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미래소년 코난」을 비롯한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성」 등을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宮崎駿 ) 감독의 세계를 겨울방학을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말 더빙판을 소장하고 계신분들의 도움 부탁드립니다^^*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宮崎駿 )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미야자키 하야오. 하지만 지브리 스튜디오를 통해 하야오가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은 나이라는 선입견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를 향한 열망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 출발점 중의 하나가 바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미래소년 코난>이었다.
1970년대 말은 일본의 민영 방송사들 사이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새로운 붐이 조성되던 시기였다. 아사히, 후지, TBS(도쿄방송) 등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국영방송인 NHK도 애니메이션은 피해갈 수 없는 과제였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은 제작 비용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제작 기간도 길다는 것이었다. 여러 기획안을 검토하던 NHK의 눈을 반짝거리게 만든 것은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로 이름이 난 닛폰 애니메이션(Nippon Animation)의 기획서였다. 닛폰 애니메이션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 <프란다스의 개>,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간머리 앤> 등은 지금도 국내 방송에서 다시금 소개되고는 한다. 닛폰 애니메이션사에서 경력을 쌓아가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프란다스의 개>에서는 원화를 담당하였고,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작화나 화면 구성의 일부를 담당하기도 했다. NHK와 닛폰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위해 여러 기획안 중 <2222년 미래소년 코난>을 채택, 하야오를 전격 발탁하게 된다. 제출된 기획안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그린 서스펜스 이야기다. 강력한 과학병기의 사용으로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나며 대해일이 일어 지구상의 대부분 인간이 죽어 버렸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인류의 생활을 바로 세우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한 명의 용감한 소년과 한 명의 따뜻한 소녀가 중심이 되어 미소를 잃지 않는 기지와 단단한 신뢰로 맺어진 우정을 통해 … 거대한 악과 싸워 인간의 미래를 지키자는 장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애니메이션에서는 묘사해낼 수 없는 박력으로 가득 찬 ‘어른도 아이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 서스펜스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 기획 의도는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이름으로 1978년 4월 4일에 첫 방영된 작품의 의도일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요약본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한 인류종말이라는 배경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 온 하야오 드라마의 설정이자 세계관이었다.
<미래소년 코난>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인 알렉산더 케이가 1970년에 발표한 <멸망의 파도>(The Incredible Tide)였다. 일본에서는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소개 되었고, 일본어 제목에서는 다분히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시키는 의도가 느껴진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설정이 바뀌기는 했지만 작품의 주요한 두 공간인 산업과 과학, 문명의 도시 ‘인더스트리아’와 수백만 명의 소년소녀가 환란을 피해 살아남은 ‘하이하바’라는 설정은 고스란히 차용해왔다. 하이하바의 원래 지명은 High Harbor, 즉 높은 항구라는 뜻인데 일본식 영어를 따라 하이하바로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물론 알렉산더 케이의 소설에는 무질서한 상태인 하이하바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흡사하게 권력과 질서의 통치가 필요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에 비해 하야오가 그려내는 하이하바는 원시공산주의에 가까운 협업사회로 그려지고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는 평등의 정신이 충만하다.
일본뿐 아니라 국내의 어린이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주며 큰 인기를 모은 <미래소년 코난>
하이하바를 통해 그려내는 하야오의 공동체 모습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바람계곡’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바람계곡의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경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군국주의국가 ‘토르메키아’나 멸망을 경험하는 ‘페지테’ 국의 모습은 하야오의 세계가 다양한 국가이데올로기를 묘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원령공주>에서도 국가의 창생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많은데, 이러한 측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른 지면을 통해 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미래소년 코난>의 기본 골격은 ‘홀로 남은 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존하게 되는 코난이라는 소년이 우연히 섬에 도착한 라나를 돕게 되고, 잡혀간 라나를 따라 계급주의 사회이자 전체주의 사회인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로의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 이후 세상과 단절된 채 외톨이처럼 살아온 코난이 경험하게 되는 다른 두 세계의 모습이다. 하이하바에는 마을 사람들 이외에도 고아 소년 무리처럼 다른 지향점을 지닌 공동체 집단이 공존하고 있다. 좀 더 세밀하게 보자면, 다양한 사람들의 거주 환경이나 이데올로기들이 묘사되고 있는 셈이다.
