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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자료실 스크랩 일제시대의 저항문인과 친일문인/ 김경식
Ivyberry 추천 0 조회 17 14.07.13 04: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제시대의 저항문인과 친일문인

김경식

■서론

일제36년동안 일제에 저항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던 문인은 최남선, 벽초 홍명희, 한용운, 김동인, 염상섭 심훈, 현진건. 이육사, 윤동주, 김광섭, 이병기등이다. 그러나 해방되던 시기에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였던 문인은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시인이다. 이들을 민족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부끄럽게도 일제에 저항했던 문인들은 1930년대 카프검거와 전향등으로 사라졌다.

오히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문인들의 친일 행각이 노골화 된다. 해방공간에 문인들이 떳떳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친일에 기인된 것이었다. 무명이었던 이육사 시인과 윤동주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유명문인들은 오히려 일본제국을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필자는 친일문인들을 매도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시효가 지난 반민법을 들먹이려는 것은 물론아니다. 누가 이 시기의 문인들을 비판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문인들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 나서면 그들을 용서하게 되고 관용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일제36년은 참으로 한 세대를 넘는 긴 세월이었다. 왜 우리 문인들은 일제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참담한 능욕을 당하면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던가.

이것을 해명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친일문인들은 후손들에게 능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일제의 통치가 얼마나 간악스러운 것인가를 알기 전에 친일문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이 천 년 전 유대땅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칠 수 있을 정도의 도덕성을 가진 자가 돌로 치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본론에서는 일제하의 조선민중이 당했던 시련의 역사와 문인들의 겁먹고 복종해야 했던 굴종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한다. 이런 압제하에서도 저항 문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이육사 시인과 벽초 홍명희의 행적을 찾아 떠나보려고 한다.

또한 친일문인으로 대표되는 서정주의 삶과 문학, 해방 후 작품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반성한 채만식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자.

■본론

1. 저항문인

-- 이육사와 벽초 홍명희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

1)이육사 시인의 삶과 문학

이육사시인은 1904년 음력4월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5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 했으며 조부 이중직이 세운 보문의숙을 다니며 신학문을 공부했다. 수인번호로 알려진 이육사(二六四 陸史)가 호지만 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필명은 ‘이활’이다.

이육사 시인의 생가터와 그의 문학관을 찾아가려면 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안동IC로 나와 안동시내를 거쳐 봉화로 이어진 국도 35번를 이용한다. 도산서원을 거쳐 퇴계종택을 지나 퇴계묘소로 언저리로 난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왼쪽에 문학관이 보인다.

퇴계고택과 묘소에서 고개하나 넘으면 그의 고향 원천리다. 문학관 아래 보이는 원천마을의 생가는 안동댐 수몰 때문에 진작에 헐렸다. 생가를 그대로 지은 집이 안동시내에 있지만, 최근에 문학관 뒤에도 ‘육우당’이란 현판까지 건 이육사 시인의 집이 복원되었다. 그런데 왠지 영화 세트처럼 보인다. 복원된 생가는 문학관 뒤에 지어 놓았다. ‘육우당(六友堂)’은 이원기, 육사, 원유, 원조, 원창, 원흥 6형제가 태어난 집이며 형제간에 우애 좋기를 바라는 의미로 당호를 지은 것이다. 생가구조는 ‘二’자 형태다.

문학관 왼쪽 옆을 돌면, 바위 위에 앉아 자신의 고향 마을과 낙동강을 바라보는 듯한 동상이 앉아있다.

그 뒤로 화강석에 음각으로 새겨진 ‘절정(絶頂)’시비가 정갈하게 서 있다.

시비에는 세로행으로 새겨진 이육사 시인의 대표시 중의 하나인 ‘절정’이 음각되어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이 시를 큰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 전문--

이 시는 역설적 구조에 의해 저항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 시다.

1939 년경에 쓴 시 ‘절정’은 조국광복을 품고 일제와 투쟁해 오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일제하의 잔인하고 암담한 상황을 표현하면서, 이것을 극복하려는 육사의 강한 지사적 의지와 신념이 드러난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니 힘이 솟는다.

문학관 왼쪽 비탈면에 ‘청포도샘’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땅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이용하여 만든 샘의 발상이 가상하다.

이육사 시인은 ‘계절의 오행’이란 제목의 산문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

이라며 고향 원천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육사문학관’은 시인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 옹골차게 자리 잡았다.

자신의 고향 마을과 생가터를 바라보고 있다. 청량산 밑을 스치면서 흘러내린 상류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도 보인다. 문학관 1층에는 시인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세미나실, 기획전시실, 영상실이 나그네를 반긴다.

육사는 유년시절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에 떠가는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아직도 맑은 물이 흐르는 강둑을 걸으면 그의 시심을 이해하게 된다.

시 ‘청포도’가 그렇고 ‘광야’가 그렇다. 이쯤에서 그의 대표시 중의 하나인 ‘광야’를 암송하면 이육사시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이 바로 이곳이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의 시상을 떠올린 곳이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시인의 시 ‘광야’ 전문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으로 부르는 이육사 시인은 1933년 ‘신조선’지에 시 ‘황혼’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다. 윤곤강, 김광균, 신석초와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지만 창간호가 마지막 호가 된 상징적인 시전문지가 된다. 이육사 시인의 독립운동과 문학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던 정인보 선생이 신석초 시인을 이육사시인에게 소개했다.

이육사시인의 시는 주로 조광(朝光)지를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된다. 산문과 논문들도 여러 편 썼는데 차라리 계속해서 시를 썼으면 하는 여운을 남긴다. 그의 시작은 1930년 중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다.

이 기간은 그가 독립을 위해 만주와 중국을 포함한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우렁찬 한민족의 기상과 함께 민족 정서가 작품 속에 보인다. 독립이 절망적일때 희망을 노래한 그의 대표작 ‘광야’를 큰소리로 읽으면 가슴 뭉클한 비장함을 준다.

시 ‘광야’에는 일제하의 굴욕적인 민족적 수난을 다가올 미래의 해방된 조국을 상상하며 현실적인 비극에 굴하지 않으려는 강렬한 은어를 담고 있다. 일제하에 광야만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태초부터 다가올 미래를 삽입하여 장엄하게 노래한 희망의 시는 드물다.

