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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의 사당
유기 劉基,자字는 백온伯溫으로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 至大 4년 (1311) 6월 15일에
태어나 명나라 홍무洪武 8년(1375) 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였다.
절강성 浙江省 온주시溫州市 문성현文成縣사람이었다.
(지금의 청전현靑田縣)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를 유청전劉靑田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홍무洪武 3년(1370)에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져서,사람들은 또다시 그를
유성의劉誠意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 후 139년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9년(1514) 에 태사에 추대되고
문성이란 시호文成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세상에 다시 한번 유문성劉文成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다.
문성현文成縣은1948년 새로운 현으로 지정되어지는데 바로 유기劉基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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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의 서예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0.blog.daum.net%2Fimage%2F2%2Fblog%2F2007%2F12%2F14%2F10%2F09%2F4761d73db797a%26filename%3D%21%5BCDATA%5B%EC%9C%A0%EA%B8%B0%EC%82%AC.jpg%5D%5D)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 적천수(適天髓)란 제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적천수란 제명은 하늘의 골수, 즉 천기를 누설한다는 뜻이다,
그런 적천수의 해설서인 ‘적천수징의’나 ‘적천수천미’를 100번 정독하면
음양오행과 명리의 심오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다.
‘적천수’를 저술한 이는 유백온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명리학 책을 지었다니, 그냥 강호의 술사(術士)가 아니었겠나 싶겠지만 실은
중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일급 책사로서
인품이나 재주에 있어 당대 제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유백온의 백온(佰溫)은 자(字)고, 본명은 기(基)다.
원말 지순 연간의 청전(靑田, 오늘날 소주 항주로 유명한 중국 절강성)사람이다.
일찍이 고시에 붙어 현령 직을 했다.
유기는 경사(經史)에 박통했을 뿐만 아니라, 두루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상위(象緯)의 학문(주역과 음양오행)에 대단히 정통한 바 있었다.
이에 당대의 명사인 조천택은 절강의 인물 중에는 유기가 으뜸이며 삼국지의
제갈량과 버금가는 인재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방국진이라는 자가 오늘날의 상해 앞 바다에서 해적 떼를 이끌고 연안의
고을들을 약탈하고 다녔지만 정부는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이에 유기는 원수부도사(元帥府都事), 오늘날로 말하면 육군대장의 참모가 되어
각종 계책을 내어 마침내 방국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해적의 괴수 방국진은 곤경에 처하자 중앙에 뇌물을 바쳐서 타협책을 취하니
정부 또한 이에 응하여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된다.
해적의 괴수에게 관직을 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던 유기는 그 바람에 왕따가 되어
군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반 행정직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이에 화가 난 유기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청전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홍건의 무리를 이끌던 주원장은 유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하였으나 당초
주원장을 홍건적, 즉 도적의 무리로 생각하던 유기는 응하지 않다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간곡한 부탁을 받고서야 주원장의 참모로 일하게 된다.
유기가 십팔조(十八條)의 계책을 진언하니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였고 예현관을 지어
그를 살게 하는 등의 각종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또 주원장이 대장 한림아를 왕으로 봉하는 대우를 해주자 ‘아니 겨우 목동에 불과한 자를
왕으로 해서 어쩌자는 거냐’며 뼈있는 말을 서슴치 않았으니 그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이에 주원장이 그러면 공은 무슨 계책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자 다음과 같이 천하의
정세를 답변했다고 한다.
“장사성(張士誠, 원말 군웅할거 당시 오늘날의 소주와 항주 일대를 지배하던 군벌)은
겨우 군사나 거느리고 가진 것이나 지키기에 급급한 자이니 근심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진우량(陳友諒, 원말에 오늘날 호남과 호북, 광동 일대에 할거하던 군벌)은
주군의 겨드랑이를 위협하고 있으며, 양자강 상류 일대를 점거하고 군선과 병력이
강대합니다.
마음에는 늘 주군을 멸하고자 생각으로 가득하니 응당 이 자를 먼저 쳐야 합니다.
