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에 수록한 강원도회원 특집 원고>
날 보고 윙크하네
오 연 수
깍두기 씨는 노총각이었다.
하지만 독신주의자는 물론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지 짝만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결혼을 해치우겠다는 결의를 품고 있는 총각이었다. 단지 짝이 없었다. 그게 주위의 사람들에겐 의아하게 느껴졌다.
‘멀쩡한 녀석이 왜 장가를 못 간담?!’
친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깍두기 씨를 다그치고 있었다. 깍두기 씨는 그럴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따져 본다면 깍두기 씨가 서른이 훨씬 넘을 정도로 결혼을 못하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할 만 했다. 왜냐하면 4년제 대학은 다니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들 다 다니는 전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의료 전문점을 경영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결코 궁색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성’적인 쪽으로 변태일까?
천만에.
그는 업무상 룸살롱에 서너 번 간 것 말고는 여자 손목도 잡지 못할 정도로 쑥 맥 이었으니 변태일 까닭이 없었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하기사, 굳이 따진다면 외모가 문제였다. 뭐, 그렇다고 얼굴이 노틀 담의 꼽추처럼 무지막지하게 잘못 생긴 것은 아니었다. 얼굴이야 ‘안소니 퀸’처럼 개성적으로 생겨 먹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키였다.
키가 보통보다 훨씬 작았고, 게다가 아랫배만 영양분이 집중했는지 불쑥 불거져 나온 게 총각 몸매로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시체 말로 ‘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깍두기 씨였지만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미팅에는 꽤 적극적이었다. 애인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여자 과우들이 그를 홀대하지는 않았고, 성격이 밝아 친구들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미팅 건수가 자주 생길 수밖에,
하지만 단 한 건도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소리가 무색할 정도였다. 여러 친구들이 주선해 준 미팅의 상대방들은 하나같이 깍두기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식사 잘 먹었어요, 다음에 연락 드릴께요.”
그리고 그걸로 ‘땡’이었다. 이건 뭐 전국 노래자랑도 아닌데 끝까지 가 보지를 못한 것이다. 후일담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또한 하나같이 똑같았다.
“키도 작은 게 배만 나왔더라.”
당연히 서른이 훨씬 넘은 깍두기 씨는 작금에 이르러선 자에겐 자신을 잃고 말았다. 속사정을 친지들의 다그침도 또한 마땅할 터였다. 의료기구 전문점을 경영하는 깍두기 씨가 늘 주눅이 들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요 며칠간 깍두기 씨는 의욕에 넘쳐 있었다. 뭔가 희망의 빛이 자신에게 미끄러지며 오는 기미가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침 햇살같이 따스한 기대였다. 깍두기 씨는 킁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요일마다 성당 앞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벌써 3주째 그러고 있었다.
목요일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비자 교리 시간이 끝날 때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날, 깍두기 씨는 새로 뽑은 핑크빛 봉고차 운전석에서 담배를 빨아 대며 새삼 달아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문득 시계를 보니 거의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비자들이 조잘대며 성당을 나올 것이다. 그러면 요 몇 주 자신을 온통 달뜨게 만든 꽃다운 나이의 이 순정 양도 카톨 릭 입문서를 손에 든 채 활짝 웃는 얼굴로 나올 것이 틀림없다. 그때 차문을 열고 자신이 ‘주 윤발’처럼 미소 지으며 그녀 앞에 선다면 분명 이 순정 양은 감동할 것이다.
“또 마중 나오셨어요?” 하면서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면 정말이지 깍두기 씨는 ‘오 청련’을 가슴에 안은 ‘주 윤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깍두기 씨는 손으로 가슴을 쓸며 숨결을 가다듬었다.
깍두기 씨는 필터 덮게까지 담배를 피우며 친구인 뚝배기에게 양복이라도 한 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정 양과 자신이 맺어지게 된 데에는 뚝배기의 공로가 누구보다도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뚝배기를 성당으로 전도한 건 자신이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니만큼 깍두기 씨에게 전도되는 일상인 것이다.
자신이 뚝배기를 전도한 것이 이 순정 양을 만나기 위한 운명이라고 깍두기 씨는 생각했다. 성당에 처음 나오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회 시간에 제법 열심히 다니는 뚝배기는 어느 날 깍두기 씨에게 문득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얌마, 목요 교리반의 3조에 내가 속해 있는 거 알지? 이번 주일에 3조 전원이
단합 대회 겸해서 시내 근교로 놀러 가기로 했어. 아홉 명 중에 다섯은 아가씨야, 어때? 함께 놀러 가자.”
