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무엘하 제4강
말씀 : 사무엘하 8:1-10:19절
요절 : 사무엘하 9:7절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설날입니다. 설날은 명절 중에서 가장 비싼 명절입니다.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고 주변 어른들에게 선물하고 자녀와 조카들에게 세뱃돈 주고 나면 지갑이 정말 가벼워집니다. 더군다나 졸업 시즌까지 겹치는 해이면, 설날은 보릿고개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 ‘그들의 지갑은 흥하여야 하겠고 우리의 지갑은 쇠하여야 하리라’는 적용처럼 와닿습니다. 그래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은총을 베푸는 자리에 감사와 생명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은총을 베풉니다.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늘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8장부터 10장은 잔혹한 전쟁과 따스한 은총이 번갈아 나옵니다. 8장에는 몇가지 잔혹한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모압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점령하고 뒤이어 모압까지 점령합니다.(8:1,2) 그리고 모압 사람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후 줄로 재어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립니다. 성인은 다 죽이고 아이들만 남긴 것입니다. 전쟁사를 보면 잔혹한 장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몽골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성읍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보복했습니다. 점령지 사람들을 엎드리게 한 후에 그 위에 카페트를 깔아놓고 열흘 동안 먹고 마시며 파티를 벌입니다. 이는 고대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스탈린 학살 이야기는 얼마나 끔찍합니까! 전쟁터에서 양심과 윤리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이 벌인 일이기에 충격입니다. 왕의 자리가 그리 만든 것일까요! 유대전승에 의하면, 다윗은 사울의 박해 때 모압왕에게 부모를 맡겼는데(삼상22:3), 모압은 다윗의 부모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잔혹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3,4절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록했는데, 사로잡은 1,700의 말 가운데 100마리만 남기고 발의 힘줄을 끊어버립니다.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힘줄을 끊은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산악지대가 많았기에, 병거는 방어전쟁이 아닌 침략전쟁 또는 왕권을 과시하는데 유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거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신17:16) 다윗은 말씀에 순종하여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싶은 욕심을 결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다윗은 잔혹한 일을 저절렀지만 하나님은 다윗 편입니다. 6절과 14절에서는 반복하여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런 말씀이 내게 주신 일년요절 말씀이면 좋겠지요? ‘경민학사가 어디로 가든지 용산에 가든지, 육사에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재봉학사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우리 청년들이 어디에 가든지, 어느 대학 어느 직장에 가든지 이기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공을 받습니다. 그들의 금방패를 빼앗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많은 놋도 빼앗아 여호와께 드립니다.(7,8) 아람 뿐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이 알아서 은그릇과 금그릇과 놋그릇을 바칩니다.(9-11) 모압과 암몬과 블레셋과 아말렉을 정복하고 그들에게서 얻은 것들도 여호와께 드립니다.(12) 후대에 있을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명성은 계속 올라갔고, 결국에는 강국 에돔까지 속국으로 거느립니다.(13)이는 다윗 왕국 이전의 사사시대와 비교해보면 엄청난 반전입니다. 이들은 사사시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약탈했던 나라들인데,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안으로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힘씁니다.(15) 적재적소에 합당한 인재를 등용합니다.(16-18) 다윗의 나라는 날이 갈수록 강성해졌고, 이제는 밖으로나 안으로나 다윗왕조를 위협할 세력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힘이 생기고 나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처럼 보였던 사람이 주머니가 두둑해지니까 하늘 높이 교만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겸손은 단지 생존전략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성공의 시간은 사람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다윗은 잘 나가는 그 때에 사울의 집을 돌아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사울의 집과 요나단, 아버지와 아들이 다윗에게는 흑과 백, 겨울과 여름처럼 전혀 다른 이미지였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광야에서 헤매고 다니게 만들었던 원수입니다. 반면 요나단은 아낌없는 주는 나무같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사울을 생각하면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요나단을 생각하면 한없이 따뜻해집니다. 사울의 상처와 요나단의 은혜, 어느 것이 클까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인간의 본성은 상처에 예민합니다. 지난 주 아는 분 개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덕담하고 축사하고 여러 가지 선물로 격려했습니다. 