하늘의 소유권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는 귀한 시련의 순간이었다.
8. 시댁 할머니가 몽시로 보여주신 나의 미래
임지동원을 위한 21일 수련이 수택리에서 있어서 참여하였다. 매 시간 원리를 들을 때 마다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져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강의 중에 코를 풀 수 없어 콧물을 삼키다 보니 인후염이 될 정도로 많이 울었다. 눈 안에 그렇게 눈물이 많은 것을 처음 체험했다.
수련 받는 중에 일생 동안 살아갈 것에 대한 몽시를 받았다. 꿈에서 나는 황금 손목시계의 줄이 고장 나서 그 시계를 고치려고 어느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등이 꼬부라진 아주 조그만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아가야 왜 이제 왔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그 많은 큰 애기(그동안 주체가 40번이나 선을 보았고, 그만큼 많은 여자들을 의미함)들을 마다하고 너 하나 기다렸단다. 이제 너희 남편과 살면 몸도 건강해 질 것이다. 내 손자가 몸이 나빠진 것은 저의 엄마 때문이니 걱정 말고 둘이 함께 살면 건강해 질 것이다.”라며 할머니는 엉엉 우셨다. 내가 우리 집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따로 갈 곳이 있다고 하시면서, 방에 있는 모든 살림살이와 패물들을 큰 캐리어 가방 5개에 담아서 나보고 가져가라고 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갑오징어와 빨간 불개미’를 담은 것 한 봉지를 내 양손에 쥐어 주시면서 “이것 가지고 가서 네 남편 먹이면 건강해 진다.”고 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진곤색 양복을 입은 젊은 청년 5명이 캐리어 한 개씩 끌고 나갔다. 나는 양손에 갑오징어와 불개미를 들고 흰색 한복에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신고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있던 초가 오두막집이 온데 간 데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왼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큰 호수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도로가에 5층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길이 있었다. 시멘트 길바닥엔 방금 비가 와서 묽은 죽 같은 진흙물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서 흰 치마꼬리와 신발에 진흙이 묻을까봐 조심조심 걸었다. 5명의 젊은 남자들은 큰 가방을 들고 검정 구두를 신어서 성큼성큼 걸어서 재빨리 멀리 있는 아스팔트길로 앞서 올라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혼자서 애를 쓰면서 진흙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가까스로 비에 깨끗하게 씻겨진 아스팔트 위에 올라섰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청년 5명과 함께 아스팔트길을 한참 걸어서 오른쪽에 위치한 교회에 도착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광주 시댁에 가서 옛날에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니 꿈에 본 할머니가 사진 속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주체의 할머니였다. 축복가정 출발 이후로 지금까지 40여년을 살아보니 내가 살아온 여정이 그 꿈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할머니는 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셨던 것이다. 큰 캐리어 5개와 같은 물질 축복을 받았고, 청년 5명은 4명의 아들과 사위를 상징했다. 진흙탕 길을 걷듯이 내 인생이 결코 쉽지 않는 일생이 전개될 것을 미리 보여 주셨던 것이다.
나는 2005년에 암 수술을 비롯하여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나는 위기를 맞이할 때 마다 하늘 앞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참부모님은 이 시간도 잠 못 주무시고 동분서주 하시는데 열심히 일해야 할 나이에 몸이 아파 누워 있다는 것이 너무나 죄송했다. 하루라도 조용히 집에 있는 날이면 불안했다. 참부모님은 이 시간도 우리를 위해 노심초사 하시는데 젊은 내가 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다 편히 쉴 수 있는 입장에서도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몸을 혹사 시켰다. 몸이 녹초가 되어야 책임 다한 것처럼 만족하게 잠들 수 있었다. 내 생애 제일 좋은 젊은 시절을 하늘부모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다짐하며 살았다.
