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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혼을 가지고 있는가?
끊임없이 피로 흠뻑 젖은 채, 전체 지구는 사는 만물이—끝없이, 그치지 않고—제물로 바쳐지는 광대한 제단에 불과하다 . . . .
-- 콩트 조셉 드 메스트르 (Soirées I. ii, 35)
서구의 국가들이 자주 그리고 현명하지 않게 비웃는 동양의 “낡아빠진 종교적 미신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누구도 동물의 생명에 대한 동양 사람들의 위대한 존중처럼 무시되지 않고 실제적으로 경멸받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가 없다. 우리 유럽인들은 날것의 뼈로부터 피와 골수를 빨아먹었던 동굴에 거주하던 우리 선조들과 우리 사이에 불과 몇 천 년 밖에 안 되는 문명화된 야만인들의 국가들이다. 이렇게 빈번하고 종종 부당한 전쟁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을 너무 값싸게 여기는 사람들은 동물 피조물의 죽음의 고통과 매일매일 선량하고 무해한 수백 만의 생명들의 희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호랑이 스테이크나 악어 갈비를 먹을 만큼 미식가적이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양고기와 황금 깃털의 꿩고기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크루프(Krupp) (무기 제조 재벌) 대포와 과학적인 생체 해부 시대에 있는 것이다. 강인한 유럽인들이 염소를 죽이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유순한 힌두인들을 비웃거나, 코끼리부터 각다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도 및 자이나교도와 공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크게 경이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육식이 우리 서구 국가들에서 필수적인 것—"폭군의 변명!”—으로 되었다면; “그들의 신(God)이 그들의 배(belly)”인 사람들이 숭배하고 성 바울이 비난하였듯이, 문명화된 세계의 모든 마을, 자치구와 도시에서 많은 희생양들이 신에게 바쳐진 사원들에서 매일 도살되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철의 시대”에 피할 수 없다면, 누가 스포츠로 똑 같은 변명을 강조할 수 있을까? 낚시, 총사냥 그리고 사냥, 문명 생활의 모든 “오락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 오컬트 철학의 관점에서 확실히 가장 불쾌한 것이고, 비의 가르침의 직접적인 결과인 힌두교와 불교의 이런 종교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장 사악한 것이다. 유럽인에게 아무리 터무니없는 생각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들인 두 종교의 옹호자들이 동물계—네발 짐승부터 가장 작은 곤충까지—를 그들의 “어린 형제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어떤 좋은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타당한 검토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아무리 과장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소위 문명 세계의 무수히 많은 도살장에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장면들 혹은 심지어 “사냥 시즌” 동안에 매일 행해지는 것들을 몸서리치지 않고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에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떠오르는 태양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사방에서 수많은 학살이 준비되고 있을 때, 첫 번째 햇살이 뒤척이는 자연을 아직 깨우지도 않았다. 모든 기독교 국가들에서 하루 종일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연 전체에 두루 고통의 긴 찬송가처럼 울리는 가련한 통곡 같은 희생양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이교도의 몰록은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고대의 스파르타—그들의 엄격한 시민들은 인간의 가슴의 섬세한 느낌에 덜 민감하지 않았다—에서 한 소년이 오락으로 어떤 동물을 괴롭혔다고 유죄로 판결 받았을 때 그 성질이 너무 철저하게 악랄해서 그가 살아가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 사람처럼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기독교 미덕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문명화된 유럽에서, 오늘날까지 힘(might)이 권리(right)와 동의어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단지 스포츠를 위해서 무수히 많은 새들과 동물들을 총으로 사냥하는 전적으로 쓸모 없고 잔인한 실습이 프로테스탄트 영국보다 어디에서도 더 열광적으로 자행되고 있지 않는다. 그곳에서 크리스트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주 앞에 강력한 사냥꾼,” 님로드 시대만큼 인간의 가슴을 부드럽게 하지 못했다. 기독교 윤리가 “이교도”의 윤리처럼 모순적인 삼단논법으로 편의적으로 바뀐다. “단 한 마리의 참새도 아버지의 의지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스포츠를 위해서 죽이는 그가 예를 들어 백 마리 참새를 죽인다면 아버지의 의지를 백 번이나 하는 것이라고 한 스포츠맨이 어느 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무자비한 숙명으로 굳어져버린 가여운 운명이 가련한 동물 피조물들의 운명이다. 기독교 가르침은 동물의 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에서 인간의 이성적인 혼은 태어나서 동물의 비이성적인 혼의 살해자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카인과 아벨의 전설이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의 문명 시대의 다른 수치인 “생체해부실”이라고 불린 저 과학적인 도살장을 보라. 파리에 있는 그곳 한군데를 들어가서, 폴 베르나 이런 다른 사람들—“그 연구소의 유식한 도살자들”이라고 정당하게 불려지는—이 한 무시무시한 것을 보라. 이 “집행자들”의 작업 방식을 철저하게 연구한 유명한 프랑스 작가이자 목격자의 힘있는 묘사를 번역만 하겠다:
“생체해부는 하나의 전공으로—그가 말한다—우리의 도살자-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절약하는 고문이 하루 종일, 주간 내내 그리고 심지어 한달 내내 똑같은 희생자의 근육과 섬유질에 가해진다. 고문에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고, 가련한 대중 앞에서 분석을 수행하며, 매일 아침 열명의 수습들이 그 일을 나누며, 한 명은 눈에 작업하고, 다른 사람은 다리에, 세 번째는 두뇌에, 네 번째는 골수에 작업한다; 그리고 경험 미숙한 손들이 낮 동안의 작업이 끝난 후에 밤까지 지속되며, 그들이 조각해 내라고 명령받은 살아 있는 시체 전체를 발가벗기고, 그 희생자에 생명과 민감성의 숨결이 남아 있다면 다음날 아침 일찍 그것에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저녁에 저장소에 그것을 신중해서 보관해 둔다. 그라몽 법의 신탁자들이 이런 혐오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지만, 파리가 런던과 글라스고우 보다 더 냉혹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
그러나 이 신사들은 그들이 추구한 웅대한 목표에 대하여 자랑하고, 그들이 발견한 웅대한 비밀에 대해서도 자랑한다. “공포와 거짓들!”—같은 작가가 외친다. “비밀들의 문제에서—몇몇 기능들과 뇌의 움직임의 몇 가지 국부화를 제외하고—우리는 권리로 그들에게 속하는 한 가지 비밀만을 알고 있다: 즉, 고문의 비밀을 영구화되었다는 것으로, 게다가 자가소모(autophagy)—상호 저작(mutual manducation)—의 끔찍한 자연 법칙, 전쟁의 공포, 스포츠라는 명랑한 대학살 그리고 도살자의 칼 아래에서 동물의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과학자들에게 영광이! 그들은 이전의 모든 종류의 고문을 능가하였고, 어떤 가능한 논쟁 없이, 인위적인 비통과 절망의 왕들로 이제 영원히 남아 있게 되었다.”[2]
생체해부에서처럼 동물들을 도살하고 죽이고 심지어 법적으로 고문하는 통상적인 변명은 성서 속에 있는 한 두 개 구절이고, 그것의 잘못 소화된 의미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소위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훼손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권리들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인 드 미르빌도 그런 구절들, 즉 “다른 많은 것들처럼, 대홍수 이후 신으로부터 얻어냈으며 우리의 힘의 타락에 토대를 둔 성서 속의 용인들”이라고 외친다. 아무리 이렇다 하더라도, 그 구절들은 성서 속에 있는 다른 구절들과 많이 서로 모순된다. 육식하는 사람, 스포츠맨 그리고 심지어 해부자—해부자 사이에 만약 특별한 창조와 성서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는 일반적으로 창세기에 있는 그 구절로 정당성을 인용한다. 즉, 신은 이중의(dual) 아담을 준다—"물고기, 가금, 가축 그리고 지구 상에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 (창세기 1장 28절); 그래서 기독교인이 그것을 이해하듯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동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힘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훨씬 더 철학적인 브라만과 불교도가 대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진화는 존재의 가장 낮은 등급 속에서 미래의 인류를 형성하기 위해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동물을 죽임으로써, 심지어 곤충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자연 속에서 최종의 목표인 인간(MAN)을 향해서 가는 어떤 실체의 진보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오컬트 철학의 학생은 “아멘”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그 실체의 진화를 지체시킬 뿐만 아니라 다음에 따라오는 인간의 진화와 앞으로 오게 될 더 완전한 인종의 진화를 잡는 것이라고 첨언한다.