소년들의 모험담이라 할 수 있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아주 나쁜 악당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국내에서는 ‘포비’로 번역된 ‘지무시’를 만나 우정을 쌓는 과정은 소년들의 모험담에 걸맞은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인더스트리아의 권력자인 레프카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악당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약삭빠른 다이스 선장이나 결말 부분에서 그와 결혼을 하게 되는 몬스키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는 선한 사람들로 묘사가 된다.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하이하바를 떠나 신대륙을 찾아 나서고, 코난은 홀로 남은 섬이 계속되는 지진과 지각변동으로 인해 더 큰 땅덩어리로 융기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착하여 새로운 인류로 살아갈 것이다.
<미래소년 코난>의 제작 이후 1979년에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1984년에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선보인다. ‘아니마주’에 연재했던 자신의 만화를 원작 삼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서사, 환경 문제, 일본 사회에 대한 통찰 등을 담은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기부터 하야오는 자신의 뚜렷한 색깔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참여한 스태프들을 기반으로 다카하다 이사오와 같은 또 다른 거장 애니메이터들과 연합하여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다. 이때부터 <천공의 성 라퓨타>(1986), < 이웃집 토토로>(1988)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하야오 월드 혹은 지브리 월드의 흐름이 시작된다.
스웨덴 실비아 왕비의 일본 방문 때 지브리 미술관을 가이드하고 있는 하야오
하야오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아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간 탓에 여기에서는 <이웃집 토토로>와 같은 유명한 작품을 제외한 몇 작품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992년에 발표한 <붉은 돼지>는 일본 내에서도 “방향성을 잃었다. 비일본적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시 흥행작이었던 <원초적 본능>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1920, 30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아나키스트인 주인공을 통해 하야오 특유의 반전사상이 펼쳐지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야오는 일본의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음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하야오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색채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기보다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다양한 영웅들을 그려내는 특유의 태도가 아나키스트에 더 가깝도록 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997년에 소개된 <원령공주>는 시대극이자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을 보였던 작품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대작이라는 점에서도 경제학적인 해석도 가해졌던 작품이다.
하야오의 아들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후계자인
미야자키 고로의 작품 <게드전기>
하야오의 인터뷰나 그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언급만으로도 이 지면을 넘치도록 채울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하야오와 미국의 유명한 SF 작가인 어슐러 K. 르귄과의 관계를 특별하게 살피고자 한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 된 측면이다. ‘땅바다’ 혹은 ‘지구바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 어스시(Earthsea) >는 6권으로 이뤄진 어슐러 K. 르귄의 판타지 소설이다. 일본에서는 <게드 전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태초의 어스시에는 인간과 용이 공존하며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태초의 이름은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최고의 마법사 지위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 바로 ‘새매’ 혹은 ‘게드’이다. 평소 그는 새매라고 불린다. 새매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게드는 진짜 이름으로 신뢰를 얻은 자만이 이 이름을 알 수 있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마법을 통해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서도 익히 보았던 설정이다. 마녀 유바바와 계약을 맺은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에서 글자를 떼어내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하쿠는 센이 된 치히로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지 않은 치히로는 마녀의 마법으로부터 풀려나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진짜 이름과 함께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세계의 균형이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마법사는 그 힘으로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모습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현자의 반열에 오른 마법사들은 ‘마법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한다. 마법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곳에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을 사용한다면, 힘의 사용으로 인해 다른 곳은 가뭄에 목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부해(腐海)'로 가득한 오염된 세계를 묘사한다. 곰팡이의 숲인 부해는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점점 더 좁히고 있다. 부해의 숲으로 들어간 나우시카 공주는 진정한 부해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부해는 단순한 파괴의 산물이 아니라 공기와 물을 정화하기 위한 균형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하울이 거대한 새 모양으로 변신한 뒤 제 모습으로 돌아오기 힘들어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역시 <어스시>에서 경고하는 부분이다. 변신마법은 본성을 망각시킬뿐더러 이를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본래대로 돌아오기 어려워진다. 이처럼 하야오의 작품 속에는 르귄의 세계가 중요한 철학으로 깔려있다.
르권의 판타지 소설 <어스시>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왼쪽),<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오른쪽)
하야오의 장남인 미야자키 고로(그는 일본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의 관장을 지낸 인물이다.)가 차세대 지브리의 후계자로서 <게드 전기 – 어스시의 전설>를 만들어 국내에 방문했을 때 필자와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 <게드 전기>는 어슐러 르귄의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계와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가령 ‘진실의 이름’에 관한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키고, ‘세계의 균형’에 관한 문제는 <원령공주>와 닿아 있다.
