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목욕탕
방은 깨끗하고 넓었다. 이렇게 큰방을 혼자 쓰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검호는 그 커다란 방 한 귀퉁이에 서있었다. 감동한 표정으로 그는 넓은 방안의 화려한 침상과 그 위에 덮인 비단 이불과 정교하게 세공된 의자와 원탁(圓卓)을 바라보았다.
"돈이란 정말 좋은 것이로구나."
검호는 문득 중얼거렸다. 푹신해 보이는 침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잠에서 깬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잠이란 묘한 것이 되어놔서 자면 잘수록 더욱 밀려오는 것이다.
그가 막 침상을 향해 몸을 던지려고 할 때 방문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새 옷 한 벌을 받쳐들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그들은, 이 집의 시녀들이었다. 그녀들은 그냥 시녀로 부리기에는 너무나 예뻐 보였다.
검호는 순간 사숙이 그녀들에게 수청(守廳)을 들라고 보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칠주야 동안 술도 고기도 입에 대지 않겠다던 사숙이니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검호가 한숨을 흘리며 묻자, 두 시녀 중 한 사람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욕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검호는 그만 한숨 대신 침을 흘릴 뻔했다.
커다란 욕실 한 가운데는 땅을 깊게 파고 푸른빛이 나는 돌을 사방에 깔아 만든 욕조가 있었다. 욕실의 벽도 그와 같은 푸르고 윤기 흐르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한 면에 피리를 불고 비파를 타는 선녀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욕실 한 귀퉁이에는 뜨거운 물을 담고 김을 뿜어내는 커다란 물통이 있었다. 그 물통에서 뿜어져나오는 김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욕조 가득히 찰랑거리는 기분 좋게 미지근한 물에서도 그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넓은 욕조 안에 검호와 검웅과 검학이 어색하게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사형제 지간이기 때문에, 서로 옷을 벗고 있다고 해서 쑥스러워하거나 어색할 일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쑥스러워하는 것은 욕조의 주변에 걸터앉아 다리만을 물 안에 담근 채로 그들의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여섯 명의 시녀들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물론 옷을 벗지 않았다. 대신 얇은 옷은 물에 젖어 다리에 착착 휘감겼고, 어떤 여인은 아예 허벅지까지 치마를 올린 채로 앉아 있었다.
한 사람에게 두 명의 시녀가 달라붙어 머리를 감겨주고 손톱과 발톱을 다듬어 주고 귀를 정성껏 후벼주고 몸을 씻어 주었다. 목욕물은 물론 향기로웠지만 시녀들로부터 풍기는 은은한 방향(芳香)은 더욱 짙었다.
시녀들은 손님들의 목욕 시중에 아주 익숙한 모양인지 별로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는 어머니처럼 편안한 태도로 자기들끼리 잡담을 주고받으며 시중을 들었다.
오히려 세 명의 촌뜨기들이 잔뜩 굳어 목욕물 안에서 몸을 움츠리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다리 사이를 손으로 가린 채 아가씨들이 어서 일을 마치고 나가주기를 바라는 형편이었다.
한 아가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검호에게 말했다.
"잠시 엎드려 보시겠어요?"
검호는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왜요?"
그 아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등을 밀어드려야 하니까요."
욕조의 언저리를 짚고 살짝 엎드리면 물론 등을 밀기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등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도 다 보인다.
만일 이 아가씨와 단 둘이 있는 자리라면 엉덩이를 보여주는 일이 과히 부끄럽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형제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그러기는 아무리 뻔뻔한 검호라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엎드려야 하는 것은 검호 혼자가 아니었다. 검학과 검웅을 시중들어주는 아가씨들도 두 사람에게 엎드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눈치를 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들의 눈은 서로에게 '사형이 먼저 엎드려요' '사제가 먼저 엎드려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섯 명의 시녀들은 세 명의 촌뜨기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너나할 것없이 욕조의 언저리를 짚고 물위에 뜬 듯이 엎드렸다. 여섯 명의 시녀들이 물 속으로 깊이 들어와 그들의 등을 밀어 주었다. 그녀들의 손은 그들의 등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수줍어하는 엉덩이에까지 미쳤다.
검학은 미칠 듯한 간지러움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꼈다.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아랫배가 뻐근했다.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것은 금릉의 풍습일까? 아니면 사숙이 우리를 각별히 생각해서 준비한 대접일까?'
