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재미 교포 신은미가 방북 여행중 찍어온 사진
글쓴이 : 노숙 김영진
사진들을 통해 북한을 보게 되면
북한이라는 나라의 사회는 매우 기묘한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죠.
암튼, 그의 인스타그램인가 하는 사이트에서
아래와 같은 사진을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평양에 있는 개선 유치원 어린이들의 반미 포스터라고 합니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의 유치원, 초등학교들에서의 반공 포스터와
비슷한 무엇이라고 생각되네요.
아래 포스터들은 북미대결이 한참 심했던 작년 2013년 3월 9일에 찍은 사진이네요.
당시는 이명박 집권 시기여서 이명박에 대한 증오도 드러내고 있군요.
April 19, 2013
a North Korean cleaning woman sweeps behind potted azaleas at the Koryo Hotel in Pyongyang, North Korea. (AP Photo/David Guttenfelder)
재미교포 신은미씨가 만약에 북한에 태어났더라면 악질 반동으로 낙인이 찍혀
탈북자 이순실씨보다도 더 악랄하다하여 요덕수용소가 아닌 전거리 교화소에
수감되어 평생 빛도 보지못하고 생을 마감할수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북조선이라는 왕조국가이기에 공화국 법보다 더
우위에 있는게 백두혈통인 최고지도자의 말입니다.
신은미씨의 외할아버지는 1948년 제헌 국회때 국회의원으로써
국가 보안법을 만들어 남한에서 공산당을 만들어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자유당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박헌영에게 타격을 입혀 빨갱이를 괴롭힌죄가 첫째요
두번째 죄는 신은미의 아버지가 육이오 사변때 서울 탈환후 북으로 진격할때
평안도 북단까지가서 북한 인민군을 때려잡은 북한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이기때문이다.
이런 악질 반동의 피를 물려받은 신은미를 북한에서 여섯법의 방북을 허용한것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만큼 엘리트이고 재미교포 신분이기에 모국인 남한에
쉽게 접근할수있어 북한 선전용으로 이용가치가 많기때문입니다.
박정희 군사정권때 북한 김일성은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김신조 일당의 무장 공비를 보내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습격하려다가 30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생포되었습니다.
북한에 보복하기위하여 남한은 감옥소 사형수들을 모아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평양에 침투하여 김일성 관저인 금수산을 습격하여 김일성 모간지를 따오라합니다.
사형수 죄수들은 엎어치나 미쳐나 어차피 죽은 목숨이기에 지옥훈련을 받고
명령이 떨어져 서해바다에 발을 담구고 평양을 향해 떠나려는데 1972년 정부에서
" 같은 동포끼리 싸움질보다는 북한 평양에가서 남과북이 어깨동무하며 서로 배만져주고
김일성과 남북 적십자 회담을 하기로했다.
실미도에서 훈련받은 인간 쓰레기들이 평양가서 김일성 모간지 따오면
우리는 평양가서 누구하고 남북적십자 회담하냐?
남북적십자 회담 한다고 신문에 났을텐데 우리 체면이 뭐가되나 ....
깜방에서 콩밥이나 축내는 버러지같은 기생충놈들 훈련받느라 욕은 보았다만
다시 감옥소 쳐넣어 콩밥대그릇 먹여 사형시킬수는 없고
정보가 바같으로 새어나가면안되므로 인간쓰레기들 잠잘때 전원 사살해 ! "
북한 김일성은 남북적십자 회담하면서 앞으로는 남한의 배를 만져주는척하면서
뒤로는 땅굴을 파서 적화야욕에 남한의 뒷통수를 쳤습니다.
신은미씨는 탈북자 단체의 고발에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됩니다.
나는 신은미씨를 종북이니 빨갱이니 매도할수는 없으며
북한도 남한도 조국이라며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것같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은미씨는 재미교포 미국인 신분이기에 북한 관광하여도 재제할수는 없습니다.
북한에 가면 북한법을 잘지키고 남한에 오면 남한법을
잘지키면 세상 살아가는데 신경쓸일이 없습니다.
북한 평양 고려 호텔에서 청소하는 여성
City bus in Pyongyang.(북한 평양 시내 버스)
북한 평양 미녀들과 포즈 취하는 미국인 굳텐펠더
North Korean children climb steps near Mansu Hill in Pyongyang on their way to lay flowers at the feet of bronze statues of the late North Korean leader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on Saturday, April 12, 2014. (AP Photo/David Guttenfelder)
그러면 이번엔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오마이뉴스의
신은미 기자가 찍어온 북한 사진들은 과연 어떤지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하지요.
물론, 신은미 기자는 전문적 사진 작가가 아니므로
사진으로 북한을 제대로 표현할 능력은 없겠지요.
신은미 기자의 사진들이 무수히 많지만....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몇장만 찾아 보았습니다.
방북한 재미교포 신은미와 북한 주민
방북한 신은미 북한 리설향 가정을 방문하여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용병으로 반상회 참여
재미 교포 신은미 북한 여행중에 꽃미남 인민군과 손을 꼬옥잡고 웃는 모습
북한의 여객기 고려항공으로 북한의 유적지를 여행하며 웃는 모습
신은미가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내려 숙소로 가기전 수양딸 리설향과 관계자분들과 기념촬영
신은미가 북한 방북했을때 외국인 관광 통역 안내원 리설향을 수양딸로 삼았다.
