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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우리네 조상님들 수없이 태어나셨다 각자의 삶을 능력껏 누리시곤 다시 모두들 흙으로 되돌아 가셨다.
사람이 그 수(壽)를 다하면 자손들은 좋은 곳을 골라 정성을 다하여 평생의 유택을 마련해 드리는데 공을 들여야만 효자, 효부라 불러주고 주변에서 사람대접을 하였었다.
비단 이 행위는 조상님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는데 좋은 곳 즉 명당에 음택을 쓰게되면 발복을 얻게되어 자손들 역시 복 받아서 잘 살게 된다는 풍수지리의 명당론 덕분에 조상님과 자손들이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명당을 찾아 이 좁은 한반도 땅을 뒤엎었던 것 이다.
그렇다면, 과연 명당(明堂)이 무엇인고?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기(氣)가 충만한 곳’이다.
이제부터 명당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한 번 들여다봐 봅시다.
▷풍수지리사상이란? 이런 명당이란 곳을 인간이 자연과 조화하여 찾아내는 학문이다.
▷풍수(風水)란?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은 막고 물이 있는 곳)의 줄임말로 ‘명당을 찾는 것’이 궁극의 목표 이고, 명당은 ‘氣가 충만한 곳’이라는데, 그러면…
▷‘氣’란? 종산(宗山)에서 발원한 산의 정기(精氣)로 산(山)을 타면 흘러내리고, 물이 있 는 곳에서는 모이지만 또 바람에는 흩어져 버리는 것이 기(氣)이다.
이 기(氣)가 자연적으로 모여있거나 흩어지지 않게 잘 잡아두는 곳이 혈(穴)이다.
이 혈(穴)이 모여있는 터를 우리는 명당이라고 한다.
▷명당은 무엇이 그리 좋다는 것인가?
: 명당에 산(生)사람이 살면 건강과 복을 누리고, 음택으로서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발복하고 번창한단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풍수지리에서는 조상의 氣가 후손과 연결된다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을 믿고 있다.
소위, “조상님 덕분에~” 이런 것들이다.
명당은 매우 귀하여 전문가들도 찾기도 어려운데, 작금은 인구증가 및 난개발로 인한 자연의 훼손이 더욱 심해지면서 맥(脈)들이 끊어져 버려 더 귀하디 귀하다.
해서, 명당으로의 부족한 것들을 인위적으로 지형과 주변을 보완한 소위 풍수의 비보로 명당과 비슷한 구색을 갖춘다. 물론 비보풍수는 옛날 우리네 조상님들도 택한 터가 명당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해 왔던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명당을 찾는 정통의 풍수지리 방법은?
: 멀리 조종산(祖宗山)과 바로 뒤 주산(主山)에서 내려오는 정기를 명당의 혈(穴)에 잡아두는 전형적인 입지형태와 배치를 살펴보자.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서 앞으로는 물이 흘러야 하고,
▶후고전저(後高前低):
뒤는 높아야 하고, 앞은 낮아야 한다.
▶좌 청룡, 우 백호(左 靑龍, 右 白虎), 남 현무, 북 주작(南 玄武, 北 朱雀), 그리고 앞에 안산(案山)과 멀리 조산(朝山)이 자리하여 내려온 정기를 4신사로 둘러싸고 바람을 막아정기가 혈(穴)에 머물게 하면서, 아울러 물로써 정기를 모아 완벽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풍수의 역사와 변천
: 동양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주역, 사주 등)’을 배경으로 중국에서 4000년 전 먼저 시작된 풍수는 신라 말에 건너와 민간뿐 아니라 불교계에서 사찰의 건립, 나라에서는 국가의 수도와 궁궐의 장소와 위치, 국장 때 왕릉의 입지선정 등에 크게 활용되어 왔었다.
풍수의 공부는 이기론, 형국론, 나경패철의 이론 등 매우 광대하고 심오한 반면 통일된 이론의 학문적인 체계는 제대로 서있지 않은 상태로 내려오면서 점차적으로 불교와 민간 신앙에까지 합쳐지면서 사주와 궁합은 물론 택일, 이사, 수맥, 정감록비기, 토정비결 및 십승지론(十勝地論) 등이 모두 포함되면서 미신으로도 치부되어 왔고, 더욱이 오늘날에는 민간 장례절차에서 매장풍습보다 여건상 화장문화가 발달되면서 더 도외시되고 있다.