진우량만 처리하면 장사성은 고립되어 한 번 거사로 족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북으로 중원을 탈취하면 왕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주원장은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서로는 장강 상류의 진우량,
동으로는 소주 일대의 장사성이 강대하여 자칫 협공 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에 유기는 양면 전선을 펼치지 말고 군의 주력을 장강 상류의 진우량 쪽으로
집중하여 승부를 보면 저절로 장사성은 무너질 것이며, 그러면 양자강 이남이
평정되니 기회를 보아 북의 중원을 도모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계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형주에 근거를 잡고 서쪽으로 파촉을 도모하여 군세를
정비한 후에 손권과 연합전선을 펼치다가 중원의 위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 북벌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한 천하삼분책(天下三分策)과 일맥상통하는 전략과 버금간다.
당시 민초들로 구성된 홍건적의 영수로서 쓸만한 지식인 참모가 없어 원대한 전략적
식견이 없었던 주원장에게는 실로 귀가 번쩍 열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주원장이 유기더러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정작 진우량이 군세를 몰아 장강을 타고 내려오자 주원장의 막료들은 크게 겁에 질린 나머지 투항하자는 파와 대피하자는 파가 주류를 이뤘다.
이에 유기는 노한 눈을 부릅뜨고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주원장은 유기만을 자신의 침소로 불러들여 무슨 대책이 있는지 물어보게 된다.
이에 유기는 투항하거나 대피하자는 자는 모조리 참수에 처해야 한다고 초강경론을
펼치면서, 다음과 같이 계책을 낸다.
“적이 지금 강성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적군이 깊숙이 들어오도록 기다렸다가
복병으로 일거에 들이치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은 도적 떼에 불과하니
명분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위엄을 세워 적을 제압하고 왕업을 이룰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이번 거사에 달려있습니다.”
과연 주원장은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일시에 몰아치니 대승을 거두었다.
주원장이 크게 상을 내리자 유기는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논공행상이 아니라, 승세를 몰아 여전히 강대한 진우량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수 있는 호기라면서 장강 상류 쪽으로의 역공을 권유했다.
주원장은 헌책에 따라 진군했고, 이로서 호남 지역은 완전 평정되었고 주원장은
양자강 이남의 최대 세력으로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원장이 결국 명을 세우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유기라는 불세출의 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리와 역술에 밝았던 유기에게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강 상류 쪽으로 역공을 도모한
주원장이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수십 차례 수전(水戰)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주원장이 배위에서 독전을 하고 유기는 곁에 서서 시봉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기가 큰 소리를 내며 주원장에게 배를 갈아타라고 독촉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에 황망히 주원장이 배를 갈아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이 쏜 비포(飛砲, 큰 불화살)가
조금 전의 배를 명중시켜 박살이 나는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유기는 때와 장소가 주원장에게 살기(殺氣)로 가득하다는 것을 추산했었던 것 같다. 이는 야사나 전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사(明史)에 기록된 실화다.
이처럼 주원장을 보좌하여 중국을 평정한 유기는 일 처리가 신의 경지(料事如神)였지만,
사람됨이 강직하고, 너무 엄정해서 사람들과 늘 부딪치는 모난 면이 있었다.
개국 공신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공로를 뽐내는 일도 없었고, 봉록도 많이 받기를
거부하니 겨우 240 석이었다. 같은 반열의 다른 공신이 4 천석 이상이었던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나중에 유기는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술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시의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 낙향한 후 관원들과는 일체 접촉을 피하던 차,
그 마을의 군수가 유기를 보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만나게 되었다.
유기는 이 때 발을 씻고 있었는데, 군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나는 소인이니
응대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숨어서 관리가 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다.
그런 유기도 그의 모난 성격 때문에 결국은 모함을 받고 독살로 생을 마치고 만다.
당시 명의 조정은 주원장의 고향 사람들인 회서(淮西)파가 득세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유기는 결국 이 회서파의 전횡을 가로막는 눈의 가시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입이 많으면 당하지 못하는 법이라, 유기는 모함을 당하게 되고 급기야는
반대파에게 독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알려지기로, 주원장은 나라를 세운 뒤 공신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가 처단한 공신들은 대부분 회서파의 무리들이었다. 동향을 앞세워 모든 대소사에
끼리끼리 작당하여 농단을 일삼자 주원장이 강력히 맞선 것이었다.