남한의 서울에 63 빌딩이 있듯이 북한의 평양에 위용을 과시하는 현대식 건물 고려 호텔
북한의 대동강 맥주가 자신의 기호에 딱맞는 신이내린 술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신은미
이태리에서 요리 유학을 받고 다녀온 요리사가 만든 피자를 보고 최대의 만찬을 즐기는 신은미
북한 노동자가 두딸과 함께 봄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향긋한 봄내음에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평양 놀이공원에서 젊은 인민 부부가 손을 맞잡고 자유롭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북한의 관광 안내원 두사람이 "방갑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여행객을 환영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신은미가 모란봉 상점에서 쇼핑한 식품을 발발이 짐꾼이 친절하게 자가용 뒤트렁크에 싣고 있다.
모란봉 상점에서 사온 명태가 상했는지,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 오염되었는지 .북한 어부가
서해 NLL을 넘어 남한의 연평도에서 잡아 왔는지 원산지를 꼼꼼히 확인하는 신은미
남한에는 로또 복권이 있는데 북한의 어느여성이 긴장한모습으로 복권을 보고있다.
중국 러시아 쿠바 미국 관광객이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관람하고 "북한의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때 독립 운동을 하여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호박으로 폭탄을 만들어
축지법으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데 외국인 관광객이 거짓말 한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다. 미국의 맥아드 장군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 나가싸끼에 원자탄
두방을 투하하여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냈기때문이다.
아프리카 콩고 관광객 깜둥이 흑인들이 북한의 선인장을 신기한듯 쳐다보고 있다.
일행중 한흑인이 도둑기질이 발동하여 선인장을 몰래 가방속에 넣으려다가 가시에 찔려
"Oh my god ,get a way! (나 너싫어 꺼져버려 !) "선인장을 탁자위에 내려 놓는다.
외국 관광객이 북한 해변에서 즐겁게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재미 교포 케네스배는
중국에서 여행업을 하였는데 2013년 11월 관광객 데리고 함경북도 나진항에서 북한의
꽃제비 (유랑고아)를 사진 촬영했다가 북한 공안에 의해 체포되어 억류되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 제1 국방위원장 김정은과 친한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전직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을 특사로 보내 김 위원장을 '친애하는
나의 친구, 존경하는 김정은 원수'라고 지칭한 뒤 "그(케네스 배)의 석방을 요청드린다"며
"당신과 북한이 얼마나 자애롭고 인정이 많은지 우리나라에 보여달라" 고 꼬디겨
2014년 11월 8일 석방되었다. 케네스배는 전빙그레 감독 배씨의 아들이다.
평양에서 수양딸 설향이가 차려준 아침 밥상 먹고 성불사로 올라가는 신은미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 스님의 옷패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폭소가 터져 웃는모습
중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말로만 듣던 북한의 성불사
성불사 노승을 만나 " 성불사의 밤"을 합창하는 신은미
평양 모란봉 공연 "우리는 한민족 " "아리랑 " "심장이 있는 사람 "을 열창하고 있다.
왼쪽이 중국 도로이고 가운데 두만강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다 . 오는쪽이 북한 군함산이다
1925년~1930년까지 북한 김일성이 다녔던 중국 지린성의 유원중학교 (육문중학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일본놈 때려잡는 항일 무장투쟁을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옥고를 치른후 마음잡고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배워볼려고 밴또싸갖고 학교 등교했는데 학교장이 일본순사에게 뇌물받아쳐먹었는지 김일성을 퇴학시켰다.
김일성 동상과 사적지 (김일성이 앉았던 책상 ,의자,점심시간에 까먹었던 밴또 도시락.... )이 있으며
한국인 관광객은 출입이 금지된다.
교복을 입은 북한의 중고등학생들
학생과 직장인들로 가득찬 북한의 만원 버스
북한의 치과병원의 진료모습이며 치료비는 국가가 무료로 진료한다고한다.
젊은 오빠 김정은이가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건 여자 축구 선수단 격려모습,
다리 아파 괴로우면서도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줄려고 강행군 현지지도하다가 다리가 절단나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축구 실력에다가 사상을 더하여 일등하게 되었다고 오열하고 있다.
잘되면 김정은탓 못되면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태어난면서 부터 받아온 우상화 쇠뇌교육이 무섭다.
김정은이가 무쇠덩어리도 아니고 다리가 뚱뚱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완전 절단나서 외국의사를 불러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느라고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일부 서방 언론은 고모부 장승택이를 고사총으로
문질러 버리자 앙심을 품고 장승택 추종 세력의 구테타설도 나왔고 김정은이가 가족력이있어 심장마비로
자빠졌다는 설도 나왔지만 산삼을 많이 먹어 그런지 백두혈통은 건재하고 요즘 건설붐이 일어나서
북한경제가 급격히 좋아지고 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의 폐쇄 정책으로 개방이 늦어 남한의 발전과는
조금 부족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써 다같이 잘살아야 서독 동독처럼 독일로 통일하였듯이 남북한도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후세에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남북한이 똑같이 잘살아야 통일이 되어도
통일 부담금이 적게 들어 가재잡고 또랑치우고 일거양득이다.
