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인제, 양양의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위에 생긴 일대승지입니다. 전일에는 인제 쪽은 한계산이라 하고 양양 쪽은 설악산이라 하여 일산(一山)에 이명(二名)이 있었지마는 본대 이유있는 일 아님에 마땅히 유래가 먼 설악이란 한 이름으로 통일할 것이겠지요.
설악산은 또한 커다란 石山덩어리로서 그의 경치는 대개 금강산에 비방하다고 하면
얼른 짐작이 될 것입니다.
산세가 웅대하고 기봉이 무더기무더기 높이 빼어나고 골이 깊고 숲이 짙고 큰 소와 급한 여울과 맑은 시내와 긴 폭포가 여기저기 변화있게 배치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홀연 기이함에 놀라고 홀연 시원함을 부르짖게 하는 점이 대체로 금강산과 같습니다. 탄탄히 짜인 상은 금강산이 승(勝)하다고 하겠지마는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승하다고도 하겠지요.
금강산은 너무나 현로(顯露)하여서 마치 노방(路傍)에서 술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이 있음에 비하여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은 양자는 물속의 고기를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담도 설악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입니다.
근래에 교통이 편리해짐과 함께 금강산의 속악화(俗惡化)가 점점 줄달음질을 할수록 우리의 설악산에 대한 그리움은 그대로 깊어감이 또한 사실입니다.
옛날에도 참으로 산수의 사이에 몸을 맡기려 하던 이는 김매월당, 김삼연 네와 같이 그윽한 집을 다 이 산중에 얽고 지낸 것이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누가 나으냐 못하냐 하는 문제는 얼른 대답하기 어렵고 또 아무래도 금강산이 나으리라 함이 보통이겠지마는 설악산에는 분명히 금강산에서 볼 수 없는 경치가 많이 있습니다.
첫째 산의 입구인 갈역(葛驛:박성원의 한설록에는 加歷이라 하였다)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70리 길이의 긴 계곡에 바위벼랑과 돌바닥이 깊은 골로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을 데리고 굽이굽이 갖은 재주를 부려서 토막토막 소도 만들고 폭포도 드리우는 일대(一大) 필름은 금강산은 고사하고 조선의 어느 명산에고 다시없는 장관일 것입니다.
하나하나를 다로 떼어서는 청룡담, 황룡담, 제폭, 황장폭 무엇무엇 하지마는 온통 합하여서는 곡백담(曲百潭)이라고 부릅니다. 해주의 석담, 청주보은의 하양동, 안의의 서상동, 북상동 등을 다 한데 연접해도 그 길이나 그 기이함이나 다 설악의 곡백담을 따르지 못할줄 나는 생각합니다.
수렴동(水簾洞)이란 것이 금강산, 설악산에 다 있지마는 금강의 수렴은 오두막살이집 쪽들창에 천발 쯤 된다 하면 설악의 수렴은 경회루 넓은 일면을 뒤덮어 가린 큰 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칠폭, 십이폭 등 무더기 폭포가 여기저기 많음도 한 특색이거니와 산성골짜구니로 솟아 떨어지는 대승폭포는 두 동강을 합하면 길이가 수백 척이어서 반도 안에서는 가장 긴 폭포가 됩니다. 이밖에 옥련(玉蓮)을 느려 세운 듯한 봉정과 석순을 둘러친 듯한 오세와 같이 봉만(峯巒)과 동학(洞壑)의 유달리 기이한 것도 이루 손을 꼽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설악의 경치를 낫낫이 세어보면 그 기장(奇壯)함이 결코 금강의 아래 들 것이 아니건마는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리기는 금강산의 몇백
천분지의 일도 되지 못함은 아는 이로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큰 실상을 가지고 세상에 소문나지 아니한 것이 설악산 하나만은 아니겠지요.
