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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 배현숙
메르스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은아들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개혼도 못 했는데 친구는 필혼을 하는 셈이다. 우리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예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올 때는 친구가 우리 집 앞 도로까지 차로 대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무릎에 놓았던 핸드백을 드는데 얇은 여름옷이라 지퍼의 미세한 고리에 실 한 올이 걸렸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밑으로 자리를 옮겨 살펴보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풀밭에 내려놓고 지퍼에 걸린 올을 조심스레 빼내니 가방과 옷은 금세 분리되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아 안도의 숨을 쉬며 핸드백을 들고 달랑달랑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집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기에 잊고 있었다. 한참 후 컴퓨터를 하려고 책상에 앉아 안경을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아까 예식장에서 밥 먹을 때 식탁에 둔 생각이 났다.
예식장에 전화를 했더니 없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잊어버렸는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귀신 곡할 노릇이라고 중얼거리며 끙끙거렸다. 긴 한숨을 쉬면서 나이 탓인가? 건망증의 시초인가?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것을 두고 아이들은 맨붕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래 잊자, 내일 안경점에 가서 새로 하나 사면되지 하고 찾는 것을 포기했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문득 ‘나이에는 장사 없다, 네도 내 나이 돼봐라.’란 말을 자주 하시던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나이 80이 넘으면서 무엇을 자주 잃어버리고 깜박깜박한다고 하소연을 할 때,
"왜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쓸데없는 생각하다 잃어 버리노."라고 엄마의 사연은 들어보지도 않고 잃어버렸다는 단 한마디에 똑 쏘아붙이는 매정한 맏딸이 아니었는가!
친정엄마는 75세 때 독학으로 한문 1급 시험에 합격한 분이다. 난 그보다 몇 10 년은 더 젊었는데도 조금 전에 잃어버린 안경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찾기를 포기하고 내일 안경을 사려고하니 얼마나 한심한가? 엄마를 떠올리며 그 때에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렇게 안경을 두고 온 곳을 알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렸고, 그 장소에 갔을 때는 내 안경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엔 풀만 바람에 일렁이고 도로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나이를 탓하면서 건망증이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난 아직 여식 하나를 여미지 못 했는데 벌써 건망증이라면 큰일이다 싶었다.
나도 엄마 나이쯤 되면 건망증이 더 심해질 텐데 내가 엄마한테 그랬던 것보다 몇 곱절 더 강도 높은 질책을 딸들에게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정엄마한테는 아직도 난 어린 딸인데 벌써 이렇게 나이 들어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씁쓰레한 마음이 가슴 저편에서 밀려온다.
빨래를 삶다가 / 김진열
지난 봄날 오후였다. 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집사람은 모임에 간다며 나갔다. 집사람은 나가며 십 분 후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라고 했다. 혼자 부엌의 가스레인지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나른함과 졸음을 참고 있으려니 전화가 울렸다. 오랜 동안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였다.
나를 만나러 집 근처에 온다기에 전달할 봉투 몇 개와 나간 김에 은행 볼일을 보려고 통장을 들고 옷을 갈아입었다. 친구가 이곳 지리를 잘 모를 것 같아 내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 10분쯤 기다리니 낯익은 친구가 내 앞에서 내렸다. 반가워 악수를 나누며 자기 차에 타서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물었다. 그리고 아는 친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대면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고갔다. 그와 나는 완전 학창 시절로 돌아갔었다. 벌써 고인이 된 친구도 나왔고, 심지어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까지 들먹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친구는 돌아갔다. 학교 졸업한 지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마음은 그때 마음이었다. 상기된 기분을 가라앉히면서 집 근처 두 은행에 볼일을 보고 여유 있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트를 탔는데 무슨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이게 무슨 냄새인가? 건성으로 생각했다. 우리 집 9층에서 내리는데 냄새는 더 심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실내가 연기로 가득 차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놀라서 더듬더듬 들어 가 보니 가스레인지 위의 빨래 삶는 세숫대야에서 불꽃이 오르는 게 아닌가. 아차! 집사람이 외출 하면서 10분 후에 불을 끄라고 하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뛰는 가슴을 안고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 불을 껐다. 집에 있는 창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선풍기를 있는 대로 다 돌려 연기를 빼내기에 바빴다. 또한 새까맣게 재로 변한 빨래를 집사람 오기 전에 얼른 치웠다.