남한의 인기가수 "소녀 시대"에 버금가는 북한의 걸그룹 "모란봉 걸데이 " 공연 모습이다.
남남북녀라고 북한 전역에서 출신 성분좋고 얼굴 이쁘고 에스라인 몸매 노래 잘하는 처녀들을
공개 오디션보아 하늘의 별따기로 뽑힌 인기 걸그룹이다. 북한 김일성시대에는 전통한복이 연예인
의상이었으며 김정은시대에는 짧은 치마가 특징이며 가슴 패인 옷은 날날이 꽃제비 사상이 있다고하여
아직까지 금지되었으며 남정네의 눈을 후벼파는 카리스마에 어떤 열성팬 남정네는 눈이 너무 황홀해
공연중에 홍콩갔다가 왔는지 침질질 흘리며 환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눈에 들어
김정은이의 첩으로 들어가는경우에는 공화국 훈장을 받게되며 가문의 영광이고 팔자 고친다.
남한의 수도 서울에 어린이 대공원이 있듯이 북한의 수도 평양에 물놀이 시설이 있어 아이들이 좋아하고있다.
1968년 12월 9일 북한 김일성은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를 남파하여 남한 강원도 골짜기에 침투하였는데
날씨도 너무 춥고 산속을 헤메이다보니 배가 너무 고파 이승복 어린이집 부엌에서 솥뚜껑 열고 삶은감자
한개 훔쳐먹고 또한개 입에 넣으려는데 부엌에서 덜그덕하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보니 왠아저씨 두명이
감자를 훔쳐먹기에 깜짝놀라서 "아저씨 남의부엌에서 뭐하는 거에요?"하고 소리치자 "쉬쉬 ~나는 북쪽에서온
마음씨 좋은 빨갱이란다.우리 공산당은 감자있으면 사이좋게 나누어 먹지 ~헤헤 "하고 살살 달래자
학교에서는 분명 선생님에게 남의것 훔치는 도둑놈은 나쁜사람이라 들었기에 큰소리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하자 방안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이 "이게 뭔소리고? "하고 뛰어나오자 당황한 빨갱이 놈은 "쫑간나 새끼 !
이 에미나이도 부르조아 물을먹은 깡패 새끼군 ...씹발 "하면서 이승복 어린이 입을 벌리고 자갈을 물리고
잔인하게 입을 찢어 죽였다. 달려온 어머니와 형은 무장공비의 총에 사살되었으며 아버지는 부상을 입고
도망하여 지서에 신고하여 군경이 합동 출동하여 무장공비를 일망타진하고 사진을 찍어 남한 전국 학교의
반공교육의 도화선이되어 그당시 학교에가면 "때려잡자 김일성 !!"하면서 반공 집회가 많았다.
요즘은 북한이 착하게 살려고 무장공비로 내려보내지 않고 그인원을 교통정리하는데 사용하니 보기가 좋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우리 한민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나라가 갈려졌으나 신라의 삼국통일로 하나가 되는듯하였으나
후삼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셋으로 나뉘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고려와 조선을 이어오면서 중국 오랑캐와 일본 왜적의 숱한 침략에도
지혜와 단결로 나라를 지켜오다가 1910년에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다.
대한 독립을 이루기위하여 수많은 광복 열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끔으로 일본은 항복하였고 나라를 되찾았다.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북한에는 김일성이가 남한에는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이루면서 남북이 분단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욕심이 많은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으로 남북한을 통일하기위하여
소련 스탈린의 허가를 얻은후 1950년 6월25일 남한을 기습 공격하여
육이오 전쟁을 일으키게 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개입으로
맥아드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발판으로 1950년 11월1일 우리 국군은
북한의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였으나 1950년 11월27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4일 후퇴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원점인 3,8선 부근에서 남북이 줄다리기를 계속하다가
전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을 맺고
남북통일을 하지 못한채 남한과 북한으로 또다시 갈리어져
60 여년 넘게 분단되어 서로 으러렁대면서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김일성 왕조가 3대째 세습되어
사회주의 이념의 공산주의 국가이며 대한 민국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이념으로 서로의 이념이 다르고
핵을 개발하고 신무기로 위협하는 북한과 전쟁을 치룬다는것은
남한과 북한 서로간에 치명적인 인명살상과
쌓아온 경제가 한순간에 파괴되기에 무력통일은 불가하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며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쪽체제가 붕괴되거나 아니면 독일처럼
국민의 힘에의해 평화적 통일이었으면 좋겠다.
나무 한그루를 보고 전체 숲을 판단해서는 안되며
조선이 대원군의 쇄국정책때문에 문명이 늦어 일본보다
경제 발달이 늦어졌듯이 북한또한 김일성 김정일 통치하엔
폐쇄주의적 사회주의 주체사상으로 개방적인 자본주의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인 남한보다 더잘산다고는 볼수없다.