검호의 등을 밀던 시녀가 말했다.
"너무 그렇게 불편해 하지 마세요. 제가 다 송구스럽군요."
검호가 투덜거렸다.
"만약에 아가씨가 남자이거나, 아니면 내가 여자라면…… 별로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검호의 말은 틀렸다. 여자의 목욕 시중을 받는 여자도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호가 있는 욕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똑같은 구조의 욕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검매가 반쯤 옷을 벗은 채로 완고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굳이 자신의 시중을 들겠다고 하는 두 시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내 손으로 직접 목욕할거예요!"
시녀들은 몇 번이나 그녀를 설득하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갔다. 널따란 욕실 안에는 그녀만이 남았다.
그녀는 비로소 나머지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욕탕 안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바윗돌처럼 단단한 그녀의 육체가 부드러운 물을 잔뜩 머금기 시작했다.
장백산을 뛰어다니며 단련된 그녀의 몸은 그녀의 얼굴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탄력 있는 사슴의 몸처럼 그녀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욕조 안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그녀는 이곳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기묘한 호화로움이나 나른한 분위기가 그녀의 성미에는 도통 맞지 않았다. 그녀는 목욕물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서 돈 냄새를 느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길지 않은 목욕을 마치고 그녀가 욕조에서 일어났을 때 물방울들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가슴과 아랫배와 엉덩이로 흘러내렸다.
"응?"
그녀는 물기를 닦아내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뒤를, 정확히 말하자면 엉덩이를 찌르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벌레 한 마리도 없었다.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방금 느꼈던 그 찌르는 듯 하는 촉감도 환상처럼 사라졌다. 누군가가 그녀의 나신을 훔쳐본 것일까? 아니면 다만 근육에 통증을 느꼈던 것뿐일까?
검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둘러 몸을 닦고 시녀가 남기고 간 새 옷을 입었다.
이 기묘하게 호화로운 욕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검란이 걱정이 되어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목욕조차도 마다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버린 검란은, 대체 어떤 귀신에게 홀린 것일까?
검란은 커다란 침상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문 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아란, 나야."
검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검매인 줄은 알았지만 그녀는 사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저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혼자 있고 싶니?"
검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만큼 사저는 검란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사저뿐이 아닐 것이다. 사형들도 모두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형제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가슴은 더욱 미칠 것처럼 괴로웠다.
"그럼 푹 쉬어라……"
문 밖에 어른거리던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검란은 다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는 대사형의 유령이 있었다.
그녀에게도 대사형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간이 있었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대사형이 남긴 향기와 그의 잔영을 뇌리에서 지우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 쏟았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꿈속에 있었고 매일 밤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낡은 사당 안에서 그 뒷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는 그 모습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대사형의 웃음과 대사형의 이야기 소리는 잊고 싶지 않았지만, 그 날 낡은 사당에서 본 그 뒷모습만은 잊고 싶었다.
그러나 잊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너무나 잘 잊혀지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잊으려 할수록 더욱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대사형의 유령과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의혹의 유령이었고 그녀를 뿌리째 흔드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야…….'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아닐 거야. 대사형은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문 밖에 다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러나 검란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번의 그림자는 걱정스러운 소리로 물으며 바깥에서 서성거리지 않았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그림자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얘야, 몸은 괜찮으냐?"
검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사숙이었다. 사숙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지금은 어떠냐? 의원을 부르랴?"
검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는 일이었다.
"목욕이라도 하면 좀 더 기분이 나아질 텐데?"
사숙은 그녀를 혼자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등 뒤로 문을 닫고는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목욕은 하고 싶지 않으냐?"
검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사숙은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눈이 약간 침침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검란은 사숙이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저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다면 이 사숙이 도와주마."
검란은 더 이상 고개를 젖지 않았다. 그녀는 비로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사숙의 옷소매가 허공에서 펄럭거렸다. 사숙의 깡마른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가볍게 찔렀다. 그녀는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그녀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고 사형제들이 걱정할 때, 사실 그녀는 말을 할 수는 있었다. 다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고 싶었지만 한 마디 소리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겁먹은 커다란 눈으로 침상 위로 올라오는 사숙을 바라보았다.
"잠깐이면 끝날 것이다. 너무 겁먹지 마라."