혹자는 설악을 은자(隱者)의 산이라 했다.(주17) 그만큼 금강에 비해 덜 알려졌다는 뜻도 되지만 설악은 유일하게 금강과 그 아름다움을 다툴 수 있으며, 그 명성은 생육신이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과 5천여수의 시를 남긴 삼연 김창흡에 의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주18)
노산도“창파를 잡아다려 발밑에 깔고, 내로라 빼어 오른 설악산청봉, 매월이 놀던 데가 어디메던고, 뎅그렁 오세암에 풍경이 운다”고 매월당에 대해서 언급했다.(주19)
설악산은 강원도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 일부와 속초시까지 포괄하는데 설악산맥 북쪽의 주능선을 경계로 양양방면 즉 동쪽을 외설악, 서쪽인 인제방면을 내설악이라 부르며 한계령 남쪽 장수대 주변을 내설악이라고도 부른다.
설악의 주봉인 대청봉은 해발 1,708m이며 연중 5개월 동안 눈이 쌓여 있으며, 봄의 진달래, 초여름의 후박꽃과 아련한 신록,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으로 등산객 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승지다.(주20)
설악은 신라 때 처음 소사(小祀)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칭으로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 등으로 불렀는데 그 어원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한가위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 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주21)
둘째는 암석의 색깔이 눈 같이 하얗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고(주22)
셋째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의‘ 뫼’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주23)
조선중기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첫째와 둘째 유래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데“설악산은 산이 매우 높아 음력 8월(중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음력 5월(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른다. 또 그 바위 봉우리의 돌 빛이 희고 깨끗하기 때문에도 또한 설악이라 부른다”고 하였다.(주24)
따라서 설악 명칭의 유래는 백설과 관련된 것, 암석과 관련된 것,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외면적 양태와 정신적 세계관을 포함한 명칭으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눈 설(雪)자를 사용한‘설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는 설악산과 관련된 두 권의 서명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하나가 노산 이은상의《산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년 초판, 1975년 3판 발행)이고, 다른 하나는 황호근의《국립공원 설악산》(통문관, 1973년)이다.
노산의 이 책은 동아일보에 1933년 10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37회에 걸쳐 연재된 것으로 그의 설악산 기행에는 심마니, 포수 등 10여명이 동행하였다.
30세의 젊은 시인이자 동아일보 기자출신이며 산악인인 노산 이은상은 설악행각 1회‘行脚前夜의 燈下에서’라는 제목으로 설악행각을 쓴 동기를 밝혔는데“그 모든 것보다도, 설악은 우리 옛 조상들의 오랜 숭배를 입어온 신령한 산, 거룩한 지역이라 후세에 끼쳐진 한 자손이 찾아가 그 영적을 더듬고 활력을 얻어 조선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민족 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민족문화를 재건설하자 하는 거기에 더 큰 깊은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글은 후에《노산문선》에 수록되었지만, 새로《산찾아 물따라》(1966년)를 묶어 내면서“일제시대의 검열기준으로‘설사 신문에는 그대로 넘겨준 글이라도 단행본에는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이어서 군데군데 삭제를 당한 곳이 많았다. 그랬으나 이번에 이같이 새로 간행하게 되므로, 그 당시 이 글을 발표했던 동아일보 보관지에서 그 삭제된 구절을 찾아 그대로 베껴 내어 완전히 보충해 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5) 따라서《노산문선》에 실리지 못했던 설악행각의 내용들이《산찾아 물따라》에 오롯이 담겨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처럼 설악산이 1933년 노산 이은상 신문연재로 널리 알려졌다는 평가가 온당하다.(주26)
다음의 서명본인 황호근《국립공원 설악산》은 사단법인 속초시관광협회 회장이었던 양권일이 전용갑에게 준 것으로 내표지에‘全瑢甲先生惠存楊權一’이라고 서명하였다.
서문에 의하면 양권일이 지우였던 황호근에게 설악산에 대한 책을 저술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황호근의 자서에“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속초시관광협회 회장 양권일 선생의 물심양면에 걸친 뜨거운 희생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을 특별히 밝히고 감사를 드리는”것이라 하였다.