‘광야’는 육사의 탁월한 민족적인 역사와 현실 인식 의지가 문학성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민족의 시다. 이 시는 현실인식과 독립운동의 열성에 기본을 지닌 정신과 투철한 민족사관에서 출발하는 선비적 지사 의식이 번득인다. 아울러 변증적인 역사관에 기반을 가지고 다가올 미래 지향의 역사의식 등을 단계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광야는 15행의 5연시다. 아득한 과거(1∼3연), 현재(4연), 미래(5연)의 세월의 변화로 달라지는 시적인 변용이 치밀하다. 또한 '까마득한 날'에서 부터 '다시 천고의 뒤'까지의 시간적 단계의 변화들은 당시 암담한 조국의 현재를 '광야'로 상징한 은유적 역사 인식의 훌륭한 표출이다.

고교시절 이 시를 암송하면서 무엇인지 모를 어떤 기상을 느끼던 기억이 삼삼하다.

이육사 시인의 생가에서 하늘을 본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봄날이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산들이 겹겹이 둘러져 있다.

오래도록 가슴속에 품어온 이 연민의 그리움을 더 이상 간직할 수

없어서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이 분의 고향을 찾아 새벽길을 떠나 왔다.

이육사시인은 민족을 사랑하여 일제에 유린당한 조국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 최전방에서 투쟁하면서도 시인으로서 지조를 끝까지 지킨 분이다.

1932년6월 이육사시인은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1881~1936)을 만나 그를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1936년 노신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에 추도문을 쓰기도 했던 이육사 시인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적인 사상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이는 식민지의 매판적 자본과 정치 세력이 판치는 조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혹독한 암흑기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몸을 조국에 바치며 일제의 칼날아래 스러진 유일한 분이 이육사 시인이다. 조국 광복을 1년 앞에 두고 일제의 잔인한 고문에 피투성이로 죽어간 이육사시인의 일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관에 세워진 ‘절정’이란 시비 언저리를 거닐면서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곳에 서면 왼쪽으로 왕모산이 보이고,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아마도 광야는 이곳을 서성이면서 시심을 얻었을 것이다.

특히 악랄한 일제에 능욕 당하는 가운데 시심을 불태우며 대항했던 이육사 시인의 강온투쟁은 감동적이다.이육사시인은 민족을 사랑하여 일제에 유린당한 조국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투쟁하면서도 시인으로서 운명직전까지 지조를 지켰다.

17번의 투옥과 모진 고문속에서도 조국광복과 시인으로서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면서

41세의 젊은 나이로 북경의 차디찬 감옥에서 독립을 1년 앞둔 1944년 1월 고인이 되었다.

시인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이육사 문학관에서 그의 생가터까지 걷는다.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생가터에는 그의 삶을 위로해 주려는 듯 청포도시비가 반긴다.

아마도 이 청포도란 시는 절정과 광야와 또 다른 부드럽고 서정성이 깃든 그의 대표시다.

시비는 직사각형의 오석에 세로행으로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시비에 그의 얼국이 조각되어 있다. 화강암을 포도송이 처럼 둥글하게 만든 모양이 이체롭다. 그러나 시비를 둘러싼 모양이 꼭 포승줄처럼 되어 있어 눈에 거슬린다.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발상이 치졸하다. 청포도(靑葡萄) 제목도 한자다. 아마도 이 시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제목을 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위 시는 1939년 문장지에 발표한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 전문이다.

가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시인은 현재 자신의 주변에 없는 그리운 대상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이 아름다운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 먼 곳에서 절망의 방랑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날 ‘고달픈 몸’으로

올 것이란 예언자적 선견지명이 숨겨져 있다. 색조 감각이 아름다운 여인의 의상처럼 손님은 희망의 밝은 빛

곧 광복이 아니겠는가?

“내 고장 7월”의 광복의 평화는 결코 억지 역설이 아니다. 결국 “청포를 입은 손님”은 일제의 칼날아래 신음하고 있는 조국에 독립을 선물로 줄 것을 암시하는 은유에 가슴이 아리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 속에 이런 엄청난 희망이 숨겨져 있음을 알기에 그의 시는 더욱 위대하다.

이 시는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독립을 향한 강인한 바램이 은밀하게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하리라.

2)벽초 홍명희의 삶과 문학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괴산읍 동부리 450번지다.

홍명희 가문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며 노론계열이다.

그의 증조부 홍우길은 이조판서로서 서화에도 뛰어나 ‘휘경원지’등의 작품을 남겼다.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은 대사성 및 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홍명희가 태어나던 해에 성균시에 급제한 후,

1907년에 태인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909년 금산군수가 로 근무한다.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입버릇처럼 “민충정공은 좋은 일을 이루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백성들의 수탈을 일체 하지 않은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자결 전 그는 집무실 벽에 국파국망 불사하위(國破國亡 不死何爲)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쓴 후 뒤 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유고로 일완시고(一阮詩稿)라는 문집을 남겼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 되었다.

한편 홍명희의 생모 은진 송씨(1871~1890)는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홍명희가 쓴 자서전에 보면, 여덟 살 되던 해에 소학을 배우면서

어머니의 그리운 정을 쓴 한시(漢詩)가 가슴을 적신다.

‘창승년년생 오모하불귀(蒼蠅年年生 吾母何不歸)’ “쉬파리는 해마다 생겨 나건만,

나의 어머니는 어이하여 돌아올 줄 모르나”라고 쓰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학 및 시를 짓고, 삼국지를 읽던 벽초는

1901년서울의 중교의숙 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게 된다.

홍명희가 중교의숙을 다니며 신학문을 익히던 시기는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만민 공동회 운동을 주도한 시기와 갑오개혁 이후

1895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 학교의 설립시기이다.

그는 열세 살 되던 1900년 참판 민영만(1863~1904)의 딸과 결혼한다.