북한의 선전매체는 남한의 빈곤층을 촬영하여 남한의 본모습이라
말하고 정부 여당을 깡패들로 모여진 패거리집단이니
경기도 두모녀가 너무 배가고파 청와대를 공격했다니 ...
말도 안되는 흑색선전에 열을 올리고
신은미씨 또한 방북 여행동안 북한 여행 관광안내원이
북한의 경관좋고 잘사는곳만 데려다니며
접대를 아주 잘해주기에 북한의 본모습이라 말하는것 같다.
나또한 대학 다닐때 제주도 관광여행을 다녀왔는데
관광 가이드가 제주도 자연 경관 좋은 곳만 골라 안내 여행하였기에
여행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변사람들에게 제주도가 참깨끗하고
살기 좋은 곳이며 자연 경관도 화려하다고 이야기한적이 있다.
매일 굶어 죽는 아프리카에 가보아도 잘사는 사람은 아주 잘사는데
극소수이고 대다수 국민이 빈곤하기에 가난한 나라라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한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국가에 충성하고 가족 챙기며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법죄행위하지 않고 열심히 살면
산입에 거미줄은 치지 않는다.
탈북자들이 가족 대대로 살아오고 태어나 뛰어 놀던 북쪽 고향이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몰려 감옥소에 갖다왔든
김일성 세습 체제가 싫어 왔든 아무리 일하여도 신분차이로
배가 고파 자유 대한의 품으로 살기위하여 망명하였든
이미 돌아갈수 없는 강을 건넜기에 죽는 그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살아야한다.
일부 탈북자 중에는 정착금으로 경마를 하여 낭패를 보아 살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이제 대한 민국 국민이니만큼 일을 못하면 기초연금받아 살아가면 된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신은미씨 종북 콘서트에서 밝힌
탈북자 80~90(%)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발언은
두고온 가족이 있는 북한이 고향이기에 잠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탈북민의 실제 마음은 자유 대한 민국에서 사는게 몸과 마음이 편할것이다 .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의 장승택이도
백두혈통인 김정은이에게 역적으로 몰려 총살 당했는데
신분이 좋든 좋지 않든 북한이 싫어 탈북했고
조국인 북한을 개보다도 못한 비인격국가라고 방송에 나와 말했는데
요즘은 매스컴이 발달되어 북한 주민을 제외한 북한의 보위부도 시청하기에
만약에 북한에 되돌아 가면 역적으로 몰려 공개 총살당하고
화가 많이 났을때는 죽은 시체를 개에게 던져줄지도 모른다
북한 체제가 좋은 사람은 북한에가서 살면되고
남한 체제가 좋은 사람은 남한에서 살면된다 .
부처님께서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를 말라했다.
남한 체제가 싫어 월북한다하여도 공짜로 밥은 먹지 못한다 .
북한에서 영웅대접을 받으려면 자기가 태어난 남한을
선전 도구화되어 밥만 먹으면 욕하고 북한 주민에게
쇠뇌교육 시켜야만 이밥(쌀밥)에 고기국 먹을수 있다.
북한 체제가 싫어 남한으로 탈북한 새터민도
북에 남겨둔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죽든 말든
자신이 태어난 북한의 실상을 방송이든 뭐든 계속 입을 열어야
남한의 종북론자의 입지가 좁아져 국민에게 반공정신을 심어주게된다.
연평도 해전에서 북한군의 포사격에 의하여
죽은 남한 두병사의 유가족은 북한 김정은을 갈아 마시고 싶을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우리 해군의 대응사격으로
죽은 북한의 인민군 130명의 유가족은 남한을 원수로 생각할것이다
북한의 인민군이든 남한의 국군이든 군인은 명령에 따라
죽고 살기에 무슨죄가 있겠는가
방송에서 모전문가는 재미교포 신은미가 북한 인민군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은데 대하여 연평도 해전으로 희생된
우리 두병사를 생각하면 저럴수는 없다고 흥분되어 말씀하시던데
체육 경기에서 남북팀이 출전하면 "우리는 하나"라고 악수하고
사진찍고 격려하고 응원한적도 있기에 아주 민감할 필요는 없다.
내가 어릴때는 남한 사회에 불만을 품은 종북 세력들이 고정간첩이 되어
엿장수로 변장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빨갱이 노릇을 하다가
어느날 중앙정보부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인공위성이 발달되어 정보 수집도 쉽고
북한의 중앙 통신 뉴스 , 북한의 노동신문도 안방에서 텔레비젼을 통해
쉽게 접하고 북한도 남한의 실상에 대해 쉽게 접할것이다
또 우리나라와 중국이 교류를 많이 하는 만큼
관광도 쉽고 탈북자가 많은것도 중국을 통해 들어오기때문이다
옛왕조시대에 임금은 군주이며 백성의 어버이이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모두 임금의 것이기에 일하며 살아가는것이
모두 임금의 은혜라 하였듯이 북한은 조선이라는 왕조이고
태어나면서 부터 수령(임금)에게는 절대 충성을 몸속깊이 배우기에
북한을 다녀온 신은미씨가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잘따르고 좋아하는것 같다 ."고 말한것 같다.
나는 남한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남한에서 회사다녀
두딸 공부시켜 두딸이 사회의 일원으로 취직하여 잘살아가고 있다.