양권일 회장에게 이 책을 받은 전용갑 사진작가는 자신의 책 앞장 화보에“사진-○표는 全瑢甲撮影, 其他崔九鉉撮影”이라고 직접 써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전용갑 선생의 소장본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필자의 수중에 들어옴에 따라 소개를 하게 된 것도 전생의 큰 인연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수록된 컬러사진 40장 가운데 전용갑이 붉은색 볼펜으로 ○표를 한 사진은 향성사의 탑, 신흥사전경, 귀면암, 비선대, 양폭, 천당폭포(사진 속에 촬영준비를 하는 최구현의 뒷모습이 담겼다), 권금성 케이블카, 금강굴, 금강문, 선녀봉의 웅자, 백담사의 전경, 한계령의 108계단, 12선녀탕, 백담산장, 속초항 출어, 영랑호, 속초시 전경, 전설이
깃든 하조대 등으로 19장이다.
따라서 최구현이 촬영한 사진은 노루목 고개, 신흥사 부도, 울산암, 흔들바위, 높이 솟은 미륵봉의 웅자,천불동계곡, 천화대, 진태봉의 운해, 비룡교,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장수대, 대승폭포, 속초항의 일출, 명태덕장, 속초해수욕장, 옥색옥녀탕, 의상대, 낙산사, 홍련암, 낙산해수욕장 등 21장이다. 1970년대 속초의 사진작가로 최구현과 전용갑이 활약했으며 황호근의 책자에 수록된 사진도 함께 작업했음을 미루어 알 수있다.
황호근과 양권일은 설악산의 팔기팔경을 정리하였다.“ 설악산에는 기괴한 점이 많은 산이라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그 이치를 생각해도 풀 수 없는 기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조화로 이루어졌는지 천만년의 비밀이 간직된 채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그런 기괴한 점을 양권일 선생과 함께 해석하고 정리하니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여덟 가지나 되므로 여기에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설악산의 풍경 가운데 특히 손꼽을 수 있는 풍경 가운데 유독 팔경을 선정한 것은 그만큼 풍경조성에 절대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정한 것이다. 필자는 양권일 선생과 몇일을 두고 옛 선인들의 시구나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선정한 것이다”라 하였다.(주27)
설악산의 팔기는 모두 자연현상에 대한 기괴한 것으로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던 신기한 것이라 하였고, 설악산의 팔경은 여덟 가지 좋은 풍경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필자가 팔기와 팔경 내용을 풀어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쌍계의 죽음을 맞이하고 쓴 사제문(賜祭文)에서 정조는“몸은 순수하고 깨끗하며 사람들로부터는 시비가 없었고, 항상 맑고 검소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견고하였도다”라고 칭송하였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그를‘포의(布衣)의 대제학’이라 일컬었으며, 집안은 국조문원가(國朝文苑家)라 하였다.
신흥사에는 영조 때 신흥사를 중창한 용암체조(龍岩體照)대사의 용암대선사비가 있는데, 당시 좌의정을 지낸 쌍계가 비문을 짓고 표암 강세황이 글씨를 썼다.
20세에 첫째 부인인 파평 윤씨를 잃고 재취한 순흥안씨 부인과 18년을 살았지만 둘째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고 쓴 제문은 조선 선비가 아내를 잃고 애통한 심사를 글로 표현한 것이다.
“ 사람 사는 것이 마치 흩날리는 꽃잎이나 버들강아지와도 같아 정처 없이 흩어지고 떨어지니 그 사이에 한번 만난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오.…수명은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내 할 일을 다했는지 생각하면 유감이 있구려. 이것이 내가 못내 후회하고 한스러워, 시간이 흘러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라오”라고 슬퍼하였다.
쌍계가 강원도 양구현감 재임시기인 1753년(영조29)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양구 관아에서 출발하여 수렴동을 거쳐 쌍폭, 봉정암, 가야동굴, 오세암, 영시암 등을 유람하고 양구현 관아로 돌아온 내설악 기행문이다.
매월당 김시습과 오세암에 대한 언급과 주지 설정과의 대화가 들어 있으며 영시암과 삼연거사에 대한 기록도 하여 설악과 매월, 삼연의 인연을 중시하였다. 기행문의 끝에는 양구현의 가뭄으로 인해 보리들이 말라 시들고 근심스런 안색의 백성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어진 목민관의 따뜻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 기행문은《쌍계유고》제10권에 수록된 것으로 장편에 속한다.
5. 정범조의〈설악기(雪岳記)〉(1779년)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조선후기의 남인계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현손이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친척이다.
