潘 씨 유래
2024.6.18. 다음 인터넷 참고
한국의 성씨로 중국계 귀화 성씨이며,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한국
성씨 순위 81위 28,062명이다. 한국 외에도 중국, 베트남, 일본까지 퍼진 성씨이다. 거제 반씨의 기원을 따지면 주나라(周) 시조 문왕(文王) 희창 (姬昌)의 아들 이고 무왕(武王) 희발(姬發)의 동생으로 상나라(商) 정벌 후 필나라 공작(畢公)에 봉해진 희고(姬高)까지 올라가는데 필공 고(畢公 高) 라고도 부른다. 희고는 무왕 때 상나라 정벌 후 필공에 봉해졌고, 성왕때 태사(太史)에 이르렀으며, 강왕 때는 성왕의 유언을 받아 태사(太史)로서 강왕을 태보(太保) 소공(召公)과 함께 보좌하여 주나라 3대를 보필한 충신 이었고, 그의 아들 계손(繼孫)이 반(潘)땅에 봉해져 희성반씨(姬姓 潘氏)가 되어 그의 후손들이 반씨를 이루었으며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에도 재상(宰相)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名門)으로 손꼽혔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때에는 하진(何進)을 살려준 후한(後漢)말의 사마(司馬) 반은(潘隱), 오나라 (吳) 초대 황제(初代 皇帝) 손권(孫權)의 황후(皇后) 반부인이 있고, 오의 태상 반준(潘濬)의 장수 반장(潘璋), 반평(潘平) 등이 유명하고 서진(西晉) 때에는 미남(美男)의 대명사(代名詞) 황문시랑 (黃門侍郞) 반안(潘安)이 유명하다.
한국에서 반(潘)씨가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554년 2월 삼국시대 백제 성왕(백제)이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8품) 반양풍(潘量豊)을 마찬 가지로 채약사인 고덕(固德, 9품) 정유타(丁有陀)와 함께 일본에 파견했다 는 기사가 있다. 고려 목종대에 정국이 불안해지자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 을 비롯한 근위세력이 목종을 보호하기 위해 교대로 궁궐에서 숙직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반씨 연원에 따르면, 시조 '반부(潘阜)'는 반계손의 먼 후손으로, 고려 때 중국 남송(南宋)에서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몽골 정벌을 주청했다가 간신의 모함으로 원나라에 갔었는데, 원세조 쿠빌라이 칸(재위, 1260 ~ 1294)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신하 가 되어 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원의 세조는 충절을 높이 여겨,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가는 자신의 막내딸 제국대장 공주를 배종하여 고려로 가게 하였다. 반부는 장군 김방경을 따라 원나라 의 일본원정에 출정하였으며, 후일 충렬왕은 그에게 문하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 기성은 거제의 고호)에 봉했다. 이후 후손들은 거제를 본관으로 하였다.
이후 인물들로 반부의 둘째 아들 반유항(潘有抗)은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고, 반유항의 아들 반영원(潘永源)은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상서 (密直尙書)를 지냈으며, 그 아들 반익순(潘益淳)은 우시중(右侍中)에 제수 되었고, 반익순의 아들 반복해(福海)는 당대의 석학 정몽주(鄭夢周) 문하 에 있으면서 권력자 임견미(林堅味)의 사위였고, 사냥 때 우왕(禑王)을 구한 공을 인정받아 왕씨 성을 하사받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겸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나, 무진피화(戊辰被禍) 때 일가친척들이 임견미와 함께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반복해의 아들 반자건(潘自建)이 당시 외국에 유학 중이라 가문이 끊길 뻔한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반자건은 여말선초의 재상으로 유명한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써, 장인과 함께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탠 공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의 요직을 역임하고, 공신으로써, 영평군(永平君)에 봉해져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시조가 되었다.
반자건의 아들 반충(潘忠)은 부친과 함께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 신(開國功臣)이 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해양군(海陽君) 광주백(光州伯)으로 봉해져 광주 반씨(光州潘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조선 전기에는 관직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한성부 좌윤 (左尹), 우윤(右尹),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권된 반우형(潘佑亨, 호는 옥계)이 있다.
조선 중기에는 이도절도사(二道節度使),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며 무관으로써, 공조판서(工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까지 역임하며, 문관으로써도 이름을 알린 문무 겸전(文武兼全)의 반석평(潘碩枰)이 유명하다. 이처럼 고려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명신들이 대대로 끊기지 않고 나와 전성기를 맞았으며, 수 많은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무진피화(정월지주)
무진피화(戊辰被禍)는 1388년(우왕14) 무진년 정월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 등이 임견미, 염흥방 등을 숙청한 사건이다.