과욕은 늘 화(禍)를 부른다.
젊은 시절 열심히 회사서 일하였지만 과욕에 눈이 멀어
주식을 하다가 집구석 다말아 먹고 노숙자로 살아간다만
모든게 내탓일뿐 국가를 한번도 원망해 본적이 없다.
남한의 체제에도 잘 적응못하는 사람이 북한의 체제를
안다는 것은 모순이며 국가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한
국가 보안법을 적용하여 언론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과거 군사 정권때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듯
우리 민족인 북한에 대해 한마디만 하면 종북론자니 빨갱이니하면서
깜빵에 쳐넣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또 무죄라며 석방되는것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북한을 고무 찬양하는 종북론자는 배때지가 불러 잡념이 많다거나
정부로부터 억울한 일 혹은 나쁜짓을하여 감빵에 다녀와 역심을 품는다든가
아니면 정신나간 미친놈이든가 뭐 이런 인간일것이다
독립 운동가인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안중근은 1909년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뒤,
그 해 10월 26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이토오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 후 러시아경찰에 체포되어
신병이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일본 군사재판에서 1910년 2월10일
사형 선고를 받게되고 1911년 3월26일 오전10시 여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고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장군 (白冶 金佐鎭將軍)
은 고종 26년 188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안동김씨인 김형규의 아들로 출생한다 .
백야는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904년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주어 가노를 해방 시켜주었다.
그리고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 뒤인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 (湖明學校) 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교사로 제공하였고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었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였고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등 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미 결성된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하여
군사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고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산곡에 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켰다.
그러나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신비한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집결한 10여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여기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러시아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여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 (韓國總聯合會) 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부인 나혜국 (羅惠國) 이 마련한
아침상을 받아 식사를 하다가 사용하던 쇠수저가 홀연히
뚝 부러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혜국은 김좌진의 손에 있는 부러진 수저를 보고 왠지 기분이 나빴고
상당히 불길한 예감이 들어 김좌진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밖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미소에서 발동기가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발동기는 하얼빈에서 사 온 것인데 중동로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 농민들은 기계 다루는 법을 잘 몰라 그동안
정미소에서 일을 하려면 김좌진만이 발동기에 시동을 걸었다.
"아니, 누가 와서 발동기를 돌리나?"
백야는 아침상을 물리고 정미소에 가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정미소는 김좌진의 자택에서 2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가 정미소의 서쪽 문을 막 열려는 순간 느닷없이
“탕! 탕!” 하는 두 번의 총성(銃聲)이 울렸다.
김좌진이 가슴과 배에 총상(銃傷)을 입고 현장에서 쓰러지자
러시아제 모젤식 M1921 권총 (拳銃) 을 김좌진에게
겨누고 있던 괴한 하나가 재빠른 동작으로 정미소를 빠져나갔다.
"앗! 장군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총성을 듣고 정미소로 달려온 강인수 (姜寅秀), 유창덕 (兪昌德) 등이
크게 놀라 김좌진을 부축해 안았다.
김좌진은 신음을 삼키면서
"아직도 할 일이 남았는데 ...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
하고 통탄의 눈물을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두 사람은 김좌진의 시신 (屍身) 을 붙잡고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오열했다.
"안돼! 장군님, 이리 가시면 남은 우리는 어떡합니까?"
"개보다 못한 놈! 저 놈을 붙잡아 찢어 놓고 말리라."
황백상 (黃白常) 이란 독립군 병사가 연자방앗간에서 매를 돌리고 있던
마필(馬匹) 한 마리를 풀어 타고 그 저격범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 저격범은 재빨리 몸을 숲 속에 숨기며 자기를 쫓아오는
독립군 병사를 총격하여 사살하고 말았다.
때마침 신안진 쪽에서 산시 방면으로 오던 조선인 농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몰려왔으나 저격범이 쏜 총탄 하나가
농민 한 사람의 머리를 궤뚫자 다른 농민들은
재빨리 엎드리거나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빴다.
저격범은 하루 아침에 세 명의 목숨을 빼앗고
기만하게 산시 마을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불의에 최고 지도자가 살해되는 상황을 겪은 한족총연합회는
긴급히 임원들을 소집하여 부위원장 권화산의 주재하에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비보를 들은 김종진도 신안진에서 급히 마차(馬車)를 타고 달려왔다.
황학수·정신·이달 등 중진들은 우선 암살범을 붙잡고
이번의 흉변(凶變)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규명하자고 말했고
각지에 파견된 조직선전부 요원들도 소환되었다.
군사부장 이붕해는 임시 치안대를 조직하여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방위하면서 저격범을 잡기 위하여 중국 치안당국에 수사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해림역(海林驛) 부근에 있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한 사무실을
급습하여 김일성(金一星)(본명 김봉환)을 체포하고 여러 문건을 압수했다.
이붕해는 이 곳에서 김일성이 고려공산청년회 (高麗共産靑年會)에 소속된
박상실 (朴尙實) 을 사주하여 백야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자백(自白)을 듣게 되었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암살 배후로 알려진 김일성(金一星)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의 전범(戰犯)이었던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과는 다른 인물로 본래 이름이 봉환(奉煥)이었으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행정위원이었다고 전한다.
