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장엄경론 제12권
22. 공덕품[4]
[보살의 상의 차별]
이미 보살의 다섯 가지 사람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여러 상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집착하지 아니함과 청정함과
성냄을 항복시킴과 덕을 부지런히 함과
움직이지 아니함과 아울러 실제로 봄과
욕망이 있는 이를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문으로써 보살의 상을 말한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다’고 함은 능히 보시를 행하고도 여러 욕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청정하다’고 함은 능히 계를 가지는 것이다.
‘성냄을 항복시킨다’고 함은 능히 인욕을 하는 것이다.
‘덕을 부지런히 한다’고 함은 능히 정진을 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함은 능히 선정을 익히는 것이다.
‘실제로 본다’고 함은 능히 지혜를 닦는 것이다.
‘욕망이 있다’고 함은 능히 원을 일으켜서 보리의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살의 모양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따라 섭(攝)하고 번뇌가 없고
손해를 견디어 참고 아울러 용맹하고
방일하지 아니하고 많이 들어서
자신을 이롭게 함을 보살이라고 이른다.
[釋] 이 게송은 남을 이롭게 하는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따라 섭한다’고 함은 보시이니 항상 네 가지의 섭(攝)으로써 중생들을 섭하기 때문이다.
‘번뇌가 없다’고 함은 계이니 스스로 남에게 번뇌와 해로움을 일으키지 않음을 믿는 것이다.
‘손해를 견디어 참는다’고 함은 인욕이다. 남이 와서 거스르더라도 갚음을 더할 뜻을 품지 않는 것이다.
‘용맹하다’고 함은 정진이다. 괴로움에 있더라도 중생들을 제도하여 굴복하여 물러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일하지 않다’고 함은 이는 선정이다. 선정의 맛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와서 아래의 처소에 나아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많이 듣는다’고 함은 지혜이다. 일체 중생들의 의심을 능히 끊어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부지런히 행하는 것, 이것이 보살의 모양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재물을 싫어하고 욕심을 버리고
원한을 잊고 또한 착함에 부지런하며
교묘한 모양으로 악한 소견이 없이
안으로 머무는 것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공덕의 문에 머무는 것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재물을 싫어한다’고 함은 보시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재물을 간탐하는 허물을 지닌다면 악한 길에 떨어지고 와서 가난하고 궁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린다’고 함은 계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만일 다섯 가지의 욕락에 집착하면 능히 출가하여 계를 받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한을 잊는다’고 함은 인욕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남이 와서 자기에게 손해를 주더라도 맺힌 생각을 품지 않고 갚지 않는 것이다. 갚음을 품은 자는 돌을 그리는 것과 같고 갚음을 품지 않은 자는 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하나는 악한 길에 떨어지고 하나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
‘착함에 부지런하다’고 함은 정진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자기와 남의 두 이익을 위하여 항상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이다.
‘교묘한 모양’이라고 함은 선정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니, 분별로서 그치고 들고 버리는 세 가지의 모양을 능히 잘 분별하기 때문이다.
‘악한 소견이 없다’고 함은 지혜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일체의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 머문다’고 함은 원(願)의 공덕에 머무는 것이다. 안이라 함은 대승의 논(論)을 말하고, 머문다고 함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비를 갖추고 또한 부끄러움을 일으키며
괴로움을 견디고 즐거움을 버리며
염(念)을 가지고 아울러 잘 정하여
버리지 않음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물러서지 않는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자비를 갖추었다’고 함은 보시를 행함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괴로운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보시를 능히 행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일으킨다’고 함은 계를 지킴에 물러서지 않음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과 법을 관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그릇됨을 짓지 않는 것이다.
‘괴로움을 견딘다’고 함은 인욕함에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바람 불고 비 오고 추위와 더위 등과 거슬리고 손해 나는 일 등 일체를 다 참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버린다’고 함은 정진함에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정근을 능히 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즐거움에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念)을 가진다’고 함은 선정에 들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능히 잘 조섭하는 사람은 염의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잘 정(定)한다’고 함은 지혜의 물러서지 않음이다. 분별이 없는 지혜가 구족하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는다’고 함은 원(願)의 물러서지 아니함이다. 대승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괴로움을 제거함과 괴로움을 짓지 아니함과
괴로움을 포용함과 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음과
괴로움에서 벗어남과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음과
괴로워하고자 하는 이를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괴로움을 여의는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괴로움을 제거한다’고 함은 보시이다. 남에게 물건을 베풀 때에 남의 가난과 궁함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짓지 않는다’고 함은 계이다. 자기 혼자 있을 때를 경계하여 남을 괴롭히거나 번뇌스러운 일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포용한다’고 함은 인욕이다.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할 때에는 모든 괴로움을 능히 받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함은 정진이다.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할 때에 항상 물러서지 않음을 얻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함은 선정이다. 욕계(欲界)를 벗어나고자 할 때에 고(苦)의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함은 지혜이다. 3륜이 청정할 때에 분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괴로워하고자 함’은 원(願)이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즐겁게 생사에 머물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즐기는 것과 성품[性]의 법과
법을 꾸짖고 또한 법을 부지런히 하며
법에 자재하고 법을 밝히고
법을 향하는 이를 보살이라 한다.