“효자는 부모의 얼굴을 보아 가면서 울고 웃어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속에 항상 간직하고 살고 있다. 부모는 울고 있는데 자식이 웃고 있다면 이미 심정적으로 자식일수 없다. 내가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부모가 웃으면 따라 웃을 수 있어야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자녀이다. 항상 그런 심정을 잃지 않으려고 채찍질하며 살아 왔다.
9. 청송 임지생활
임지 생활에서의 추억은 너무 많다. 박금청, 허효점, 이옥주, 변단옥, 정성희, 배명화 6명이 30개월 동안 깊은 산골 마을 청송에서 동고동락 했던 사연과 애환은 책을 써도 몇 권 쓸 것이다.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연과 내용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도 본업인 전도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 청송대원들은 꽃다운 20대를 시골 농사꾼 아낙네보다 더 절절하게 보냈다. 소만 키우지 않았지 다른 일들은 다 해봤다. 그래도 우리들은 불평하지 않고 절대 신앙으로 참 효녀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새벽마다 기도와 활동으로 하늘 앞에 매달렸고 모두 개근상을 받았다.
10. 기대와 전혀 다른 축복가정 생활
약혼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주체들과는 30개월 동안 오로지 편지로만 소식 전할 수밖에 없었다. “오지도 가지도 만나지도 말라”는 협회 지시를 지켰다. 약혼 대상자들을 임지에 보내 놓고 주체들은 얼마나 만나고 싶었을 텐데, 서로 마음으로만 그리워했다. 청송대원 주체들은 30개월 동안 두 사람만 한번 씩 다녀갔고 모두 협회 지시대로 따랐던 착한 사람들이었다. 교통의 오지였기 때문에 더 올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시대적 혜택을 입어서 휴대폰으로 얼마든지 연락이 가능하지만, 전화로 목소리만이라도 한번 듣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었다. 현대판 견우직녀의 신세였다.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들은 아예 만남이 금지되었다. 서로간의 얼굴도 잊어버릴 정도로 엄격히 행동을 자제했다.
주체는 30세 입교 이전부터 결혼하기 위해 선을 40명도 더 봤던 사람이라서 행여나 잘못 될까봐 “탈선만 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하늘 앞에 약속을 하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30개월을 새벽냉수목욕 기도로써 조건을 세웠고, 매주 한번씩 주체와 시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1978년 약혼 대원들은 임지를 마치고도 갈 곳이 없어 16개월 동안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남편은 37세, 나는 29세 되던 1982년 10월 14일 축복식이 있는 날, 1978년 약혼 대원들에게는 가슴에 담은 한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감격의 날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다.
그러나 축복가정 생활은 깨소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입에 넣으면 질기면서 쓰디 쓴 칡뿌리와 같은 것이었다. 쓰다고 뱉을 수도 없었고, 입에 물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쓰고 질겨도 씹고 또 씹어야만 단물이 나오는 그런 것이 축복가정 생활이었다.
“축복은 원수가 만나는 것이다”라는 참부모님 말씀처럼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뜻을 위해서는 몸 마음을 도사리지 않고 부부가 하나 되어 활동했다.