18세 때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괴산으로 귀향하여

중국의 경전들을 탐독하였다. 우연히 괴산에 양잠기술을 전수하러 왔던

일본인 부부를 따라 동경유학을 떠난다. 대한해협을 건너 오사카(大阪)를 거쳐 토쿄에 도착한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거듭 승리하여

조선을 완전하게 손에 넣기 위한 순서만 기다리던 때였다.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천황제 국가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며 안전을 찾을 때여서

문화나 사상 면에서도 개인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벽초는 동양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한 뒤, 1907년 다시 대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09년까지 공부하였다. 학교 공부를 게을리 하였지만 성적은 좋았으며 독서광이었다.

특히 문학서적을 탐독하였고 우연히 고서점에 들러 책을 구매하기 시작한 후 밤을 세워 독서하였다.

그의 독서는 처음에는 톨스토이 작품에 관심을 갖다가,

나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백치’ 등에 매료되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애찬자가 된다.

그는 또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작품들을 애독하였다. 바이런의 작품‘카인’에서 따와

자신의 호를 가인(假人)이라 하였으나, 성경의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성경에서의 사실을 인식 한 후 괴산의 나무꾼(碧樵)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백옥석(白玉石)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1920년 이후 부터 벽초(碧初)라는 호를 사용했다.

대한제국의 현실이 풍전등하 상태에 있던 1910년 2월 홍명희는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괴산으로 귀향하여 고향의 인근을 다니며 러시아 유학공부에 열중한다.

당시 부친 홍범식은 충남 금산의 군수로 재임중이었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에 자결한다. 홍범식의 장례는 금산 군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히 치러졌다.

발인 날에는 온 고을 사람들이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장례 행렬이 괴산의 제월리 선수골 선영으로 향할 때 300리가 넘는 곳을 100여명이 따라 왔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경술국치 때 제일 먼저 순국한

홍범식의 자결 소식이 나라 안에 알려지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정부 고관으로부터,

유생, 평민등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순국하는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자결과 유서의 내용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의 유언의 충격은 벽초를 괴산 땅에 인물로 묶어 두지 않았다.

3년 상을 치르고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1913년 출국하여 1918년 귀국하기까지 그는 중국의 여러 곳을 방랑하며 민족의 독립을 모색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32세 되던 해인 1919년 3월 충북에서는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하였다.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고 3월15일 괴산으로 내려온 홍명희는 3월19일 쯤 시위를 벌였다.

소백산 줄기에 폭 쌓여 있던 괴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첩첩산중이었던 장연면에까지 일어나는

폭발력을 과시했다.

장연면의 만세시위는 산골의 면 단위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세로 일어난 것으로 보아

3,1운동 당시 괴산의 만세운동의 규모와 격화된 반일 감정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괴산은 비록 산골 마을이었으나 홍범식의 죽음으로 인한 영향으로 반일 감정이 다른 지역보다 강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괴산출신인 천도교지도자 권동진이 참여하여 양반 및 유생들이 고종의 장례식 날

다수가 참석하였다.

한편 홍명희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고향 괴산에서 3,1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1년6개월 구속되었다.

출옥 후 홍명희는 정인보와 함께 대둔산및 내장산 일대를 여행하였다.

이무렵 최남선과 정인보들과 어울리면서 조선광문회의 출입을 자주하면서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몰락되어 갔다.

선산이 있던 괴산군 괴산면 제월리 주변 대부분의 땅이 그들 소유였다고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셋집을 전전하였다. 괴산의 대지주가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 셋집을 살았기 때문에,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였다는 설이 있다.

출옥 후 홍명희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근무하면서 사회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초에 그는 일시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교사를 지냈으며,

그 후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시대일보사장이 되었다가 폐간 된 후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오산학교는 3,1운동 당시 남강 이승훈이 1908년 설립한 민족교육의 명문으로

많은 독립의 인재들을 양성한 학교였다.

신간회 창립의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벽초는 1927년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함으로 작가의 길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신간회 사건으로 옥중에서 집필했던‘임꺽정’은 당시 우리민족의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읽게 되는 소설이 된다.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해 검거되었다가 1932년 1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58세 되던 8월15일 해방의 감격 속에서 시 ‘눈물 섞인 노래’를 짓는다.

괴산군의 치안유지회 회장에 추대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 부회장으로서 환영대회에서 환영사를 한다.

1947년 장남 홍기문의 ‘조선문법연구’에 서문을 쓰고 이듬해 ‘임꺽정’6권이 간행된다.

홍기문이 부친의 영향을 받아 조선어 연구에 착수하게 된 계기는 홍명희가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는 시점이다.

부친의 원고를 읽던 중 우연히 알퐁스도데의 ‘마지막수업’을 번역해 놓은원고를 발견하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48년(6.5~7.5)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에 참가하며 부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였다.

임꺽정은 1928년 11월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1939년 7월4일 연재를 중단한 미완의 작품이다.

조선중기의 봉건적 모순속에서 노비, 평민등 각 계층의 삶과 갈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면서,

천민백정의 아들 임꺽정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분노를 살아있게 서술한 임꺽정은

그 자신이 이렇게 어록에 쓰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에 ‘임꺽정’만은 사건, 인물, 묘사,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이극로 선생은‘ 임꺽정은 깨끗한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가 쏟아지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월탄 박종화 선생도 임꺽정에 관해 언급했다.

‘임꺽정에는 조선 사람이라면 잊어버릴 수 없는 구수한 조선냄새가 배어 있다’고 하였듯이,

조선 하층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민족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재현함으로써

민족 문학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소설이 되었다.

임꺽정은 명종조(明宗朝)에 당대 사회의 국기를 흔들 만큼 큰 사건이었던 “임꺽정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소설이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로부터 명종 때까지 50년간의 시대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연산군 때의 흥문관교리 이장곤의 신분하락과 복권의 과정을 다룬 (봉단편),

중종조에서 명종조까지의 사화(士禍)로 얼룩진 시대상과 사대부 계층의 생활상을 다룬 (피장편) (양반편)이다.

임꺽정을 비롯한 청석골 두령들이 청석골로 입산하는 과정을 다룬 (의형제편),

청석골패의 활동상황과 관군의 토포(討捕) 및 그에 따른 몰락의 과정을 묘사한 (화적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는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과 구별된다.