정말 조금만 늦었더라도 신문에 크게 날 사건이 생길 뻔 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마에 땀이 나고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내 코엔 그 때의 메케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게 건망증이 아닌가 싶다.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아니라 정말 앞으로 신경 바짝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없다. 집 사람한테는 우리 조심 하자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아버지의 사진 / 서민용
아들놈의 성화로 오래간만에 앨범을 펼쳤다. 아들놈은 앨범을 좋아한다. 앨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어서 좋단다.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세 살 때 발가벗고 찍은 사진들도 있고 온 가족들의 얼굴을 익히는 좋은 교재로도 쓰인다. 앨범을 펼쳐서 양손으로 들고는 내 무릎을 파고드는 녀석에게 못 이겨 나는 또 설명을 시작한다.
"요것은 니가 네 살 때 우리 집에서 찍은 거지?"
"이것은 우리 동해 놀러 갔을 때 아빠 친구랑 찍은 거고……."
한 장씩 앨범을 넘기다가 문득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였더라? 맞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여름이었지. 그러니 녀석은 네 살 때구나. 사진은 우리 삼 대(代)가 얕은 냇가에 들어앉아 아버지는 녀석(손자)을 안고 난 비스듬히 아버지 뒤에서 아버지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그윽하게 웃고, 나는 조금 더 입을 헤벌레 웃고, 녀석은 그야말로 입을 힘껏 다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때는 그렇게 웃었건만 우리 삼대는 그야말로 웃는 것도 늙어감에 따라 줄어든 것 같다.
아버지 생전에 카메라에 그 모습이 찍힌 것은 아마도 그게 마지막인 것 같다. 그 해 여름 모처럼 온 식구가 모였다. 대구에서 내가 사는 남양주 마석까지 큰누나네 식구들과 함께 모두 휴가를 오셨다. 그 해 봄 늦게나마 내가 결혼식을 올리고 집도 어느 정도 크고 아늑한 곳으로 이사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한번 오시라고 말했지만 미뤄 오시다가 여름에 처음으로 아들 사는 곳이라고 일부러 오신 것이었다.
전에도 가끔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오시어도 우리 집에는 들리지 않으시고 작은 누나네에서만 지내시다 가시곤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는 부모가 반대하는 동거부터 시작한 상태였고 아직 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심지어 집사람이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도 싫어하셨다.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셨는지 얼른 대충 인사를 받으시고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 버리시곤 했다. 며느리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평소 아버지의 성격상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지만, 나는 섭섭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동거부터 시작했다고 친구들까지도 안 만나고 계시다고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는 차라리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런 설움 속에서 어렵게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집까지 갖추었으니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아버지를 우리 집에 모시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작고도 절실한 계획은 처음부터 보기 좋게 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역에서 작은누나의 봉고로 청평의 냇가로 바로 오셔서 아직 우리 집에는 들리지도 못했다.
그 냇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틀째 되는 날.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작은 자형에게 그만 철수해서 우리 집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자형은 다른 친구들과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면서 그냥 하루 더 있자고 했다. 그래서 그러마 하고 또 하루를 천막에서 묶기로 했다. 그 날도 밤늦도록 우리가족의 특기(?)인 광란의 파티를 마치고 쓰러져 자는데 난리가 난 것이다.
오후부터 내린 비가 한밤중이 되자 냇물이 갑자기 불어 순식간에 우리 텐트를 배로 만들어 버렸다. 텐트가 물위에 둥둥 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허겁지겁 정리를 하여 철수를 하였다. 우선 작은누나 집에 짐들을 풀어놓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때가 아침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모자라는 잠을 청하고 집사람과 나는 대충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였다. 그 얼마나 기대하던 대접이었던가. 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겠는가. 우리 부부는 피곤도 모르고 그저 서로 바라보고 웃기만 했다. 이제 정식으로 우리 집에서 부모님께 한 끼 밥을 대접해 드리게 된 이 사실이 그저 고맙고 소중할 뿐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아들놈 임신으로 인해 부득이 살림을 시작한지 어언 3년이 지났다. 그 기간에 한 번도 우리 집을 찾지 않았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 드디어 결혼식도 올리고 떳떳하게 부모님께 식사 한 끼 대접하려고 그랬는데……. 전화가 왔다. 이럴 수가…….
