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가장 풍족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황폐해진 대로 황폐해진 국가였다.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지금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빈국 중 하나였다.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노력으로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있었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중요한 국가(선진국)의 단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젊은 세대들에게 지금이 긍정적이기만은 마냥 하지 않다. 몇 년 전에 유행한 “N 포 세대” 담론은 그전 세대엔 ”자연스럽게“ 했던 ”결혼, 연애, 출산, 집, 취업“ 등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학력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첨예해진 경쟁은 그들을 더욱 각박하게 만든다. 특히 대한민국을 묘사하는 말 중 '헬조선'은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시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걸 알 수 있다.
가장 풍요롭지만 지옥이라 불리는 이 모순적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현재 시기에 대한 비관적인 목소리를 자주 듣기도 한다. 부모 세대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현재는 못 한다는 사실을 들며 지금을 가장 힘든 시기라고 묘사하는 목소리도 있다. 나는 이 고난이 과연 우리 세대에 한정된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즉, 어떠한 시기도 힘들지 않았던 세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난의 종류는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세대라고 특히 그전 세대에 비해 힘들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지금의 세대는 결코 그전 세대에 비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젊은 세대에 속하지만 내가 지금 세대의 고난 담론에 공감하지 않는 이유는 이 담론의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 출신으로 고등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엄마의 형제는 아무도 고등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아빠의 형제는 두 명만 고등 교육을 받았다. 아빠의 모든 형제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다른 형제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때 아빤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운 것이다. 최근에 만난 우리 부모님 세대의 교수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시절 대학 진학률은 5% 정도라고 한다. 즉, 대학 교육은 소위 있는 집 자식이나 형제 중 몇 명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던 것이다. 내가 만약 이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지금 꾸는 꿈을 꿔보지도 못 한 채, 내 삶의 길이 정해진 듯이 살아갔겠지?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의 고난 담론이 나의 목소리라기보단 과거에도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에겐 지금 이 시기가 내가 꿈을 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시기라면, 그 시절에도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겐 골칫거리 경쟁자들이 무수히 많아지는 시기인 것이다. 즉, 경쟁자가 많아지고 각박해진 현실은 그전에도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특권을 가진 계층이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많은 존재들이 세상에 외치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한정적이다. 예컨대, 전장연 시위가 최근에 화두가 됐는데 과연 이들이 이제서야 외치기 시작한 걸까?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에 자신들의 권리를 외쳤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화두가 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또는 주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보단 그들에 대항한 주류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린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사회에서 듣는 목소리는 주로 중심부에 있는 존재들로부터 나온다.
큰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귀에 들리니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목소리라고 믿는 것 아닐까? 아니면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5%에 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지인은 현재 "자아실현, 의미 추구"가 갈수록 어려워지니 이런 담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나는 이 역시 특권 계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본다. 자신이 피해를 받은 사실조차 모르는 존재를 절대적 피해자라고 한다. 과거엔 특권 계층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의미 추구, 자기 실현의 측면에서 절대적 피해자가 대다수였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실현이나 의미 추구를 할 수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 한 채 그저 자신의 가정 환경에 호응하는 삶만을 살았던 것이다. 즉, 노동자 계층의 자녀들은 후세대의 노동자 계층이 되고 학자층의 자녀들은 후세대의 학자층이 되는 것이다. 간혹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노동자 계층에서 계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개인도 있었지만 이는 ”성공한“ 소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점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 힘겨워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나는 공감하지 못 한다. 의미 추구가 특정 계층의 특권이었다면, 나 역시 내 배경이 이끄는 대로의 삶만을 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모르고 편하게 살래.“ 와 ”알고 불편하게 살래“중 전자 중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전자는 의미 추구의 가능성조차 몰랐던 과거의 모습일 것이고, 후자는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