▷풍수에 대한 우리의 접근과 대처방안?
: 근간에 우리의 ‘자생풍수’라 하여 풍수지리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며 현대화 시키고, 체계화한 최창조 前서울대 교수는 풍수를 장례뿐 아니라 생태적 환경과 건축에도 적용하면서 이제는 전통 풍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졌기 때문에 현대화된 도심 속에서 명당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풍수란 것이 근본적으로 시대의 상황에 맞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선인들의 지혜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삶이라 한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우리들이 자연과 친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오늘날의 진정한 풍수라 말한다.
그러한 논리에서라면 나름 실생활에 접근해 있는 풍수이론을 이론적 배경이나 타당성의 여부를 떠나 가볍게만 볼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우리네 선인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해온 지식 중에 현실에 맞는 적합한 이론들은 우리가 알아두어 나쁠 것 없으니, 오히려 적절히 받아들이면서 우리 삶에 다소라도 도움을 얻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적용되는 풍수지리에서 보는 전원주택지(양택)의 입지조건.
①배산임수(背山臨水):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곳이 최고의 입지다.
②전저후고(前低後高): 배수와 일광이 좋고, 전면이 트여서 좋다.
③전착후관(前搾後寬): 앞이 좁고 마당, 정원, 후원 등 뒤가 넓어야 한다.
④남향(南向): 채광과 환기에 좋다. 최소 동남향이어야 한다. 좋은 집터는 남북으로 길다.
⑤배산은 완만해야 한다: 너무 높은 악산(岳山이거나 암산(岩山)은 좋지 않다.
⑥물은 완만하게 굽어 들어오는 것이 좋다: 서서히 들어와 유유히 나가는 만곡수가 좋다.
특히 궁(弓)자형이 좋으며, 물은 산의 정기를 모아서 사람에게 생기와 건강을 준다.
⑦길은 집 앞에 있고, 집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에서 집이 들여다 보이고 도둑도 들 수 있어 사는데 불편하다.
▷다시 한 번! 풍수(風水)란?
: 우리나라같이 팔도강산 어디를 가나 물이 풍부하고, 산은 대부분이 야트막한 산들이 많은 지형이라 솔직히 비슷한 것이 수두룩하다보니 쉽게 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더 많이들 명당 찾기에 몰입해 왔던 것 같다.
일단 명당으로 알려지게 되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꼬여든다. 자신의 땅도 아니고 남이 선택해 놓은 곳이건만 자기 가족만의 영달과 발복을 위해 몰래 야밤에 평장(平葬: 봉분없이 평평하게 매장)으로 암장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송사 중 가장 많은 송사가 무덤송사였었고, 그렇다보니 명당을 구하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엉터리 반(半)풍수쟁이 소위 얼풍수쟁이들도 더불어 양산되기도 한 것이다.
그 민폐가 어찌나 심했던지 구한말 조선의 대표 거짓말 중에 으뜸은…
“강원도 포수치고 호랑이 한 마리 안 잡아본 놈 없다.” 였고, 그 다음이…
“누가 풍수쟁이 말을 믿어?” 였단다.
무덤 풍수쟁이치고 얼풍수쟁이 아닌 사람 없다보니, 이 얼풍수들이 입만 뻥긋 했다하면,
발복타령부터 시작해서 마치 신들린 듯 거짓말만 하는 체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런 연유로 풍수쟁이 말 자체를 “풍(風)친다.”고 했고, 오늘날에 그 말이 “뻥친다.”로 되어버렸다.
바로 그 “뻥!!”의 유래가 되었다는 스토리가 된다.
오죽하면 우리네 속담에 ‘몹시 심하게 다그치거나, 매로 다스리는 경우’에 흔히들…
“복날 개 패듯 …” 같은 의미의 다른 속담이 바로 “풍수쟁이 볼기 맞듯…”이었으니
반(半)풍수에 의한 폐단이 사회적으로 몹시 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라 하겠다.