작은 자형이었다. 가평에 냉면 잘하는 데로 모두 먹으러 가자고 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 했지만 저녁 때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면박을 줬다. 그에게 나의 이런 소중한 심정을 일일이 설명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이야기 해봤자 오해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의 꿈은 또 미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루어졌었다. 아직은, 냉면 먹고 고기 먹고 그러다 저녁엔 온 식구들이 노래방까지 들려서 목청껏 외치다가 또 작은 누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거기서 2차로 술이 나오고, 아버지는 외손녀 침대에서 주무시고 말았다.
다음날은 모두 내려가야 하기에 그냥 거기에서 서울역으로 바로 출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름이 끝나고 추석이 지난 지 이틀 후 아버지께서는 주무시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그렇게 나의 소박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제는 가슴 저 밑의 앙금이 되어 가끔 나의 소주잔에 안주가 되고 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끝내 아들놈 사는데서 따뜻한 밥 한 끼 못 얻어 드시고 돌아가시고 만, 불쌍한 우리 아버지…….
토요일 오후 2시 / 서민용
오월의 햇살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공기는 열여덟 새내기의 속살처럼 말랑말랑하고 촉촉하다.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다.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있는 날. 어머니까지 모시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도심 속의 예식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특히 토요일에는 30분 단위로 예식이 치러지니 오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들 속을 헤집고 식장으로 들어가는데 저쪽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친구의 어머니께서 막 내려오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막 인사를 드리려는데,
“아이고, 야야. 니, 와 인자오노?”
친구 어머니는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폐백실에 가야 한다며 바삐 계단을 내려가 버린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뭔가 잘못됐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그 이유를 생각해내려 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역시 식장을 막 빠져나오는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니, 어쩐 일이냐. 어제 그렇게 리허설까지 해놓고 이렇게 늦어버리면 어떻하냐. 사회 볼 친구가 없어서 난리쳤다.”
그때서야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곱게 넣어두었던 청첩장을 다시 꺼내 보았다. ‘5월 17일(토) 오후 1시’ 분명 오후 1시였다. ‘왜 1시이지?’ 그럼 왜 나는 당연히 2시로 알았을까? 분명 청첩장에는 오후 1시로 찍혀 있었고, 어제 저녁 친구들과 만나서 예식 리허설까지 하면서도 아무도 1시임을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당연히 그리 알고 있었을 테니까.
황당해하는 나를 친구들은 놀리기도 하면서 피로연장으로 끌고 갔다. 피로연 내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그동안 자라면서 한 번도 연락이 끊긴 적이 없었고, 비록 학교는 달랐어도 매 주말이면 만나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장래를 의논하기도 했던 친구가 아니던가. 얼마 전에 내가 먼저 결혼식을 올릴 때는 그가 사회를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미안하고 창피했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원인은 모두 나의 선입관에 있었다. 습관적으로 토요일 오후 2시가 머리에 각인이 되었던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우리는 늘 토요일 오후 2시에 만났었다. 그때는 손전화가 없어서 약속시간은 그만큼 중요했다.
“토요일 2시. 대백 앞.”
우리의 약속시간은 늘 이렇게 토요일 오후 2시. ‘대백’ 앞이었다. 나의 결혼식도 토요일 오후 2시였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오후 2시에 만났었다. 그렇게 오후 2시가 머리에 박혀있었던 것이 이런 사단을 만들다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모두 다 손전화가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확인을 할 수 있어서 약속시간을 착각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5분만 늦어도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리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 그 친구 딸내미 결혼식이 있다.
“어디 보자.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오리발 / 탁정운
짐을 꾸린다. 내일 떠나는 여행을 위해 이것저것 장비를 챙기는 중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말레시아의 코타키나날루다. 미지의 그곳엔 어떤 것들이 나타나 나를 반겨 줄까 하는 기대로 가득하다.
25여 년 전이었다. 연휴를 맞아 동료들과 거제도에서 동남쪽으로 배로 30분쯤 거리에 있는 홍도라는 무인도로 괭이 갈매기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곳은 갈매기의 주 산란지인 동시에 돔이 잘 잡히는 곳이라서 낚시꾼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그 때만해도 그곳은 정기 여객선이 없어서 어선을 흥정해서 타고 갔다. 홍도로 가는 뱃길은 마치 장판 위를 가는 것처럼 잔잔하고 햇살도 좋았다.