그러나 역사소설의 경우는 상황이 달라진다. 역사소설은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와 허구를

근본성질로 하는 문학이 서로 결합되는 독특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침략전쟁기로 들어서면서 우리의 언어와 문자, 이름과 성까지도 말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소설은 이 때 부터 쓰여 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는 러시아 소설가들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과 같은 작가의 글들을 탐독하였으며,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들의 소설로 읽곤 하였다.

또한 소년시절부터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 소설류를 탐독하였다,

역사서적 뿐 아니라 다독을 통한 역사인식의 바탕 하에서 임꺽정이 쓰여 진 것이다.

장면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고 극도로 치밀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이 땅의 진정한 민족문학의 시작을 알리게 하였다.

그는 또 학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니, 1922년부터 삼년간 ‘유교경전언택총’에 관여하여

조병건, 이승욱, 정봉시, 정만조, 심상순, 윤희구, 어윤적, 이해조, 여규정등과 분담하여 사서삼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유교전강연구에서 출간하였다.

거기에 기재한 이름은 홍 희(洪 憙)로 가운데 명(命) 자를 생략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으로 조선사 편찬위원으로 있으면서, 조선학술사를 집필하였다.

민족의 분단만 없었다면 이 땅에 벽초 홍명희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감히 필자는 단언한다.

그는 괴산이 낳은 민족의 큰 느티나무이며, 자신의 아버지 유언을 끝까지 지켜 행방 전까지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명이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끝내 일제에 타협하는 길을 가서는 치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면,

그는 해방의 기쁨을 ‘눈물섞인 노래’를 지어 읊조리면서,

1910년 한일합방 때 자결하신 부친 홍범식을 그리워했다.

독립만세

독립만세

천둥인 듯

산천이 다 울린다

지동인 듯

땅덩이가 흔들린다

이 것이 꿈인가?

생기라고 꿈만 같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 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국민의무 다하라고

분부하신 님의 말씀

홍명희 시 ‘ 눈물 섞인 노래’ 부분

‘국민의무 다하라고 분부하신 님’의 말씀이란 부친 홍범식의 유언이며 자신의 다짐이기도 하였기에,

이 시를 쓰며 떳떳하게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홍명희가 유명작가로서 평온한 삶을 마다하고 결행한 모든 일들을

이 순수한 시 한편으로 녹이고 받아들이고 싶다.

고향 괴산을 그리워하며 북한에서 1968년 3월5일 생을 마감한 벽초의 80평생의 삶을 내 어찌 감당하겠는가.

괴산은 필자의 고향이기도 하여 유년시절부터 홍명희선생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땅의 이념의모순속에서 그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얼마 전 필자는 그의 생가복원을 하고 있는 공사판을 거닐었다.

벽초 홍명희를 괴산에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가슴이 아렸다.

‘홍범식고택’으로 불리어 지게 될 이 집의 이름은 앞으로 벽초 홍명희 생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괴산읍내에 있는 음성방향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생가이다.

그런대 벽초 홍명희 선생 생가라는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의 이름은 벽초 홍명희 아버지 홍범식 선생의 고택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 집 앞에 일완 홍범식 선생 고택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읍내 다리를 건너면 산 밑에 큰 터를 잡고 있는 고래 등 같은 검은 기와집이 보인다.

약 1,500 평 정도 되는데, 서남향으로 지어진 생가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一’자형의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괴산군민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다.

생가 앞으로는 큰 시내가 흐르고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어진 괴산의 대표적인 명문가의 집이다.

이 집의 특징은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 살림집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최근에 복원하였다.

1730년(옹정 8년)경에 건축되었던 고가다.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집은 괴산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며, 홍범식 선생의 항일지사의 의미와

벽초 홍명희의 문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집이다.

이 땅이 통일되면 양쪽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이 ‘홍명희’다.

‘임꺽정’이란 소설은 그만큼 위대한 민족의 유산이 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선산 아래 이제는 번듯한 정원을 가진 사랑채 제월리에서

홍범식선생이 묻혀 있는 벽초의 선산을 오른다.

그의 증조부 홍우길 묘소가 지척에 보이고, 언덕길을 더 오르면 조부 홍승목의 묘소다.

괴산에 가면 벽초 선생이 뛰어 놀던 괴강 언저리와 만세운동시위를 하던 장터거리,

연설하였던 곳 이곳저곳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그 분이 낚시를 하며 명상을 하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제월대를 찾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괴산군의 용기였다.

그의 생가가 폐허화되어 다른 용도의 건물이 건립되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방자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괴산에서는 홍명희생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다만 홍범식고택 복원공사라는 이름으로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밑에서 부수상을 한 것을 이 지역의 정서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다.

'벽초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마을 괴산과 그의 선영을 한번 와 보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홍명희의 생애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원칙은 자신이 홍범식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그의 생에는 그 어떤 경우도 일제에 타협하거나 굴복할 수 없도록 결정된 삶이었다.

해방공간(1945~1948)에서 친일한 부역세력이 제거되기는 커녕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치세력 속에서 그들이 점차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는 정황을 보며,

홍명희는 고향을 등지고 평양을 선택하였다, 반민족자 특별법의 유명무실이 가져온

실망감으로 인하여 오히려 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들이 능멸 받는 상황에서

서울은 더 이상 벽초가 살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 사상이란 적어도 일제 해방기까지는 민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워 온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식민치하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는 사상 중의 하나였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한용운이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식민지 시기의

최고의 민족시인으로 인정하듯이, 벽초 역시 민족해방을 이끈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한국근대소설사의 최고 작가로 평가되었으면 한다.

한 그루 나무도 그 골짜기의 물과 바람을 자신의 몸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벽초는 괴산이 심은 큰 나무이지만 우리 민족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다가올 미래에 통일이 되면 벽초의 묘소가 다시 그의 부모님 산소로 돌아와

괴산이 명실상부한 문학의 고향이 되길 기원한다. 오늘도 그의 부친 홍범식의 묘소는

제월리 고택을 내려 다 보면서 앉아있다.