반대자들 중에 누가 옳고, 누가 더 논리적인가? 그 대답은 그 의문을 결정하기 위해서 선택한 중재자의 개인적인 믿음에 주로 달려있다. 만약 그가 소위 말하는 “특별한 창조”을 믿는다면, “왜 살인이 신과 자연에 반하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로 간주되고, 수 백만의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죽이는 것이 단순한 스포츠라고 여겨질 수 있을까?” 라는 평범한 질문에 그는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 자신의 이미지로 창조되었고 그의 창조자와 그의 탄생지인 하늘(천국)을 우러러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은 그들의 탄생지인 땅을 향해서 아래로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가축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창세기 1:24) 왜냐하면 “인간은 불멸의 혼을 가졌고, 말 못하는 짐승은 불멸이 없으며, 심지어 사후에 짧은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성서가 이 미묘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권위라면, 인간의 탄생지가 기어 다니는 것들의 탄생지처럼 하늘이라는 어떤 사소한 증거도 성서 속에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것에 대답할 수 있다—상당히 반대이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만약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고 “그들”을 축복했다면, (창세기 1장 v. 27-28) 마찬가지로 “거대한 고래들”을 창조하였고 “그들을 축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21, 22절) 더구나 “주 신(Lord God)이 땅의 먼지에서 인간을 만들었다.” (2장 7절): 그리고 “먼지(dust)”가 확실히 분쇄된 흙이 아닌가? 왕이자 설교가인 솔로몬이 가장 결정적인 권위자이고 성서의 성자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전도서(3장)에서 이 주제에 대하여 모든 논쟁을 해결하는 일련의 진리들을 말한다. “인간의 아들들이 . . . 그들 자신들이 짐승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3장 18절) . . . “인간의 아들들에게 닥치는 것이 짐승들에게도 닥친다 . . .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다”—(3장 19절). “모두가 한 곳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먼지로 만들어지고 먼지로 다시 돌아간다 (20절) . . . “인간의 영(spirit)이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spirit)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가는지 누가 아는가? (21절) 진실로 “누가 아는가?” 하여튼 그것은 과학도 아니고 “신성한 학교”도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이 성경 혹은 베다의 권위에 근거해서 채식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공처가의 우리 조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중의 아담—2장의 공처가의 우리 조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창세기 1장의 “남성과 여성(male and female)”—에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력”를 주었다는 것이 아주 사실이라면, “주 신(Lord God)”이 아담이나 다른 존재가 동물 창조물을 걸신 들린 듯 먹으라고 혹은 스포츠를 위해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씨를 맺는 어떤 나무의 과일”과 식물계를 가리키면서, 신이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너희 (인간)에게 그것이 먹을 거리가 될 것이다.” (I, 29.)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날카로워서 몇 세기 동안 그들은 결코 고기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옥타비오”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마이뉴티우스 펠릭스에게 쓴다: “동물 피가 섞인 음식을 맛보는 것을 거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살인을 목격하는 것도, 심지어 살인을 말하는 것을 듣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동물 권리들”을 방어하고 성서의 권위를 토대로 그런 권리들을 무시하는 오류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채식주의를 설교하지 않는다. 더구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서 생각하려는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진화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의 길이 언제나 어려움으로 포장된 것을 볼 것이다; 그래서 육체 인간을 동물들의 알려진 모범으로 단순하게 여기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영적인 자아(Ego)를 동물의 혼과 신성 사이의 중간 원리로서 간주하는 것이 사실과 논리에서 훨씬 더 일관적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서 인용한 구절들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겉보기에 터무니없는 것들과 모순들 전체 덩어리를 조화시키는 비의 철학의 관점에서 성서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에 대한 열쇠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 헛된 일이다; —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 전체는 인간에 대한 자비로 가득하고 동물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레위기 24장의 원본 헤브루 사본은 그것으로 가득하다. 성서에 번역된 17절과 18절 대신에: “짐승을 죽이는 자는 짐승을 짐승으로 갚을 것이다”: 원본에는 “혼을 혼으로(soul for soul)”가 아니라 “생명을 생명으로(life for life)”로 되어 있다.[3] 그리고 만약 그 법칙의 엄격함이 스파르타에서처럼 짐승의 혼을 인간의 혼으로 죽이는 정도까지는 아닐 지라도, 심지어 죽인 혼을 살아 있는 혼으로 대체할 지라도, 가해지는 부가적인 처벌이 상당히 무거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과 23장 2절이하)에서 안식일에 휴식이 가축과 모든 다른 동물에게도 확장되었다. “일곱 번째 날이 안식일이다 . . .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의 가축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안식년은 . . . “일곱 번째 해에는 땅이 쉬어 그대로 있게 하라 . . . 그래서 너희의 소와 나귀가 쉴 수 있게 하라”—이 명령은 고대 헤브루에 의하면 심지어 짐승 창조물도 신을 경배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에는 인간과 동등하게 놓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 질문이 “혼(soul)”, “네페쉬(nephesh)”가 “영(spirit), “루아흐(ruach)”와 완전히 구분된다는 오해에 달려있다. 그러나 “신께서 인간의 코 속으로 생명의 숨결(breath of life)을 불어넣었고 인간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동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 네페쉬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혼도 또한 네페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계발에 의해서 혼(soul)이 영(spirit)으로 되며, 둘 다 보편 혼(UNIVERSAL SOUL) 혹은 영(spirit)이 그 바탕으로 있는 똑 같은 하나의 사다리의 하위와 상위 계단들이다.