섬에 내리자마자 카메라를 준비해서 다들 촬영하기에 바빴다 나 역시 내 나름의 포인터에서 삼발을 펼치고 열심히 촬영했다. 그 시절엔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서 다들 한 컷 한 컷 신중하게 찍을 때였다. 편대를 이루어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은 마약처럼 필름 값 신경을 무디게 했다 셔터소리가 지속적으로 원 없이 터졌다.
갈매기들이 산란기라 잘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침 광고 찍으러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호루라기, 긴 밧줄 등으로 갈매기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못살게 하는(?) 덕에 수월하게 촬영했다.
이튿날 오전부터 바람이 불더니 급기야 주변에서 조업하던 어선들도 홍도로 피신을 왔다. 오후에는 강풍이 몰아쳤다. 홍도 주변 무인도의 낚시꾼들이 난리가 났다. 데리러 와야 할 고깃배가 높은 파도에 올 수가 없어서 다들 바위틈이나 엎드려서 자신들을 훌쩍 넘어가는 파도와 사투를 하고 있었다.
섬에서 우리는 가슴 졸이며 보고 있었다. 아, 이번 파도는 너무 커서 저 사람들이 모두 죽겠구나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면 파도가 지나간 후에 용케도 살아 있는 낚시꾼이 보였다.
생명이 참 모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선 대신 경비정이 와서 해양경찰들이 구조를 했다 경비정도 파도 때문에 접근이 어려워 해경들이 애를 먹고 구조를 했다. 그런데 낚시꾼들은 자기생명보다 낚시 장비를 먼저 구조선에 올렸다. 생명보다 중한 낚시 장비를 먼저 챙기는 대단한 강태공들이었다
문제는 다음날 이었다. 우리도 거제로 나와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우리를 태우러 와야 할 어선이 오질 않았다. 우리 외에도 몇 팀이 있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속절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같으면 하루 결근하고 다음날 출근한다고 연락하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겠지만 그 시절엔 내일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살든 시절 이었다.
우리는 어선 한 척과 흥정을 했다. 돈을 많이 줄 테니 육지로 좀 데려 달라고 역시 돈의 힘은 위대했다. 육지로 나갈 사람을 모집하니 우리 팀뿐만 아니라 여러 팀이 타기로 했다.
배를 탈 사람들은 어부들에게 주의 사항을 들었다. 배가 아무리 흔들려도 움직이지 말 것을 몇 번이나 듣고 승선을 했다, 다들 전쟁터에 가는 듯한 비장한 얼굴이었다.
드디어 배가 출발했다. 거의 45도 가량 좌우로 롤링을 했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말도하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배 멀미도 하지 않았다. 유독 나 혼자만 긴장하지 않고 다른 일행들의 얼굴을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난 그 당시 스킨스쿠버를 하고 있었다. 사진장비뿐만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서 오리발과 스노클 장비를 챙겨갔다. 섬에 들어 갈 때 모든 사람이 웃었다. 사진 찍으러 가는데 왠 오리발이냐고…….
배위에서 보란 듯이 오리발을 신고 지금 배가 전복되면 홍도로 돌아갈까 거제로 그냥 헤엄칠까를 마음속으로 계산하면서 새파랗게 질려있는 동료들 옆에서 계속이야기 했다. 긴장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내일 출발하는 코타키나날루 여행을 위하여 오리발과 카메라를 잊지 않고 챙긴다. 추억의 홍도 뱃길을 생각하면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무엇인가 / 서민용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하던 기준이다.
신(身)이란 그 사람의 관상을 일컫는다. 남자 관상을 볼 때 포인트는 눈이다. 정기(精氣)는 눈에서 표출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면 총기는 있지만 장수(長壽)는 못한다고 한다.
도교(道敎) 내단학(內丹學)에서 말하는 인체의 세 가지 보물은 하단전의 에너지인 정(精)과, 중단전의 에너지인 기(氣), 그리고 상단전의 에너지인 신(神)이다. 눈빛에서 나오는 총기는 이 신(神)에서 나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원유가 정(精)이라고 한다면, 원유를 어느 정도 가공해서 나온 석유가 기(氣)이고, 상당히 가공해서 나온 휘발유가 바로 신(神)에 해당한다. 휘발유는 상당히 가공된 것이라서 귀하고 비싼 기름이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신(神)이 항상 빛난다는 것은 비싼 휘발유인 신(神)이 지나치게 과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神)은 기(氣)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氣)는 다시 정(精)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신(神)을 많이 소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단전의 정(精)과 중단전의 기(氣)도 이에 비례해서 빨리 고갈되기 마련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스위치를 꺼놓아야지 항상 스위치를 켜놓고 있으면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관상가들은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리면 빨리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눈에 총기가 가득한 천재들이 대체적으로 장수하지 못하고 빨리 죽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려서 아랫배를 관조하라는 말은 눈의 총기를 밖으로 품어내지 말고 내면으로 감추라는 이야기이다.