이전 근무처의 책임자는 자기 사람들을 동원하여 축복해주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업하는 사람은 행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멘트에서 이전 근무처에서 받은 상처를 꺼내어 주변을 잠시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상처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끈질긴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제 자신만 보더라도 은혜의 기억들은 애써 노력해야 떠오르는데, 손해보고 상처받은 기억들은 생생한 동영상으로 남겨 놓기를 잘합니다. 상처는 너무도 쉽게 우리 영혼을 원망과 미움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의 상처가 아닌 요나단의 은총을 택합니다.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은총이 큰 것보다 요나단의 은총을 크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도움은 짧고 사울의 박해는 길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이지 않음으로 요나단의 은총을 갚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윗은 그 무엇보다 크게 여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상처에서 벗어나서 요나단의 후손에게 은총을 베풀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려면 나가 받은 은총을 크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총이 있습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고 이 땅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보다 큰 은총은 없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시련이나 아픔도 능히 견디고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37절에서 고백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다윗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이기고 은총을 베풀었듯이,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이기고 은총을 베푸는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은총을 베풀고자 사울 집안의 청지기를 찾습니다. 시바였습니다.(2) 발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를 불러 사울의 후손에게 하고 싶은 바를 전달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1절에서는 ‘은총’이라고 말씀했는데,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씀합니다. 다윗은 주고받는 모든 은총을 하나님을 통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요나단을 통해 나를 도우시는 손길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원수의 자식이기 이전에 나를 돕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의 자손들을 죽이지 않고 돌보겠다’는 약속 또한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요나단의 아들을 돕는 손길 또한 나의 손길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까! 요나단의 아들은 보행장애인이었습니다.(3) 블레셋 군대가 사울과 요나단을 죽이고 사울왕궁으로 쳐들어오자, 그의 유모가 서둘러 업고 도망치다가 부주의로 떨어뜨려 발을 절게 되었습니다.(삼하4:4) 그 후 므비보셋은 아는 사람 집에 얹혀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4) 고대인들은 장애를 신의 형벌로 여겼습니다. 장애인을 가까이 하면 하늘의 저주가 자기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집안도 망하고 육신도 망가졌습니다. 아무 도움이 안되는 사람인데, 다윗은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5) 사울 가문과 다윗 가문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므비보셋은 두려움으로 벌벌 떱니다. 단칼에 목을 날리라고 명령한들, 어느 누구도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씀을 선포합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가족처럼 아끼고 보호한 것처럼, 다윗 또한 므비보셋을 가족으로 영접합니다. 그의 본래 기업을 회복시켜 주고 매일 왕의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도록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받아 마땅한 죽은 개와 같은 자를 왕의 가족으로 대우해주시니,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갖도록 합니다. 기업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사울의 청지기였던 시바에게 이제는 므비보셋의 청지기가 되어 모든 실무를 담당하도록 명령합니다. 10절을 보면 시바의 아들은 열다섯이며 종은 스무명이나 되었습니다. 청지기가 그 정도 생활을 누렸다는 것은 사울 가문의 땅이 비옥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므비보셋은 남의 집에 빌붙어 살아가는 찌질이에서 벗어나 다윗 왕국의 왕자님이 되었습니다.(11) 12절에 나오는 그의 아들 미가는 역대서에 이름을 기록할 정도의 용사입니다.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의 죽음과 함께 망해버린 줄 알았던 가문과 그의 사람들이 다시 싹을 틔우고 일어서는 새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 또한 므비보셋처럼 세상에 휘둘리고 내 안에 있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이리 저리 어그러진 자들입니다. 진리의 길을 똑바로 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처럼 어그러진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므비보셋을 자기 식탁에 앉게 했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천국 잔치에 앉게 하십니다. 