처음 그 제의를 들었을 때 깍두기 씨는 심드렁했다.
“주일날에? 미사는 안 드리고?”
“아니, 미사는 9시에 드리고 가면 돼. 너 새로 뽑은 12인승 핑크빛 봉고차 있잖아!! 서비스 좀 해라. 혹시 아냐? 아가씨도 많은데.”
꼭 아가씨가 많다는 소리 때문에 깍두기 씨가 그날 핑크빛 봉고차로 서비스를 할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었다. 주일날 미사를 드리고 나서 깍두기 씨는 달리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놀러 가기로 한 주일날은 날씨도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잔잔한 호수를 연상시켰다. 그야말로 산뜻하고 투명한 허공이었다.
그런 하늘 아래 깍두기 씨는 한껏 멋을 냈다. 센스 있는 스타일리스트 처럼 조끼도 걸치고 찢어진 청바지에 선글라스는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마 ‘ 주 윤발’이 이렇게 걸쳤으면 상당히 멋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깍두기 씨는 결코 주윤발이 아니었다. 핑크빛 봉고차로 모인 9명의 예비자들은 짐짓 진지한 척 그를 보고 인사했지만 몇몇 아가씨들은 얼굴을 돌린 채 웃음을 참느라 입을 꼭 다물었다. 여하튼 핑크빛 봉고차는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니 공기가 맑다 못해 차갑게 와 닿았다. 예비자들은 시시덕거리며, 차창 밖을 정신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어깨도 들썩대며 한껏 피크닉의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요즘유행의 톱으로 인기를 퍼내고 있는 트롯의 대명사 <너가 왜 그기서 나와> 의 ‘영 탁’의 노래가 차 안을 붕붕 날고 있으므로 깍두기 씨도 모처럼 가벼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깍두기 씨는 뭔가 설레 이고 있었다.
그는 백미러에 자꾸만 눈길을 주었다. 뚝배기는 조수석에 앉아 휘파람을 휘휘 불며, 그런 깍두기 씨에게 짓궂게 눈을 껌뻑 거리기도 했다. 척하면 삼척이라고, 뚝배기는 깍두기 씨의 낌새를 눈치 챘다. 깍두기 씨는 자신의 바로 뒷자리에 앉은 이 순정 양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자 9명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이 순정 양은 ‘불초자 열혈남아’ (不肖子 熱血男兒)에 나오는 ‘오 청련’과 진배없었다. 단정한 머리 결은 어깨까지 출렁이고 초롱 한 눈망울은 바라만 보아도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뚝배기의 뒤를 따라오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깍두기 씨는 하마터면 군침부터 삼킬 뻔했다. 침이 온통 입 안으로 모여드는 듯싶었다. 이 순정 양은 다른 아가씨들과는 달리 건성으로 인사를 하지도 않고 제법 정중히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 모양을 멀건 히 바라보았던 깍두기 씨는 선글라스만 만지작거렸다. 그 바람에 다른 아가씨들은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눈치 챌 겨를도 없었다. 깍
깍두기 씨는 참말로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 청련’에 어울리는 건 선글라스를 낀 ‘주 윤발’일 테니까.
핑크빛 봉고차가 가파른 언덕배기를 숨 가쁘게 넘어선 직후, 툭하면 백미러를 흘겼던 깍두기 씨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가 싶었다. 이 순정양이 언제부터인가 상체를 끌어당긴 채 백미러를 향해 윙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초롱 한 눈망울로, 뭔가 깊은 의미를 담은 듯 짧게 세 번, 길게 두 번, 깍두기 씨는 그만 소리 나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건 틀림없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이 순정 양은 다른 예비자들과는 달리 별로 시시덕대지도 않고 오로지 백미러를 향해 윙크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깍두기 씨는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중얼거리며 악세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밟지 않고서는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봉고차는 국도로 신나게 질주했다. 뚝배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깍두기 씨를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내친 김에 깍두기 씨는 카세트테이프를 ‘김건모’에서 ‘박상민’으로 바꾸었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여자에게 윙크를 받았던 것이다.