37세인 1759년 진사시에, 1763년(영조39) 증광문과에 갑과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고, 1768년 지평∙정언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773년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1776년인 56세 풍기군수와 공조참의를 거쳐 1778년 병조참의 동년 7월에 양양부사를 제수 받아 8월에 부임하였다. 당시는 대흉년이라 양양주민이 새로 경작한 밭의 세금과 어민의 봉납을 면제하였다.
양양부사를 재직하면서 이듬해인 1779년 3월 설악산을 유람하고〈설악기〉를 썼으며 4월에는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785년(정조9)이후 대사간, 대사성, 이조참의, 한성부우윤, 대사헌, 개성부유수,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1799년에 예문관제학, 1800년(순조즉위) 실록지사로서《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해좌선생문집(海左先生文集)》이 전한다. 1867년에 간행한《해좌집》39권 19책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으며〈설악기(雪岳記)〉는 권23 기(記)에 들어 있다.
《해좌집》권6과 권7에는 양양 낙산사, 현산요, 동해묘, 낙산사, 의상대, 관음굴, 죽도, 영랑호, 선유담, 청간정, 신흥사, 비선대, 천후산, 계조암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범조는 시와 문장에 뛰어나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정조가 당대 문학의 제일인자로 평가할 정도였으며 시풍은 풍아화평(渢雅和平)하였고, 각지 명승고적에 대한 감회를 적은 것이 많다. 이덕무가《청비록》에서 평한 것과 같이 정범조는 석북 신광수와 이름을 나란히 한 작가로서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을 썼다고 평한다.(주32)
정범조는 조선 정조연간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남인을 이끌었는데 1794년 지돈녕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1796년 친척인 정약용이 원주 법천동 우담에‘청시야(淸時野)’라는 초당을 찾았다. 현계산 탄천의 우담에 살던 정범조는‘맑은 세상에기에 초야에서 늙으려 한다는 뜻’을 담아 초당을 지었다.
목민심서의 저자 정약용은〈청시야초당기(淸時野草堂記)〉에서“공이 처신하는 것과 세상 살아가는 것은 대개 마음에 스스로 얻은 것이 있어 그런 것이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초야에 묻혀 사는 것도 도가 있으니, 맑은 시대가 아니면 초야에 묻혀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년에 양양부사를 했던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 선생도 양양에 대한 글 한줄 남기지 못했으나, 정범조 양양부사는 설악기행을 남겨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산을 좋아하고 은둔하는 처사의 풍모를 지녀서 사람들은 그를‘산야인(山野人)’라 불렀다고 전한다. 험난한 벼슬길에 지쳤지만 경치 좋은 설악산을 곁에 둔 양양부사가 되자, 서슴없이 설악을 찾은 것도 그의 타고난 성품이기도 했으며, 시를 좋아하고, 문장을 통해 고적을 소개하고 싶은 심미안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두 편의 설악산 기행문을 살펴보았다. 기행수필의 특성상 개인적 감상이 주류를 이루지만, 비교적 일정이나 명승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여 현재의 길라잡이로도 도움이 되는 글이다. 이정소의 외설악 기행과 정범조의 내설악기행문은 내외설악에 대한 선비들의 사랑이 짙게 배어나오는 문장이다. 산중의 미인이라는 설악을 오래 깊이 사랑한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겠으나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 가운데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과 삼연 김창흡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홍태유, 이정소, 정범조, 김금원 등도 있다.