전통 풍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하여도 옛 것을 알아야 현실에 맞는 것도 취할 수 있는 것이렸다. 그런 뜻에서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신기한 땅 이야기를 펼쳐보려는 것이다.
풍수란? 한 마디로 정의하자!! 최창조 교수의 저서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 정답이다.
◈명당의 형태(분류에 따라 14 또는 27형국 등 연구(?)하는데 따라 다양하다.)◈
: 산천은 지세에 따라 외관상 여러 가지 모습을 띠게 되는데, 명당은 이런 지세의 모습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간주하여 여러 형태의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흔히 문자를 써가면서… 회룡고조형, 금계포란형, 비학등천형 등등… 요래 부르게 되면 풍수쟁이도 일반사람도 서로가 이해하기 편해 서로가 좋다.
여기서는 형상이 다른 것조차도 서로가 지니고 있는 기(氣)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조선의 명당터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금부터 소개할 이미 알려진 여러 형태의 명당터의 종류와 그 명당이 지닌 의미를 알아봐 보자.
①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용이 맥을 끌고 내려와 되돌아본다는 형상의 터’
: 이런 명당에서는 자손들이 가문을 명문가로 이룰 수 있게 재물도 충분히 보완된다고 한다. 이런 터의 혈처는 용(龍)이 휘감아 돌며 조상산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려보는 부분에 와혈(窩穴)이 응집되는데, 그곳이 가장 핵심이라 한다.
▷안동 권씨 묘(贈이조판서 청풍김씨 김인백(金仁伯) 부인): 의왕시 고천동 171.
: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꼽히는 이 터는 주산 오봉산에서 낙맥한 용이 횡으로 입수해 와혈로 결혈을 한 곳으로 이 묘의 발복으로 청풍김씨 후손들 중에서 부자(父子) 영의정을 포함해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뒷산의 봉우리가 5개라 오봉산(五峰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6개라 각각의 봉우리의 기운을 받아 6정승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
②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봉황이나 황금닭(天鷄)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 금계가 먼저 새벽을 알려야만 일반 닭들이 따라서 운다고 한다.
닭은 한번 알을 품으면 이십여 마리씩 부화시키기 때문에 대길로 본다.
이런 터에서는 무리를 이끄는 영웅호걸 및 대대로 많은 자손을 번식시킨다고 한다.
혈처는 닭볏(닭벼슬)이며 그래서 ‘벼슬’을 한단다. 말장난 같은 의미부여이다.
조사 중 한 숙박업소의 광고에서 퍼왔는데… 재미있다. ‘상상속의 집’ 상상해 보자!!
▷상상속의 집(팬션호텔): 거제 일운면 소동리 거제대로 2752,
: ‘금계포란’뿐 아니라 ‘회룡고조’ ‘옥녀단좌형’까지 좋은 것은 다 주워모았다. 보자!!
▷봉화 닭실마을(사적 및 명승 3호): 경북 봉화읍 유곡1리, 충재 권벌 유적지 일원.
: 문수산을 조산으로 백운령이 암탉이 알을 품은 형세이고, 안산인 옥저봉은 수탉의 날개짓 형상으로 사신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에 알(닭실마을)을 품고있는 택리지에 거론한 삼남의 4대 길지[경주 양동(성주이씨), 임하 내앞(의성김씨), 안동 하회(풍산류씨)] 중 한 곳이다.
이곳 유곡(酉曲)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권씨종택, 청암정, 기념관, 재실, 석천정사 등이 있다.
③ 오공형(蜈蚣形): ‘지네의 모습을 닮은 형상의 터’
: 지네는 꼴은 징그러워도 다리가 15쌍에서 170쌍까지라니 엄청 다리가 많다.
즉 수많은 다리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여 자손들은 번성하고 재화를 많이 모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명당이다. 최고의 혈처는 앞다리가 변형된 두 이빨 사이라고 한다.