[釋] 이 게송은 섭(攝)의 법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법을 즐긴다’고 함은 보시이다. 보시 등의 법을 즐기기 때문이다.
‘성품의 법’이라 함은 계이다. 자기의 성품을 보호하여 가지기 때문이다.
‘법을 꾸짖는다’고 함은 인욕이다. 성내는 법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법을 부지런히 한다’고 함은 정진이다. 대승의 법을 부지런히 행하기 때문이다.
‘법에 자재하다’고 함은 선정이다. 여러 선정에 자재하기 때문이다.
‘법을 밝힌다’고 함은 지혜이다. 위없는 지혜를 구족하기 때문이다.
‘법을 향한다’고 함은 원이다. 한결같이 큰 보리를 즐기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일러 법이라고 이릅니까?
[답] 일체의 바라밀 법이 다 따라 전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재물과 제지(制止)와 보호와 착함과 즐거움과
법과 승의 일곱 가지이니
일곱 가지의 불방일(不放逸)이다.
그러기에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불방일의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첫째는 재물의 불방일이니 이는 보시로 말미암는다. 보시를 않으면 견고하지 못하고 보시를 하면 견고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지의 불방일이니 지계로 말미암는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지을 것은 짓고 마땅히 짓지 아니할 것은 짓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보호의 불방일이니 인욕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남의 마음을 보호하여 두 가지의 해가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착함의 불방일이니 정진으로 말미암는다. 항상 정근을 일으켜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즐거움의 불방일이니 이는 선정으로 말미암는다. 여러 선정을 즐겁게 받으면서 또한 맛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법의 불방일이니 여실하게 참된 법을 능히 알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승(乘)의 불방일이니 큰 원으로 말미암는다. 설사 마왕(魔王)이 와서 그 보리의 마음을 무너뜨리더라도 또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수행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작은 죄와
참지 못함과 물러섬과 또한 어지러움과
작은 견해와 다른 승(乘),
일곱 가지의 부끄러움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부끄러움이 있는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첫째 수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이라 함은 간탐함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둘째 작은 죄의 부끄러움이라 함은 미세한 죄를 부끄러워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셋째 참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라고 함은 참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넷째 물러서는 부끄러움이라 함은 게으름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어지러움의 부끄러움이라 함은 선정에서 물러섬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작은 견해의 부끄러움이라 함은 나머지의 작은 집착에 부끄러워해서 법의 무아를 통달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다른 승의 부끄러움이라 함은 소승의 마음을 일으키어 큰 보리를 버림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지금 세상과 뒤의 세상과 버림과
정근을 일으키고 또한 신통을 얻으며
평등하게 말하고 큰 과인
일곱 가지의 섭(攝)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이 게송은 섭생(攝生)의 문으로써 보살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첫째 지금 세상에 섭한다고 함은 이른바 보시로써 현재의 중생을 섭하는 것이다.
둘째 뒤의 세상에 섭한다고 함은 이른바 지계로써 미래의 중생을 섭함이니, 뛰어나게 태어나는 곳을 얻어서 바야흐로 능히 섭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림의 섭이니, 이른바 인욕으로써 번뇌로 어지러운 중생들을 섭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정근을 일으키는 섭이니, 이른바 정진으로써 게으른 중생을 섭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신통을 얻는 섭이니, 이른바 선정으로써 다른 곳의 중생을 섭하기 위하여 그곳에 가서 교화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평등하게 말하는 섭이니, 이른바 지혜로써 하와 중과 상의 중생을 섭해서 평등한 마음으로 설하여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이다.
일곱째는 큰 과로 섭하는 것이니, 이른바 큰 원으로써 만일 부처님의 과를 얻으면 온갖 중생을 섭하여 남음이 있지 않게 함이다.
그러기에 이 게송들은 다른 문으로써 여섯 가지의 바라밀과 큰 원이 보살의 모양임을 말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이름의 차별]
이미 보살의 여러 상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여러 이름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라. 여러 보살을
또한 마하살이라 이르고
또한 지혜 있는 자라 이르고
또한 최상의 성취라고 이르며
또한 항복을 받는 자라 이르고
또한 항복하여 가진다고 이르며
또한 능히 항복받는 자라 이르고
또한 항복받는 아(牙)라 이르며
또한 용맹하다고 이르고
또한 최상의 성인이라 이르며
또한 도사(導師)라고 이르고
또한 큰 명칭(名稱)이라 이르며
또한 자비 있는 분이라 이르고
또한 큰 복덕이라 이르며
또한 자재한 행이라 이르고
또한 바로 말하는 이라고 이른다.