고로: 당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슐러 르귄이 쓴 판타지 소설 <어스시(Earthsea)>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를 만들었다. 그 이후의 모든 작품이 <어스시>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웃집 토토로> 역시 그 중 하나다. 예전에 토토로와 인간은 하나였다.
필자: 그렇다면 토토로가 <어스시> 시리즈에 등장하는 용인 셈인가?
고로: 맞는 말이다(웃음). 나에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제 아버지인 동시에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아버지이다. 르귄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철학을 제공한 부모 격인 셈이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르귄은 나의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하야오의 세계에 대해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시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엿볼 수 있는 극우적인 태도와 전개에 대해 비판의 견해를 보였다.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듯한 하야오의 세계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하는 견해들도 많다. 하지만 그가 일궈낸 지브리 스튜디오가 오늘날 디즈니로 대변되는 애니메이션 스타일과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스타일과 세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하야오의 의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 작품을 어느 정도 흥행시켜야 다음 작품을 제작할 경제적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에 하야오의 색깔이 보수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보여주는 낭만적인 풍경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의 대안적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를 알려주는 사인처럼 하늘을 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1941년 1월 5일 일본 동경에서 태어난 그는 비행기 회사를 경영하는 큰아버지와 공장장인 아버지 덕분에 비행에 친숙했을 것이다. 단순한 그림쟁이가 되기 싫었던 탓에 대학에서 일부러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던 하야오는 도에이 동화에 공채로 입사하면서 훗날 함께할 여러 지인들을 만난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조금 더 자유롭게 애니메이션을 창작하는 것이었고, 지브리 스튜디오는 그에게 요람이 되어 주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를 비롯하여 인간적 유대로 똘똘 뭉친 하야오의 세계를 엿보게 만든다.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모험심과 꿈꿀 권리야말로 그의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기다려지는 중요한 이유이다.
☞ 자료출처: 네이버 캐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계
안녕하세요?! 영화블로거 루트입니다. 이번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소개&정리해보는 글을 준비했습니다. 멜로장르와 100% 맞아떨어지는 주제라고 보기엔 좀 애매하지만, 애니메이션 거장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한 번 제대로 다뤄보고 싶은 욕심에 이렇게 작성을 해봅니다. 아무쪼록 흥미로운 글이 되면 좋겠네요.
글ㅣ 루트 구성ㅣ 네이버 영화
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이 작품은 97년에 나오는 [모노노케 히메]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립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네요. 13년의 차이만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좀 더 선/악의 이분법이 뚜렷한 인물관계와 명확한 해피엔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도 참고해서 두 작품을 함께 비교감상해보셔도 좋겠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거대문명이 멸망하고, 천 년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땅과 바다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고, 그나마 인간들이 살만한 지역들조차 "부해"라는 유독가스를 내뿜는 숲이 확장하면서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불과 물"입니다. 불은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문명을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 직접적으로 태우기도 하고, 총이나 거신병 같은 무기를 만들 때에도 사용되지요. 인간 이외에 다른 존재들을 파괴의 대상이나 도구, 수단으로 삼는 이기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물은 자연이 가지는 치유와 공존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위협하던 부해이지만, 그 지하에서는 오염된 지구를 되살리는 맑은 공기와 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부해의 확장과 그것을 막으려는 인간의 표면적인 대립 속에서도 인간은 오로지 자신들만의 생존을 목적으로 삼는 반면에 자연은 인간이 파괴한 환경을 치유하고 인간과의 공존의 가능성을 품는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네요.
나우시카의 고향이 "불"이 아니라 "바람"을 동력으로 하는 점도, 그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자연(부해, 오무)은 파괴와 치유의 이중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연을 이용하고 황폐화시킬 때에는 독을 내뿜는 부해와 붉은 눈으로 변하여 돌진해 오는 거대곤충 오무처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인간이 오만한 이기심을 버리고 자연과 공존을 택한다면 부해는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오무는 인간의 상처를 고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자연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나우시카"의 소통이 필요하다 전합니다.