▷김동수가옥: 전북 정읍 산외면 오공(蜈蚣)리 814, 신배마을 內 (민속자료 26호)
: 가옥주의 6대조인 광산김씨 김명관이 도깨비가 지네형상의 터에 점지해 준 명당터로 12대에 이어져 발복이 계속된다며 1794(정조8년)에 지은 99칸의 호남부호 대저택이다. 이 가옥은 오공형의 혈처인 지네의 두 이빨사이에 자리하였고, 뒷산이 지네의 머리, 연결되는 창하산의 길게 이어진 능선이 몸통이 된다고 한다.
습한 것을 좋아하는 지네를 위해 집 앞에 원형의 연못을 조성하였고, 뜰에는 역시 지네의 먹이가 되는 지렁이 형상으로 긴 수로를 만들어 주었다.
풍수적인 균형 역시 잘 이루어져 있는데…
東쪽 구정이골(狗:개 구) : 지명에서 개(狗)가 보인다.
西쪽 이치마을(貍峙:살쾡이 고개마을) : 역시 마을이름에 ‘살쾡이(삵) 고개’ 짐승이 있다.
南쪽 독계봉(鷄:닭 계) : 산 이름에서 닭,
北쪽 창하산은 생김새가 지네형태로 각각이 서로 천적관계인바 언제나 정신차리고 항시 견제하기 때문에 나태해지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연관된 상징성을 보인다.l
특히 이 집은 안채의 형태가 안대청을 중심으로 종이를 반으로 접은 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 주는 것이란다.
아직도 99칸 중 88칸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곳을 개방하여 한옥체험관 등으로 지금도사용하고 있으니 진짜 발복이 12대(360년)까지도 가긴 가나보다.
④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 ‘호랑이가 숲에서 뛰쳐나오는 형상의 터’
: 호랑이가 먹이를 덮치는 형상이라 진취적인 기상과 먹을 것이 풍족한 것을 의미한다. 산세가 험한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지세로 이런 곳에서 장군이 나온단다.
서울에서는 관악구 봉천11동 일대, 인현고교와 은천아파트 사이가 그 터가 된다고 한다.
이곳은 관악산 연주대의 맥이 흘러내려와 동네 뒷산 쌍봉에서 멈추는데, 연주대는 호랑이가 엉덩이를 치켜 올린 모습이고 쌍봉은 호랑이의 머리 부분이 된단다.
그리고 이 머리 부분인 쌍봉에서 두 개의 맥이 갈라지는데 이것은 호랑이의 두 앞발을 뜻한다고 한다. 그 호랑이 양발 사이에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맹호출림형의 혈처가 된다.
▷관악구 봉천 11동 일원: 맹호출림형의 터로 호랑이 앞발 사이의 혈처가 된단다.
( 그 명당에서 어떤 장군이 나오셨나?? 무덤이 없었나? 우리나라 장군 한 분 놓쳤네.)
⑤ 행주형(行舟形): ‘배(船)가 떠나가는 형상’의 명당 터.
: 명당 형국 중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로 배는 물건을 싣는다. 항해하는 배에는 짐이 가득하니 이는 곧 부유함을 상징한다. 고로 이 명당의 발복은 가문의 번창이다.
평양, 나주, 전주 같은 큰 고을이 옛날부터 배(舟)모양이라 그랬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이런 형태의 명당터가 조선 여기저기 대단히 많지만, 모두가 완벽한 명당이 아니란다.
그러므로 모자람에 대해서, 또 어떤 위험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해야만 한다.
즉, 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많이 실으면 침몰하게 되니까 마을에는 무거운 기와집보다 반드시 초가집을 짓도록 한 전북 고창군 흥덕마을이 잘 지키고 있다.
또 마을에 우물을 파게되면 그 행위가 배 밑창을 뚫는 꼴이 되므로 ‘행주형’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한다. 이북의 평양이 그러했고, 안동의 하회마을이 역시 그러하다.
⑥ 와우형(臥牛形): ‘소가 누워 있는 형태’
: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야트막한 낮은 산이 이어져 있는 노년기 산세로 행주형 다음으로 많이 발견되는 명당이 ‘와우형’이다. 소는 우직하면서 유순한 짐승이지만 감당 못할 힘을 감추고 있고, 음식은 되새김질을 하여 자주 누워서 먹는다.