일본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청산리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보았으며
김일성 (김봉환)을 불러 독립군중에 가장 가시였던 김좌진을 암살을 설득했다.
당시 김일성(김봉환)은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 영사관의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 살이를 할 형편이었는데 김좌진 장군 을 간사한 일본 경찰이
" 김좌진을 잡아 죽이면 석방시켜주고 애인인 소설가 김경애와도
달콤한 동거가 될수 있도록 보장해줄께 ..."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행정위원인 김일성(김봉환)은 오랫동안
감옥소 생활하는것이 싫고 김경애와 동거도 허락해 준다는 일본 경찰의
사탕발린 세치혀에 속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우헤헤헤 ...무식하고 멍청한 조센징놈 독립군 공산당하더니만
같은 동족끼리 대가리에 총부리겨누는 생쇼를 하겠구먼 ....
그래서 조선놈은 보면 볼수록 입맛이 당긴단말이야 ....
머저리같은놈은 독립운동보다는 기집년 치마폭이 더좋다는것아닌가..."
일본 경찰은 김일성(김봉환)이 나간후 기둥을 붙잡고 한참을 웃는다.
1930년 1월24일 공산주의 박상실에 암살된후 임시로 만주에 안치된
김좌진 장군의 유해가 1933년 본부인 오숙근이 일본을 피해 만주로 잠입해
상자에 김좌진 장군의 유해를 수습하여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한뒤
1957년 아들 김두한이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했다.
독립 운동가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12년 4월15일 함경남도 평양시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보현 할아버지이래로 지주 리평택지주의 묘지기였으며
아버지 김형직은 일본제국의에 대항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였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 장로교 신자였고 강반석의 언니가
북한 총리를 지냈던 강성산을 낳았고 탈북한 강명도 교수는
북한 강성산 총리의 사위이며 김일성과는 외10촌관계이다.
1919년 일곱살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
그뒤 아버지 김형직은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1923년 평양으로 보내고
김일성은 외가에 머물면서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창덕소학교에 다닌다.
또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1925년 열세살때 중국의 지린성에 있는
유원중학교에 다녀 성적도 우수하여 중국어 구사도 잘하였으나
1926년 아버지 김형직이 병으로 죽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1926년 10월17일 일본제국주의 타도 동맹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투쟁
을하다가 1929년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된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면서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30년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조식에 가입 이름을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개명하고 조선 공산 청년회에 가입한다.
그뒤 반일본 민족주의가 세운 중국 하덴에 있는 2년제 군사학교인
화성 의숙에 편입한뒤 1930년대 졸업하여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1937년 6월4일 보천리 전투에서 일본군 7명을 죽이고 7명을 중상입혔다.
100여명의 독립군으로 일본군을 괴롭히자 신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자주 올랐으며 독일오른 일본군은 김일성의 현상금이 1만엔이나 걸었다.
1939년 말부터 일본군 토벌대가 빨찌산 토벌전을 벌이면서
항일 유격대도 타격을 받았고 1940년 소련으로 피신하여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수 공작 요원 훈련을 받은후 소련군 장교로 임관한다.
1945년 8월초 나찌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도 1945년8월15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항복함으로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자 소련군 장교 김일성은 1945년 9월19일 평양에 입성한다.
1945년 10월14일 소련 군정에 의해 김일성이 군중 7만여명을 모아놓고
"조선 해방 축하 집회"를 열었는데 독립군으로 명성을 날린 김일성이
영감탱이 인줄알았는데 기때기 시퍼런 청년으로 드러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함성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은것을 보면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성주(나라의 기둥)라는 이름이 가볍지는 않다.
김일성은 1946년 3월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선 공산당으로 바꾸고
명실상부 북조선 노동당 당수가 된다.
1948년 2월 조선 인민군 창건하고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로 바꾼다.
1948년 백범 김구는 김일성과 만나 남한 단독정부보다는 남북 통일 정부를
원했으나 사실상 남북이 따로 따로 정부가 구성되고 말았다.
1949년 김일성은 박헌영과 소련 스탈린을 만나 무력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스탈린은 시기상조라고 거부하였다.
고집이대단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제 미국 군정도 물러갔으니 지금 남조선을 무력으로 도발하는게
적기고 인민군도 정신무장이 잘되어 있으니 탱크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
소련 스탈린은 전문을 통해 남한이 선제 공격하면 반격만 승인한다.
스탈린에 불만이 많았던 김일성은 박헌영 관저에서
중국의 공산당 목택동(마우쩌둥)이 중국 국민당 장개석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하였듯이 이번엔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이승만 자유당을
몰아내고 조선을 통일하여야 한다.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회담하고 스탈린은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변하고 있어 북한이
통일 과업을 완수하는데 동의합니다 .
다만 중국의 모택동이 반대하면 연기해야합니다 ."
1950년 5월 중국의 모택동은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무모한 한국 전쟁 육이오는 3년간의 상흔만 남긴채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 패배의 책임이 김일성에게 돌아갈까봐
1955년 3월 공산 혁명동지였던 박헌영을 미군정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여 총살 시킨다.