이 진술이 많은 선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 개와 고양이를 아무리 많이 사랑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이 다니는 교회의 가르침에 너무 많이 헌신해 있어서 그런 이단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개나 개구리의 비이성적인 혼이 우리 자신들의 혼처럼 신성하고 불멸하는가?”—그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외친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글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선한 기독교인의 권위자이자 다름 아닌 설교자들의 왕인 성 바울이다. 근대 과학이나 비의 과학의 주장을 너무 분개해서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의 성인과 사도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기꺼이 귀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분들 말의 진정한 해석을 신지학자도 반대자도 아닌 선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즉 또 다른 성인인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제시할 것이다. 그는 바울 서신들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주석을 달았으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양쪽 성직자들이 가장 숭배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들은 실험 과학이 그들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들은 또한 성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동물의 생명을 간절하게 탄원하는 편지를 쓴 것보다 힌두인은 누구나 더 간절하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층 더 불쾌하게 놀랄 것이다. 힌두인들은 혼의 이주(transmigration)의 가르침 때문에 그래서 동물과 인간에게 생명 활기를 불어넣는 그 요소 혹은 원리들이 같다는 것 때문에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한 자비를 주장한다. 성 바울은 더 깊게 들어간다: 그는 동물도 어떤 선한 기독교인처럼 “부패의 구속으로부터 구원”을 똑 같이 희망하면서, 그리고 기대 속에서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대한 사도이자 철학자의 이 정밀한 표현을 나중에 다시 인용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를 설명할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들 같은 너무 많은 해석가들이 성 바울의 진정한 의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그것의 내적인 의미에 반대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신학자들의 공정성에 반대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들을 상세 부분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명제를 끝까지 지지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초기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코르넬리우수 아 라삐데처럼 가련한 동물에게 공식 사과(amende honorable)를 할 것이다.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자연이 짐승 창조물에게 할당한 역할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그가 말한다: “모든 피조물들의 목표는 인간에 대한 봉사이다. 그래서 그(그들 주인)와 함께 그들은 그들의 갱생(renovation)을 기다리고 있다”.[4] 인간을 “섬기는 것(serving)”은 분명히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무용지물로 총에 맞거나 오용되는 것을 의미할 리가 없다; 반면에 “갱생”이라는 말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크리스트의 재림 후에 체들의 갱생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동물을 제외한 인간으로 제한시킨다. 씨크릿 독트린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주관적 객관적 존재 단계에서 그리고 동물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그 위로 장구한 일련의 진화라는 변형 속에서 형태들이 연속적으로 갱생과 완성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분개하면서 거부할 것이다. 성서에서 그들에게 설명한 것이 이렇지 않고 그것을 의미할 수 없다고 들을 것이다. 그것을 주장해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기쁘게 부르는 그것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이 많이 있고 그 결과로 슬픈 일이 많았다. “가나안은 저주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창세기 9장 25절)라는 문장이 가련한 노예들, 흑인들에게 수 세기의 고통과 부당한 비애를 만들었다. 반 노예 문제에서 가장 격렬한 적들이 바로 미국의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손에 성경을 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모든 국가의 자연적인 쇠퇴의 원인이 되어 왔다; 심지어 로마도 무너졌다. 왜냐하면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이 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가이어(Geyer)가 타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가장 지성적이고 최고의 기독교인들이 모든 시대에 성서의 많은 잘못된 해석들을 지독하게 주입식으로 불어넣었으며, 심지어 가장 웅대한 시인들 중에 한 사람도 인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방어하면서 가련한 동물에게는 그런 부분을 주지 않았다.
신은 우리에게 주었다
단지 짐승, 물고기, 가금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 그 권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의 부여로;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인간이
그가 주인으로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자격을
유보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롭게 한다
밀턴이 말한다.
그러나 살인처럼 오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결론들이 예단하는 질문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것으로 지지될 때마다 부조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동양의 동물애호주의(philozoism) 반대자들이 이렇게 전제와 결론 사이의 부조화, 상정한 사실과 추론 사이의 부조화로 그들의 비평가들에게 가장 능력 있는 주장을 뒤집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제공해 준다.
이 가장 심각하고 흥미 있는 주제에 한줄기 빛을 비추는 것이 현재 에세이의 목적이다. 로마 가톨릭 작가들은 그들의 성인들이 만든 많은 기적 같은 동물의 부활들이 진짜라는 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많은 토론 주제로 만들었다. “동물들 속에 있는 혼(soul in animals)”은 보쉬에(Bossuet) 의견에 의하면 “모든 철학적 질문들 중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동물들은 혼이 없지 않더라도 그들 속에 영구적인 혹은 불멸의 혼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 원리가 체의 죽음과 함께 죽는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대면해서, 신학자들과 교회 성직자들이 이 진술을 동물들이 종종 기적적으로 부활할 수도 있고 부활하기도 했다는 다른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 아는 것이 흥미롭다.
비록 미약한 시도—더 상세한 시도는 여러 권을 필요로 할 것이다—이지만, 신학자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해석의 불일치를 보여줌으로써, 이 에세이는 동물 생명을 빼앗는, 특히 스포츠나 해부에서 엄청난 범죄성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하여튼 그 목적은 인간 혹은 짐승은 그 생명-원리가 육체로부터 영원히 떠난 후에도 부활할 수 있다는 개념이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일지라도, 그런 부활들이—만약 그것들이 사실이라면—인간의 부활처럼 말 못하는 짐승의 경우에서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짐승 둘 다 우리가 “혼(soul)”이라고 느슨하게 부르는 그것을 자연에 의해서 부여받았거나, 아니면 어느 것도 그렇게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II
얼마나 기괴한 괴물인가 인간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혼돈이고, 모순의 대상인가! 만물의 공언하는 심판자이면서, 지구의 미약한 벌레! 진리의 거대한 보관소이자 수호자이면서, 그럼에도 불확실성의 단순한 덩어리! 우주의 영광이자 스캔들!
-- 파스칼
우리는 이제 교회가 죽음 동물의 부활과 동물의 혼이 동물의 죽음과 같이 죽는다는 가정 사이의 불일치를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조사해보고, 그리고 동물들과 관련된 어떤 기적들을 주목하기 위해서, 짐승 속에 있는 혼의 성질에 대한 기독교 교회의 관점들이 무엇인지 볼 것이다. 가련한 동물 세계를 향한 잔인하고 무자비한 관행들로 너무 가득 차게 된 그 이기적인 가르침에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기 전에, 독자들은 그 질문에 참고로 성 바울의 말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관하여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 교부들의 망설임을 알아야 한다.
가장 포기할 줄 모르는 두 명의 라틴 교회 옹호자—드 무쏘와 드 미르빌 글에서 여기에서 주목한 몇 가지 기적들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의 카르마가 신실하지만 그들 자신의 매우 잘못된 관점에 대항해서 사용되는 무기를 어떻게 제공하게 되었는지 주목하면 재미있을 것이다.[5]
특별한 창조와 인격신(personal god)을 믿는 모든 사람들처럼 “창조론자들” 혹은 기독교도들과 진화론자들 혹은 힌두교도, 불교도, 모든 자유사상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과학자들 사이에 거대한 미래의 전쟁이 있어야 하기에, 그들 각자의 입장에 대한 요약이 바람직하다.
1. 기독교 세계는 동물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상정한다: (가) 앞에서 인용된 성서 구절들과 후기 스콜라 철학의 번역들에 대하여; (나) 신성한 혼 혹은 인간 혼 같은 것이 동물 속에는 없다고 추정하는 것. 인간은 사후에도 계속 살아 있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다.
2. 동양의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추론을 위대한 철학 체계에 근거를 두면서 살아 있는 존재 어느 것이건—이전 페이지에서 제시된 이유들 때문에—죽이는 것은 자연의 작업과 진보에 반하는 죄라고 주장한다.
3. 서구의 진화론자들은 최근의 과학의 발견들로 무장한 채 기독교도들이나 이방인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과학자는 진화를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점에 대하여 동의한다: 즉, 저 물리적, 정밀 연구가 인간은 그가 기르는 개 이상의 불멸의 신성한 혼을 가지고 있다는 추정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시아의 진화론자들이 동물을 향해서 그들의 과학적 종교적인 견해들과 일관되게 행동하는 반면에, 기독교나 물질주의 과학 학파는 그들 이론 각각을 실질적으로 적용할 때 논리적이지 않다. 전자(교회)는 모든 살아 있는 사물은 인간의 아기처럼 개별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현명하고 친절한 신의 섭리 하에서 조심스럽게 보살핌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 열등한 창조물이 일시적인 혼을 가지고 있다고만 인정한다. 후자(물질과학)는 인간과 동물을 지금까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자연의 힘들에 의한 혼이 없는 생물로 간주하면서 실제적으로 그 둘 사이에 심연을 만든다. 극도의 냉정함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물을 해부하는 사람이자 가장 확고부동한 물질주의자인 과학자는 동료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는—죽을 만큼 고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생각에 몸서리 칠 것이다.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위대한 물질주의자들 중에서 지구에서의 동물의 진정한 윤리적 자격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권리들을 정의할 때 일관되고 논리적인 사람을 찾아보지 못한다.