유기는 이처럼 당대의 일류 재사였으며, 역술계에서는 적천수,
즉 ‘하늘의 비밀을 흘린다’라는 제명의 글을 남긴 것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적천수를 유기가 저술했는지 그 여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음양오행에 대해 대단히 정통했었다는 것만은 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추연이다.
추연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으로 음양오행설을 주장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윤의 "음양오행설의 성립과 그 이론적 배경"이라는 고려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을 보면 추연이라는 인물과
그외에 음양오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초기 명리학의 유래를 살펴보면, 명리학의 유래는 정확치 않지만 일반적으로 낙록자와 "명서"의 저자인 귀곡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명리학의 뿌리는 음양오행론에 있으며 전국시대말 직하음양가와 추연에 의해 음양오행설이 형태를 갖추었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존재하던 음양론과 오행론이 합한 것이 음양오행론이며 도입된 것이 "관자"이다.
"관자"에서 처음 상생이 나온다. 자연현상의 질서로 흥망성쇠를 예측하였으며 사람도 자연으로 보고 동기감응이라는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였다.
그리고 한대에서 동중서에 의한 "춘추번로"로서 음양오행론의 체계가 완성되고
왕충의 "논형"의 정명사상은 명리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당대에는 인도 역법이 전해졌고 이순풍이 인덕력을 만들었으며 721년 현종때 일연이 대연력을 편찬하였다.
당대의 천문 역법의 발전은 점성술을 통한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에서 명리학의 기반이 정립되었다.
한유가 지은 "한창려문집"에 수록된 묘지명에 의하면 이허중은 음양오행에 능통하였고 처음으로 연월일시의 간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추측하였다고 한다.
송대에는 서자평에 의해서 간지의 생극제화로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서자평의 저술로는 "낙록자삼명부"를 주석한 "낙록자삼명소식부주"2권이 있다.
서자평이 저술했고 서대승(서승)이 편저한 "자평삼명통변연원"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목록이 되었으며
서승은 "연해자평"을 지어 격국론등을 정리하였고 일간을 근거로 육친을 나누어 운명을 논하였다.
명대에는 장남이 "명리정종"에서 명리학의 종래학설에 대한 오류를 비판하고 새로운 이론인 동정설, 개두설, 병약설 등의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하였다.
만민영이 지은 "삼명통회" 앞부분에 음양오행과 간지의 원류를 다룬 점은 명리학이 역사적이면서 철학적인 존재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담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의 개국공신은 유기에 의한 "적천수"는 유명한 명리서이다.
그리고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난강망"이 조선시대에는 명과 시험과목에 채택되었다.
청대에는 심효첨에 의해서 "자평진전"이 저술되었으며,
임철초의 "적천수천미"는 현대명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사극 <주원장>에 나오는 홍무제 주원장과 성의백 유기.
성의백(誠意伯) 유기(劉基)
홍무(洪武) 3년 11월 봉(封) 성의백(誠意伯)
홍무(洪武) 8년 4월 정사(丁巳) 졸(卒)
정덕(正德) 8년 12월 추증(追贈) 태사(太師), 시(諡) 문성(文成)
저 사극 속에서 최후의 순간에는 호유용이 보낸 탕약을 마신 바로 그날 밤에 죽는 걸로 처리되었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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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前綠荷葉(정전록하엽) 앞 뜰의 푸른 연잎
香氣濃於酒(향기농어주) 술보다 향기가 짙어
疏雨忽飛來(소우홀비래) 주르르 비가 떨어져
的력明珠走(적력명주주) 흰 구슬이 굴러 흐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0.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bBE3%26fldid%3D2CjR%26dataid%3D1579%26fileid%3D2%26regdt%3D20050619222448%26disk%3D7%26grpcode%3Dkn41%26dncnt%3DN%26.jpg)
작품 -41회 유진영 글
庭前綠荷葉 香氣濃於酒
疏雨忽飛來 的력明珠走
(정전녹화엽 향기농어주 소우홀비래 적력명주주)
앞 뜰의 푸른 연잎 술보다 향기가 짙어.
주르르 비가 떨어져 흰 구슬이 굴러 흐른다
력-白+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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