우리 민족간에 총부리를 겨눔으로써 얻은것은 하나도 없으며
삼천리 금수강산이 파괴되고 고향잃은 이산가족만 생기고
오늘도 고향향해 철마는 달리고 싶지만 남북간에 끊어진
녹슬은 기찻길만이 탈북자의 가슴을 안타깝게한다.
내가 볼때 북한의 김일성은 난사람이지만 신(神)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때 독립 운동을 한것은 사실이나 축지법을 사용하여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도 않았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일본군을 무찔렀다는것도 우상화일뿐 인간이 할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기로써 기적을 만들어내듯이 북한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깰수 없다는것을 알지만 김일성 주체사상만
있으면 기적을 이루어 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기는 우주가 만들어진후부터 현상이 있었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의식하였고 그후 영국의 길버트가 마찰전기를 연구하게됩니다.
이탈리아 볼트가 전지를 연구하였으며 쿨롬 , 페러데이 ,멜스웰이
전기를 발전시켰으며 1837년에는 모르스 부호를 사용하여 원거리
통신을하는 전신기가 개발됩니다.
발명가이고 사업가인 에디슨은 1847년에 태어나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그당시만 해도 밤에 불을 켜는 것은 주로 가스등을 이용했는데,
사람이 일일이 등에 불을 붙였야 했고, 화재의 위험이나
가스누출에 따른 폭발사고가 자주 발생했기에 전구를 발명하면
안전하고 돈을 엄청 벌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나라는 조선 고종때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시스템에서
경복궁에 16촉광의백열등 750개를 점등할수 있는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불을 밝혔는데 그당시 돈으로 2만 45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후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경제적 이권 침탈과 진출로
그간 주요 도시에는 적지 않은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전화(1898년),전기(1900년),수도(1903년)가 가설되기 시작하였으며,
1899년에는 서울에 전차가 개통되고, 경인철도가 개통되는 등
배경은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신문물이 상당히 들어오고 있었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 총독부는
산의 지형이 높은 강을 막아 댐을 만들고 낙차를 이용
수력 발전으로 전기를 공급했기에 북한이 평야인 남한보다
전기공급이 원활하고 많았다.
1945년 해방이되면서 북한에는 김일성 공산 정부 남한에는
이승만 대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북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모택동이
국민당 장개석을 쫒아내고 중국 인민을 통일한것을 보고
남한에 있는 남조선 공산당 박헌영에게 게릴라 전술을 펴게하고
그당시는 3,8선을 자유롭게 왕래가능하였기에 간첩을 보내
이승만 정부를 무느뜨릴려고 했으나 미군정과 공산 빨갱이를
때려 잡자는 김두한 애국 청년단에의해 간첩이 생포되면
군인과 경찰은 간첩들을 끌고가서 총살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보복으로 남한의 전기를 끊고 남한의 이승만이를
갈기 갈기 찢어 갈아 마실려고 1950년 6월25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무력 침공을 하여 3 일만에 서울에 입성하여
부로조아 지주들을 찾아내어 반동분자로 몰아 인민재판후 공개 총살 시켰다.
나는 경북 문경이 고향인데 그당시 태어나지도 않아 잘모르는데
그당시 문경도 북한 인민군 손에 들어갔는데 인민군이 충주에서 쏜 포탄이
우리논에 떨어지기도 하고 방안에 엎드려 있으면 바같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소총으로 교전하느라 "탕탕탕"하며 콩뽁는 소리가
났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고 인민군이 낙동강전투를 위해
문경 산골 마을을 총을 메고 지나갔는데 주민들을 전혀 해치지 않고
배가 고프다며 북한돈을 마을 소주인에게 주고 잡아 먹으려고
황소 한마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배가 고파 아주 피곤하게 보이는 인민군은 행군하면서
총알도 질질 흘리면서 어깨에 총대멘 군기빠진 인민군도
보았다고 작은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고
상주 천봉산에 살았던 친척 할머니는 육이오 전쟁이 일어난줄도 몰랐다고한다.
나의 고향인 문경 산골마을에는 80가구 정도 살았는데
초가집에 호롱불이었으며 전기가 들어온건 1970년도
새마을 운동을 하고서였다.
종북론자들은 " 해방후 북한이 남한에 전기 공급을 끊은것은
남한의 이승만 정부가 국민에게 전기세 받아 쳐먹고 전기대금을
북한에 주지않아 북한의 김일성이가 화가나서 남한에 전기를 끊어버렸다,"
는데 북한이 간첩을 보내 위조지폐찍어 경제를 혼란시키고
게릴라 전술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엎어버릴려고하니
간첩 빨갱이를 잡아 총살 시키니 김일성이가 화날만하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 엿먹으라고 북한에서 전기 끊은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가이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방이후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협상을 이루기도하였으나
1949년 6월26일 향년 72세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안두희는 평북 용천군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947년 북한 공산정권이
지주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월남하여 서북 청년단에 가입하여 우익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육군 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장교 소위가 된다.
안두희는 이승만의지시로 김구를 암살했으며 특무대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석달뒤 15년으로 감형되고 1950년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 정지처분을 받고 1950년 6월27일 포병장교로 복귀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2월15일 소령으로 예편한다.