북한에 있는 그의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증손자인 홍석중은 북한의 유명한 소설가다.

그는 최근에 ‘황진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가계도는 조선후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족이란 족보의 한 단면도다.

벽초 홍명희의 삶과 문학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혼이 담겨 있다.

2. 친일문인

---서정주와 채만식의 삶과 문학을 중심으로

1) 서정주의 삶과 문학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사나들목>을 나와 22번국도로 접어들면 이곳이 선운사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부안면소재지를 지나게 되고, 용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서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고개가 나타나는데, 이고개가 유명한 ‘질마재’다.

물론 서정주 시인의 시 때문이고 직접 가서 보면 싱겁다.

멀리 줄포만이 보이고 왼쪽으로 서정주시문학관이 보인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었던 선운초등학교가 폐교 된 곳을 시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였다. 학교터를 그대로 문학관으로 개관하였기 때문에 부지면적이 2,862평이나 된다. 전시실, 세미나실, 전망대및 서재 재현실, 다용도실등으로 디자인 된 공간은 깔금하다.

전시동 콘크리트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는 건축물로서 자연적이며 친환경적인 것이 특징이다.

서정주의 고향마을 선운리에 콘크리트 6층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든 문학관은 사뭇 범상치 않게 서 있다. 서울 남현동 자택에 있던 미당의 유품이 2001년 11월3일 개관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한 작가의 유품이 다양하면서 많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 미당문학의 특징이다. 사용하던 장롱까지 옮겨다 놓았으니 말이다. 아예 살림집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이것은 그의 사후 1년 만에 문학관이 개관되었고 살아생전에 이미 서정주 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의 6층 전망대에 오르면 질마재 및 생가를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왼편에는 미당의 생가가 오롯이 누워 있으며, 오른편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묘소가 오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앉아 있다.

오랫동안 문학기행을 많이 다녔지만 작가의 생가와 인접해 문학관을 포함한 자신무덤이 존재하는 사람은 서정주 시인이 처음일 것이다.

서정주시인은 1915년 5월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동네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받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후 구속되었다. 고창고보에 편입학 한 후 이후 자퇴하여 계속적인 방황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문제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 칼막스와 레닌의 사상에 도취되어 가죽구두도 벗어버리고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직전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이후 톨스토이의 “공정한 물질의 분배가 행복을 주겠는가?”라는 선언에 감동을 받아 사상의 자유로움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번민과 방황을 통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같은 해 김달진 김동리 김광균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시작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1938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여 원색적이며 악마적인 시풍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다. 이런 관심의 일환으로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 지기도 했다. 해방직후 보수문단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자신의 일제하 친일문학행위를 포장하려고 하였으며, 70년대 말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한다.

생전에 1000여편의 시를 15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으며, 그의 유품은 모두 1만5천 여점에 이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5차례 추천되기도 했지만, 결국 2000년 세상을 떠난다.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군부 독재자 선출과 정에서 전두환 찬조연설, 대통령당선축하의 축시헌사, 전두환지지 발언등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속어와 질펀하고 흥미진진한 언어구사와 신화적인 담시를 썼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원색적인 관능미로 출발하였으며 오십대 이후에는 전통적인 미학탐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친일문학을 소개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발표한 서정주 시인의 친일 문학이다.

●시의 이야기- 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평론)

●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

●항공일에 (1943,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

●헌시(獻詩1943,시)

●보도행(1943,수필)

●무제(1944,시)

●오장 마쓰이 송가(1944,시)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수무 살 된 벗에게, 단편 소설인’최체부의 군속 지망‘ ,시<헌시>등은 우리의 청년들을 일제의 학병 지원을 유도하기 위한 징병의 정당성을 담은 작품이다. 이 외 대부분의 친일작품들은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일제를 대변하듯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1944년 12월 매일신보에 발표한 서정주의 대표적 친일시를 읽어보자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였다.

■송정 오장 송가 (오장 마쓰이 송가)

서정주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일장기 앞에서

서정주

이날은 대성전기념일도 축제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받은 깃대에 국기를 한번 꽂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땀까지 흘려가며 벽장 속에서 국기를 꺼내어

그 깃대에 매었다.

탄탄한 깃대에 비해서는 벌써 장만한지 해가 겹친 국기의

깃폭은 낡아 보였다.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뒷집에서 깃대를 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거기에 맞추어야 할 새로운 깃폭을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나는 깃대에 꽂힌 국기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 있었다.

1992년 <시와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변명에 불가하다고 판단하였지만 노인이 된 그가 어쩐지 가련해 보이기도 했었다. “일제가 100년 이내에는 결코 망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고백적인 글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민족의식의 결여와 역사철학의 빈곤을 드러낸 글이었다.

1980년 2월쯤이라 기억된다. 필자는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을 방문한 기억이 있다. 그 때 필자는 그의 시 ‘자화상’을 암송하고 다녔다.

어떤 문예지를 읽고 주소를 확인하여 인사를 하러 갔는데 마침 빈 집 이었다. 후에 다시 찾아 가 시집에 싸인을 받을 계획이었다.

아마도 문학청년 정도로 생각되었는지 “어느 대학을 다니는가? 문학을 전공하나?” 생각보다 친절했다. 더 이상 말을 잊기가 어려워 ‘질마재신화’라는 시집을 보여주면서 싸인을 부탁하였다. 그것이 전부다. 80년 광주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그가 친일작가로 알려지면서 큰 실망을 했다. 사람의 정서가 그토록 무섭게 변할 수 있음을 그 때 알았다. 이후 필자는 미당의 집 근처를 얼씬거리지 않았다.

자화상이라는 시도 암송하지 않았다. 그래도 늘 자화상의 첫 구절 ‘애비는 종이었다.’의 시작은 내게 어떤 비장함을 심어 주곤 했다.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 살구가 곡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숫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는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시인의 고향마을 질마재에서 멀지 않은 곳인 부안면 인촌리에, 호남 갑부중의 한명이었으며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인촌 김성수 고택이 있다. 이 집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한때 마름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 결코 김성수집안의 머슴은 아니었다.