관상을 볼 때 또 하나의 포인트가 찰색(察色)이다. 얼굴의 색깔을 보는 일이다. 얼굴 생김새와 윤곽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얼굴의 색깔은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찰색을 일명 ‘기찰(氣察)’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사람의 장기적인 운세는 관형(觀形)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눈앞에 직면한 단기적인 운세의 판단은 찰색을 보고 예감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이마에서 빛이 나면 관운이나 승진 운이 있다고 판단하고, 양쪽 눈 중간의 콧대 부분이 시커멓게 보이면 조만간에 죽을 수도 있다고 본다. 관상의 대가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찰색의 핵심은 관상을 볼 때 그 시간은 반드시 한낮인 정오에 보아야 하며, 나무그늘 밑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오는 태양이 중천에 떠서 자연광이 가장 밝은 시점이다. 그러나 너무 밝아서 얼굴의 미세한 명암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무그늘 밑은 자연광을 약간 차단하는 곳이므로 음양의 균형이 잡힌 지점이라고 본다. 문제는 조도(照度)이다. 저녁 때 카페 불빛에서는 찰색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또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의 찰색도 불가능하다. 조도가 가장 균형을 갖추는 시전에 보라는 이야기이다.
사주를 보려면 생년월일시를 만세력에서 찾아 십간십이지의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관상은 상대방의 얼굴을 그 자리에서 한 눈에 판단할 수 있으므로 사주에 비해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관상을 돈오(頓悟 : 한순간에 깨달음)에 비유하고 사주는 점수(漸修 : 점진적으로 닦음)에 비유하곤 한다. 이와 같이 사주와 관상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신(身) 다음에는 언(言)이다. 언(言)이란 그 사람이 말을 얼마나 조리 있게 하는가를 보는 일이다. 언(言)을 조금 깊게 들어가면 목소리의 색깔을 분석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보이스 칼라를 가리켜 성문(聲紋)이라고도 표현한다. 사람마다 지문(指紋)이 다르듯이 목소리의 결인 성문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관상(觀相)이 불여음상(不如音相 : 관상보다 음상이 더 중요하다)’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목소리는 인물 됨됨이를 판단할 때 근본적인 자료로써 활용된다.
사람마다 각기 목소리가 다른 이유는 인체 내의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각기 다른 데서 연유한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오장육부의 진동을 따라 나오는 것이고, 사람마다 장기의 크기와 강약이 다르므로 목소리의 칼라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오장(五臟) 가운데 상대적으로 비장(土)이 강한 사람의 목소리 톤은 ‘음-’소리가 강하고, 폐장(金)이 강한 사람은 ‘아-’ 소리가 강하다. 간장(肝腸)을 담당하는 (木)이 강한 사람은 ‘어-’소리가 강하고, 심장(火)이 강한 사람은 ‘이-’소리가, 신장(水)이 강한 사람은 ‘우-’소리가 강하게 나온다.