이제 이런 비난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예들을 들어야 한다. 진지하고 교양을 갖춘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인용된 다양한 권위자들의 관점들이 독자에게 익숙하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을 시작으로 그들이 도달한 결론의 요약된 형태를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교회는 위대한 성인들이 수행한 기적들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성취한 다양한 천재들 중에서 우리는 우리가 다루는 주제, 즉 죽은 동물의 기적적인 부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그런 사람들만을 선택할 것이다. 이제 혼이 활기를 불어넣는 육체와는 독립적인 불멸의 혼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어떤 신성한 기적으로 혼이 겉보기에 영원히 버린 그 육체 속으로 다시 불러서 들어올 수 있다고 쉽게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동물의 경우에, 독립적인 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르치고, 혼이 육체와 함께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런 똑같은 가능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거의 2백년 이상, 심지어 성 토마스 이후, 교회는 동물의 혼이 그 유기체와 함께 죽는다고 권위적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면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나도록 불러들이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 시점에 스콜라 철학이 들어와서 조정할 수 없는 것을 조정하게 된다.
그것은 동물들의 부활의 기적이 수없이 많고 “예수 크리스트의 부활처럼” 진짜라고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6] 볼란디스트가 그런 예들을 제공한다. 17세기 성인 전기작가인 브리그니 신부는 성 레미(Remi)가 소생시킨 능에(새 종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파랑새’ 이야기들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면 내 자신이 거위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답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점을 반박하면, 그러면 그는 또한 스페인의 성 이시도르(St. Isidore)가 스승의 말을 소생시켰다는 진술을 그의 삶에서 지워야만 한다; 똘렌티노의 성 니콜라스의 전기에서 그가 자고새를 먹는 대신에 되살렸다고 한다; 성 프란시스의 전기에서 그가 굽고 있던 활활 타는 오븐에서 양을 찾아서 소생시켰다; 그리고 그는 또한 삶은 물고기를 소생시켜서 양념 속에서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회의론자는 10만 가지 이상이 되는 목격담이 거짓이거나 사기라고 비난해야 할 것이다.”
브리그니 신부보다 훨씬 높은 권위자인 성 베네딕트 14세도 위의 증거들을 확인하고 단언한다. 더구나 성 실베스트러스, 프랑스와, 크라쿠프의 세베린 및 다른 많은 소생의 사례들의 목격자로서 그 이름들이 볼란디스트에서 언급되었다. (그를 인용한 벤투라 추기경이 말한다) “단지 그는 첨언하길, 부활이라는 이름을 받기 위해서는 죽은 피조물의 물질 형태를 동일하게(identical) 그리고 수적으로(numerical) 재생해야 한다[7]; 그리고 성 토마스 가르침에 의하면, 그 짐승의 그 형태 (혹은 혼)가 육체의 죽음과 함께 항상 절멸하기에, 그런 모든 경우에 신은 기적의 목적을 위해서 부활된 동물에게 적합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부활된 짐승이 죽음 이전에 있었던 것과 완전하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non idem omnino esse)“[8]
이제 이것이 마법의 마야들 중에 하나처럼 끔찍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절대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다음 사항은 명확하다: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을 불어넣은 혼이라고 불린 그 원리가 육체의 죽음 후에 죽거나 흩어진다—교황과 추기경이 말하듯이—"일종의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는(informal) 혼”이 신의 기적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다; 더구나, 그 혼은 “독립적이고, 천상의 영원히 지속하는 실체”인 인간의 혼과는 구분되는 혼이다.
성인이 만든 “기적”으로 불리는 그런 절차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대 이외에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새로운 육체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혼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그 성인 뒤에 있는 신이기 때문에, 토마스 가르침의 전체가 반대를 받을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합리적으로 말하듯이: “동물의 혼이 그 육체와 (비물질성에서) 구분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영적인 원리로 인정하는 것을 거의 피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어떤 독립적인 원리라고 믿는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살아 있는 동물을 단순히 어떤 자동장치(automaton), “잘 감겨진 태엽장치”로 여겼다는 것을 독자에게 환기시킬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 이론을 채택하는 사람은 근대 물질주의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하다. 왜냐하면 그 자동장치가 사랑, 감사 등등을 느낄 수 있고, 부인할 수 없게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그런 속성들은 물질주의가 가르치듯이 “물질의 속성(properties of matter)”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동물이 하나의 “자동장치”라면, 왜 인간은 아닐까? 해부학, 생리학 등등의 정밀과학은 두 개의 육체 사이의 가장 작은 차이점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의 영이 동물의 영 이상으로 “위로 올라가는지” 누가 솔로몬에게 정당하게 묻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데카르트도 다른 사람처럼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무엇을 말하는가? 짐승에게 혼(anima)을 허락하고, 그것을 비물질적(immaterial)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는 동시에 영적(spiritual)이라는 특질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그럴 경우에 그것은 인간의 혼만을 위해서 예비된 특별한 작용과 미덕 그리고 지성(intelligence)을 암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신은 두 가지 구분되는 질료(substances), 형체를 가진 것(mundanam)과 영적인 것(spiritualem)을 창조했다”고 결정되었고, 형체를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것이기에, 성 토마스는 어떤 성인이 수행했을 때만 속임수라고 부르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일종의 타협을 해야만 했다. 그가 말한다: “짐승의 혼은 영도 체도 아니다; 그것은 중간 성질이다.”[9]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진술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성 토마스가 “모든 혼들—심지어 식물의 혼들도—은 그들 체들의 실체적 형상(substantial form)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식물에게 적용된다면, 왜 동물에게는 그렇지 않을까? 그것은 확실히 “영”도 순수한 물질도 아닌, 성 토마스가 “중간 성질”이라고 부르는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올바른 길로 들어서 왜 그것이 불멸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한다는 것을 부정할까? 그 모순이 너무 명백해서 드 미르빌이 “여기 우리가 라테란 공의회에서 선포한 두 가지 질료가 아니라 세 가지 질료의 실재 속에 있다”고 절망 속에서 외친다.” 그리고 계속해서 “천사 학사(Angelic Doctor)”를 감히 반박한다.
[신과 자아의 지식에 대한 소론(Traité de la Connaissance de Dieu et de soi même)]에서 위대한 보쉬에(Bossuet)는 데카르트 체계와 성 토마스 체계를 분석하고 비교한다. 논리 문제에서 그가 데카르트를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완전하게 받아들인 성 토마스 가르침보다 데카르트 “발명”—자동장치—이 “어려움을 벗어나는 데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벤투라 신부는 보쉬에가 “그런 비참하고 유치한 오류”를 받아들이는 것에 분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 토마스는 동물들이 주인에게 충실한 애정과 감각과 같은 영적인 특질을 가진 혼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는 그들이 지성과 사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말한다: “‘나는 데카르트 철학의 이름 하에 교회에 반대하는 거대한 전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예견한다’고 보쉬에가 말했기 때문에 그가 더 비난받아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그가 맞다. 왜냐하면 짐승의 두뇌의 “지각하는 물질(sentient matter)”에서 자연스럽게 로크의 사고하는 물질(thinking matter)이 나오고, 이것으로부터 현 세기의 모든 물질주의 학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실패할 때, 그것은 결점들과 분명한 모순들로 가득 찬 성 토마스 가르침을 지지해서 그렇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가 가르치듯이, 만약 동물의 혼이 형태에 활기를 불어넣고(informal), 무형의(immaterial) 원리라면, 그러면 물리적인 유기체와 독립적이기에, 인간의 경우처럼 “동물과 같이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존속하고 살아 남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것이 인간의 혼과 다른 것인가? 그리고 어떤 주제이든 성 토마스의 권위를 일단 받아들인다면 다른 부분에서 스스로 모순을 보이지만 그것은 영원하다. “인간의 혼은 불멸하고 동물의 혼은 사라진다”고 그가 말한다(Summa, 5권, 164페이지)—이것은 같은 책 2권에서 “다시 출현해서 무(nothingness)로 되는 어떤 존재들이 있을까?”라고 질문한 후에, 스스로 대답한다: -- “없다. 왜냐하면 전도서에서 (iii,14)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신(GOD)이 행하는 일은 무엇이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신에게 변함이 없다 (야고보서 1, 17).” 성 토마스가 계속 말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자연 질서 속에도, 기적의 방법으로도, 다시 출현해서 무(nothingness)가 되는 (절멸되는) 어떤 피조물도 없다; 피조물 속에는 절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신성한 선(goodness)을 최고의 찬란함으로 보여주는 것은 피조물의 영원한 보존이기 때문이다.”[10]
그의 번역자인 드루(Drioux) 신부가 이 문장에 대하여 언급하고 주석에서 확인하였다. 그가 말하길, “아니다. 아무것도 절멸되지 않는다; 그것이 근대 과학에서 일종의 공리로 된 어떤 원리이다.”
