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나무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로 알고 있지만 오늘날의 음료인 커피로 발전한 곳은 아라비아 지역이다. 이슬람교 세력의 보호를 받으며 아라비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종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는 커피가공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유럽인들이 커피가 경작되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남부 아라비아 반도(현재의 예멘)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커피는 기원전 800년경부터 거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이 시기에 예멘과 에티오피아 사이에 실지로 무역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과, 커피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시기에는 약물로 복용)을 알고 있던 무역상들이 커피를 매매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라는 주장. 예멘에서는 야생에서 커피가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볼 때, 다소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커피가 남부 아라비아로 전달된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에티오피아가 525년 남부 아라비아를 침공한 것으로 보아, 이때 아라비아에 커피가 처음 전파된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를 침입했던 노예상들에 의해 기원전 1,000년경 아라비아에 전파되었다고도 한 이 후 터키로 전달된 커피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널리 음용되지만 외부로의 유출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십자군 원정에 의해 유럽에 전파된 커피는 처음에는 이교도의 음료라 하여 배척을 받지만 결국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현재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인 브라질에 커피가 전래된 것은 1727년경. 브라질은 그 토양과 기후가 커피 재배에 매우 적합하여 세계 제일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 | |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먼저 커피문화가 형성되었다. 1554년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에서 문을 연 커피점은 너무나 번창하였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많은 커피점이 세워졌다.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곳>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 당시의 커피점에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체스를 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그곳은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은 유럽 카페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의 커피점이 언제나 번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모임을 두려워한 군주에 의하여 세 번이나 완전히 폐쇄된 적도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 부딪쳐 오래지 않아 다시 문을 열었다. | |
유럽에 커피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유럽에서는 커피가 초기에 이교도의 음료라고 하여 거부되었으나, 교황 클레멘트 8세가 이교도만 즐기기에는 너무 훌륭한 음료라고 하여 커피에 세례를 줌으로서 기독교인도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들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점은 베니스에 개점되었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을 모방하였다. 중산층을 주요고객으로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방향을 바꾸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자 베니스의 커피점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645년이었다. 비엔나의 커피점은 1687년 군인이었던 게오르크 콜시츠키(Gerog Kolschitsky)가 처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커피점 그는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던 터키를 물리친 공적을 인정받아 터키가 후퇴하면서 남겨놓고 간 커피 500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아랍 풍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볶는 법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커피를 제공할 때 터키를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제국이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손님에게 접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관습이 되어 오늘날에도 중부유럽에서는 커피와 함께 케이크 또는 달콤하게 가공된 고기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한편 지중해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베니스의 상인들은 동방의 향신료 무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에게 그들의 영역을 점차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상권을 되찾기 위하여 베니스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고 있던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커피무역을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의 모카 항에서 선적된 커피는 베니스 항에 내려지고 이곳에서 유럽의 모든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클레멘트 4세 이때까지 아랍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기 위하여 외국인에게 커피를 판매하기 전에 커피 씨앗을 볶아버리거나 삶아 싹이 틀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커피가 아랍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으나 17세기 초 인도의 바바 부단(Baba Budan)이 라는 한 순례자에 의하여 아랍의 커피 독점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1616년 아랍에서 훔쳐낸 7개의 커피 씨앗을 인도로 가져가 마이소아 지방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네덜란드인은 인도의 말라바르와 실론 섬에서 소규모의 커피 농장을 경영하였고, 곧 이것을 자바에 옮겨 심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것을 본국의 암스테르담 식물원에 보내게 되고, 네덜란드는 오늘날 세계 커피나무의 종묘원의 원조 격이 된다. 