그런 이해와 소통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도 중요하겠습니다. 부해를 없애려고 만든 거신병이 제대로 임무를 완료했다면 인간들은 계속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겠죠. 또한 이웃국가를 견제하겠다고 오무를 잔인하게 이용하다가 자신들의 도시를 잃어버리고 오무떼의 습격이라는 재앙을 불러옵니다. 오무의 시체가 부해를 넓히는 역할을 하므로, 오무떼를 물리쳤다해도 부해의 급격한 팽창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졌겠지요.
이처럼 오무들을 학살하는 거신병의 무지막지한 무력(=문명의 힘)으로 인간이 일시적으로 자연의 우위에 설 수도 있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는 결국 인간의 자기파괴로 이어지는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행위임을 잘 보여줍니다. 자연은 인간이 반드시 공존해야만 하는 운명공동체인거죠.
2) [천공의 성 라퓨타], 1986
"지브리"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첫 작품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메세지나 세계관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서, 그 공존을 방해하는 원인인 "인간의 이기심. 그 파괴적 욕망"으로 중심축이 살짝 옮겨졌다 보면 되겠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감성과 함께 보다 유쾌한 분위기를 띄고 있고요.
라퓨타는 과거에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 세계를 지배했던 대제국의 성입니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광선과 로봇, 성을 공중에 띄울 수 있는 비행석 등등 고도의 문명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버려진 성이지요. 거기에 남겨진 보물을 노리는 인물들과 문명기술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물, 그리고 그런 욕심에 휘말린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에서는 항상 주인공이 날게 됩니다. 중요한 만남 혹은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꼭 "비행"이 이루어지는데, 일종의 "이상" 혹은 "이상향"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이 하쿠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에도 날고 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두 주인공의 만남도 날면서 이루어지고 엔딩에서는 계속 땅을 걸어다니던 하울의 성이 하늘을 나는 것으로 그 이상적인 변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하늘을 나는 라퓨타는 소년 파즈가 지닌 동경의 대상으로 나오지요.
라퓨타가 가진 중요한 차이는 마법이나 용과 같은 판타지적인 힘이나 바람과 같은 자연에 의한 비행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문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행이라는 점입니다. 즉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결코 물질문명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바로 인간들이 지닌 이기심. 그 파괴적인 욕망을 제시합니다. 그의 작품 속 인간들은 단순히 자연만을 도구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까지도 지배하고 짓밟으려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런 이기적인 "지배욕"에 의해 문명의 이기들이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수단으로 악용되기 때문에 물질문명에 의한 이상향은 불가능하다 말하네요. 과거에 세상을 지배하던 라퓨타 일족들이 물질문명의 집대성인 성을 버리고 땅으로 돌아간 것도, 이상적인 삶이 하늘 위의 성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에 대해서 마냥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에 충실하던 인물들의 변화, 순수로의 회복을 동시에 전하거든요. 그의 작품 속에서 또 항상 등장하는 순수한 소녀의 존재가 그 회복(=치유)의 촉매제입니다. 나우시카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이루어내듯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가 하울과 황야의 마녀를 변화시키듯이, 라퓨타에서는 시타가 해적들을 변화시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문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녀의 주문에 의해 인간의 목적에 의해 구축되었던 부분들이 무너지자, 자연에 동화된 라퓨타가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네요.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난 로봇이 나무를 가꾸고 동물들과 친구가 되듯이 말이죠.
3) [이웃집 토토로], 1988
미야자키의 작품도 조금씩 변화를 가집니다. 그 중에 [이웃집 토토로]부터 나타나는 특징은 "판타지"가 되겠군요. "토토로"라는 판타지적 존재가 등장한 이후로, 미야자키의 작품 속에서는 마녀, 돼지, 용, 마법사 등등 다양한 비현실적인 요소가 작품에 계속 등장합니다. 이런 발견(?)도 영화를 즐기는 소소한 즐거움이겠지요.
[이웃집 토토로]는 시골마을로 이사온 두 어린 소녀가 숲에 사는 정령과 같은 존재인 토토로를 만나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다소 저연령층에 맞춘 듯한 인상입니다. 이는 가장 최근작인 [벼랑 위의 포뇨]도 마찬가지이고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모노노케 히메]와 유사하고, 또한 여주인공의 성장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마녀 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자연과 인간(문명)이라는 대주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조금씩 변화와 반복을 오가는 필모그래피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네요.