만약 그렇다면, 과학과 신학이 인정한, 자연 속에서 동물의 혼의 경우에서만, 불변하는 이 규칙에 왜 예외가 있어야 할까? 심지어 그것이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모든 공정한 사고자라면 매우 강하게 이의를 제기할 가정이다.
하지만 스콜라 철학에서 자연 과학으로 가서, 동물이 지성을 가진 혼, 그래서 독립적인 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자연과학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보자.
“생각하고, 이해하며, 행동하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은 천상의 어떤 것 그리고 신성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영원하다”라고 키케로(Cicero)가 거의 2천년 전에 썼다. 우리는 그 결론—성 패트릭(St. Patrick)이 행한 부활의 기적을[11] 확고하게 믿은, “형이상학의 왕”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결론--을 반박하는 헉슬리 씨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말한 기적들 같은 대단한 것을 교회가 충실한 지지자들에게 제시하고 강요할 때, 신학자들은 최고 권위자들이 스스로 모순된 가르침에 대하여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만 한다.
그래서 동물은 진보와 불멸로부터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동물은 하나의 자동장치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중세 스콜라주의에 동의해서 동물은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은 오직 본능만 가지고 있고, 그것은 물질주의자들이 동의하고 교회가 부인한 비자발적 충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프레드릭과 조지 퀴비에는 동물들 속에 있는 지성과 본능에 대하여 상세하게 토론하였다.[12] 과학 아카데미의 박식한 총무인 플루랑스가 그 주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모아서 편집하였다. 파리에 있는 파리 식물원의 자연사 박물관과 동물 부서에서30년 동안 이사였던 프레드릭 퀴비에가 그 주제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데카르트의 실수 아니 일반적인 실수는 지성과 본능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충분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뷔퐁 자신도 그런 누락을 했고, 그것 때문에 동물 철학에 있는 모든 것이 모순으로 되었다. 동물 속에 있는 우리 자신 보다 우월한 느낌과 실제 존재하는 의식을 인정하면서, 그는 동시에 생각, 회고 그리고 기억과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뷔퐁, “동물의 성질에 대한 대화”, VII, 57페이지) 그러나 그가 거의 거기서 멈출 수 없기에, 짐승도 일종에 활동적이고 광범위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우리 기억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기억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위 문헌, 77페이지) 그리고 동물이 어떤 지성을 가졌다는 것을 거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물이 “그의 주인을 살피고, 정보를 얻고, 주인의 의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위의 문헌, X권, 개의 역사, 2페이지)
더 중대한 일련의 모순되는 진술을 위대한 과학자로부터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명한 퀴비에가 이렇게 말한 것이 맞다: “뷔퐁의 새로운 메커니즘은 데카르트의 자동장치보다는 훨씬 덜 지성적이다.”[13]
비평가가 말했듯이, 본능과 지성 사이의 경계선을 밝혀내야 한다. 벌들이 벌집을 만들거나, 강 속에서 비버가 댐을 세우는 것은 모두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변하지 않는 본능의 행위이자 결과이다. 반면에 지성의 행동들은 본능이 아닌 이성이 활동하는, 동물이 분명히 생각한 행위들 속에서 찾아진다. 예를 들면 짐승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면 완전성과 계발을 진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아기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어린 동물은 아이 이상으로 그 두 가지를 보여준다.
진실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알듯이, 토론자들 모두가 다 안다. 만약 어느 물질주의자이든 그것을 인정하길 피한다면, 그것은 자만으로 그런 것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혼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는 동물도 자기자신처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무한히 작은 정도라 하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교회 사람,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박물학자, 근대 형이상학자는 인간과 동물 모두 다 계발이나 완성도에서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본질과 이름에서는 같은 혼과 기능들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공언하는 것을 꺼린다. 본능과 지성이 서로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는 두 가지 적, 그 성질상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기능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두 가지 혼 혹은 두 가지 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혼 속에 두 가지 힘(potency)이 있고, 두뇌 속에서 각각의 위치를 자리잡고 있으며, 그 각각의 위치가 그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그 끔찍한 생체해부를 하는 동안 우연히 고문을 가하는 그 기관의 일부 혹은 그 기관에 따라서—일시적으로 그것들을 고립시켜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이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촉발시킨 인간의 자만(pride)은 무엇인가:
물어보아라, 누구의 목적을 위해서 천체들이 빛나는지;
지구를 누가 사용하기 위해서? 자만이 대답하길, 나의 목적이다.
나를 위해서 친절한 자연이 다정한 힘을 일깨우고,
모든 식물에 젖을 먹이고, 모든 꽃들이 퍼지도록 한다.
*****
나를 위해서 그 광산에서 수 천 가지 보물들을 가져온다;
나를 위해서 건강이 수 천 개 샘에서 솟아오른다;
나를 뜨게 하기 위해서 바다가 출렁거리고, 나를 밝히기 위해서 태양이 뜨고;
지구는 나의 발을 놓는 받침, 하늘은 나를 덮는 덮개!
그리고 뷔퐁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모순되는 말을 하게 만든 것도 똑같은 무의식적 자만이다. 그 차이가 “동물에게는 회고(reflection)가 없고, 그가 느낀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고 그가 말한다. 뷔퐁은 어떻게 알까? 동물이 종종 신중하게 생각하고, 비교하며 선택했다는 것을 청중에게 말한 후에, “동물은 동물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14] 그러나 그 누가 염소 혹은 개가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동물은 자신이 생각하고, 말할 수 없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더 예민하게 생각하고 알 수도 있다. 뷔퐁이나 다른 사람은 어떻게 아는가? 그러나 박물학자들의 정확한 관찰로 동물이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는 나타난다; 일단 이것이 정리되면, 같은 것이 동물에게도 원인이 된다는 것을 보기 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성에 대한 정의—인간의 불멸의 혼의 특권—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철학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초기의 기독교는 그런 끔찍한 가르침—최고의 지성인 같은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트와 그분의 제자들로부터 떨어지게 된 진정한 원인—을 설파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줄 수 있다.
III
오, 철학이여, 그대 삶의 안내자, 그리고 미덕의 발견자!
-- 키케로
철학은 얌전한 직업이다. 그것은 모두 실재이고 평이한 거래이다; 나는 바닥에 자만만 있는 근엄함과 가식을 혐오한다.
-- 플리니
인간—가장 잔인한 동물이며 동시에 가장 성인 같은 존재—의 운명은 신학 가르침에 따르면 불멸하다; 무수히 많은 동물 왕국의 미래 운명은 무엇인가? 다양한 로마 카톨릭 작가들—벤추라 추기경, 마이스트레 백작 등등—이 “동물 혼은 어떤 힘(animal soul is a Force)”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동물의 혼이 지구에 의해서(by the earth) 만들어졌다는 것이 잘 확립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드 미르빌이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살아 움직이는 혼들 (네페쉬 혹은 생명 원리)는 지구에서 온다; 그러나 그들의 체와 우리 자신의 체를 구성하는 먼지에서 오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힘 혹은 잠재성에서도 온다는 것을 이해하자; 예를 들면, 모든 힘들이 그렇듯이, 바다의 힘과 공기의 힘 등등 무형의(immaterial) 힘에서 오고, 모든 것들은 다른 곳에서 말했던 엘리멘터리 영역들이다(Elementary Principalities).”[15]
마퀴 드 미르빌이 그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엘리멘트(Element)”는 각각 보이지 않는 영들이 채우고 있고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domain)이라는 것이다. 서구 카발리스트들과 장미십자회원들은 그것들을 실프, 운다인, 살라만더 그리고 그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드 미르빌 같은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들에 헤브르 이름을 부여하고 신의 허락 하에 사탄의 통치 하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악마들(Demons) 중에 하나로 분류한다.