참부모님께서 우리 가정을 많이 사랑해서인지 1년에 한명씩 2월 달마다 아들 세 명을 주셨다. 그리고 또 한 아들을 주셨으나 내가 잘못 판단하여 유산을 했다. 연달아 아들을 3명 낳고 또 유산까지 하고 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했던 기도는 “막내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날마다 울면서 기도 할 정도로 너무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86년, 셋째 아들을 낳고나서 갑상선 한쪽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였다. 그로 인해 건강이 더 나빠졌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내 운명에 딱 맞는 것이었다. 환고향 명령을 받아서 집에서 교회로 출퇴근하면서 교회에서 자고 식사 때는 집으로 와서 식사 챙겨주고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교회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아이들을 돌 볼 시간이 없었다. 미혼 전도 대상자를 데리고 부곡 콘도에 2박3일 수련 갔다 오니 첫돌 지나서 아장아장 걷던 셋째 아들이 두 발에 화상을 입고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발바닥이 완전히 익어 버렸다. 그 아들을 업고 6개월을 병원에 다닌 끝에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낫게 해 주신 은사를 받았다. 하늘을 위해 진심으로 살면 기적을 주시는 하늘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산가족과 같이 몸은 고달팠으나 하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은 기뻤다. 환고향 명령이 어두운 터널 속에 있던 나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참부모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더욱 다지게 되었다
또한 뜻을 위해 계획을 세울 때마다 그 일을 못하게끔 사탄이 방해를 했다. 아이들이 다치거나 가정에 우환이 발생하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지혜가 생겼다. 뜻을 위해 계획을 세우면 먼저 하늘 앞에 헌금을 하거나 정성을 드리는 조건을 세웠더니 그 다음부터는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11. 다시 동원 활동
1988년도 6월에 “친정으로 환고향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그에 따라 살림살이를 남편과 나누었다. 나는 아들 3명과 울산에 가서 두 칸짜리 방을 얻었다. 친정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기고 활동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기를 직장에 다니다가 갑자기 없어지더니 아이 셋을 데리고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소문이 났다. 친정어머니께서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1974년부터 교회를 다니셔서 그런지 말없이 협조해 주셨고, 1988년도에 독신 축복을 받으셨다.
1988년 환고향 이후, 1년 동안의 기도와 정성으로 딸을 잉태하여 1989년도에 딸을 낳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아들 세 명에 딸을 낳았으니,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부모가 되려면 아들 키우는 재미와 딸을 키우는 재미를 같이 누려야 한다는데, 나에게 그런 행운이 다가왔다. 마음이 기쁘니까 몸 건강도 좋아졌다.
1990~1991년, 2년 동안 광주교구 부인회장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하영호 교구장을 모시고 120일 철야 정성을 통해 건강을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잠을 충분히 못 자는 만큼 건강이 나빠져야 할 것이지만, 딸을 낳은 후에 120일 철야 기도에 참석하면서 말씀으로 은혜 받고 정성과 기도 덕분에 건강이 조금씩 좋아졌다. 하늘의 가호와 은혜였다. 신앙 세계는 일반인의 차원과 다른 것이 있는 법이다.
나의 하루 일과는 가히 초인적인 슈퍼우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잠재우고 밀린 가사를 정리하고, 밤 11시 3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교회 도착하여 밤12시(자정)부터 5시까지 기도와 말씀훈독을 반복하면서 철야기도를 하였다. 끝나면 5시 30분에 집에 도착하여 1시간 30분 정도 조금 눈을 붙인다. 알람시계가 없어도 7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아침밥해서 아이들 먹여서 유치원과 학교 보내고, 빨래하고 청소를 하고 나면 10시가 되었다.
6500가정 진숙자 대원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도활동을 하고,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여 저녁밥 지어서 네 명의 아이들 먹이고 목욕시키고 빨래를 개고 나면 밤 9시가 되었다. 약 2시간 쪽잠을 자고 11시에 일어나서 목욕하고 교회로 가서 철야정성을 드렸다. 이런 하루 일과를 120일을 하루도 안 빠지고 하고 나니까 1991년 참부모님의 환고향 명령이 떨어졌다. 남편이 태어난 리, 동 단위로 가라는 지시였다.
남편과 나는 참부모님의 명령을 따라서, 남편 고향인 목포 북교동에서 남편이 태어난 바로 옆집을 매입한 뒤 그곳으로 이사했다. 목포에 환고향하여 활동하던 중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대회를 비롯하여 많은 행사와 대회가 있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버스에 태우고 3끼니의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여 새벽에 출발하여 늦은 밤 시간까지 하루 종일 서울 행사에 갔다 오면 몸은 파김치처럼 축 늘어졌다. 버스 20여대를 동원하면 휴게소에 쉴 때마다 버스를 갈아타고 참어머님을 소개하고, 돌아 올 때에는 행사에 대한 내용을 소개 하면서 미친 듯이 활동했다.
