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노동운동역사자료실 연구원/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전국노동자대회, 하면 뭐가 생각나요?"
매년 11월이면 전국의 노동자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전국노동자대회의 긴장감이 예전에 비해 떨어지는 듯하다. 메이데이 투쟁이 임단협 투쟁의 한복판 시기에 있는 것에 비해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렇지 않은 시기성 때문일까? 투쟁적 기풍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전국노동자대회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아요?"라는 물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전국노동자대회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단결투쟁의 장이다. 지금부터 전국노동자대회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투쟁을 통해서 이뤄온' 전국노동자대회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민주노조 총단결'을 품어낸 전국노동자대회
1994년 11월13일 경희대학교. 민주노총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대운동장 중앙무대 뒤편에 '건설 민주노총! 쟁취 사회개혁!'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인상적이었다. 3만여 노동자들이 대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히 한국통신노조 동지들과 전지협 동지들이 많이 참석해 있었다. 1994년 투쟁을 힘차게 전개했던 두 노조 동지들에 대한 격려와 연대가 넘쳐났다.
대회장 곳곳에 참가 조직들의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풍물패의 길놀이와 노래공연 및 율동배우기로 어느덧 대회가 시작되었다. 민주노총(준)의 출범을 미리 축하하는 듯 '또다시 앞으로', '바위처럼' 등 힘차고 빠른 노래들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본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민주노총(준)의 출범을 알리는 대회사였다. 양규헌 전노대 공동의장이 힘찬 목소리로 대회사를 낭독했다. "동지여러분! 24년 전 오늘, 한 점 불꽃이 되어 산화해 가신 전태일열사를 비롯한 모든 노동열사들의 피맺힌 한을 담고, 1천만 노동자의 노동해방 열망을 담아 벅찬 가슴으로 선언합니다. 1994년 11월13일 오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발전적으로 해소되고 민주노총준비위가 발족되었음을 여러분 앞에 엄숙히 선포합니다!" 순간, 문선대의 힘찬 노래와 함께 조합원들은 일제히 가지고 있던 종이들을 하늘에 날리며 민주노총(준)의 출범을 축하했다. 본대회는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대합창, 대회 결의문 낭독으로 마무리되었다. 모든 조합원들은 결의문을 통해서 '95년 임단투와 사회대개혁투쟁을 통한 민주노총 건설, 복수노조금지조항 등 노동악법개정투쟁, 산별노조 건설 등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한편 94년 노동자대회 하루 전날인 11월12일, 경희대 노천극장에서는 전야제가 펼쳐졌다. 전야제는 '건설 민주노총, 자주적 단결권 쟁취'라는 불글씨가 점화되고 불꽃놀이가 펼쳐지면서 절정에 달했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일부 참가자들은 "맨 문화행사만 하고 투쟁적 기풍을 세우기 위한 준비들이 없고 홍보용으로만 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평가한 반면, "처음 참석하게 된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행사였다. '이래서 노동자는 하나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라고 감회를 밝힌 동지들도 많았다.
94년 노동자대회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공식적으로 해소되고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새롭게 발족하는 것을 선언하는 일종의 '보고대회'였다. 이러한 대회의 성격 때문에 대다수 참석자들은 "대회가 민주노총(준)의 출범을 선언하는 것에 머물렀다", "분명한 주장과 요구내용이 부족했고, 제반 사회개혁과 관련해서는 슬로건과 현수막만이 있었다"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특히 대회가 끝난 후 전개된 행진에서는 지도부가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오가 행진하는 도중에 각 단위별로 해산을 하는 등 조직적인 투쟁과 선전을 펼치지 못했던 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94년 노동자대회가 남긴 과제
94년 노동자대회를 전후로 제기된 문제점은 첫째, 민주노총 건설과정이 주로 상층의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지만 조직형태, 시기 등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었고 조합원들의 요구와 관심을 모으는데는 소홀했다. 두 번째로 지적된 것은 민주노총 건설의 내용적 통일성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서 '민주노총은 왜 건설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역조직과 업종조직 간에 인식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한 지역조직 신문은 '87년 7, 8, 9 투쟁의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들이었다'고 패기 있게 밝히고 난 뒤, '기업별노조에서 노조탄압, 부당해고, 민주적 노조활동을 위한 투쟁 등에 한계가 노정되어, 제도·정책적 요구와 투쟁을 담을 더 큰그릇이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반면에 업종측 한 노보는 '전노협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대기업 노동조합과 업종별 연맹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민주노총과 산업별노조의 건설은 정부와 자본의 전근대적인 경영과 노무관리를 변화시켜 경제발전과 국가경쟁력의 강화에도 한몫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민주노조 건설에 대한 내용 및 경험의 차이가 민주노총(준)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그 수단은 '투쟁을 통해 건설하는 민주노총'이라는 구호 속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준)에게 주어진 일년의 시간으로는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열사의 죽음 위에 피어난 꽃
1995년은 민주노총 건설의 원년이었다. 많은 한계가 지적되었지만 민주노총 건설이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결실임은 분명했다. 1995년 11월12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는 '민주노총 창립기념'으로 마련되었다. 1988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과 '노동법개정투쟁' 그리고 '민주노조 총단결'의 염원을 이어갔던 전국노동자대회가 드디어 전국 중앙조직 건설의 역사적 의미를 받아 안는 순간이었다.