어린 두 소녀는 먼지의 정령이라 볼 수 있는 숯검댕이와 숲의 정령인 토토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두 소녀의 눈에만 보이지요. 이웃집 할머니가 자신이 어릴 적에는 보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어린 순수를 간직한 경우에만 만남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 속에 계속 등장하는 "순수한 소녀 이미지"의 직접적인 반영이겠습니다. 자연과의 소통을 이루는 존재들이죠.
이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 할 요소는 "어머니의 부재"입니다. 단순히 토토로라는 판타지적 존재가 어린 아이들과 생물학적 어머니와의 단절을 회복시킨다는 표면적인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어머니(대자연)와 소녀들(인간)사이의 단절이 토토로의 도움(=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회복된다는 텍스트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병에 걸린 어머니(오염된 대자연)에게 옥수수가 건강에 좋다고 선물하는 것도 농사라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공존의 결과물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요. 토토로가 준 도토리 씨앗을 밭에 묻어서 싹을 틔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대신하여 소녀들을 돌봐주는 이가 할머니인데, 그녀는 이미 정령들을 볼 수 있는 순수를 잃은 상태(=늙음)이지요. 그래서인지 토토로와 어머니(=자연)가 보고 싶은 어린 소녀는 계속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납니다. 결국 [이웃집 토토로]도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소통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토토로(=자연이 지닌 생명력, 가치)의 존재를 믿고 친하게 벗하는 소녀(=인간)들에게 어머니(=대자연)는 건강을 회복하여 돌아오겠지요.
4)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토토로부터 판타지적 요소가 추가되었다면, [마녀 배달부 키키]부터는 "성장"이 플롯의 중요요소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나우시카나 라퓨타의 시타와 같은 소녀들은 큰 캐릭터의 변화없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등장하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토토로의 두 소녀들이 약간의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보이더니만, 키키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장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녀의 딸로 태어난 키키는 관습에 따라 13살이 되어 낯선 땅으로 홀로 수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택한 대도시는 각자 살기 바쁜 곳으로 마녀의 존재도 잘 모르네요. 그곳에서 마녀로서의 자신을 되찾아가는 키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제부터 정리하자면, 문명의 발전을 이룬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전통"의 가치를 다룹니다.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라 그런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로 다루던 주제들과는 다소 이질적이긴 합니다.
온통 검은색 뿐인 마녀복장이라든가, 낡은 빗자루라든가. 13살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의 마음에는 그리 마뜩치 않지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또래의 소녀들을 보며, 또 그런 소녀들과 어울리는 소년을 보며 괜히 토라지게 됩니다. 장작을 쓰는 전통적인 방식의 오븐으로 구운 할머니의 파이를 배달하자 시큰둥해 하는 손녀의 반응에도 상처를 받고요. 까마귀를 다루는 능력처럼 마녀로서의 힘을 잃어가는 처지이며, 문명의 이기인 거대 비행기가 키키의 유일한 능력인 비행마저 대신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마녀인 소녀는 쇠락해 가는 전통과 물질문명으로 치장되는 현대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일종의 성장통이라 할 수 있겠죠.
그 고민의 해답은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이분법에서의 탈피로 이루어집니다. 전통의 가치는 옛 것. 혹은 오래된 것이라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는거죠. 하늘에는 헬륨가스로 만들어진 거대 비행기가 날아다니지만, 친구인 소년은 자신 만의 비행기를 만들려고 여전히 노력 중이지요. 또한 화가를 꿈꾸는 여자도 자신만의 그림을 위해 계속 그리고 또 그리는 중이지요. 키키도 마녀로서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금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형식적으로 느껴졌던 관습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되고, 마녀 배달부로서 현대사회에 적절히 적응하게 되네요.
중요한 포인트는 돌풍에 사고가 난 헬륨비행기와의 비교입니다. 그 비행기에서 추락할 위기에 빠진 친구를 키키가 빗자루도 아닌 막대솔을 타고서 날아가 구해냅니다. 현대의 물질문명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이나 그 빈틈을 전통이 메꿔줄 수 있다는 상징적인 비유이겠습니다. 빗자루가 아닌 막대솔인 것은 전통이 시대변화에 따라 그 고유의 특징이나 모습을 다소 잃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추가하자면 과거에는 13살부터 독립하여 일을 했는데, 지금의 13살은 어른의 보호 속에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다소 비판적인 시선도 엿보입니다. 이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에는 현재의 일본이나 젊은 세대들에 대한 훈계조의 메세지가 종종 튀어나옵니다.
