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정족산 전등사를 찾다
남리 이승창
2023년 계묘년 올해 추석은 그 연휴(連休)가 9월28일 부터 10월 3일로 무려 6일간이다. 금년은 여느 때보다 폭염(暴炎)이 심하여 가축이 축고 곡식이 말라 죽고 과일이 걷말라서 경작하는 농민들이 울쌍이며 따라서 물가가 올라 주부들의 장바구니가 가볍우나 주머니의 돈은 더나가니 또한 불만이다
하지만 가을 바람이 더위를 물리치고 장마가 물러났다. 찌는 더위의 고뇌 속에서도 오곡과 백과는 영글고 맛이 들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니 흐뭇하다.
일에 지치고 더위에 시달린 모두에게 추석 명절의 긴 연휴는 목마른 데 물 처럼 상큼하고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그 것 만으로도 피로감이 어느정도는 풀리게 되어 다행이다.
오늘은 연휴의 끝나는 10월 3일 날이다. 큰아들 국헌(菊軒:아호)이 아침 일찍 당도하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바람을 쐬어 드린다는 받가운 말이었다. 큰아들은 추석날 아침 나와 함께 온양 조카집에 다례(茶禮)를 올리려 갔다가 왔다. 자기 할 일을 다하였지만 자기피로는 뒤로하고 연휴동안 무료(無聊)하게 지낼 두 늙은 아비와 어미를 위하여 나드리를 해주려는 효성(孝誠)의 마음에서 우러난 정성(精誠)이 아니면 무엇이랴. 자식이지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 곳으로 가려는 것이냐라고 물으니, “강화도(江華都)에는 모시고 간적이 없으니 그리로 모시겠다”라고 하였다. 고맙고도 기특하였다. 강화도하면 역사성(歷史性)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고려조(高麗朝) 때 몽고(蒙古)의 침략(侵掠)을 피해 강화도로 조정(朝廷)을 옮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목각(木刻)했는가 하면 역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의 침략을 받은 곳이며 강화도령 철종(哲宗)의 잠저(潛邸)가 있은 곳이기도 하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를 겪은 곳으로 이름이 있는 곳이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濟州道)를 제외한 가장 큰 섬이다. 이곳은 고려 고종 임금이 몽고침략을 피하여 조정을 옮겼던 곳이므로 섬도[島]자를 쓰지 않고 도읍도[都]자를 써 강화도(江華都)라고 한다.
그리고 왕이 있는 도성(都城)를 지키는 중요할 경기(京畿)의 요충(要衝)이므로 유수(留守)를 두어 지키던 아주 중요한 요충지역이었다. 즉 개성유수(開城留守) 광주유수(廣州留守) 수원유슈(水原留守) 강화유수(江華留守) 이렇게 사대유수를 두어 경성(京城)의 왕도(王都)를 지키던 곳이다. 이런 역사(歷史)를 가진 강화도를 구경해 주려는 내 큰아들 국헌(菊軒:아호)이 자랑스렵고 또한 고마웠다.
전에는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연육교(連陸橋)를 놓아 차로 통과하기 때문에 강화도의 발전도 괄목(刮目)할 만큼 변화하고 있었다. 또한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요새지이기 때문에 정족산(鼎足山)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등 사서(史書)를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자리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과 먼 절도(絶島)는 아니었지만 바다 속에 있으므로 죄인의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하나의 예로 교동(校洞)은 조선조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의 유배지(流配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인조14.1636) 때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리대군(鳳林大君)등 왕궁(王宮)의 비빈(妃嬪)들과 조정대소관료(朝廷大小官僚)와 그 가족들의 피란처이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몽진(蒙塵)은 시간의 촉박(促迫)으로 인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행재소(行在所)로 하여 청군(淸軍)을 대항하였고, 강화도 역시 관군의 태만으로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어 거주하던 왕세자등 귀인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 청국(淸國)으로 끌려갔으며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패전하여 성하지맹(城下之盟)의 치욕적 항복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은 큰아들 국헌(菊軒)이 바람을 쏘여 주었는데 그 지역은 유명한 정족산의 전등사(傳燈寺)였다. 정등사는 사전(辭典)에 의하면 소재지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정족산(鼎足山) 삼랑성(三郎城)에 있는 교구본사(敎區本寺) 총무원(總務院) 직활(直割)의 절로,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11년(381)에 아도 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했다고도 하고 또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원년(1214)에 전등대사(傳燈大師)가 세웠다고도 하는 양설(兩說)이 있다.