반면에 암살범 안두희를 한국 독립당에 입당 주선하여 김구에게 소개시킨
김학규는 징역 15년을 받고 복역하게 된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채 이름까지 바꾸어
잠적했으나 1960년 4.19 혁명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도망다녔으나 여러차례 테러를 당하였고 1961년 4월18일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본부인과 이혼하였고, 생계에도 곤란을 겪던 그는
약 2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28일 그를 알아본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개패듯이 맞았으나 용케 살아났다.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 30분경 안두희가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평소 김구 선생을 존경하던 버스기가 박기서
가 누워있는 암살범 안두희 대갈통을 몽둥이로 개패듯이 내리쳐 죽여버렸다.
박기서는 1997년 살인을 하고도 정상이 참작되어 징역 3년을 받았으나
1998년 3월8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안두희가 북한이 고향이고 지주였기에 북한 공산당 김일성에게는
인민을 괴롭히는 부르조아 반동이었고 만약에 해방후 월남하지
않았다면 김구선생은 암살 당하지 않았으며 안두희는 김일성에 의해
반동 분자로 낙인이 찍혀 아오지 탄광행이나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을것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
스트레스 받으며 천년의 근심으로 살필요 있는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자 ...
그러다가 보면 우리 후세에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
탈북민 이순실씨는 북한 요덕수용소 생활도 하여
죽어서도 북한에 가기 싫답니다.
한 줌 재가 되어서도 가기 싫답니다.
그런데도, 서울 한복판에서 임수경 의원과 신은미, 황선은 북한을 찬양했죠.
그러자 탈북 여성들이 단단히 뿔이 났습니다
재미교포 신은미씨(53) 통일 토크 콘서트 발언 내용중
"탈북자 80(%)~90(%)가 북한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
고 발언했다가 탈북자 단체에게 검찰에 고발를 당했습니다.
신은미씨는 검찰조사에서
"27000명 탈북자 전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전화오거나 편지온 탈북자중에
80(%)~90(%)가 북한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
고 해명했습니다.
신은미씨의 남편 정태일씨도 한발짝 물러나서
"아내인 신은미 꼴통이 한발언이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대구 출신인 신씨는 외조부가 1948년 제헌국회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을 주도한
박순석 의원(1960년 별세)이고, 작고한 부친도 6ㆍ25전쟁에
참전한 육군 장교를 지냈다고 저서에서 소개했습니다.
이 때문에 어릴 적부터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북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고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정태일과 재혼하고 부터 정태일이 북한 비디오에 광이라서
정태일의 영향을 받아 북한 관광하고와서 어릴때 교과서에서 배운 북한하고
지금의 북한하고는 현저히 달라 사진을 찍어 남한에 와서 통일 토크 콘서트를 열어
평양에서 찍어온 사진을 남한 몇몇 사람들에게 설명한것 같습니다
신은미씨는 미국에서 생활한 미국 시민권자로써 북한도 남한도 모두 고국이라 생각하고
모국인 남한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관광 입국 비자였는데 출입국 관리위반인줄 모르고
전국 통일 토크 콘서트를 하려고 한것 같습니다
신은미씨(53)가 6번의 방북하면서 김정일 생일날 노래를 부르고 ,
김정일을 찬양하기위해 만든 "심장이 있는 사람"을 북한에서 공연 한적이 있던데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그노래가 누구를 위한 노래인지 몰랐다고 진술할수도 있습니다.
신은미씨의 책 "재미교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가 통일부에서 우수 도서로 인정한 만큼
그책을 위주로 토크 콘서트를 하였다면 국가 보안법에 걸릴 염려도 없습니다
신은미씨가 알고 북한을 찬양하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종북이 뭔지도 모르고 한것이
라면 신은미씨의 외할아버지가 해방후 1948년 제헌국회서
국보법을 만든 국회의원이셨고 아버지가 육이오 사변때 북한 공산당을 때려잡기위해
북으로 진격한 장교였던 애국자 집안인 만큼
이번 만큼은 선처를 하여 대한 민국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낫놓고 기억자는 알아도 니은자는 모르는 시골무지랭이 이기에
국가 보안법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같은 동포로써 연민의정이 느껴집니다.
더불어 민주당 전대표 문제인이 2016년 4,13 국회의원 선거때 광주에 왔을때
호남 홀대론에 격분하여 울분을 참을수 없었지만 광주의 영웅 김대중 선생의 아들 김홍걸씨 얼굴보고 참았다
광주는 야당의 중심지다 문제인은 호남의 지지없이 절대 대통령 될수 없음을 깨달았을거다
광주에와서 무릎꿇고 사죄하는것을 보니 대통령 후보로 인정한다
앞으로 호남을 부처님 모시듯이 잘대해주면 대선때 한표 주겠다 으흐흐흐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김정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뿌리니
대남 당당부장 김여정이 뿔난것 같다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 최고 존엄자에게 모독주는 탈북자놈들 입을 찢어 죽이겠으니
명령만 내려 달라 !"고 궐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북한 김여정도 "조국을 배신하는 탈북자놈들을 용서할수 없다"고 맹비난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