여성연합 창설 전국대회를 목포 실내 체육관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하게 되었다. 지방교회에는 식구가 없다보니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여성연합 지부장인 내가 담당해야 했다. 임신 2개월 입덧이 시작하면서 강행군을 했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목포 시내 전체를 교역장님과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았다. “참부모님의 영광이 목포 땅에서 빛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넓은 실내 체육관을 일곱 바퀴를 걸어서 성별하면서 돌았다. 결의문 선서를 연습하고, 아침 7시 30분에 집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1,2,3학년 아들 셋을 밥 먹여서 학교 보내고, 막내딸을 유치원 보내고, 허둥지둥 집안일을 마무리 하고 교회로 갔다. 10시경에 교역장님을 만나서 인원동원을 확인하기 위해 하루 종일 다녔다. 임신한 몸으로 입덧하면서 먹지도 못하고 저녁 무렵 집에 들어오는 일과를 2개월가량 계속하니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풍치가 와서 잇몸 전체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하고 방광염까지 발병한 상태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임신 3개월이라도 항생제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죽기를 각오하고 활동했다. 목포 대회 날, 인원이 차고 넘쳐서 참부모님으로부터 “목포대회는 성공했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동안의 수고로 인한 누적된 피곤이 싹 날아갔다. 그러나 너무 과한 활동을 하고 약을 먹은 탓으로, 7개월 뒤 1992년 12월 24일 아들을 낳았으나 아기는 10일 뒤 애승일인 1월 2일에 하늘나라로 갔다. 2세를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에 6개월을 성초를 켜 놓고 기도했다.
“36만쌍 축복을 승리하면 하늘 뜻이 이루어진다.” 말씀을 이뤄 드리기 위해는 열심히 활동했다. 북교동 노인잔치를 준비 중에 셋째 아들이 학교에서 팔이 부러져 병원에 데리고 가고, 노인잔치는 남편과 6천가정 이화순, 변단옥 사모가 와서 도와주었다. 9살짜리를 혼자 병원에 두고 미혼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활동하느라 재활치료가 늦어져서 집에서 억지로 재활치료 하다가 또 팔이 부러졌다. 다시 깁스를 하고 2개월을 기다리다 보니 팔이 약간의 장애가 왔다. 마음이 아프고 저렸지만 아들에게“ 이 팔은 엄마가 하나님 일을 하느라고 생긴 흔적이니 항상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뜻길이 바빠서 또 바쁘게 살아야 했다. “통일교회 식구는 팔자가 세다.”는 말씀처럼 우리 통일가의 식구들은 억척같이 억세게 살아야 한다. 순교의 자세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아담 해와가 죽기를 각오하고 타락한 과정을 복귀하려면 우리 역시 고생과 고난을 통한 죽음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쉴 수도 없었고, 멈출 수도 없었다.
“통일교회의 가는 길은 일생이 고달프다.”(《말씀선집》 제28권, 173쪽)는 말씀이나 “참부모님께서 걸으신 눈물의 길, 가시밭길, 괴로운 길을 가자, 따르자, 섬기자.”(성가 10장, 황환채 작사)는 가사처럼 우리는 억센 삶을 걸어야 하였다. 남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사탄과의 영적인 투쟁을 하면서 일하고 싸우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참어머님을 대신한 우리들이니까 모든 면에서 갖춰져야 한다.”는 사길자 회장의 말씀을 듣고, 대입 수능고사를 치른 후 목포대학교 야간반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밤7시부터 10시까지 매일 출석했다. 1학년 때는 장학금을 탔으나 2학년 때는 160가정 활동이 있어서 겨우 학교에 출석하는 정도였다. 그 때에 같이 졸업한 동기들 중에서 시의원 도의원 등 정치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30여명이나 되었다.