‘음, 아, 어, 이, 우’ 이 다섯 가지 소리는 각각 비장, 폐장, 간장, 심장, 신장과 연결되어 있다. 음, 아, 어, 이, 우의 음 높이는 전통 음계인 궁, 상, 각, 치, 우와 배대된다. 궁에 해당하는 ‘음-’소리가 가장 낮은 소리이고, ‘우-’소리가 가장 높은 소리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서 ‘음-’ 소리가 강하게 나오면 이 사람은 오장 중에서 비장이 튼튼하고, 그 성격은 군왕의 성품이 있다고 판단한다. 토(土)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음-’소리가 지나치게 강하면 교만한 성품일 수 있다. 적당하면 군왕의 위엄이 있는 좋은 목소리이지만 지나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교만한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아-’소리는 폐장에서 나오는 소리로서 노(怒)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금(金)이 많은 사람이다. ‘어-’는 원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데, 목(木)이 많은 사람이고, ‘이-’는 슬픈 마음이 담겨 있는데, 화(火)가 많은 사람이며, ‘우-’는 신장에서 나오는 소리로서 음란한 마음이 들어있다. 수(水)가 많은 사람은 대체로 음란하다고 본다. 남자는 어느 정도 음란함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서양음악의 여자 소프라노들이 내는 소리들은 ‘우-’소리에 해당한다. 이는 곧 음란한 소리. 즉 섹슈얼한 소리인 것이다. ‘우-’소리는 신장에서 나오고, 신장이 강한 사람들은 수기(水氣)가 강해서 다분히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과로를 해서 피곤할 때 목젖(편도선)이 먼저 붓는 사람은 신장이 약하다는 표시이고, 어금니가 솟는 사람은 간장이 약하고, 혓바늘이 솟는 사람은 심장이 약하고, 입술이 부르트는 사람은 비장(위장)이 약하고, 앞니가 솟는 사람은 폐장이 약한 증거로 본다.
음상(音像)을 본다는 것은 음, 아, 어, 이, 우와 같은 소리의 기준에 맞추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분석해보고, 그 분류 등급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양식을 미리 짐작해 보는 작업이다. 목소리는 인격의 표상인 것이다. 이는 또한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수련방법에도 이용된다. 신장이 약한 사람은 ‘우-’소리를 집중적으로 연습하면 신장이 강화된다. 심장이 약하면 ‘이-’소리를 집중적으로 발성하면 효과가 있다. 다른 내장기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음아어이우’ 발성 수련법은 『정역』의 저자이기도 한 김일부(金一夫 : 1826~1898) 선생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된 바 있다.
서(書)는 글씨이다. 좁은 의미로는 글씨체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문장력을 말한다. 요즘이야 붓이나 펜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 자판을 통하여 글을 쓰는 세상이라 글씨체는 별 의미가 없다. 대신에 문장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한국사회의 여론은 여전히 글을 쓰는 칼럼리스트, 신문기자, 논객, 작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만큼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상당한 능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기 생각의 50%만 말로 표현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은 웅변가라고 할 수 있고, 자기 말의 50%만 글로 전달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은 대단한 문장가에 속한다.
판(判)은 무엇인가. 판단력이다. 신(身)과 언(言)과 서(書)를 보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판단력을 보기 위해서이다. 결국은 판단력에서 인간 능력은 결판이 난다. 인생사는 예스냐 노냐 판단의 연속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 한번 잘못 내리면 만사가 끝장날 수 있다.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가장 첫 번째 능력은 역시 판단력이다.
그런 만큼 신언서판(身言書判) 중에서 판단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판단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이판(理判)이고 다른 하나는 사판(事判)이다. 이 둘을 흔히 합쳐 ‘이판사판’이라고 한다. 이판사판의 어원(語原)은 불교의 『화엄경』에서 유래하였다. 불교경전 중에서 최고의 경전이라 일컬어지는 『화엄경』에서는 인간사의 범주를 이(理)와 사(事)로 파악한다. 이(理)는 본체의 세계이고 사(事)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理)는 눈에 안 보이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이고 사(事)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이기도 하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때 이(理)는 공(空)의 세계이고, 사(事)는 색(色)의 세계와 같다. 양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관계에 있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화엄경』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격은 이판과 사판에 모두 걸림이 없는 경지의 인격이다. 대체적으로 사판(事判)은 데이터를 종합 분석하여 내리는 합리적인 판단이고, 이판(理判)은 직관적이고 영(靈)적인 차원에서 내리는 판단이다.
사주명리학적 입장에서 예를 들자면, 처녀총각 중매를 할 때 신랑의 학벌, 직업, 외모, 집안을 따지는 것은 사판(事判)에 속한다. 그러나 조건이 좋다하더라도 둘이 만나 백년해로를 할 것인가는 100% 장담할 수 없다. 조건이 좋다고 무조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생년원일시를 놓고 사주와 궁합을 본다. 사주와 궁합을 보는 작업이 이판(理判)에 속한다.
사판능력은 인생경험에 비례해서 증가하지만, 이판능력은 경험세계와 데이터를 초월한 영역이므로 이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판과 사판이 모두 좋게 나오면 일은 거의 성사된다. 이판사판이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밀어붙인다는 뜻에서 ‘에라 이판사판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먼저 사판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 다음에 이판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합리적인 과정을 먼저 거쳐서 판단하고 신비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수순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이다. 이름 하여 ‘선사판(先事判)에 후이판(後理判)하라’이다.