‘청바지에~ 어여쁜 아가씨가 날 보고~ 윙크 하네~ 오호, 이것 참~ 야단났네~’ 노래는 그야말로 슈퍼맨의 주먹처럼 깍두기 씨의 달아오른 심장을 두들겼다.
놀러 갔다 온 다음날, 깍두기 씨는 대뜸 뚝배기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보따리 풀어헤치듯 털어놓았다. 뚝배기는 또 눈을 껌뻑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보니까 네놈 기색이 심상치 않더라. 근데 잘 될까? 순정이가
말이야...... ......”
“그러니까 도와 달라는 것 아니냐?! 은혜 잊지 않을게.”
깍두기 씨가 워낙 정색을 한 채 매달리니까, 뚝배기는 선선히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까두기 씨의 구애 작전이 시작되었다. 뚝배기는 깍두기 씨를 코치했다. ‘여자를 감동시키려면 일단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해라, 순정 이는 소울 음악을 좋아하더라.’
이러면 깍두기 씨는 레코드점을 헤매다시피 하여 ‘제임스 브라운․레이 찰스’ 의
오래된 엘피판을 사 들고 목요일 날 성당 앞에서 기다려 이 순정 양에게 선물했다. 하여간 이런 식이었다. 이 순정 양은 처음엔 수줍었는지 빨 장미가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차츰 감동하는 눈치였다. 깍두기 씨는 그렇게 확신했다.
은은한 달빛이 성당 앞마당에 굴러가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저녁 9시를 넘어섰다.
‘오늘따라 늦게 끝나는군!’
깍두기 씨는 연신 줄담배를 피며 주머니 속의 묵주(黙珠)를 만지작거렸다.
이순정 양이 세례를 받고 난 뒤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카톨릭 신자에게 꼭 필요한 묵주를 선물할 참이었다. 깍두기 씨는 이 순정 양을 눈앞에 그리면서 헤벌쭉 웃었다. 성당 앞마당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성모상이 달빛을 안고 있었다.
이윽고 예비자들이 두런두런 대며 나오기 시작했다. 깍두기 씨는 물었던 담배의 불을 부랴부랴 비벼 끄고 차문을 열고 나왔다. 깍두기 씨는 눈에 불을 켰다. 드디어 뚝배기의 모습이 보이고 이 순정 양의 청순한 얼굴이 눈이 아프도록 동공에 들어왔다.
“오! 마이 갓!!"
깍두기 씨는 서너 번 얕은 기침을 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하고 깍두기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첫마디를 꺼냈다. 그런데 이 순정 양은 잠깐 깍두기 씨를 흘기더니 양미간을 찌푸렸다. 뜻밖의 표정이었다. 이제 자신에게 완전히 감동하고 있으리라고 여겼던 깍두기 씨는 눈을 멀뚱 떴다. 뚝배기의 표정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전 약속이 있어서..”
이 순정 양은 냉큼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깍두기 씨를 지나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깍두기 씨가 묵주를 선물할 겨를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깍두기 씨는 멍하니 이 순정 양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뚝배기는 그런 깍두기 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 순정 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뚝배기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까 그러더라. 네가 부담된다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담이라고? 이럴 수가 없어. 그렇다면 애당초에 왜 내게 윙크했냐고!! 그날 있잖아, 놀러 간 날, 백미러를 통해서 봤단 말 야. 내게 윙크했다고.”
깍두기 씨는 따지듯이 말했다. 이럴 리가 없는 것이다. 뚝배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깍두기 씨는 거의 울상이었다.
다음날, 깍두기 씨의 가게로 뚝배기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저편에서 뚝배기의 맥 빠진 소리가 깍두기 씨의 귀청을 울리며 스며들었다.
“순정이 한 테 그날 일을 알아봤는데, 네가 오해했더라. 윙크를 한 게 아니고 속눈썹이 별안간 빠져서 눈썹을 붙이려고 눈을 깜빡 거린 일이 있다고 하던데.....”
깍두기 씨는 입을 딱 벌리고 수화기만 마냥 들고 있었다. 가게 안엔 ‘박 상민’의 노래가 때마침 튀어 나왔다.
‘청바지에 어여쁜 아가씨가~ 날보고 윙크 하네~ 오호, 이것 참~ 야단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