160가정 활동에 대해서는 축복가정이라면 누구나 할 말이 많겠지만, 버스 한 대를 동원하면 부부는 1~2가정 타기가 일수였다. 부부로만 160가정을 전국에서 3번째로 완료하여서 성약메거진에 소개되기도 했다. 160가정 완료 후 참아버님께서 160가정 완료자들을 제주도로 오라고 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680가정 목표를 달성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우리 부부는 집에 돌아오는 즉시 그 동안 환고향하여 관리해 오고 있던 목포 시내 있는 각 동의 새마을 부녀회장, 농협 부인회장단, 바르게살기 회장단 등을 만났다. 축복 활동을 목포 시내 전체를 대상으로 할 수 있었지만, 우리 가정이 먼저 하고 나면 다른 식구들이 할 때 중복되는 수가 많이 있으니까 활동할 수 있는 동을 가정마다 배치해 달라고 교역장님께 요청하였다. 우리 가정은 3개동을 배정 받았다.
먼저 서산동에서 예식장을 빌려서 축복행사를 했다. 시의원이 축사를 했고, 40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 온 것을 보고 인근의 우리교회에서 보러 왔다가 “이옥주 지부장처럼 하면 지역 복귀는 쉽게 되겠구나.”하고 용기를 가졌다.
2주 뒤에는 죽교동 홍일고등학교 유도관 강당을 빌려서 축복행사를 했다. 새마을 부녀회원들과 통장부부들을 식당에 모이게 해서 80여명에게 축복행사를 먼저 시범을 보였다. 모두 다 협조하여 인원동원을 해 주었고, 남편과 나는 한 집도 빠짐없이 초청장을 다 돌렸다.
행사 날 김석진 교구장께서 오셔서 축복을 집례하셨다. 운동장에 1,000여명이 운집해서 접수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시는구나!”하셨다. 시의원은 제일 먼저 와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리면서 축사를 해 주었다. 지방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왔어도 내가 접수 받느라고 응해 줄 시간이 없어서 30분을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갔다.
홍일고등학교 행사 일정을 정해놓고 재향군인회 전남도회의에 참석하러 간 사이에 목포 교회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축복행사를 하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이를 축복행사 날 아침에 교회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떡을 100kg 준비하고, 1,000명을 목표로 맥콜과 과일을 준비했고, 행사 선물은 우산을 미리 교회에 부탁해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활동하느라 믿고 확인을 하지 못했다.
다른 장소를 빌려서 축복행사를 하느라고 선물도 다 그쪽으로 가져가고 식구들도 모두 그쪽으로 갔다. 행사 날 아침에야 이를 알았을 때 너무나 황당하였다. 누구에게 따질 시간도 없었고,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물어 볼 시간도 없었다. 부랴부랴 인근교회에 수소문하여 권기남 나주 교역장께서 행사에 줄 우산을 직접 목포까지 가져다 주셨고, 성주식 요원은 영암교회와 해남화산교회 대원들의 협조를 받았다. 접수는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 대원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행히 6천 가정 해남 화산 종메 교회장 이화순사모와 권사 두 분이 와서 접수를 도와주었다.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 봐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안내를 맡아 주었고, 성주식은 영암교회와 해남 화산 종메교회 대원들이 도와주어 1,000명의 인원이 모두 무사히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일생동안 이때처럼 놀라고 당황했을까? 어쨌든 승리했기 때문에 “누가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하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하신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천명 축복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날 저녁 모든 식구에게 뷔페 식사를 대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전 식구가 동원한 축복행사에는 400명이 참석했다고 들었다. “얼마나 축복 행사를 하고 싶었으면 중복으로 날짜를 잡았을까?” 생각하면서 북교동 축복행사는 잠시 뒤로 미루고 한 달 동안 식구들 축복행사를 각 동의 새마을 부녀회장 들에게 부탁하여 협조해 주었다. 그 뒤에 북교초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800명 축복행사를 했다. 그 당시 우리가정은 2300가정을 정식으로 축복을 완료 했다.