그는 또한 동물 혼은 육체와 함께 파괴된다고 가르친 성 토마스의 결정에 반발한다. 그가 말하길, “그것은 어떤 힘으로, 동물 혼(animal soul)이라고 부르는 지상에서 가장 실질적인(substantial) 힘을 절멸시키라고 우리는 요청받는다.” 그것은 벤추라 신부에 따르면,[16] “인간 혼 다음으로 가장 존경받을 만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무형의 힘이라고 부르고 이제는 “지상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이라고 이름 붙여준다.[17]
그런데 이 힘은 무엇인가? 조지 퀴비에와 플루랑스 학술 위원이 그 비밀을 말해준다.
앞의 작가가 쓴다: “여러 체들의 힘 혹은 형태 (여기서 형태는 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가 물질이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그 본질 속에서 파괴되지 않은 채) 꾸준히 변하기 때문이며, 반면에 형태는 영원히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플루랑스는 이렇게 관찰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 속에서, 형태가 물질보다 더 지속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체의 존재(BEING)를 구성하는 그것, 그것의 독자성(identity)이자 동일성(sameness)이 그 형태이기 때문이다.”[18]
드 미르빌이 “그것은 공평한(magisterial) 원리이고, 우리 불멸의 철학적 약속이기 때문에,”[19] 혼—인간과 동물—이라는 용어가 오해소지가 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의 대생명(ONE LIF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리 이것이 그렇다 하더라도, 세속의 철학과 종교 철학은 두 가지 “혼”이 인간과 동물 속에서 동일하다는 이 진술을 확증하고 있다. 보쉬에가 아낀 철학자인 라이프니츠도 어느 정도 “동물의 부활(Animal Resurrection)”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죽음이란 “그냥 개성을 일시적으로 감싸는 것(temporary enveloping of the personality)”이기에, 그는 그것을 수면 속에서 생각들을 보존하는 것 혹은 애벌레 속에 있는 나비에 비유한다. “그에게 부활은[20] 자연 속에 있는 일반적인 법칙이고, 마법사가 작업하는 방식이나 주위 환경 그리고 조숙함에 의해서만 마법사에 의해서 수행될 때, 그것은 웅대한 기적이 된다”고 드 미르빌이 말한다. 이런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의심할 여지없이 진정한 오컬티스트이다.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닌 5분 안에 꽃을 피게 하고 식물이 자라게 만드는 것, 식물, 동물 혹은 인간을 강제적으로 발아시키거나 발전시키는 것은 오컬티스트들의 기록 속에 보존된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오직 기적처럼 보인다; 입문자에게 알려진 오컬트 법칙 하에서 유도된 조건들에 의해서 천 배는 강화되고 자연적이고 생산적인 힘들이 빠르게 처리된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자연의 힘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것들이 맹목적이건 혹은 인간의 오컬트 힘에 종속된 작은 지성체에 붙어 있건, 혼란스러운 원소들에서 그 사물의 계발을 불러내는 데 집단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런데 왜 어떤 것은 신성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은 악마 같은 속임수 혹은 단순한 사기라고 부르는가?
여전히 진정한 철학자로서 라이프니츠는 심지어 사자의 부활에 관한 위험한 질문에서도 동물계 전체를 거대한 통합 속에 포함시키고 “나는 동물의 혼이 불멸하며 . . . 우리 자신의 불멸의 성질을 증명하기에 더 적합한 것이 없다”고[21]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프니츠를 지지하면서 미들톤 목사인 딘이 1748년에 이 주제에 대한 두 권의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성전들은 다양한 구절 속에서 짐승들이 미래 생을 살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 가르침을 교회의 몇몇 교부들이 지지해왔다. 동물들이 혼을 가지고 있다고 이성이 우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동물들이 미래 상태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신이 동물의 혼을 절멸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의 체계는 어디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그것은 어떤 확고한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고[22] 그가 말한다.
지난 세기 많은 과학자들은 그것이 매우 가능하다고—특히 그들 중에 한 명인 박식한 신학자인 제네바의 찰스 보넷—선언하는 딘의 가설을 옹호하였다. 이제 이 신학자는 “새로운 탄생(New Birth)” 혹은 팔링게네시아(Palingenesia)라고 부른 엄청 이상한 책의 저자였다.[23] 모두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씨앗 때문에 이 새로운 탄생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고, 시스템은 “법칙들의 집합”이기 때문에,[24] 라이프니츠처럼 동물들은 어떤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쓰길, “동물들은 감탄할 만한 책들로, 창조자가 그 속에 가장 독립적인 지성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모아두었다. 해부학자는 동물을 존경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하고, 만약 최소한의 윤리적인 사람을 특징짓는 섬세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페이지들을 넘기는 동안, 그가 석판을 다루고 있다거나 조약돌들을 부수고 있다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살아있고 느끼는 모든 것은 그의 자비와 연민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만약 그가 동물들의 고통과 피로 익숙해져야 한다면 자신의 윤리적인 느낌을 타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 진리는 너무 명백해서 정부는 그것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 . . 자동기계라는 가설에 대하여, 그것이 무해할 정도로 선한 느낌과 좋은 생각을 매우 강력하게 침해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사회에 매우 위험한 것이고, 나는 그것을 철학적 이단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결코 채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운명에 대하여, 만약 내 가설이 맞다면, 신의 섭리가 그들을 위하여 미래 상태 속에서 가장 위대한 보상을 예비해두고 있다.[25] . . . 나에게 그들의 부활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혼 혹은 형태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혼은 단순한 질료이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도 없고 부패할 수도 없으며 절멸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자동기계 속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그런 추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동물의 자동기계로부터 곧 인간의 자동기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 .
근대 생물학자들은 “자동기계-인간(automaton-man)” 이론에 도달했지만, 그들 자신의 장치들과 결론은 그들 제자들에게 남겨졌다. 현재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최종적이자 절대적인 증거이다. 즉, 성서나 가장 철학적인 번역가들—아무리 그들이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 통찰력이 부족했다 하더라도—이 구약성서 속에서 인간 속에 있는 혼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듯이,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바탕으로 모든 동물에 불멸의 혼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욥기와 전도서 (iii. 17 이하. 22)에 있는 어떤 구절들을 읽어 보기만 하면 된다. 문제의 진실은 거기에서 이 둘의 미래 상태에 대하여 단 하나의 단어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속에서는 동물 속에 있는 불멸의 혼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를 보게 되는 반면, 신약 속에서는 인간의 혼과 같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힌두인의 동물애호주의를 조롱하고, 마음대로 즐겁게 동물을 죽이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주장하고, 동물에게는 불멸의 혼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 최종적이자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
모든 짐승 피조물의 불멸성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Part 1 끝부분에서 성 바오르가 언급되었다. 운 좋게도 이 진술은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과 자유사상가들 그룹에 의한 성서에 대한 신성모독적이자 이단적인 해석”으로써 업신여길 수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아니다. 부디 사도 바오르의 심오하고 현명한 말들 하나 하나가 동물들과 관련된 구절들로써 명확하게 이해되길 바란다. 왜냐하면 보겠지만, 물질 과학이 가르친 물질의 불멸성(indestructibility); 교회가 철저하게 거부한 영원한 진화의 법칙; 하나의 대생명(ONE LIFE)의 편재성 혹은 하나의 대원소(ONE ELEMENT)의 통일성과 비의 철학이 가르치듯이 자연 전체에 두루 퍼져 있는 그 실재성과 성 바오르가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말한 (로마서 viii. 18-23) 비밀스러운 의미가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주거나 명백하게 하나이자 똑 같은 것이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으로 분명하게 가득 채워진 저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다음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이 진실로 무엇이겠는가? 나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오컬티즘 관점에서 주석을 더해서 그 구절을 여기에 옮겨 놓는다.
