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영향 없이 채소 키우는 ‘아파트형 농장’도 등장
기후변화 시대, 삶의 패턴도 바뀐다
‘날씨’의 사전적 의미는 ‘그날 그날의 비, 구름, 바람, 기온 따위가 나타나는 기상 상태’다. 하지만 날씨는 우리 생활에서 이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한반도에도 한파와 폭설 등 이상기후가 나타나면서 개인과 가정은 물론 산업 현장에도 적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의류·유통업 등 적극적으로 이상기후에 대처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기상정보로 돈을 버는 기업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상기후의 가장 큰 특징인 변동성은 앞으로 또 다른 도전과 대응을 예고한다. 날씨로 인한 변화의 현장을 살펴봤다.'
기상이변은 농업의 모습도 바꿔놓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인성테크의 도심형 식물공장 ‘시티팜(City Farm)’이다. 7단 높이로 쌓여있는 ‘재배 베드’ 위에서 상추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중앙포토] |
지난 17일 낮 12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국전력거래소 중앙급전소 상황실.
전국의 전력 수요가 7314만㎾를 돌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겨울 들어 네 번째로 최대 전력 수요치가 경신되는 순간이었다. 공급 능력(7718만㎾)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셈이다.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4.1도까지 떨어진 이날 실시간으로 전력 수급 상황을 체크해 산업체와 가정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앙급전소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승구(50) 부장은 “전력 수요가 피크가 될 때쯤이면 전국 300여 개 발전소의 발전기(2600여 대)가 모든 돌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만약 발전기 중 한 대라도 고장 나 예비전력이 400만㎾ 이하로 내려가면 곧바로 제한 송전 등 비상조치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겨울철에 중앙급전소가 이처럼 비상태세에 돌입한 건 2009년부터다.
한국전력 하동혁 녹색성장팀장은 “원래 전기는 여름철에 피크(최대 수요)가 걸려야 정상인데 2009년부터 겨울철에 피크가 걸리는 이상현상이 나타나 그 추세가 굳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여름철 최대 전력 수요는 6321만㎾인 반면 겨울철엔 6679만㎾였다. 지난해 역시 여름철 6988만㎾, 겨울철 7130만㎾였다. 하 팀장은 “경기 회복으로 산업용 전력사용량이 10% 이상 증가했고 이상한파로 겨울철 전력 수요의 24%를 차지하는 난방용 부하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겨울철 전력 수요 증가는 전력 관련 회사 직원들의 생활패턴도 바꿔 놓았다. 당장 한전과 전력거래소 직원들은 점심시간을 오전 11시~낮 12시로 한 시간 앞당겼다. 이땐 사무실 내 전기를 모두 끈다. 전력 사용량이 최대치에 이르는 이 시간대에 전력 사용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상기후는 에너지산업의 기술 개발도 촉진하고 있다. 차세대 전력망인 ‘스마트그리드’는 물론 태양광과 풍력을 활용한 에너지 생산 연구도 활발하다. 정유사들은 영하 16도면 어는 일반 경유와 달리 24도까지 견디는 ‘혹한기용 경유’의 생산과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이상한파는 요사이 백화점 의류매장의 풍경도 바꿔 놓았다.
예년이라면 시즌오프 세일을 통해 겨울 상품을 털고, 봄 신상품을 선보일 때다. 하지만 유난히 춥고 긴 올겨울은 상황이 다르다. 봄 상품 진열은 미뤄졌고 마네킹들은 여전히 두툼한 겨울옷에 털모자·머플러 차림이다. 신세계백화점 강신주 MD운영팀장은 “각 브랜드들이 겨울 상품을 추가 생산해 2월 중순까지 판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의류업체들의 기획·생산·판매전략도 확 바뀌었다. 사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의류업체들의 골칫거리
였다. 대부분의 옷이 계절보다 6개월 이상 앞서 기획·생산되기 때문에 이상기온으로 갑자기 추워지거나 더워지면 속수무책이었다.
간혹 고객 반응에 따라 인기 제품을 추가 생산하는 ‘반응생산(QR:Quick Response)’이 있지만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다. 하지만 최근엔 이 반응생산 제품 비율이 높아졌다. 코오롱 쿠아는 반응생산 비율을 20%에서 40%까지 높였다. LG패션 홍보팀의 김형범 대리도 “예년엔 시즌 전에 옷 대부분을 미리 만들었지만 지금은 사전제작 비율이 20%가 채 안 된다”고 말했다. 트렌드와 날씨에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생산이 탄력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상기후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전담팀을 만든 회사도 있다. 제일모직 빈폴맨즈는 지난해 5월 ‘기후대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과거 5년간의 기온·강수량과 제품별 판매량을 분석하고 날씨 전망을 바탕으로 사업 계획을 세웠다. 올겨울 상품에서 처음 반영된 TF의 전략은 좋은 성과를 거뒀다. 1~2월 한파를 예상하고 패딩·다운점퍼 생산량을 1만 벌 이상 늘린 것이다. 제일모직 홍보팀 양희준 과장은 “현재 판매 추이를 봤을 때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춥거나 더운 날씨가 길게 이어지면서 디자인과 트렌드에도 변화가 생겼다. 점퍼나 트렌치코트 같은 대표적인 봄·가을 아이템을 찾는 고객은 줄고 얇은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나 한 벌로 다양하게 연출 가능한 옷을 찾는 고객이 증가했다.
코오롱FnC 양문영 차장은 “한 벌을 여러 방식으로 입는 ‘트랜스포머형’ 옷은 원래 기능성 의류
디자인에 주로 이용됐다”며 “하지만 날씨 변동성이 커지면서 이를 찾는 고객이 늘었다”고 밝혔다.
기상이변은 먹을거리 주변 풍경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편의점과 홈쇼핑 등 유통업체는 일기예보를 마케팅에 도입해 재고를 조절하고 있다. 기상이변과 관계없이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빌딩형 식물농장’도 등장했다. 농촌진흥청은 다음 달 중순 최첨단 빌딩형 식물공장 문을 열고 상추 등 엽채류를 본격적으로 생산할 예정이다. 식물공장은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 국립농업과학원 안에 자리 잡았다. 지하 1층~지상 3층에 연면적 396㎡ 규모로, 다단식ㆍ수평형ㆍ수직형 등 다양한 재배 시스템을 갖췄다. 지열히트펌프 시스템과 태양광발전 시스템으로 열과 전기에너지를 공급한다. 흙 대신 물과 영양액이 공급되고, 햇볕 대신 발광다이오드(LED)와 고효율 인공광원이 식물을 비춘다.
김유호 연구관은 “식물공장은 기후변화와 관계없이 365일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이 융·복합된 자동생산 시스템”이라며 “미래 농업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식물공장을 통한 채소의 연중 생산을 주력 사업으로 삼은 기업도 있다. 경기도 용인의 인성테크는 자체 식물공장을 운영하면서 지난해 3월부터 8개월 동안 신세계백화점에 상추를 납품했다. 이 회사의 안형주 이사는 “지난해 11월부터 배추 재배도 시작했다”며 “머지않아 지난해 가을과 같은 배추파동은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는 보광훼미리마트는 날씨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1년 초부터 자체 날씨정보 시스템을 마련했다. 기상청에서 받은 행정단위별 날씨 데이터를 본사에서 입력해 전국 점포로 전송하고, 점포에서는 또 오늘과 내일의 기상예보를 4시간 단위로 실시간 확보해 적정 제품 재고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