김석진 교구장께서 이런 활동 내용을 협회장께 보고해서 참부모님께도 보고 드렸다고 한다. 참부모님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축복해 주셨다. 이 말씀을 평생 동안 귀한 축복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재향 군인회 측에서 여성회를 조직을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을 하면서 우수한 평가를 받아서 재향군인회 전국회장상도 받았다. 재향군인회 회장단에는 전직 시의원과 현직 시의원이 40명 정도가 있었다. 내가 여성회장으로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더니 김대중 대통령이 여자 정치인을 많이 중용한다고 했으니 추천을 해주겠다고 하였다. “다음번에 꼭 공천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공천 약속까지 해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포는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바로 당선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환고향하여 동장, 시장, 시의원, 국회의원 되라.”고 하신 참부모님 명령을 이뤄 드릴 수 있는 순간이 목전에 와있었다.
12. 목회 발령
그런데 1998년 2월에 남편이 나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목회자로 나가겠다.”고 협회에 신청하여 목회자 발령을 받았다. 1995년도에 36만쌍 미혼자 축복을 20여명 약혼까지 했으나 절반이 파혼되고 10가정 정도가 축복가정으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축복 받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미혼자들이 200여명이 있었다.
새마을 부녀회, 청소년 보호 관찰소에서 강의하였다. 그 당시 한번 강의에 15만원씩 받았으며,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에게 강의 할 수 있도록 약속을 받은 상항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느닷없이 목회자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목포에서 참아버님 명령인데도 종메 교회 허가를 내어 주지 않으니까 목회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허가를 해 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생각에 목회를 지망했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유달산 성지에서 “하늘이 기대 하심에 맞춰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꼭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울면서 약속하고 기도하였다. 내가 추진해 오던 모든 것을 뒤로 두고 남편을 따라서 목회의 길로 나섰다.
처음 지원한 곳은 광주교구 하남교회였다. 그곳은 1989년도에 시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을 애통히 여긴 남편이 시어머니 이름으로 협회에 헌납한 교회였다. 겨우 식구 5명이 있는 어려운 교회라서 목회자가 오지 않는 교회였다.
목회 나오기 전에 이미 나는 1개월 전부터 혈변을 보면서 활동하러 다녔다. 활동 중에 참아버님 앞에서 쓰러지는 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고 즉시 병원으로 갔더니 십이지장에서 혹이 있는데 그곳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전남대 병원 수술실 앞에서 집에 가서 아이들을 맡을 사람을 정해 놓고 오겠다고 수술을 거부하고 나왔다. 그런데 3월에 목회 발령 받고 보니 교회를 비울수가 없었다. 여름 방학 때 수술 받기 위해 기다리던 차에 브라질 이상가정 교육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암 수술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참부모님을 마지막으로라도 만나 뵙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수술은 뒤로 미루고 브라질 이상가정 교육에 1차로 참석했다.
브라질에서 돌아오자마자 40일 동안 아이들만 있던 집안을 며칠 동안 정리 해 놓고 미혼자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세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1인당 10명의 식구를 대신해야 할 2세들이다. 그러니까 학교에 가기 전에 새벽에 깨어나서 오징어 다리 전단지를 골목이나 벽에 붙이고 나서 학교로 가야 한다.” 면서 새벽에 깨워서 활동을 함께 했다. 그 결과 미혼자 15명을 축복시켰고, 1년이 지나니 식구가 40명 정도가 되었다. 축복 받은 남자 15명에 대상들이 오니까 30명이 되었고, 그 부모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였더니 40여명의 식구가 되었다. 다 모이기에 좁아서 2층에 성전을 증축하여 홍성복교구장님 모시고 헌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전도 활동을 하니 하늘이 함께 해 주심을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네 명의 자녀들은 부모로서 돌봐주지 못했어도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건강을 돌보지 못해서 결국에는 또 한 번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식구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전남 담양수북교회를 끝으로 목회를 그만두게 되었다.