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로마서 viii. 16, 17) 전제를 놓는다. 즉, “영(spirit) 자체 (파람아트마:Paramatma)가 우리의 영(spirit) (아트만:atman)과 더불어 우리가 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그리고 “자식이면, 그러면 계승자(heirs)이다”—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혹은 신성한 본질의 불멸성과 영원성의 계승자. 그리고 나서 그가 말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드러날 영광과 비교될 만큼 가치가 없다.” (viii. 18)
“영광(glory)”은 어떤 “새로운 예루살렘”이 아니라, 성 요한의 카발라적 요한계시록에 있는 미래에 대한 상징적인 제시라고 우리는 주장한다—데바찬 기간과 계속되는 인종들 속에서의 일련의 탄생들로, 매번 새로운 화신 후에 우리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점점 더 고양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 부활”에서 우리 모두가 진실로 “신의 자식”이자 “아들들”이 될 때, 그것을 사람들이 열반 상태 혹은 파라브라흠 상태라고 부르건, 이 모두가 하나이자 똑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
"피조물이 진실로 고대하는 것은 신의 아들들의 현현을 기다리는 것이다." (viii. 19)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권위에 근거해서 더 깊이 보여주겠지만, 여기서 피조물이 의미하는 것은 동물이다. 그런데 전체 피조물이 그 현현을 기다리고 있는 “신의 아들들(sons of God)”은 누구인가? 그들이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천사들(seven angels)” 혹은 “사탄과 같이 온” (욥기 참조) “신의 아들들”인가? 그들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언급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계에서 모두 말하는 “신의 아들들”인가?[26] 세계 위대한 종교 성전에서 그런 “현현”이 모든 만반타라[27] 혹은 세계 주기가 끝날 무렵에 약속되었지만,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비의적 해석을 제외하고, 그 어느 것도 베다에 나온 것만큼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만반타라가 끝날 무렵에 세계의 파괴—오직 그것 중에 하나만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져 있다—인 프랄라야가 온다고 말한다. 그때는 “다음 라운드의 인간의 파도(tide-wave)”를 위해서 나머지 혹은 시쉬타(Sishtas), 즉, 모든 씨앗들과 일곱 리쉬(Rishis) 그리고 한 명의 전사가 남겨질 것이다.[28] 그러나 우리가 관심 갖는 주요 질문은 현재 기독교 이론 혹은 힌두 이론이 더 정확한가가 아니다; 브라만들이—보이는 모든 만물의 주기적이자 일시적인 완전한 파괴로부터, 자신들이 미래 인류로 현현하는 리쉬들 혹은 “신의 아들들(sons of God)”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의 씨앗들이 남겨진다는 것을 가르칠 때—말하는 것이나 성 바오르가 설교하는 것이나 거의 정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 다 “기다리는” 모든 피조물이 “신의 아들들의 현현”으로 기뻐할 때 더 완전한 상태 속에서의 갱생(renovation)과 새로운 탄생의 기대 속에 있는 모든 동물 생명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 바오르가 설명한다:
“피조물 자체(ipsa)도 또한 부패(corruption)의 구속에서 해방될 것이다” 라는 것은 씨앗 혹은 파괴될 수 없는 동물 혼(animal soul)이 기초 상태 혹은 동물 상태에 있는 동안에 데바찬(Devachan)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더 높은 형태 속으로 들어가서, 인간과 함께 계속 한층 더 고귀한 상태들과 형태들 속으로 진보하면서, “신의 자식의 영광스러운 자유 속에서” (viii. 21)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끝낼 것이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자유”에는 모든 피조물들의 카르마적인 진보를 통해서 혹은 진화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반정도의 지각(sentient) 있는 식물에서 진화한 바보 같은 짐승이 서서히 인간, 영, 신(God)으로 변형된다—이하 무한하게! 왜냐하면 성 바오르가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입문자들이다) 전체 창조가—불가타 성서에서는 피조물이라고 한다—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산고를 치르는 것을 안다.” (viii. 22)[29]
이것은 인간과 동물이 목적지를 향한 그들의 진화 상의 노력과 카르마 법칙에 따라서 고통받는 것이 지상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until now)”는 다섯 번째 인종까지를 의미한다. 그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하면, 기독교의 위대한 입문자가 설명한다:
“그들 (동물들) 뿐만 아니라 영의 첫 번째 과실인(first-fruits of the Spirit) 우리 자신들도 입양을 기다리면서, 즉, 우리 체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우리 자신 속에서 신음한다.” (viii. 23) 그렇다. 동물 속에서는 훨씬 덜 계발된 우리의 다섯 번째 원리(마나스)의 완성 때문에, 파라브라흠 빛(Parabrahmic light)인 일곱 번째 원리 혹은 아트마(Atma) 혹은 “영의 첫 번째 과실들(first-fruits of the Spirit)”을 가진 것이 우리,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어떤 보상으로서 그들의 카르마는 우리 카르마보다 훨씬 무겁지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언젠가 온전하게 진화한 인간에게 디얀초한 형태를 제공하는 바로 그 완성에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비의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건, 중세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건, 그 어떤 것도 위대한 사도의 말씀만큼 더 명확한—심지어 입문하지 않은 세속의 비평가에게 조차도—것이 있을 수 없다. “부패의 구속에서(from the bondage of corruption)” 혹은 일련의 일시적인 형태들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희망 혹은 영적 실체의 생존이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의 “귀감(paragon)”이 되는 인간이 동료 존재들에게 조차도 불공평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 데, 그가 기르는 가축 및 가금류와 그가 기대하는 것을 공유한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길 바랄 수 없다. 유명한 성서 주석가인 코넬리우스 아 라피데가 이 세계의 하위 피조물에게 “creatura”라는 단어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식적이고 주도 면밀한 의도를 가지고 전임자를 비난하고 지적한 첫 번째 사람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 오리겐 그리고 성 치릴로—히파티아 속에서 인간 동물을 보는 것을 거부하고, 그녀를 야생 동물처럼 다룬 사람—가 위에서 인용된 “creatura”라는 단어를 사도가 단순히 천사들에게 적용하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게 확증을 호소한 코넬리우스가 말하듯이,
“이 의견은 너무 왜곡되고 과격하다; 그것은 천사들은 이미 부패의 구속에서 자유롭다는 사실 때문에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다.”
성 오거스틴의 제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 바오르가 말한 “피조물들”은 “모든 시대의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이라는 이상한 가설을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코넬리우스는 이전 형제-성인에 반대했듯이 냉정하게 신망 있는 교부를 반박한다. 그가 말한다:
“왜냐하면 인용된 구절에서 사도가 말한 피조물들은 분명하게 인간과 구분되는 피조물들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다가올 죽음으로부터 해방이다.”[30]
그러나 심지어 용감한 코넬리우스도 결국에는 전반적인 반대에 놀라서 피조물들이라는 용어로 성 바오르가 의미했던 것은—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힐라리우스가 주장했듯이—엘리멘트(elements) (!!), 예를 들면, 태양, 달, 별, 지구 등등이라고 결정한다.