설악을 기록한 근현대인물로는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1930년대부터 설악을 누비고 신문에 소개한 노산 이은상의 업적도 놓칠 수 없다. 그리고 1960년대 초부터 설악산 개발에 앞장섰거나 이를 사진으로 남긴 이달영, 이대성, 최구현, 유만석, 이기섭, 이기찬, 정형민, 이종우 씨 등도 떠오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산악인 유창서, 사진가 성동규, 최낙민, 환경운동가 박그림 씨와 같이 설악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의 부모는 평안도출신으로 1.4후퇴 때 월남하여 속초에 정착하였다. 당시 중앙시장 내의 평북여관 자리를 이기섭 박사에게 양도하고, 리어카에 우리를 태우고 1960년초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당시에 남겨진 사진을 보면 비선대, 계조암, 비룡폭포 등 흑백사진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영국왕실에서 지었다는 산장에서 뛰어놀았고, 틈만 나면 양폭산장으로 달려가 유만석 아저씨가 끓여주던 산당귀차도 마시고 구수한 전설도 들었다. 설악을 찾은 관광객에게“여러분이 왔다해서 와선대요 그런데 비가 와서 비선대다”라고 소개했다는 어떤 안내자의 설명도 대신 들려주었고, 설악산 이곳저곳의 바위이름과 전설도 지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른바 설악산 신스토리텔링의 창시자다. 반달가슴곰, 산양, 멧돼지, 산토끼, 하늘다람쥐, 솜다리꽃, 금강초롱, 열목어(곤돌매기), 어름치 이들은 나의 유년기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처럼 항상 주위를 맴돌던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 집 주위로 눈길을 뚫고 산양이 내려왔는데 며칠 대나무 잎을 뜯어다 주어 보살핀 후 서울동물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1978년 6월 설악동 기존지구 강제철거가 마무리되면서 1960년부터 살았던 그곳을 우리는 떠났다. 뿔뿔이 흩어진 친구처럼 설악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흐려져 갔다. 하지만 설악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말려서 보관하고 있는 한국의 에델바이스 솜다리꽃처럼 지금도 설악은 내 곁을 가까이에서 지키고 있다.
한반도의 등허리에 우뚝 솟은 설악, 금강산과 제주도 관광 및 해외여행에 밀려나 명맥조차 잇기 힘든 설악관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독자적이며 창의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설악산만의 독창적 킬러콘텐츠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해야 한다.
심마니이야기, 울산바위와 권금성 이야기, 백담사이야기, 삼연과 매월당이야기, 설악의 비경과 유서 깊은 산악제의, 열목어, 신갈나무, 당단 풍나무 등의 친자연과 친환경적 생태문화적 요소로도 이미 충분한 경쟁력과 세계인의 감동을 줄 수 있다.
한국의 스위스라고 칭송하던 설악이 지금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내 걸음방식으로 걷지않고 남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다. 날로 쇠락해가는 설악관광의 현실을 보면 가슴이 저린다. 그래서 우리는 설악산얘기를 다시 꺼내야만 하고, 설악눈꽃축제도 부활해야 한다. 설악은 눈의 원조산이며 신성한 정신적 영산이다. 또한 솜다리꽃으로 다시 핀 고 이기섭 박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설악문화제를 경쟁력 있는 명품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선인들 그리고 후대에게 우리들이 설악을 위해서 무엇을 했으며, 설악에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실천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설악산을 둘러싸고 있는 속초∙고성∙양양∙인제의 설악권이 상생과 협력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는 설악산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충실히 수집하고 정리해야 할 과제가 남겨져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설악기행을 다시 읽으면서 진교준의〈설악산 얘기〉라는 시를 다시 읊고 있다.“ 나는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나는 산이 좋더라, 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 나는 산이 좋더라,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