2) 채만식의 삶과 문학을 찾아서

삽상한 바람이 불고 있는 금강하구언에서 바라본 군산은 아슴한 호기심으로 항구도시의 이미지를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채 얼려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군산의 당시 지형지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충남 서천에서 금강하구둑을 달리다 보면 “ 남쪽 언덕에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는 소설

?탁류?의 이 표현이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산이 몇 번 변할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강은 그렇게 휘돌아 돌아 왔지만 강물을

막고 있는 금강하구둑에 막혀 강물은 갈 길을 멈춘다.

천리를 달려온 강물은 바다와 합류하지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지만 겨울이면 철새들의 도래지가 되어 사람들 보다 새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장항에서 금강하구둑을 건너 군산시로 진입하는 초입에 위치한 ?채만식문학관?이 오른편에서 마중을 나와 있다. 채만식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하지만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1930년대 군산일대의 사회상을 빼어나게 묘사한 작품 ?탁류?를 쓴 작가로 기억하고 있다.

삼월바람이 아직은 차갑게 불고 있는 날, 나는 소설가 채만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경위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로 3시간 좀더 걸려 군산에 닿게 된 것이다.

그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간 내흥동에 위치만 ?채만식문학관?은 아담한 2층의 건물이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배롱나무들이 서서 반긴다.

군산시에서 관리하는 문학관은 채만식선생의 일대기를 ?군산과 채만식? ?삶과 고뇌? ?전시실? ?영상세미나실? ?작품세계?로 분류하여 아담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집필실을 입체 그래픽을 이용하여 실제감을 보여 주도록 하였는데 원고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채만식선생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채만식선생의 치열한 문학적 삶을 시대적상황과 연계하여 파노라마식으로 소개하고 있고 특히 전자음향자동장치를 이용한 설명은 문학관이 어떻게 만들어 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 사실감을 더해 준다.

문학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해안이 펼쳐진 길을 따라 차를 몰아 달린다. 바다 건너편에는

장황제련소 굴뚝이 옛 명성을 잃어버리고 홀로 서서 군산을 바라다보고 있다.

채만식문학비가 있는 월명공원을 찾아 나선다.

항구를 따라 해안가에 우뚝 솟아 길게 누워있는 월명공원입구에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오른다. 군산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는 공원에는 봄의 햇살을 받으며 유치원생들이 노란색교복을 입고 병아리처럼 계단을 오르고 있다. 강암 송성용선생이 소설 <탁류> 한 구절을 유려한 필치로 써내려간 비문을 읽는다. 문학비는 높고 외진 곳에 앉아서 금강이 마지막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문학비 난간에 앉아서 잠시 ‘탁류’의 주인공들 이름을 불러본다.

정주사,정초봉, 정계봉, 고태수, 장형보, 남승재, 박제호

가장 먼저 세파에 시달리는 고달픈 여인 정초봉, 미모로 인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 슬픈 이름을 불러본다. 탁류를 읽다가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연민의 정 때문 일 것이다.

?탁류?는 1937년 10월 13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로

일제식민지의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초봉이의 운명이 금강의 흐름을 서술한 것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초봉이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기구한 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백제에 관한 표현들은 망한 조선을 다시금 연상하는 것이리라.

초봉이의 일생과 정주사의 비정함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민족의 수난이라는 전체적인 문제로 부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작품은 어둡고 서늘하다.

이렇듯 일제하의 현실을 풍자적 기법으로 묘사한 채만식이 10편이 넘는 친일문학작품을 발표한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친일작품은 다음과 같다.

1940. 7 - 나의 '꽃과 병정' 「인문 평론」

1940. 11 - 대륙경륜의 장도 그 세계사적 의의 「매일신보」

1941. 1. -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 「매일신보」

1941. 1 - 문학과 전체주의「삼천리」

1941. 1 - 자유주의를 청소 「삼천리」

1941. 7 - 혈전(소설) 「신시대」

1941. 9 - 농촌에 이바지한 조합의 지대한 공헌 「반도 光」★

1942. 12 - 포로의 시사(示唆) 「경성일보」★

1943. 1 - 영예의 유가족 방문기 「매일신보」

1943. 1 - 지인태 대위 유가족 방문기 「신시대」

1943. 1 - 추모되는 지인태 대위의 자폭 「춘추」

1943. 3 - 농산물 출하(공출) 기타 「반도 광」

1943. 8 - 홍대하옵신 성은 「매일신보」

1944. 3~7 군신(軍神) 「반도 光」

1944. 6 - 경금속 공장의 하루 「신시대」

1944. 10 - 1945. 5. 15 여인전기(소설) 「매일신보」

월명공원은 군산시 중심에 위치한 군산시민들의 안식처이고 4월의 진달래 와 벚꽃,철쭉꽃이 만개하면 볼만하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일러 꽃구경은 하지 못하고 멀리 바다만 바라다본다.

군산은 남으로 만경강과 북으로는 금강이 서해로 유입되는 두 강의 하구 사이에 낀 바다를 마당으로 한 지리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이전에는 서해안 벽지에 지나지 않은 곳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확장의 각축전에서 내몰린 백제의 남하서천( 南下西遷)정책으로 수도가 금강중류의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옮겨 오면서 금강하구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격상되었다.

백제멸망으로 240년간 금강은 후백제(AD900년)의 출현과 더불어 중국의 오월(吳越)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고려 때도 군산은 조세와 공물의 집산지로 성황을 이루었고 조선 효종 때는 호남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시모노세끼조약을 맺은 후 군산을 개항시킨다. 개항 당시 150여 가구가 살던 마을 군산은 구릉을 제외한 낮은 곳은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다. 1899년 개항후 해방 때 까지 일제에 의한 가장 강력한 지배구조 하에 있던 울분의 도시가 되어야 했던 곳이다. 일제의 토지강탈과 그 곡물의 수탈항구로서의 오명(汚名)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산은 3,1만세운동과 항만노동자들의 파업을 통한 항일의 끈질긴 투쟁도 병행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인천에 항구로서 역할을 빼앗기고 그나마 6,25를 당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후 군사정부의 집권 하에서도 소외의 길을 걸어오다가 최근의 90년대부터 ‘서해안 시대’란 이름하에 다시 군산은 활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국가공단으로 이어진 해안가 도로변에는 아직도 게딱지같은 허름한 집들이 즐비하다. 아직 군산은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이곳저곳에는 궁색하고 어색한 일제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하긴 일제는 군산을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곡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곡물을 실어내던 곳으로 만들었다. 1919년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군산의 인구 13000명중에 일본인의 숫자가 6800명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차라리 그들이 장악한 도시였다.