다윗이 기업을 주심으로 므비의 삶을 회복시켰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요나단의 은총이 다윗의 은총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듯이, 예수님의 은총은 우리의 은총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양들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은총을 받은 자들이 또다른 누군가를 향해 은총을 베풀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져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전수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을 은총의 릴레이 역사에 초대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악한 세상은 은총을 잇는 역사를 환영하지 않으며, 오해하고 대적하기에 익숙합니다. 10장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눈에게 조문단을 보내어 아버지 나하스에게 받은 바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그 때 그 시절, 암몬왕 나하스가 다윗을 지원했습니다. 다윗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울이 싫어해서였습니다.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다는 논리입니다. 암몬의 지원은 외교 전략이었고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다윗의 나라는 신흥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기에 굳이 고개 숙이며 조문단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암몬의 관리들은 다윗의 조문단 파견을 불순한 의도로 해석했습니다.(3) ‘다윗같이 강한 자가 뭐가 아쉬워서 오래전 일로 조문단을 보내? 정탐 목적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해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엄청난 모욕을 준 것입니다.(4) 수염의 절반을 강제로 깎아버립니다. 당시 수염은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절반을 깎은 것은 이스라엘의 자유인이 여기에서는 종에 불과하다는 메시지입니다. 의복 아랫부분을 잘라내어 끔찍한 성적 수치심을 갖게 했습니다.
그냥 돌려보내도 되었는데, 왜 이런 외교적 결례를 둔 것일까요? 자기들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했던 것입니다. 6-8절을 보면, 43,000명의 용병을 고용할 정도로 엄청나게 돈이 많았습니다. 암몬 자체의 군사들도 많습니다. 전쟁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군대를 앞뒤로 포위할 정도였습니다.(9,10) 기드온 300용사와 미디안 135,000명의 전쟁 같은 모습입니다. 잘 나갈수록 겸손히 은혜를 베풀어야 더욱 번성하는데, 그들은 힘만 믿고 무례와 상처를 주는 것에 용감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흘러갑니까! 이스라엘 군사령관 요압이 동생 아비새에게 말합니다.(11)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용병과 비교됩니다. 용병은 자기보다 강한 적을 만나면 도망치기에 바쁜데, 이스라엘 군대는 형제를 돕고자 움직입니다. 자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돌아보는데 익숙합니다.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UBF가 힘이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으면 공부 잘하고 취업 잘되고 결혼 잘하고 인맥 넓힐 수 있다? 그런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되었음을 믿고 동역하며 순종했던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난 해 동서가 제게 ‘예배 숫자가 어떻게?...’라고 물었습니다. 20명 내외라고 하자, 걱정스런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 목자님 생활은 어떻게?’ 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약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향해 은혜와 긍휼로 묶이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갖습니다. 요압은 그런 믿음으로 담대히 외칩니다. 12절입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기를 원하노라” 돈을 보고 싸우는 용병과 하나님을 보고 담대하게 싸우는 이스라엘 군대, 승리의 추가 어디로 기울어질지 뻔합니다. 용병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용병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맞은 편에 있는 암몬 군대까지 사기를 잃고 도망칩니다.(13-14) 두려움의 전염효과입니다. 이스라엘은 암몬-아람연합군을 물리치고 중동의 패권을 거머쥐는 결정적인 승리를 합니다.(15-19) 결과적으로 보면, 오래전 은총을 받은 그때 그 시절을 기억했던 것이 영광의 승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아이돌 출신 배우가 최근 어떤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로 호평 받았습니다. 그가 맡은 배역은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찌질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자들이 꽃미남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어찌 그리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원래 찌질한 사람이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노력했던 것은 찌질했던 그 때의 나를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찌질했던 시간 그 자체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찌질했던 그 때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찌질했던 그때 그 시절을 어둡게만 기억하고 있다면, 그때는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시절의 찌질함을 오늘까지 오게 된 디딤돌로 기억한다면, 그때의 찌질함은 오늘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나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이 그러합니다. 기도의 은총, 말씀공부의 은총이 그러합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위로받고 격려받은 은총, 모든 은총이 그러합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모든 은총을 잊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는 복된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