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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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정룡〈, 속초시의 축제《〉강원도 축제의 이해》국학자료원, 2006, 135~154쪽, 이 글에서 필자는 속초시 축제를 전통지향형축제, 통일지향형축제, 국제지향형축제로 나눈바 있다. 지난 1996년부터 시작된 설악눈꽃축제를 폐지하고, 2008년부터 시작한 불축제
를 비롯하여 논뫼호불꽃놀이와 실향민주제를 포함한 속초관광발전 을 위한 4계절특성화축제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2) 崔九鉉, 《雪嶽山觀光畵帖》雪岳觀光協會, 1958, 필자 소장의 이 흑백사진집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3) 李殷相, 〈雪岳行脚>《?山文選》永昌書館, 1947
4)장정룡 외, 《속초지역구전설화집》속초문화원, 1999
5) 장정룡, 〈설악산 심메마니연구〉《강릉어문학》7집, 강릉대국문과, 1992
6) 장정룡,〈 설악산 울산바위전설고찰《〉속초문화》제24호, 2008, 72~92쪽
7) 엄경선〈신문기사로 읽는 우리 지역이야기〉28,《설악신문》934호, 2009.11.30 14면“1975년 6월 당시 굴지의 음반사였던 지구레코드에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하춘화가 부른‘속초에 심은 사랑’‘설악산 메아리’를 새 음반으로 내놓았다.‘ 속초에
심은 사랑’은 속초시의 고향심기운동에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하춘화가 단독으로 불렀으며,‘ 설악산 메아리’는‘잘했군 잘했어’‘다정한 부부’에 이은 후속타를 노려 하춘화, 고봉산이 콤비로 불렀다.”필자가 소장한‘설악산메아리’(김령인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고봉산 노래)음반에 실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음반의 뒷면
에는 속초항구과 흔들바위를 미는 승려 사진이 들어 있다.“ 1.흰구름 덮인 설악산으로 그대와 손잡고, 휘파람 불면서 하이킹 가자, 진달래 철쭉꽃 우리를 부른다. 레이 레이 레이호 레이 레이호, 산메아리 를려온다 사랑노래 들린다, 시원한 폭포수가 노래를 합창하면, 오색의 무지개핀다 그대와 손을 잡고, 설악산 찾아가는 즐거운 청춘하이킹, 2. 형제봉으로 마등령으로 즐거운 하이킹, 콧노래도 흥겹게 설악산 가자, 에델봐이스가 우리들을 부른다, 레이 레이 레이호 레이 레이호, 산새들이 노래한다 흰구름이 떠있다, 금강산 찾아가다 설악산 봉우리핀, 전설의 울산바위로 발걸음 가벼웁게, 비선대 찾아가는 즐거운 청춘하이킹” 1984년 남궁옥분 도‘설악산’(오세은 작사작곡)이라는 노래를 취입했다. 가사 중에는“설악산 설악산 오 설악산, 나는 좋아 설악산이 나는 좋아, 아 그대 품속으로”라고 하였고 대청봉, 한계령 오색약수, 백담사 등 내설악을 주요 내용으로 넣었다.
8) 金蓮東, 《全鮮名勝古蹟》東明社, 1929, 257쪽“?蹄君, 雪嶽山…泉石絶勝하고 峯巒壯奇하야 與金剛으로 上下云이라”
9) 趙明履“雪嶽山가는 길에 皆骨山중을 만나, 중드리 무른 말이 楓岳이 엇더트니, 이 이 여 서리치니 때마잣다 드라”조명리는 조선 영조 때 사람으로 자는 仲禮, 호는 道泉州�江,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文憲이다. 유창돈, 《고시조신석》동국문화사, 1959, 348~349쪽
10)“ 송강 정철은 설악에서 역적이 나타난다 하여 봉정암에 穴을 지르려고 설악산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정철은 설악산을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여 후세에 흥미로운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雪岳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苦境이며, 鳳頂이 아니라 難頂이라’라고 말하며 매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즉 설악산에 들어서자 천지가 진동하고 소낙비가 내리고 큰 �聲이 온 몸을 삼킬 듯이 으르릉 거리자 혼자서 답답하여 내뱉은 말이라고 한다.”황호근,《 국립공원 설악산》통문관, 1973, 47쪽, 필자가 수집한 송강정철과 설악산에 얽힌 전설로는‘계조암과 송강 정철’‘울산바위와 송강정철’이 있다. 장정룡《, 속초지역구전설화집》속초문화원, 1999, 119쪽 참조
11) 成東奎,《 雪岳의 秘境》아카데미서적, 1988, 머리말
12) 문봉선,〈 설악산과 나 그리고…〉《설악산》학고재, 1996, 130쪽
13) �齊賢,《 翁稗說》仲思序“지정 임오년(1342) 여름이다.…벼루를 꺼내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을 받아 먹을 갈았다. 그리고 평소에 벗들에게서 받은 편지 조각을 이어서 그 뒷면에 여러 가지를 적고 그 끝에 책이름을 역옹패설이라고 붙였다.”