대회 당일 아침.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전국금속노동자결의대회가 열리는 등, 자동차, 화학, 부양, 대학, 의보 등 각 단위조직들은 개별적인 집회을 가졌다. 전야제 참가 대오는 오전 10시경부터 연세대를 출발하여 여의도까지 행진을 벌였다. 조선노협의 100여 명 동지들은 우주복같은 작업복 차림으로 행진에 나서 눈길을 끌었고, 다른 노동자들도 각 단위별로 통일된 소품들(빨간코팅 면장갑 등)을 선보였다. 본대회에는 약 5만여 명의 노동자, 학생들이 참가했다. 1시 경 여의도광장에 차례로 도착한 노동자들은 대형 무대의 크기에 놀랐다. 중앙무대만 가로 25m, 세로 10m, 높이 14m 규모로서 역대 민주노조 진영 행사규모 중 가장 큰 무대였다. 대오는 우선 '바위처럼', '다시 또 다시', '민주노총 총진군'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대오를 정비한 후, 권용목 사무총장의 사회로 대회를 시작하였다. 민주노총 창립 선포식 및 창립선언문 낭독(배석범 부위원장), 대회사(권영길 위원장)가 끝난 후 정태춘 씨가 '이 어둠의 터널을 뚫고'를 축가로 열창하였다. 마지막으로 김영대 부위원장의 결의문 낭독으로 본대회가 막을 내렸다. 본대회 후 문화행사는 '민주노총호 출항 대동 뱃놀이'였다. 전통 가락과 민요에 민주노총 출범을 축원하고 투쟁과제들을 담은 노래들이 이어지는 가운에, 노동자들은 긴 오색천을 머리위로 흔들면서 거대한 바다를 형상화하였다. 중앙으로 20대 과제를 담은 대형 에드벌룬이 모이고, 다시 민주노총호가 되어 무대 앞으로 전진한 뒤, 참가자들의 해방춤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내용이었다. 민주노총호를 하늘로 띄워 보내고 조합원들을 단위별로 해산하였다. 민주노총 출범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
95년 전국노동자대회에 앞서, 11월11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는 민주노총 창립 대의원대회가 열렸고, 그날 저녁에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가 펼쳐졌다. 이날 전야제에는 3만여 명이 운집했다. 전야제 사회자였던 최광기씨는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영화배우 홍경인씨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소개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여 큰 박수를 받았고 참석자들은 조명을 끄고 라이터를 일제히 밝혀 장관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95년 노동자대회 전후의 분위기
이 당시 대회를 전후한 분위기는 양분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한국노총의 위기와 민주노총(준)의 발전에 고무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노총 건설의 방향성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출범 한 달 전에 가진 한 대담에서 대담자들은 '민주노총이 유일한 중앙조직이 될 것'으로 전망하며 '민주노총의 조직 확대과정이나 조합원의 지향 등을 볼 때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민주노총으로 정리되지 않겠느냐'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양규헌 민주노총(준) 공동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 추진되는 경과는 제가 바라보는 민주노조운동의 발전 경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령의 정립과 공동투쟁의 경험들이 축적되지 않으면서, 각기 생각의 차이가 민주노총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민주노총 내부에서 이런 문제들을 시급히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전노협, 접었던 깃발을 다시 펼쳐라!
1994년과 1995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민주노조 총단결'의 장을 마련해 주었던 대회였다. 그러나 민주노조 총단결은 외형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과 전노협 정신이 살아 숨쉬며 전국의 노동자들이 계급적으로 단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탄압과 회유에 맞서서 "전노협이 내 조직인데 어떻게 내가 내 안에서 탈퇴를 할 수가 있나"라고 반문하던 그 정신이다. 또한 "황량한 공단거리에 민주노조의 깃발 하나라도 온전히 올려낸다면, 곧게 뻗은 공단대로 옆에 주검으로 묻힌다해도 여한이 없다"는 뜨거운 결의이다. 민주노총이 출범한 직후 1995년 12월3일. 전노협은 공식적으로 해소식을 가졌다. 양규헌 전노협 위원장은 접혀진 전노협 깃발을 가슴에 꼭 안고 눈물을 흘렸다. "전태일 열사여! 박창수 열사여! 노동해방 열사여! 우리는 전노협 정신을 민주노총에 실현시키겠습니다." 마지막 대의원대회 참가자들이 외쳤던 그 다짐이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