서해안 시대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군산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서울에서 목포까지 완공된 이후 군산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월명공원의 채만식문학비를 답사하고 내려와 다시 그의 생가를 찾아 나선다.

다시 왔던 길을 더듬으며 해안도로를 따라 금강하구둑을 왼쪽으로 두고 달린다.

그의 고향 가는 길은 군산과 익산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야한다.

승용차로 20분쯤 들판과 몇 개의 고개를 넘어 달리다 보면 제법 번화한 동네가 반긴다. 임피사거리, 채만식선생의 고향마을이다. 파출소가 있고 상가가 도열한 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소읍(小邑) 모습 그대로다.

삼거리 상가에 들러 “소설가 채만식선생의 생가터가 어디입니까”

슈퍼의 주인여자는 “길 건너 <맛보리국밥집>에 알아보세요”라고 말한다.

맛보리국밥집 주인인 최승만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도로변에 있는 문학비를 보면서 그는 내게 말했다. “채만식선생의 생가를 보기위해서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시지만 볼 것이라고는 생가 표지석과 이 가게 안에 있는 우물이 전부입니다.”

한국문인협회 군산지회가 세운 생가표지석에는 ?小說家 蔡萬植先生生家터? 10호정도의 오석(烏石)에 예서체로 써있고 뒷면에는 ‘ 선생께서는 1902년 6월 17일 이 곳 에서 태어나시어 ‘탁류, 레이디메이디 人生, 太平天下,等 百餘篇의 珠玉같은 作品을 우리 文壇에 남기셨습니다.’ 라고 각인되어 있다. 표지석 앞에 차량이 주차하면 생가(生家)표지석은 그나마 꼼짝없이 갇히게 되어 있는 장소에 앉아 있다.

맛보리국밥집 바로 옆 명화마을이라는 비디오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둡고 칙칙한 헛간이 나온다. 그곳에 채만식선생의 유년시절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우물이 있다.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는 오토바이가 우물에 기대어 방치되어 있고 불결하여 발을옮기기가 어려울 정도다.

최승만씨는 “해도 너무 하는 것 이지요” “정치자금 몇 백억을 차떼기로 주고받는 나라에서 소설가의 마지막 남아 있는 흔적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의 말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생가를 답사하기 위해서 멀리에서 온 사람들에게 심히 부끄럽습니다” “생가에 남아 있는 채만식선생의 유물은 고작해야 이 우물 하나인데 전기불이라도 켜두고 자세히 보고 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채만식선생의 생가를 답사하려고 멀리에서 달려온 사람들의 실망은 당연하다. 그 곳은 생가가 아니고 단지 생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작고(作故) 문인들 중에서 자신의 집을 지니고 살면서 생가를 보존하였던 작가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모진 가난에 집 없이 유리(遊離) 하다가 말년에는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 예술가들의 삶이었다. 생가 터에서 북쪽으로 언덕 같은 산 아래 채만식선생의 모교인 임피초등학교가 있다. 몇 년 후면 개교 100주년이 된다고 하는 이 학교 정문입구에는 4백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는데, 채만식선생도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학교에 다녔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느티나무를 쓰다듬는다.

이 학교 김대우 교감선생님은 매우 친절하게 학교를 안내해 주셨다.

“우리 학교는 역사가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교입니다. 특히 4회 졸업생인 채만식선생님이 우리학교 졸업생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낌니다.” 그는 보물이라도 꺼내듯이 조심하면서 졸업대장을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다. ‘蔡萬植 1914년 졸업’이라는 희미한 펜글씨체가 90년 전 졸업한 채만식선생을 현실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교감선생님은 아마도 채만식 선생이 친일문학을 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김대우교감은 내게 ‘우리고장 임피’ 라는 자료도 건네주면서 학교의 이곳저곳을 안내하였지만 어느 곳에서도 채만식의 체취가 있는 곳은 남아 있지 않았다. 동상은 고사하고 기념비 하나 없었지만 임피초등학교는 향교의 옆자리에 위치하며 옛빛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묘소는 임피초등학교에서 걸어서 15분 걸리는 취산리(계남리)의 야산에 위치해 있었는데 최승만씨와 함께 했다.

“ 묘소 올라가는 길을 조성하다가 중단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비석에는 ‘作家白?平康蔡公萬植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그의 비석은 봉근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한 개씩 서 있다. 뒤쪽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의 푸르름이 위안일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묘소 바로 아래 채만식 선생이 몇 년간 거쳐했다는 집이 쓰러져 가고 있었고, 폐허가 된 빈집에는 무심한 고양이가 주인이 되어 집을 지키고 있다.

채만식선생이 임종직전에 차남에게 했다는 유언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 외투 ,동복, 두벌의 춘추복은 사후에나마 생색이 있도록 팔아서 장비와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라.”

빈집은 그의 죽음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가난의 처참한 모습을 하며 무너지고 있다.

소설가 채만식은 1902년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농의 9남매중 5남으로 태어났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의 한학을 배운 후에 서울로 유학하여 1922년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부속제일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공부 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입사하여 재직 하던 중 1924년 단편<세길로>가 ‘조선문단’ 에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장한 이후 창작생활을 병행하며

그의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1936년 기자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금광업을 하던 그의 형 준식(俊植)을 찾아 갔지만 일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의 집은 부농에서 차츰 가난하게 되어 갔고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민족정서에 어긋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채만식의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오점이 되고 있다.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일제의 제안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슬프게 한다. 지식인에게 가난과 정치, 사상이란 것이 변화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란 것을 다시 채만식에게도 느껴야 하는 것이 먼 길을 달려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이 되리라.