5) [붉은 돼지], 1992
41년생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버지는 전쟁 당시에 군수공장인 "미야자키" 비행장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했습니다. 비행장은 백부의 소유였고요. 그의 작품 속에서 "비행"이 이상(향)으로 표현되는 것도 그런 성장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추측할 수 있겠네요.
또한 1차대전이 끝난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비행기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붉은 돼지]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전범국인 일본의 거장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껄끄럽고 불편할 수 있겠지만, 다행히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히려 반전의 메세지가 뚜렷합니다. 이런 부분도 참고하시면 감상이 조금은 더 흥미로우실 수 있겠군요.
주인공 포르코는 돼지로 등장합니다.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오로지 그만 돼지얼굴을 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몇몇 대사를 통해 유추가 됩니다. "국채를 구매해서 애국을 하시죠?"라는 말에 "돼지에게 국가는 없다." 라고 답하고, 다시 이탈리아 공군으로 돌아오라는 친구의 권유에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로 살겠어." 라고 말합니다. 즉 그가 돼지로 변한 것은 더 이상 국가 혹은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전쟁의 소모품으로 비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파시즘에 휘말려 개인을 잃고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또한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니까." 라는 그의 대사에서 보듯이, 파시즘에 물드는 인간이기를 거부한 포르코는 대신에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완전한 돼지와도 선을 긋습니다. 인간들이 가진 이기적인 지배욕(=전쟁)의 수단으로서의 "비행"이 아니라, 정말 비행을 사랑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비행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순수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바로 비행기 설계사 "피오"이지요. 그녀는 파르코 못지 않게 비행기를 사랑합니다. 게다가 폭력의 수단으로 비행기를 다루려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무릎쓰고 반대하기까지 하지요. 그녀 덕분에 포르코는 비행을 전쟁과 돈벌이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인간과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에 물들어 개인을 잃고 폭력의 수단이 된 인간들에 대한 불신을 누그러뜨리게 됩니다. 그런 피오와의 만남과 키스 덕분에 잠깐씩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인간에 대한 믿음"의 회복이 그가 스스로에게 건 마법을 푸는 키워드이기 때문이겠지요.
포르코는 돼지로 살기로 마음먹었기에 지나와의 사랑도 거리를 두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인간으로서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일테니까요. 하지만 [붉은 돼지]는 끝내 그가 사람으로 돌아왔는지, 지나가 기다리는 정원에 나타났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지 않고 열린 결말로 마무리합니다. 그저 그에게 비행은 "자유롭되 싸우지 않는 것"이라는 메세지만을 뚜렷히 남깁니다. 아마도 "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닌 진정한 인간다운 삶." 이것에 대한 선택이 포르코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네요.
6) [모노노케 히메], 1997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상당부분 유사합니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을 다루는 논의 깊이가 훨씬 깊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각자의 가치관과 당위가 맞부딪치며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의 인과관계를 뚜벅뚜벅 밟아갑니다.
이번에도 자연이 가지는 파괴와 치유의 양면성이 부각됩니다. 자연신으로 나오는 시시가미는 아예 생명 그 자체로 삶과 죽음으로 의미가 확장되네요. 낮과 밤의 모습까지 다르고, 발을 딛으면 생명이 피어나고, 그 발을 떼면 다시 시들어버리죠. 중요한 요소는 시시가미가 결코 자연계쪽 신(멧돼지, 늑대)들의 편도, 그렇다고 인간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파괴와 치유의 순환을 가지는 대자연 속에 인간과 개별단위의 자연은 모두 종속된 개체들인거죠.
이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언급했던 어머니(대자연)와 소녀들(인간)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결국 [모노노케 히메]에 이르러서는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이 아니라, 아예 인간조차 대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세계관의 변화를 보입니다.
그 변화는 불분명한 선/악구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서 계속 화해와 회복의 코드로 등장했던 "소녀(=원령 공주)"가 이번에는 절대적 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물질문명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반대하며 자연의 편에 서지만, 뚜렷한 선/악의 구분이 없는 갈등구조 속에서는 공존을 이루는 매개체로 역할을 하지 못하네요.