하여간 주차를 하고 아들의 인도로 산길을 걸어서 절을 찾아갔다. 당초는 산길이 등성이라 늙은이들이 가기가 어렵다고 아들이 차를 돌리려고 하였다.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시엄시엄 걸어가면 되니 한번 가보자고 하자 아내 정화당도 내말에 수긍을 하였다.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언덕배를 거쳐 가니 생각보다 는 그리 험한 길은 아니었다. 약수(藥水)가 있어 약수 한모금씩 마시고 이곳저곳 둘러보니 참으로 산세가 순하면서도 그윽하여 아주 아름다웠고 바라보이는 전망이 그윽하고 안온(安穩)하여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아들과 아내와 천천히 둘러보니 대웅전(大雄殿)이 옛스럽게 동그마니 서 있는데 편액(扁額)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되어 있었다. 보전이란 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진 집임을 말한다고 한다. 화려하나 사치롭지 않고[華而不侈] 검소하나 촌스럽지 않은[儉而不陋] 옛 소박함이 그대로 배어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나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어 대웅보전에 들어가 석가여래전에 삼배예불를 올였다 큰아들도 나를 따라 삼배예불을 하니 부자(父子)가 정성으로 예불을 하였으니 부처의 비호가 있을 것이다. .
아들과 함께 예불을 하고 정적속에 다소고니 세상을 내다보며 중생을 제도하는 사랑어린 석가모니부처님의 자비로움을 마음에 담고 아내와 함께 전등사문을 나와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길이 나있는 대로 사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 보니 우리 차를 대놓은 주차장이 아니라 아들은 차세운 주차장으로 도로 가서 차를 가져오고 우리 내외는 기다렸다. 잠시후 아들이 차를 몰고 왔다. 시간이 점심 때가 넘어 오후 한싯경이 되었다. 전등사에서 내려와 마니산(摩尼山) 참성대(塹星臺)를 찾으려고 방항을 잡아 차를 돌리면서 큰이들은 제동생에게 강화도에서 이름있는 식당이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그애가 전에 강화도관광을 했던 것을 짐작했다.
형의 전화를 받은 작은 아들은 “마니산 산채비빔밥집이 유명하다”라고 전해주니 마니산에 가던 중에 마침 마니산 산체비빕밥집을 경과하게 되어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차를 내려 큰아들이 물어보니 삼십분을 대기해야 한다고 전하였다.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니 기다리자고 하였다. 내 식성은 본래 면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아는 아들은 맞있는 국수집을 물색하는 차에 막내아들이 강화도 마니산두변의 유명한 식당을 물색하여 형에게 일러주었으므로 마이산을 찾을 겸 국수집을 찾아 가는 길인데 길가에 제아우가 알려준 유명한 산채비비밥집이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네동생이 일러준 유명한 집이이라면 국수말고 여기서 유명한 산채비빕밥을 먹기로 하자고 하니 아들이 아버지말을 듣고 산채비빕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밀려 있어서 30분을 기다린 것이다. 30분을 기다려 산채비빕밥점심을 먹고 나니 3시가 훨씬 넘었다. 소문난만큼 정결(淨潔)하고 장맛이 깔끔하였다. 정족산은 소나무가 울창했고 공기도 상큼했다. 시간상으로 마니산 참성대 답사는 포기하고 강화도 관광은 정족산 전등사 만으로 마무리하기로 하고 귀가 길에 올랐다. 이강화도 저쪽 바다 건너엔 북한 김정은이가 호시탐탐 도발을 연속하고 있는 것이 우리평화의 화근임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답답하였다.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읊어본다.
강화경색이추심
江華景色已秋晩 강화도의 경색이 이미 가을이 늦은데
정족산중고사심
鼎足山中古寺深 정족산속 옛절 전등사가 깊숙이 있네
열력다년송백로
閱歷多年松柏老 많은 해 보낸터라 송백이 늙었는데
무상인사객상심
無常人事客傷心 무상한 사람 일에 객이 상심해 하네
이렇게 발전한 경제강국의 나라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반도 삼천리 강토가 반으로 잘려 남북이 적국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참혹한 일이기에 국민 누구나 불안한 마음이 뇌리 한구석을 점(占)하고 있으리라고 본다. 하루빨리 국력을 강력히 길려 어느 적국도 감히 도발을 못하도록 만들어서 우리 국민 모두가 편안한 낙원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자손대대 만세를 두고 누리는 낙토(樂土)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귀가길에 강화도의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뒤로 하고 오면서 느낌을 말해 보았다. 집에 오니 여섯시가 되었다. 자기 일도 바쁜 아들이지만 효행을 실천하는 착한 효성(孝誠)에 고마음을 느기며 우리 내외는 참으로 행복한 늙은이구나 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2023. 1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