그러나 정작 대규모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90년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한 커피묘목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인도에 보냈으며, 그리하여 1699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커피는 이 지역의 기후에 잘 적응하였다. 수년이 지나자 네덜란드 식민지는 커피 주 생산지가 되었고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은 커피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커피가격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면 과잉 생산된 커피를 과감하게 폐기처분까지 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기호음료로 차를 주로 마시고 있었는데 자국 내 식민지에서 쉽게 커피를 구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왕 루이14세에게 커피나무 한그루를 선물하였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식민지에 커피 종자를 심게 되고 아프리카 부르봉 섬(지금의 레위니옹)이 첫 상지가 된다. 이곳에서 자란 커피나무가 브라질로 옮겨져 부르봉 산토스라는 고급 커피로 탄생하게 된다. | |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Martinique)섬에 근무하던 끌류(Gabriel de Clieu)대위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임무지로 다시 떠나면서 묘목 몇 그루를 갖고 가기를 원하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폭풍우 때문에 거의 죽을 뻔 하다 하였다. 항해도중 물이 떨어지자 끌류 대위는 자신에게 할당받은 식수마저도 커피묘목을 살리기 위하여 나무에 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간신히 도착하였을 때 어린 묘목은 모두 죽고 단 한 그루만을 겨우 살 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그루는 카르티니크 섬에서 무성하게 번식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팔백만 그루가 되었다. 이곳의 커피는 그 후 프랑스령 기아나(Guianna)로 옮겨져 울창하게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 한 그루의 묘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 부르봉 왕조 이름에서 인용하여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를 부르봉 커피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식민지에 커피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에, 영국은 1730년 자메이카와 1740년 인도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만들었다. 그 결과로 아라비카 커피는 점점 다품종으로 변화하게 된다. 멕시코와 서인도산의 커피나무가 중앙아메리카에 심어지면서 커피나무의 이식시대가 끝난다. 실론, 자바에 병충해가 만연하여 그때까지의 아라비카종이 전멸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의 서남 해안지대에서 재배되었던 로부스타종이 새로 이식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최대의 커피생산국인 남미의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1727년 사랑에 빠진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부인이 포르투칼 연인과 헤어질 때 그에게 보낸 꽃다발 속에 커피나무를 숨겨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브라질은 그 토양과 기후가 커피재배에 너무나도 적합하여 곧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커피 생산국가가 되었다. 1740년 이래로,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는 커피 공급의 주요 원천이었다. 유럽에서 마시는 모든 커피의 2/3가 안틸리스 제도(카리브해에 있는 네덜란드령의 6개 섬)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산토도밍고의 혁명으로 인하여 부의 주요 원천이었던 커피재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1773년 영국의 조오지 국왕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되고 있던 차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보스턴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에 한밤중에 올라가 그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대서양에 모두 던져버렸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보스턴 차당사건이다. 그 후 미국에서는 차를 대신하여 커피가 기호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1800년대 커피문화는 유럽인들이 지성을 자극하는 음료로 숭배하며 영국 고전문화의 커피하우스, 프랑스 예술가들의 파리의 까페, 숲과 음악의 도시 빈의 까페, 보수적인 프로이센 독일 까페 등, 유럽전역에 까페 라이프를 창출했다. 또한 유럽 열강들의 커피 식민재배에 힘입은 바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의 수가 급진적으로 확산되었다. 1773년 영국의 조오지 국왕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되고 있던 차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보스턴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에 한밤중에 올라가 그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대서양에 모두 던져버렸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보스턴 차당사건이다. 그 후 미국에서는 차를 대신하여 커피가 기호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1800년대 커피문화는 유럽인들이 지성을 자극하는 음료로 숭배하며 영국 고전문화의 커피하우스, 프랑스 예술가들의 파리의 까페, 숲과 음악의 도시 빈의 까페, 보수적인 프로이센 독일 까페 등, 유럽전역에 까페 라이프를 창출했다. 또한 유럽 열강들의 커피 식민재배에 힘입은 바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의 수가 급진적으로 확산되었다. 1906년 브라질이 커피재배의 97%를 생산하였으며, 커피 독점을 가져왔으며, 1940년 국제아메리카평의회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커피 생산국들에게 커피할당동의안이 시행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이루어지다가 1990년대 초 커피농작물의 실패(브라질)가 겹치면서 커피가격의 급상승을 가져오면서 커피할당제는 막을 내렸다. 현재는 거대한 자본을 가진 세계의 주요 업체들에 의해 주로 미국의 뉴욕선물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