13. 가족의 결단 및 미래 비전
한번은 여수 청해가든 훈독회에 참석했는데 참아버님께서 둘러보시더니 나를 지목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셔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질렸지만 ‘오! 데니보이“를 불렀는데 떨려서 노래가 잘 안 나오니까 참아버님께서 함께 불러 주셨다.
목포대학에서 참어머님 행사 때에는 “호텔 식사보다 우리 정성으로 만들어서 대접하자”며 모든 음식을 우리 집에서 만들어서 호텔로 가져갔는데 “나물이 참 맛있다”하면서 맛있게 드신 적도 있었다.
2005년도에 암수술을 하러 서울로 가면서 장남을 불러 놓고 유언처럼 말했다. “엄마가 수술하고 나면 결과가 어찌될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늘 앞에 우리 가정이 마이너스 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너는 엄마를 대신할 수 있도록 축복을 받아라.” 장남은 내 말을 듣고 22세에 축복을 받았다. 암 수술 후 목포로 돌아 와서 협회 인준 훈독가정교회를 인가 받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 통폐합 때 그만두게 되었다.
청평 역사 초기부터 “우리 몸에 영들이 많은데 그 영들을 분립하여 축복을 시키면 모두 믿음의 자녀가 된다.”는 대모님 말씀 듣고 아이들과 목포에서 열심히 청평을 다녔다. 조상해원식을 청평 역사 처음부터 시작하여 완료했고, 남편과 나는 40일 수련을 4번씩, 장남은 3번, 두 아이들 모두 한번 이상씩 다 받았다. 셋째 아들은 STF 2년을 수료 했다. 횡적 430가정은 믿음의 자녀들 덕분에 쉽게 할 수 있었다. 청평 역사에서도 많은 영적체험의 은사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청평 역사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확신한다.
“재산은 도장 한 번 혹은 서류 한 장에 없어 질수 있으나, 머릿속에 든 지식과 기술은 사기 당할 염려도 없고, 도둑질 당할 염려도 없고, 맨손으로 어디 가서든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너희들이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끝까지 시켜주겠다.”고 자녀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참부모님 앞에 “효”를 다해야 복을 받는다고 강조하며 살았다.
장남은 치과의사로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둘째아들은 부부가 공무원이고, 셋째아들은 공인회계사이며 며느리는 공무원이다. 딸은 임상심리사로 전문직에서 일하고 있다. 세 아들은 모두 축복을 받았고 손주들이 5명이다. 딸은 아직 미혼이다.
천일국 주인상과 세통선2012-32호로 “당신은 뜻길의 영웅입니다.”라는 참부모님 공로상등 참부모님 상 다수와 협회장상 다수를 받았고, 믿음의 자녀는 미혼 축복가정 27가정과 교회 나오는 다수의 기성가정이 있고, 천보가정도 10여가정이 된다.
올해 2022년 6월에 또 다시 갑상선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다.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은 청평역사 덕분이다. 그 이전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절대 선영되시는 조상님들 덕분이다. 지금은 43가정 실세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항상 하늘 앞에 플러스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내 뜻대로 살아 왔던 삶이 아니라 하늘의 뜻대로 나를 도구로 써 오셨다는 것을 깨달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이 모든 삶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영광으로 돌려드린다.
첫댓글 정혁순님 댓글
이옥주언니의 자서전을 보니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되어 많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성약시대 사도로써 전혀 손색이 없는 삶이네요. 존경스럽습니다. 그저 뭐든 열심히하시는 분으로만 알았었는데 그런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간직하고 계셨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들 앞에 모범이 되어 주셔서...
손기문님 댓글
지난번 이장일 목사님의 부인 되시는 이옥주 사모님의. 자서전을 읽고 하늘은 정성을 드리며 열심히 신앙을 하는자는 반드시 역사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보여주신 삶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적 장님이 될 위기에 눈을 뜨게 햐주셨고 무서운 암세포도 하늘을 향한 뜨거운 심정에 태워져 소멸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모쪼록 이장일 목사님과 자녀들과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잘 사시길 기도 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