이 형상에서는 앞의 안산(案山)에 곡초의 형을 갖춘 터라면 큰 사람이 나오고, 자손대대로 누워 먹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는 풍요와 평안, 그리고 힘도 있고 유순하지만 새끼 낳는 수가 적어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에 비하면 자손의 번식이 떨어지는 점도 있다고 한다.
와우형의 혈처는 소의 뱃속과 머리에서도 각간(角間:양뿔사이)이란다. 그래서인지 우리네조상님들 살았던 곳곳에 우복동(牛腹), 우도의 쇠머리봉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55- 15,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댁.
▷충남 예산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과 묘.
▷전북 장수 산서면 오산리 월강마을, 안동권씨 묘: 와우형 적초안(案)의 명당.
⑦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의 터
: 혈처는 말의 주둥이 부분으로 목마른 말이 물을 들이켜는 입에 생기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혈처 앞에 연못이 있으면 더욱 좋고, 없다면 못을 파서 비보하는 것이 좋다.
이 형상에서는 목이 마를 때 오직 물 마실 것만 생각할 뿐이므로 이 명당의 발복 역시 오직 한 길로만 몰두해 가는 후손을 얻어 대대로 천석꾼이 난다는 명당이란다.
▷ 갈매못 성지: 보령시 오천 영보리 375- 2, 병인박해 때 천주교신자들의 처형장
: 성지 뒷산의 형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다하여서 지명도 ‘갈마연’ ‘갈마무시’ ‘갈마연동’이라 불렸던 곳으로 ‘갈매못’ 이란 지명 역시 갈마연(渴馬淵)에서 나왔다고 한다. 명당의 발복은 성지가 들어선 후 일어났는가?
옛날의 처형장이 지금은 천주교 순교성지로 변하여 순례자의 발길이 줄을 이어 방문하고 있는 명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신앙만을 생각하여 순교자가 되셨다??
⑧ 유혈(乳穴): ‘여인의 가슴과 같이 생긴 형상의 터’ 또는 ‘유두혈(乳頭穴)’
: 유두혈은 여인의 두 젖가슴이 정혈로 대지가 어머니의 몸이고 혈처는 젖꼭지이다.
이런 명당에서는 후손들이 총명하여 문필, 관직 등에서 귀한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대로 정혈을 통해 기맥이 후손들에게 젖 먹이듯이 전해지는감?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 본래 이곳은 동래정씨 최초의 정승인 정창손의 선산이었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동래정씨의 유두혈 명당을 빼앗아 왕릉터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인가? 동래정씨 큰 집이 되는 교서랑파에서는 정창손의 아들 정 괄(佸)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정승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작은 집 첨사공파인 정난종의 집안에서는 정승이 한 섬이나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같은 동래정씨 가문에서 14세 때 교서랑파의 정창손(영의정, 대제학, 청백리)과 첨사공파의 정난종(이조판서)이 각각 천하의 명당터에 부친을 모시게 되었는데 한 곳은 광릉터로 나라에 빼앗겼고 한 곳은 조선 8대 명당터로 이름 높은 예천군 지보면의 정사(賜) 묘가 그곳인데, 동래정씨 가문에서는 첨사공파 쪽에서 더 많은 인물이 나왔으니 말이 되나?
지금도 동래정씨 교서랑파에서는 정창손의 조부와 부친 정흠지의 묘는 남양주에, 정창손본인의 음택은 구정승골에, 아들 정 괄(좌의정)은 김포에 각기 음택이 따로 떨어져 있다.
어찌되었든 예종은 부친을 위해 광릉터를, 할아버지 세종의 이장을 위해서 여주의 영릉터를 신하들의 선영에서 각각 빼앗은 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재위 14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묻혔을 뿐이다.