신성한 추론자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는 불행하게, 그리고 동물들에게는 운 좋게—이것들이 논쟁으로 혜택을 받는다면—그것들은 그들보다 한층 더 높은 권위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한때 그의 비서인 프로클로스 주교의 증언에 의해서 로마 카톨릭에서 최고의 신망을 가지고 있는 이미 언급했던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이다. 사실은—우리 시대에 이런 신성모독적인 용어를 성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방인들에게 그 사도의 “매개체”였다. 성 바오르의 서신에 대한 주석에서 성 요하네스는 그 사도 자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 바오르의 구술을 받아서 그의 주석을 썼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 8장에 대한 주석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이주(emigration)(죽음)가 지체되는 것에 항상 괴로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듯이, 만약 이성(reason)—‘anima’가 아닌 ‘mente,’ 즉 “혼(soul)”—과 말(speech)을 못하는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기대한다면,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더 부끄러워해야 한다.”[31]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미지의 나라들로 “이주(emigration)”하려는 이런 욕망에서 가장 부끄럽게 실패한다. 만약 사람들이 비의 철학의 관점에서 모든 나라들의 성전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다면,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하여, 죽으려고 작정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무관심해지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카르마를 쌓으면서 다음 생을 조용히 준비하면서 우리가 지상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이롭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질상 궤변가이다. 그리고 심지어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의견—동물들 속에 있는 불멸의 혼이 있다는 의문을 끝낸 혹은 최소한 모든 기독교인 정신 속에서 당연히 그렇게 하도록 한 사람—을 읽은 후에도, 저 가련하고 말 못하는 짐승들이 이런 가르침으로 많은 혜택을 보지 못할까 안타깝다. 진실로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비난받는 섬세한 궤변가가 동물 속에 있는 혼의 성질이 무엇이건 가련한 짐승을 죽임으로써 영원한 영광 속으로 “그것의 이주(emigration)가 지체되는 괴로움”을 끝내주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고 그 자신이 칭찬할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영박물관 전체가 육류 식단에 반대하는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문명 국가들이 도살장을 멈추고, 그들이 소고기 스테이크나 크리스마스 오리고기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이 초라한 글들로 인해서 몇몇 독자들이 성 바오르의 고귀한 말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그래서 생체 해부라는 모든 공포스러운 것으로 그들 생각을 심각하게 돌린다면, 그러면 본인은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도 우리처럼 영원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이 세계가 납득하게 될 때—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확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가련한 짐승들에게 매일매일 가해지는 생체 해부와 다른 영구적인 고문들이 사회 전반에서 위협과 비난의 분출을 불러일으킨 후에 모든 정부가 그런 야만적이고 부끄러운 실습들을 멈추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H.P. 블라바츠키
“신지학자(The Theosophist),” 1886년 1월, 2월 그리고 3월.
[1] “부활과 기적에 대하여”, 드 미르빌.
[2] “부활과 기적에 대하여”, 드 미르빌.
[3] 불가타(Vulgata)에 있는 같은 구절의 해석과 루터와 드 베테(De Wette)에 있는 구절의 해석 사이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4] 아포칼립스 주석, v장. 137.
[5] 드 미르빌이 바로 이 특별한 부분에서 교회의 오류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그가 감히 할 수 있는 한, 동물의 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6] 시복(De Beatificatione), 등, by 교황 베네딕트 14세.
[7] 스콜라 철학에서 “형태(form)”라는 단어는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무형의 원리에 적용한다.
[8] 시복(De Beatificatione, 등, I, IV, c. Xl, Art. 6.
[9] 벤투라 추기경, [기독교 철학], 11권, 386페이지. 드 미르빌, [동물들의 부활].
[10] 신학대전(Summa Theologiae)—드루 판 8권.
[11] 성 패트릭은 “지구 상에서 가장 사탄화된 나라—마법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무지한 아일랜드”—를 “수년 전에 죽은 60명을” 부활시킴으로써 “성인들의 섬(Island of Saints)”으로 기독교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봉독(Lectio) I. ii, 로마 성무일도서, 1520) 솔즈베리 대성당에 보존된 그 성인의 유명한 고백이라고 간직된 사본에서(Descript. Hibern. I. II, C. 1), 성 패트릭은 자필의 편지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이 야만 민족의 마술 관행에 대항해서, 우리 사도들 중에 가장 위대한 분에게도 주지 않은, 기적의 재능을 나에게, 가장 큰 죄인이자 사람들 중에 마지막인 나에게 주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다른 것들 (동물들과 파충류들을 부활시키는 것) 중에서 많은 해 전에 재로 변한 죽은 육체를 되살려야 한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런 신동 앞에서, 라자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지 않은 사건처럼 보인다.
[12] 최근에는 로마네스 박사와 부틀러 박사가 그 주제에 대하여 커다란 빛을 주었다.
[13] 보편적 전기(Biographie Universelle), 예술(Art), 뷔퐁의 삶에 대한 퀴비에.
[14] 동물의 성질에 대한 대화
[15] Esprits, 2m. mem. Ch. XII, Cosmolatrie
[16] Esprits, 2m. mem. Ch. XII, Cosmolatrie
[17] Esprits--p. 158.
[18] 장수(Longevity), pp. 49와 52.
[19] 부활. 621페이지.
[20] 오컬티스트들은 일련의 생들과 궁극의 니르바나 부활(nirvanic Resurrection) 동안에 그것을 “변형(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다.
[21] 라이프니츠, Opera philos., 등등
[22] 과학의 도서관(Bibliothéque des sciences), 24권 참조. 1768년 첫 번째 3개월.
[23] 두 개의 그리스 단어—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에서 왔다.
[24] 팔링게네시아(Palingenesia) 2권 참조. 또한 드 미르빌의 부활 참조.
[25] 우리도 또한 가장 고등동물부터 원생동물에 이르기까지—일련의 재탄생들과 고등동물 형태 속에서 그리고 인간과 그 너머로—동물을 위한 “미래 상태들”을 믿는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충분한 의미에서 진화(evolution)를 믿는다.
[26] 아이시스 언베일드, 1권 참조.
[27] 고대에 “신의 아들들(sons of God)”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씨크릿 독트린] 1부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다.
[28] 이것은 비의적 버전과 같은 정통 힌두 버전이다. “힌두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방갈로 강의에서, 마드라스 출신의 디반 바라도르 라구나스 라오가 말한다: “매번 만반타라가 끝날 무렵에, 세계의 파멸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 명의 전사, 일곱 리쉬 그리고 씨앗들이 그 파괴에서 구원된다. 그것들에게 신(God) 혹은 브라흠(Brahm)이 베다 혹은 법령을 전한다 . . . 만반타라가 시작하자마자 이 법칙들이 선포되고 . . . 그리고 그 만반타라가 끝날 때까지 구속하게 된다. 여덟 분들을 씨쉬타(Sishtas) 혹은 나머지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파괴 후에 그들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와 계율이 씨쉬타카르(Sishtacar)라고 알려진다. 그들은 또한 사다챠르(Sadachar)로 호칭된다. 왜냐하면 그들 행위와 계율만이 항상 존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통 버전이다. 그 비밀스러운 사람이 여기 지구상에서 일곱 번째 근원인종이 끝날 무렵에 디얀초한 상태를 성취한 일곱 분의 입문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엄폐(obscuration)” 동안 다음 라운드 혹은 세계 주기를 대비하여 인간으로 진화할 시간이 없었던 동물과 모든 광물, 식물의 씨앗과 함께 지구상에 남아 있게 된다. A.P. 씨넷트, [에소테릭 붓디즘], p. 146, 147 참조.
[29] 원본 라틴어 번역에서는 . . . ingemiscit et parturit usque adhuc(잉태 및 분만과 출산).
[30] 코넬리우스, 편집, 펠라가우드(Pelagaud), I. IX, p.114.
[31] 강론(Homélie) XIV.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신에 대하여(Sur l'Epitre aux Romains). (H.P.B.는 이 구절을 드 미르빌의 불어인 ‘영에 대하여’에서 번역한 것으로 글자 그대로 표현이라기 보다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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