[釋] 이 열여섯 가지의 이름은 다 뜻을 의지하여 세운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의 보살이 다 이러한 명칭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러한 이름을 들으면 곧 이가 보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뜻의 차별]
이미 보살의 여러 명칭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여러 뜻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실의(實義)의 깨달음과 대의(大義)의 깨달음과
일체의 깨달음과 항상 깨달음과
방편의 깨달음,
다섯 가지의 깨달음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다섯 가지의 깨달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보살이라 이른다.
첫째 실의의 깨달음이니 인(人)과 법(法)의 무아를 깨닫기 때문이다.
둘째는 큰 뜻의 깨달음이니 자기와 남의 뜻을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체의 깨달음이니 일체 종지의 뜻을 깨닫기 때문이다.
넷째는 항상 깨달음이니 비록 열반을 나타내지만 깨달음은 다함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방편의 깨달음이니 깨달음이 중생의 근기를 따라 방편을 짓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나를 따름과 작은 견해와
여러 식(識)의 몸과
또한 헛된 분별에 있어서
네 가지를 깨닫는 것이 보살이다.
[釋] 다시 네 가지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보살이라 이른다.
첫째는 ‘나를 따르는 깨달음’이니 마음을 깨달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마음이라고 함은 아뢰야식을 이른다.
둘째는 ‘작은 견해의 깨달음’이니 뜻을 깨달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뜻이라 함은 이른바 아견 등의 네 가지 의혹의 모양이 서로 응하면서 아뢰야식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식(識)의 몸의 깨달음’이니 식을 깨달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식은 6식(識)의 몸을 이른다.
넷째 ‘헛된 분별’이라고 함은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참답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분별이 아니라고 함은 곧 전(前)의 마음과 뜻과 식이니, 일체 보살은 오직 이것이 참다운 분별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무경(無境)과 진의(眞義)와
영무(永無)와 또한 원만함과
또는 불가득(不可得)을 말하는
다섯 가지의 깨달음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다시 다섯 가지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보살이라 이른다.
첫째는 ‘무경(無境)의 깨달음’이니 의타의 성품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의(眞義)의 깨달음’이니 진실의 성품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무(永無)의 깨달음’이니 분별의 성품을 깨닫기 때문이다.
넷째는 ‘원만(圓滿)의 깨달음’이니 일체의 경계와 일체의 종자를 깨닫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불가득(不可得)의 깨달음’이니 3륜이 청정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3륜이라 함은
첫째는 응각(應覺)이니 이른바 보살의 경계이고,
둘째는 의각(依覺)이니 이른바 보살의 몸이고,
셋째는 각성(覺性)이니 이른바 보살의 지혜이다.
이 셋은 얻을 수 없다. 그러기에 불가득의 깨달음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성취와 처소와
태장(胎藏)과 수차현(隨次現)과
깊은 의심을 끊는[斷深疑]
다섯 가지의 깨달음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다시 다섯 가지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보살이라 이른다.
첫째는 ‘성취(成就)의 깨달음’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과를 이룸이다.
둘째는 ‘처소(處所)의 깨달음’이니 이른바 도솔천궁(兜率天宮)에 머묾이다.
셋째는 ‘태장(胎藏)의 깨달음’이니 이른바 어머니의 태에 들어감이다.
넷째는 ‘수차현(隨次現)의 깨달음’이니 이른바 태에서 나오고 애욕을 받고 출가를 하고 수행하여 도를 이룸이다.
다섯째는 ‘단심의(斷深疑)의 깨달음’이니 이른바 중생들을 위하여 큰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득(得)과 부득(不得)과 머묾과
자기와 또한 남에게와
말함이 있음과 말함이 없음과
아만이 있음과 아만을 끊음과
성숙하지 못함과 또한 이미 성숙함과
이와 같은 열한 가지를
일체를 다 능히 깨닫는다.
그러기에 보살이라 이른다.
[釋] 다시 열한 가지의 깨달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기에 보살이라 이른다.
‘득과 부득과 머묾’이라고 함은 그 순서대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깨달음이다.
‘자기와 또한 남에게’라고 함은 이른바 안의 깨달음과 밖의 깨달음이다.
‘말함이 있음과 말함이 없음’이라고 함은 이른바 거친 깨달음과 미세한 깨달음이다.
‘아만이 있음과 아만을 끊음’이라고 함은 이른바 하열한 깨달음과 뛰어난 깨달음이다.
성숙지 못함과 또한 이미 성숙함’이라고 함은 이른바 먼 깨달음과 가까운 깨달음이다.
그것은 성숙되지 못한 자의 깨달음은 오래 걸리고 먼 데서 바야흐로 깨닫게 되고 이미 성숙한 자의 깨달음은 가까운 데서 곧 깨닫기 때문이다.
「공덕품」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