▷포은 정몽주과 저헌 이석형의 묘: 용인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 너무 유명한 유두혈의 명당터로 두 혈처를 포은 정몽주선생과 증손녀사위인 이석형이 공유하고 있다. 포은의 손자 정보는 딸이 이석형과 혼인하였으니 일찍 죽자, 선영에 장사지냈고, 이후 이석형이 죽자 합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굴러들어온 돌인 연안이씨의 이석형의 혈처가 더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명당을 연안이씨에게 안겨주어서인지 저헌선생의 가문에서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의 3대 대제학을 비롯하여 부원군이 3명, 정승이 8명, 대제학 6명, 판서 42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 문과급제자 116명을 배출하였다.
이번 EP는 여기까지, 나머지는 다음 EP
조선의 명당 (명당의 형태 02)로 이어집니다... 형태 중에 백가학무형(百歌學舞形)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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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 풍수지리 말 꺼내셨을 때..안동하회마을이 떠올랐고..
울 시아버님 산소도 떠오르고..
우리나라 유수 기업 회장님들 집들 모여있는 성북동이니 한남동이니 장충동이니도 떠오르고..
역대 대통령 고향집도 떠올려보고..
아~~놔!!
혹 강북에 있는 아파트 중에 비슷한 조건 품고 있는 아파트 엄써요?히히..어케 좀 편히 묻어가보려고요...^^
어디에 모시었나요?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데, 용인쪽이신가요?? 명당은 마음 속에 있다니까요!!!
조선의 명당 (4~ 5편 예정) 끝나고 나면, 저절로 아시게 될 것 같습니다.
@하나또하나 이북 용천 태생이시라 이곳에 선산은 없고요..남북이산가족 찾을 때 매일 TV보시던 생각납니다. 고향에 두고오신 부모형제들 때문에..
생전에 장흥에 있는 신세계공원묘지 묫자리 좋다는 곳 한 40평 사두셔서 그곳에 모셨는데요. 그곳에 있는 묘 중에 세번째로 커유.ㅠㅠ시엄니께서 아마 당시 엥간한 집 한채값은 묘 꾸미는데 투자..그럼 뭐하나요?ㅜㅜ
근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산이라 해서 조상님들 묘를 선산에 모셨잖아요?
현재도 산부지를 사서 묘를 써도 신고만 하면 되나요? 당최 무지해서..헤헤
명당에도
저렇게 다른 형태들이 있다는걸 알았네요~
동래정씨가문 얘기도 흥미롭구요~~
늘 수고해주시는덕에
많은걸 알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일본인 천주교 신도들하고 갈매못에가서
대성통곡했던일이 생각나네요.
길이 없어 가는데 무척 고생을 했었는데
몇년후 하나아저씨랑 같이 갔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갈매못 정말 멋지게 변신을 했더라구요.
갈매못성지는 참으로 멋진곳입니다.
천종산삼 찾기 힘들 듯
명당의 조건 갖춘 곳 찾기 힘듭니다.
많이 개발되고 또 훼손되었기 때문이죠.
자연환경 좋은 마음 편안한 곳에 살다
죽으면 화장해 자연장으로ᆢ
화장화면 무해무덕하다고 합니다.
사후 음택명당은 무의미해졌으니
양택명당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늘 감사...
명당에 대해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석형의 묘가 본래 정몽주 선생의 명정이 떨어진 자리로 명당이라는 말을 엿들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가 밤중에 몰래 물동이로 물을 퍼다부어 물이 괴게 하였고, 다음날 포은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하자 묘터에서 물이 나고 있었고, 물이 나는 것은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옆 능선에 모시게 되었는데, 후일 자신의 남편 이석형을 이곳에 모셔 연안이씨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네요 ^^ 전설일 뿐, 정몽주 선생 묘를 이곳으로 천장 (이장)시에 (1406년 3월, 태종 6년) 증손녀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석형은 1415년 태어나 1477년 돌아가셨네요.
골상보다는 관상이요 관상보다는 심상이라...모든 것은 다 마음에서 비롯되나 봅니다
유익한 글 잘 보고갑니다 ㅎ
에고고 머리만 복잡시럽어지네요 뭐시가 뭔지 당최 무식혀서리
늘 하나형부님 대단하심요 열심히 시간나는대로 함 보고 조금은 덜 무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