염흥방은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을 반역 모의자라고 무고하여 투옥시켰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어 최영(崔瑩)과 사전 협의를 거친 우왕은 조반(趙胖)은 석방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 일당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무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진피화’, 혹은 정월(正月)에 처벌했다 하여 ‘정월지주'(正月之誅)라고도 한다.[1]
□ 사건의 발단[편집]
염흥방은 젊어서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개혁을 주창하는 인물이었으나, 이인임에게 항거하다 귀향을 다녀온 이후 권문세도가와 친분을 쌓아 탐욕에 찬 간신이 되어 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에겐 이광(李光)이란 종이 있었는데, 이광은 주인의 권세를 믿고 황해도 배주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땅을 강탈했다. 이에 조반이 염흥방에게 애걸해 다시 그 땅을 돌려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이광이 땅을 빼앗고 조반을 능욕하였다.
조반이 이광에게 찾아가 애처롭게 청하여도 이광이 더욱 방자하고 포학하자, 조반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수십 기(騎)로 그가 사는 집을 포위하고 이광을 목벤 다음에 그의 집을 불지르고 말을 달려 개경에 들어가 장차 염흥방에게 알리려 하였다.
1388년(우왕 14년, 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하였다. 체포된 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이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 것뿐인데, 어찌 반란을 꾀한다고 하느냐.” 라고 항변하였다.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조반을 반역 모의자라고 무고하고, 조반과 그 가족들을 체포해 순군옥에 가두고 고문등의 참혹한 형을 가하며 기어코 반역 사건으로 몰려 했다. 그리하여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허위보고까지 하였다.[1]
□ 경과[편집]
고려 우왕은 전횡을 일삼는 것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하여 최영과 이성계에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을 비롯하여 영삼사사 임견미, 찬성사 도길부(都吉敷) 등의 체포령을 내렸다.
임견미는 “7일 만에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 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된 도리인가. 옛부터 임금이 그릇된 것을 신하로서 바로 잡은 자가 있다”고 거짓으로 호도하며 무력으로 맞서려 하였다. 임견미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도당들을 모이게 하려했으나 이미 갑옷 입은 기병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임견미의 집은 남산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들이 열을 지어 포진하고 있었다. 임견미는 전의를 잃고 순순히 붙들렸는데 탄식하며 말했다. “광평군(廣平君, 이인임)이 나를 그르쳤도다.”
이 사건으로 우시중 이성림(李成林, 염흥방의 異父兄), 찬성사 반복해(潘福海), 대사헌 염정수, 지밀직 김영진(金永珍, 임견미의 사위), 밀직부사 임치(林淄, 임견미의 아들)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고 이어 염흥방, 임견미, 도길부, 이성림, 염정수, 반복해, 김영진, 임치를 베어 죽이고 그 족당(族黨)인 찬성사 김용휘,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이인복의 손자로 이성림의 사위), 판개성 임제미(林齊味, 임견미의 아우), 밀직 홍징(洪徵, 염흥방의 매부), 밀직 임헌(任獻), 전법판서 이송(李竦), 임헌의 세 아들 임공위(任公緯), 임공약(任公約), 임공진(任公縝), 반덕해(潘德海, 반복해의 형), 개성윤 정각(鄭慤, 반복해의 매부), 임견미의 문객인 박인귀(朴仁貴), 이희번(李希蕃),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반복해의 부친), 우사의대부 신권(辛權, 임견미의 조카사위),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도길부의 사위), 집의(執義) 이미생(李美生, 임견미의 족자), 홍징의 세 아들 홍상빈(洪尙濱), 홍상부(洪尙溥), 홍상연(洪尙淵), 임견미의 가신 김만흥(金萬興) 등을 참수했고 임견미 등의 집을 몰수하였다.
우왕은 인사 발령을 하여 최영을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이색을 판삼사사, 우현보(禹玄寶)․윤진(尹珍)․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 문달한(文達漢)․송광미(宋光美)․안소(安沼)를 문하평리, 성석린을 정당문학, 왕흥(王興)을 지문하사,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다시 이미 처형당한 자들의 족당 50여 명을 참수했다.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염흥방의 형), 염치중(廉致中, 염국보의 아들), 안조동(安祖同, 염국보의 사위), 성균제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염흥방의 사위), 호군 최지(崔遲, 염흥방의 사위), 대호군 김함(金涵, 반복해의 매부), 호군 임맹양(林孟陽, 임제미의 아들) 등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 1388년 무진년의 피화)라고 하였는데, 정월에 발생한 일이라 정월지주(正月之誅)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고려사』, 권113,「최영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