14) 黃根,《 國立公園雪嶽山》通文館, 自序
15) �錦園《, 湖東西洛記“》人之稱名區勝景者必曰仙景畵景”
16) 崔南善,《 朝鮮의 山水》東明社, 1947, 23~25쪽, 원문의 맞춤법을 현대어로 바꾸었다.(필자 주)
17) 洪泰猷〈, 遊雪岳記《〉耐齋集》卷4. 記“지금까지 많은 명산을 보아왔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산만이 이 설악산과 우위를 다툴 수 있고 다른 산은 견줄 바가 못 된다.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치는 우리나라 사람
조차 아는 이가 드무니, 이 산은 산 가운데 隱者이다. 내가 세세히 설악의 경치를 적은 것은 고향에 돌아가 친우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요, 또 절경을 찾아 유람하려는 이들에게도 알려주려는 뜻에서이다.”
18) �錦園(1817년경-1847년이후)《, 湖東西洛記“》설악에는 옛날 김삼연의 영시암과 김청한의 오세암이 있었으나 그들의 자취가남아 있지 않아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설악의 이름이 이 두 사람 때문에 더욱 알려져 금강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19) �殷相《, 祖國江山》民族文化社, 19, 32쪽
20) 손경석,《 한국의 산천》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202쪽
21)《 新增東國輿地勝覽》권44, 양양산천조“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 중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지었다.”(在府西北五十里鎭山極高峻仲秋始雪至夏而消故名)
22) �錦園《, 湖東西洛記“》설악산을 찾으니 돌들은 불쑥불쑥 솟아 하늘에 닿았고, 산봉우리들 우뚝 벌려 있는데 돌들은 희기가 눈 같아 설악이라 이름했다.”(訪雪岳山石勢�天峯巒聳� 石白如雪故名雪岳也) 김금원은 원주 태생으로 자세한 이력은 알수 없으나 14세 때인 1830년 봄 3월에 남장을 하고 처음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으며 서울 용산에 있는 삼호정에서 박죽서, 김운초, 김경춘 등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1850년에 유명한 여류기행문인《호동서락기》를 썼다.(필자 주)
23) �殷相〈, 雪岳行脚《〉�山文選》永昌書館, 1958, 165쪽“이 설악의‘설’이란 것은 결국 신성을 의미하는‘ ’의 음역인 것임만은 介疑할 것 없는 일이라 봅니다”
24) 김윤우〈, 설악산의 산수와 명승고적《〉山書》제15집, 한국산서회, 2004, 20쪽
25) 이은상《, 산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년 5쪽, 머리말은 1966년 10월 3일 개천절에 노산 이은상이 썼다.
26) 엄경선〈, 그 시절 설악에는 무슨 일이, 신문기사로 읽는 우리지역이야기⑥《〉설악신문》905호, 2009. 5. 4 14면
27) 黃根《, 國立公園雪嶽山》通文館, 1973, 59~65쪽
28)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국학자료원, 2002, 189쪽
29) 崔承洵,《 太白의 詩文》下, 江原文化叢書11, 강원일보사, 1977, 155쪽“그는 비선대의 맑은 물을 굽어보고 그 물에 잠긴 奇壯한 경관을 본 것이 아니라 물밑에 잠겨있는 그림자를 보았다.…우주의 묘리를 한데 모였다는 것도 기발한 상이거니와 낙구에 여운을 남겨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것은 더욱 이곳의 경승도 살렸고 문장의 운치도 더하였다.”
30)《 三淵集》拾遺卷之24,‘ 藝園十趣’
31)《 道川面面勢一覽》大正十五年度, 1926‘ 所野八景起源’이 자료는 일제강점기 도천면 통치자료이나 당시의 문화재나 고적, 명소전설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박익훈 전 교장님이 소장하신 자료를 빌려 필자가 쓴《속초지역 구전설화집》에 영인 수록하였다. 면세일람이 나올 당시 도천면 기성회회장은 박상희였다. 그는 이후 1929년부터 12년간 도천면장을 역임하였다. 엄경선,《설악의 근현대인물사》마음살림, 2009, 163‘ 속초번영의 주역, 속초읍장 박상희’
32) �家源,《 韓國漢文學史》民衆書館, 1961, 326쪽
33) 이정소 지음, 임영란 옮김〈유설악록(遊雪岳錄)〉《山書》제15호, 한국산서회, 2004, 14~17쪽 정범조 지음, 심경호 옮김〈설악기(雪岳記),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산문기행,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이가서, 296~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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