마찬가지로 계속 비판적인 대상으로 비추어졌던 물질문명에 대해서도 조금은 수용적인 시선을 나타냅니다. 뛰어난 기술을 지닌 타타라 마을의 촌장인 에보시는 주변 권력자들로부터 자신의 마을사람과 문둥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철과 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재앙신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만 결코 악으로만 몰아부칠 수는 없지요.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대표한 두 여성의 사이에는 아시티카가 위치하게 됩니다. 싸움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노력한 그의 노력에 의해서 원령 공주는 그를 사랑함으로써 인간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고, 에보시도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더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 밝힙니다. 이처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지었다면, [모노노케 히메]는 보다 현실적인 화법으로 극적인 해결이 아닌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을 강조합니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모두에게 좋은 유토피아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작은 노력과 변화들이 쌓이며 변해가는 것이니까요. 그런 노력과 변화에 대한 인식이 바로 원령 공주와 에보시의 성장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에서 대자연에 종속된 인간과 자연은 이제 공존을 넘어서 공생관계로 자리잡게 됩니다.
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점차 복합적인 화두를 던지는 방식으로 변화를 보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치히로의 성장을 통해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언급된 바 있는 "전통"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가져오고, 동시에 물질문명을 이루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요소로는 돈만 밝히는 탐욕과 소외를 끄집어냅니다.
일단 한 줄로 이 작품을 설명하자면, 치히로의 성장영화입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이의 삶에서, 스스로 걷는 자신의 삶으로의 변화이지요. 예를 들어서 치히로가 손에 꼭 쥐는 바람에 이별선물로 받은 꽃이 시드는 것은 "아이의 삶"이라는 과거와 이별하지 못한다면 꽃이 시들 듯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인 동시에 성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상태를 나타냅니다. 동굴(=자궁)을 거쳐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널리 쓰이는 재탄생에 대한 상징이지요. 부모와 떨어지고, 이름의 일부를 잃는 것도 재탄생을 위한 과거와의 단절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치히로가 신들의 세상에서 겪는 모험은 과거의 자신과 단절하고, "재탄생"을 위해 성장통을 겪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성장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우선은 인사라는 기본적인 예의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상당히 일본답지요. 그 다음은 모두가 꺼려하는 "부패의 신"의 목욕을 돕는 것으로 귀천과 이득을 따지지 않고 성실히 노동에 임하는 자세가 나타납니다. 이런 인사와 노동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젊은 세대들에게 충고하고 싶어하는 부분으로도 보이네요. 그 다음은 희생과 사랑을 간직한 마음으로,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위해 써야 하는 약을 괴물이 된 가오나시와 생명이 위험한 하쿠를 구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치히로가 얻은 것은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통찰입니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강의 신인 "하쿠"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것과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한 눈에 알아보는 통찰이 바로 성장의 완성이 됩니다.
그 통찰은 탐욕의 화신인 유바바가 쥐로 변한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대비가 되지요. 또한 작은 방에 갇혀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존재였던 유바바의 아들 보가 겪게 되는 변화(독립, 노동, 이타심)는 치히로가 겪는 성장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탐욕과 소외에 대한 비판은 갖가지 상징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입구에 있는 버려진 돌신당은 물질문명의 탐욕에 빠지는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전통이 버려졌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잘못된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무분별하게 성능을 뽐내며 질주하는 외제차의 모습은 잘못된 줄 뻔히 알면서도 자연을 짓밟은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과 맞닿습니다. 무엇보다 예의를 갖추지 않고서 돈만 지불하면 다 괜찮다는 사고방식으로 게걸스럽게 식욕을 채우다가 돼지로 변하는 부모는 물질문명의 탐욕에 빠진 현대인의 자화상쯤 되겠지요.
온천장 직원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생긴 점도 자본주의라는 탐욕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자신도 개성도 모두 잃고서 "돈"만 탐하는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되지 못하는 가오나시를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외면합니다. 그 황금만능주의 속에서 철저히 소외당했던 가오나시라서 치히로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황금을 쏟아내고 폭력을 행사하는 미성숙한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네요. 인상적인 장면은 치히로가 탄 전철 속 모든 존재들이 가오나시와 같은 반투명한 모습을 띈다는 점입니다. 전철을 타고 아침 출근 길에 오르는 모든 현대인들의 모습과 유사한 그 풍경은 "소외"가 특별한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우리사회 모두의 문제임을 넌지시 강조하네요.