그때 그 사람 / 조정향
마음이 심란하다. 웅크리고 있던 겨울이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봄은 어느새 다양한 색깔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댄다. 두 늙은이가 신명이 나서 차를 몰고 꽃 마중을 나섰다.
봄날의 밝은 표정 탓에 남편도 내심 즐거운가 보다, 팔조령을 넘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춘이었을 때 유행하던 노래를 아는 대로 흥얼거린다. 나중에는 숫제, 음정 박자 무시하고 뒤범벅으로 소리를 질러댄다. 성대 결절이 된 두 목소리가 꼭 태초의 원시인, 아니 오랑우탄 같아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다. 웃다 보니 신혼시절이 옛날 영화처럼 머릿속을 찾아 든다.
남편이 군에 있을 때, 전남 광주에서 첫아들을 얻었다. 막내 응석받이로 자란 나는 아이가 아이를 낳은 격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자다가 없어졌으면 싶었다.
객지에 홀로 지내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 졌다. 거기다 일까지 힘에 겨워 끝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위가 아파서 밤새워 아이와 같이 울고 뒹굴었다. 살이 빠져 50 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얼굴은 거뭇한 살구나무 등걸 같았고 피부 또한 소나무 껍질 같았다. 20대의 남편도 철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무관심이었다.
견딜 수 없어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하소를 했다. 아주머니는 내 얘기를 듣더니 친정에 가기를 권했다. 대구에 가기로 결정을 했지만 사회생활에 익숙지 못한 나는 혼자 가기가 겁이 났다. 대전까지 가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나를 데려다주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어 광주를 출발, 대전에 도착한 후 대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남편은 내 좌석을 찾아주고 마침 바로 앞좌석에 자신과 같은 산뜻한 여름 카키복을 입은 장교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발차시간이 임박하여 미처 그 사람과 인사도 시키지 못하고, “이 사람 잘 부탁 한다.”하고 내려가 버렸다.
스물네 살 된 그때의 내 차림은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아니었다. 그 당시 혼수에는 옷을 짓지 않고 옷감만 보내 주었다. 그래도 맏며느리라고 불망사 하늘색 치마감에 흰 적삼을 넣었는데 객지생활을 할 처지인데 그걸 왜 넣어서 다녔던지……. 또 그 한적한 시골의 바느질집에 맡겨서 지었으니 옷은 가관 이었다.
시댁에 첫 아들을 안고 가니 자랑스럽게 원피스도 있었지만 한복을 입었다. 드디어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전속력으로 달렸다. 철부지 새색시는 젖살이 오른 통통한 아들을 돌려 안고 앉았으나 바로 앞 남편 친구 때문에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서먹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배꼽까지 내려오는 허연 불망사 적삼을 걷어 올려 보채지도 않는 아이에게 젖을 턱하니 물리고 앉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친구가 반듯하게 일어서더니 “안녕 하십니까. 인사 올리겠습니다. 종일이 누님 되십니까?”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 동안 시골생활에 까칠하고 거뭇한 얼굴 때문일까 나를 남편의 누나로 보다니……. 얼굴이 달아올라 귀밑까지 벌게졌다. 그분도 눈을 확 굴리더니 아니다 싶었던지 “아이구! 미안 합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고는 바람같이 도망가 버렸다. 그리곤 대구에 도착 할 때까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사람 소식을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마 어디에서 우리처럼 늙어 가면서 그때의 (한 세상 살아버린 아줌마 같던) 친구의 아내를 희미한 눈자위에 떠 올리며 빙긋이 웃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그 분의 기억 안에 나는 한평생 옥색치마 흰 적삼의 산전수전 다 격은 듯한 키만 큰 엉성하게 말라빠진 여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회상에 젖어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만원 내라!”하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나올 때 나는 ‘꽃이 활짝 폈다, 남편은 덜 폈다’,로 만 원 내기를 걸었다. 나는 양다리 계산을 했기에 당당하다.(남자들은 참 어리석다)
“여보, 오늘이 만우절인데.” 했더니 남편은 약이 바짝 올랐는지, “운전 하는 꼴이, 사고 안 내고 다니는 게 기적이다.”를 연발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즐겁다. 노을 내린 저쪽 마을엔 살구꽃 연분홍 너울이 구름처럼 펼쳐있다. 이호우 님의 <살구꽃 핀 마을은>을 큰 소리로 읊는다. 노후의 평온한 하루를 그런대로 마무리하듯 액셀을 지그시 밟는다.