1945년 낙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부농이 아닌 가난뱅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인근의 이리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그는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폐결핵으로 병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글을 써야만 했다. 자신이 거쳐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탁류>의 성공으로 인세(人稅)가 생기자 1947년 기와집을 마련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어렵게 마련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친하게 지내던 시인 장영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가난이 가져온 가련한 작가의 애절한 편지를 읽는다.

“장군, 인편에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것 일세”

1950년 6월11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택(幽宅) 뒤에 있는 소나무 숲을 거닐며 가난이 비록 예술가들에게 형극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 것이며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주오”

가난으로 인한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채만식선생의 고향 마을로 다시 돌아와 고샅을 걷는다. 그의 친일 행위는 그가 잘 살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굶주리며 죽어가더라도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면 그는 민족작가로 영원히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안타까운 것은 결국 친일작가라는 오명이다.

기울어져 가고 있는 오후의 봄햇살이 임피향교 가는 골목에 있는 작은 연못에 와서 부딪히며 반사된다. 눈이 부시다.

임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김대우 교감선생은 “임피는 17세기와 21세기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마을입니다.” 그의 말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2004년3월 김경식 답사글 중에서

■ 결론

일제하 저항문인과 친일문인으로 분류하는 일은 슬픈 일이다.

또한 저항문학(민족문학)과 친일문학을 가리는 작업은 쉽지 않다. 36년의 식민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부분 친일의 길을 선택한다. 당시 문인들이 친일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사에는 이를 남겨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일제하에 친일문학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문인은 춘원 이광수였다. 1939년 2월 동양지광에 ‘가끔씩 부른 노래’ 발표한 시를 시작으로 친일문학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광수는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국민총력), '폐하의 성업에' (1943.2 춘추),'모든 것을 바치리' (1945.1.18?매일신보) 등 모두 103편의 시, 소설, 논설을 해방직전 까지 발표한다.

시 ‘불놀이’로 유명한 주요한 시인은 43편을 발표하여 친일문학작품 2위를 기록한다. 최재서 26편, 김용제 25편, 김동환 23편, 김종한 22편, 이석훈 19편, 박영희 18편, 김기진 17편, 노천명 14편, 백철 14편, 최정희 14편, 정인택 13편, 채만식 13편, 모윤숙 12편, 유치진 12편, 서정주 11편 등의 순이었다.

친일문인들의 작품들은 중,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및 문학 교과서에 작품이 게재되었다. 국민작가로 인정받던 이광수, 주요한, 서정주 시인, 노천명이 친일문인이었다는 것에 오히려 국민들은 실망했다. 일제 치하의 참혹한 현실을 풍자적 기법으로 묘사했다는 채만식 등이 10편이 넘는 친일문학작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가치관을 혼동시키기에 충분한 사실들이다.

그러나 1943년과 45년 사이에 항일 시인들은 우리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43년 이상화, 한용운 이육사가 44년에 세상을 떠난다. 윤동주는 45년 1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일제에 능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그날이오면’ 이라는 가슴 울리는 시를 썼던 심훈은 36년 35세로 세상을 떠난다. 또한 김광섭 시인은 43년 옥살이를 시작한다.

친일문인은 저항문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중에서 저항 문인으로 이육사와 벽초 홍명희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보았다. 친일문인으로 서정주와 채만식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 보았다. 이들의 삶과 문학을 통해 민족사의 비극의 그늘이 이제는 양지에서 거론되기를 기원한다.

김소월 시에서 본 저항의식

초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사람이여 !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나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가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사람이여 !

초혼- 全文 -

김소월 시인이 초혼가를 쓸 무렵 그의 가족중 죽은 사람도 애인도 없었다. 그의 애인 채란이라는 기생을 그토록 강렬하게 사랑했다거나 죽었거나 이벌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 시는 아마도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 하고 있는 절규의 시가 될 것이다.

김소월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
봄은 왓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설업다,이를 두고 봄이냐
치어나, 꽃잎에도 눈물뿐 흐르며
새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이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보느냐, 벌겋게 솟구는 봉숫불이,
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료
그리워라 내 집은
하늘 밖에 있나니

애닯다 긁어 쥐어뜯어서
다시금 젊어졌다고
다만 이 희긋희긋한 머리칼뿐
인저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김소월의 봄-2연과 3연-

물마름

김소월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지는 가지에서 재갈이던 때.
온종일 흐르던 물 그도 곤(困)하여
놀지는 골짜기에 목이 메던 때.

그 누가 알았으랴 한쪽 구름도
걸려서 흐느끼는 외로운 영(嶺)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디드냐 남이장군(南怡將軍)이
말 먹여 물 찌었던 푸른 강(江)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뚝을 넘치는
천백리(千百里) 두만강(豆滿江)이 예서 백십리(百十里).

무산(茂山)의 큰 고개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예로부터 의(義)를 위하여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년래(三百年來)에
참아 받지 다 못할 한(恨)과 모욕(侮辱)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人力)의 다함에서 쓰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된 삼천리(三千里)에 북을 울리며
정의(正義)의 기(旗)를 들던 그 사람이여.

그 누가 기억(記憶)하랴 다복동(多福洞)에서
피물든 옷을 입고 외치던 일을
정주성(定州城) 하룻밤의 지는 달빛에
애그친 그 가슴이 숫기 된 줄을.

물위의 뜬 마름에 아침 이슬을
불붙는 산(山)마루에 피었던 꽃을
지금에 우러르며 나는 우노라
이루며 못 이룸에 박(薄)한 이름을.

검은 가시의 서리 맞은 긴 덩굴들은
사닥나무의 구부러진 가지위에
회색인 密蜂의 구멍에도 벋어 말라서
압히는 가을은 더 쓰리게 왔어라.

서러라 印눌린 우리의 가슴아!
겉으로는 사랑의 꿈이 발아래
아! 나의 아름다운 붉은 물가의
새로운 밀물만 스쳐가며 밀려와라

김소월의 시 '가을'- 全文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곳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반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루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시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 날이 오면

심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소슴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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