이러한 탐욕과 소외로부터의 해방도 개인의 성장 조건과 일치합니다. "유바바"처럼 직접 일하지 않고 화려하게 치장한 공간에 가만히 앉아서 부를 축적하는 마법(=주식)과 달리, 검소한 생활 속에서 직접 노동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는 "제니바"의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치히로를 위한 머리띠를 선물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탐욕과 소외를 버리고 함께 하는 노동과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전합니다. 또한 버려지고 있는 전통, 망가지고 있는 자연, 소외를 당하고 있는 인간 등등 물질의 탐욕에 휩싸여서 "행방불명"되고 있으니, 그 소중함을 알아보는 통찰이 필요하겠지요.
결국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작게는 치히루 같은 개인의 성장을, 크게는 탐욕에 빠진 사회의 성장을 동시에 촉구하는 작품이네요.
8)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다루어왔던 여러 가지 주제들을 "사랑"으로 통합시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입니다. 결국 모든 것의 해답은 "사랑"이라고 말하네요.
저주에 걸려 할머니가 된 소피의 외모는, 그녀의 "늙은 마음"을 상징합니다. 활발하고 인기가 많은 동생과 달리, 외모에 자신이 없다 위축되어 자신감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찾지 못하는 중이거든요. 보시면 소피가 마담 설리만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와 하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말할 때는 젊어지고, 스스로 예쁘지 않다 말할 때는 다시 늙어집니다. 그녀가 받은 저주는 "마음의 젊음과 늙음"을 표현한다 볼 수 있겠네요.
하울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염색이 잘못되어 금발을 잃자 좌절하지요. 그에게서도 소피처럼 "외모"가 뛰어나야만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게다가 마법사인 그는 순수한 지성(=지식인)을 뜻합니다. 스승인 설리만(=국가권력)의 하수인이길 거부하고, 황무지의 마녀(=타락한 지식인)처럼 될까 무서워 하는 겁 많고 여린 존재이지요. 지저분하고 정돈 안 된 하울의 성 내부의 모습은 고통스러워 하는 하울의 내면심리를 그대로 표현합니다. 어른인 척 하는 소년의 모습이 바로 하울의 자아가 반영된 것이라 이해하시면 되겠네요.
이러한 소년과 소녀가 만나 사랑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하울을 구하기 위해 머리카락(=외모)을 희생하는 것, 울지 못하는 늙은 마음을 버리고 상대를 위해 눈물 흘리는 충실한 감정으로 사랑을 향해 전진하여 걸어가는 것. 그런 그녀의 변화가 하울을 저주와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해냅니다.
소피를 만난 하울도 점차 변하지요. 마법으로 이사한 하울의 성 내부가 깨끗이 정돈되고 소피의 방이 생기는데, 이것은 하울의 마음에 소피가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만났기에 겁 많은 마법사(=지식인) 하울이 불의와 전쟁을 막기위해 싸우기 시작하네요.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찾은 카루시파(=지식)와 의지를 찾은 마법사 하울(=지식인)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는(=이상의 실현) "하울의 성"으로 표현됩니다. 성장, 환경, 국가, 전쟁 등등 다양한 주제를 두루 다루던 거장이 이끈 긴 역사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었네요.
마지막으로 추가하자면, 허수아비는 동화 속 단골메뉴인 사랑의 키스로 저주가 풀린 왕자와의 해피엔딩과 아낌없이 주는 키다리아저씨 설정까지 포함된 캐릭터입니다. 헌데 그가 왕자님으로 변했음에도 소피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울만 바라보지요. 일반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 즉, "백마 탄 왕자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합니다. 외모 뿐만이 아니라, 배경으로 사랑을 따지는 세태에 대한 비판의 메세지도 담겨있네요. 마지막까지 둘의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진정한 사랑은 외모에 있지 않다는 상징이겠습니다.
이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쭉 정리하였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정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감상법을 연습하면서 그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러 영화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 1~2시간 이상 쉼 없이 말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훨씬 즐겁습니다. 굳이 영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 글이 영화든 다른 무엇이든, 무언가를 정말 좋아할 줄 아는 분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자료출처: 네이버 영화.
첫댓글 일본 도쿄시 미타카에 있는 지브릴 미술관을 추천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운영하는 지브릴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만화를 만드는 기법 및 여러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