영암 노인 이야기 / 서민용
“가면 어서오소하고 반기기를 하나, 내려갈라 하면 잘가소하고 인사를 하나, 내가 뭣 할러 가나 몰러, 나도 잘 몰러”
“그러제라.”
“해거름에 산에 올라갈 적이 많은데, 올라가면 뭐 혀. 오면 온다고 반기기를 하나 가면 간다고 붙잡기를 하나. 아무 말 없는 그 사람을 거기에 묻어두고 내려오는 내 복장만 무너지는 거지.”
“그러제라, 왜 안그러것소.”
“하루 일을 보고 해질녘에 가까우니까 몇 번 올라가봤는데, 아무 말도 없는 마누라 앞에서 내 가슴만 썩어들더라고, 헛방이여, 헛방”
“허허, 성님도 참, 그래도 형수가 좋아라 할 것이요. 영감이 이렇게 날 지켜주고 있구나 하고 말이요. 근데 조카들은 자주 내려 오요?”
“자식새끼들은 전화 한통 없고, 내려오는 것도 반갑잖어, 어쩌다가 내려오면 올라갈 생각만 한당께.”
“다 즈이들 묵고 살란 께 바쁘것지라. 어쩌것소 성님이 이해해햐지라. 자시는 것은 어째 잘 챙겨 드시오?”
“잉, 그거이 영 잘 못 묵네, 밥솥에 밥을 한 솥하고 찌개를 끓여도 한 숟갈을 뜨고 난께 영 못 묵겠대. 입맛이 없어, 입맛이……. 먹어야 사는 디 그게 먹히질 않어……. 내가 요즘 그렇게 사네.”
“그래도 먹어야 사제라이, 근데 농지구입자금은 뭣하러 신청했다요?”
“그게 말이시, 재작년에 철이 엄마가 죽고 그 땅을 팔줄 알았제, 그래서 작년에도 돈을 마련해 뒀어. 그런데 상근이 아제가 땅을 안 내놓드만, 땅 쥔이 땅을 안 판다는데 수가 있남? 작년 가을에 그 돈 다 다시 갚아불고 올해 새로 준비하려는 것이여. 혹시 땅 내놓으면 살려고, 도시에 살면서 농사철이면 자가용타고 농새지러 오는 놈들 보기 싫어서, 또 우리 일가 아닌가. 내가 사서 농새 지어야지. 그래야 내 맘이 편한께.”
“아따 성님, 자식 중에 농사지을 놈도 없다면서 또 땅을 사면 그 땅 누가 다 농사 지을라요? 혼자서 지금 땅도 다 처리 못하면서? 지끔 땅 가는데도 허리가 끊어진다고 맨날 앓아쌋씀서”
“긍께, 나도 모르것어. 이제는 내 몸이 몸이 아닌데, 걱정이여. 해마둥 농새 시작헐 적에는 생각이 많더구먼, 자식 중에 한 놈이라도 뛰어들면 마음 놓고 맽기것구만, 그게 내 뜻대로 잘 안되는 게 문제여.”
“그러제라, 왜 안 그러것소. 자식이 부모 맘 알아주면 상전이제라.”
“지들이 낭중에 내 죽어 송장 치를 때, 찢고 까불고 싸우더라도 내가 해놓는 게 맞지 않는가? 그래도 내가 해놓고 가면 그놈들 중 누군가는 알아주지 않겠는가 말이여. 난 그놈들을 이 세상에 내놨으니까, 그것이 죄니까.”
“아따 성님, 그것이 뭔 죄다요? 성님도 참.”
“즈그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마누라한테는 할 말 있잖여? 허허.”
봄이다. 지리산의 ‘낙장불입’시인(이원규)은 벌떡 일어나 대문을 박차고 봄 마중을 나가자고 노래했다. 기다림의 절정은 마중을 위해 길을 나섬이라고…….
몸이 안 좋아 쉬는 날 늦은 아침을 먹으러 동네 식당에 들려 옆자리의 두 노인네들에게서 귀동냥한 이야기이다. 봄 마중을 위해 어디론가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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