사숙은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어째서 사숙은 저렇게 이상한 얼굴로 웃는 것일까?
사숙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위로 젖혔다. 검란은 그 손이 속옷의 끈을 풀러내는 것을 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든,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나타나 달라고! 대사형의 유령이라도!
"사숙, 큰일 났어요."
갑자기 사숙의 손이 멈췄다. 방문은 어느새 열려있었고 한 사람이 거기 서있었다.
졸린 얼굴을 한 검호였다. 사숙은 긴장하며 검란에게서 떨어졌다. 검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방이 너무 커서 잠이 오지 않아요. 사숙님하고 이야기라도 할까 하고 찾아다녔더니, 여기 계셨군요."
사숙은 싸늘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내가 재워주랴?"
사숙은 소매를 걷으며 덧붙였다.
"원한다면 아주 오래 자게 해주마."
검호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 자고 싶지는 않아요. 어제 너무 많이 잤더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그래도 자거라!"
검란은 사숙의 손이 매섭게 공간을 가르고 검호의 목을 향해 뻗어 가는 것을 보았다. 검호는 여전히 졸린 눈이었다. 그는 그것을 피할 재주를 알지 못할 것이다. 검호는 언제나 게을렀다. 게으른 사람은 뛰어난 무공을 지니기 어렵다. 그리고 그 게으름에 대한 벌은 저렇게 아주 짧은 찰나에 죽음으로 한꺼번에 받게 되는 것이다.
검호의 목에 사숙의 손끝이 막 닿았을 때, 검호의 어깨 너머에서 별안간 한 자루의 시커먼 도가 튀어나왔다.
그 도는 마치 예리한 검처럼 짧은 순간에 사숙의 목을 꿰뚫었다. 도신은 검처럼 좁지 않고 아주 넓었기 때문에 상처는 컸고 피는 사방으로 튀었다.
사숙의 바로 앞에 서있던 검호는 사숙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러나 검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피를 뒤집어썼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는 듯이 멍하니 한 자루 도에 목이 꿰뚫린 채 앞에 서서 가르릉거리며 숨을 토하고 있는 사숙을 바라보았다.
사숙의 피는 검란이 쓰러져있는 침상에까지 튀었다. 그 더러운 피가 다행히 그녀의 몸에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치마와 소매에 몇 방울이 묻었다. 검란은 혈도를 눌린 상태에서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숙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사숙의 목을 꿰뚫은 한 자루의 시커먼 도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호의 뒤에서, 그 한 자루 도를 들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옆으로 걸어 나왔다.
사숙이 입으로 피거품을 뿜어냈다. 할 수 있다면, 그는 '너는!'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검표였다.
봄에 금릉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던 검표였다.
검호가 이마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사람을 죽일 때 내 뒤에서 그렇게 나타나지 말아 줘. 더럽잖아."
검표가 대답했다.
"사람을 죽일 때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는 것 따위는 신경도 써서는 안돼."
슈웃!
검표가 칼의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슬쩍 옆으로 당겼다. 사숙의 목은 바닥에 떨어져서 아이들이 놀다 버린 공처럼 비참하게 떼굴떼굴 굴렀다. 사숙의 몸도 그 옆에 쓰러졌다.
검표는 비록 검호의 몸으로 자신을 가렸기 때문에 온몸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자처럼 보였다. 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널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구나."
잠시 후, 방에서 뛰어나온 검매와 검웅과 검학도 검표가 벌여놓은 일을 보고는 반갑다는 말보다 먼저 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검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사숙의 머리를 집어들더니 귀 뒤쪽부터 그 살갗을 쭈욱 뜯어내기 시작했다.
"으아! 그만해!"
검웅이 비명을 질렀다. 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숙의 얼굴 가죽을 벗겨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사형제들에게 보여주었다.
"가짜야."
검웅이 손에 든 것은 사숙의 얼굴 가죽이었지만, 사숙의 머리통에 남은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검학이 물었다.
"어떻게?"
검표는 얼굴 가죽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며칠 전부터 금릉에 와있었어. 여기도 와봤었고. 이 사해표국에는 아무도 없었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검매의 눈이 커졌다.
"그럼?"
"오늘 새벽, 갑자기 한 떼의 사람들이 이 안으로 들어왔어. 그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자고."
검학이 혀를 찼다.
"이사형이 큰 소리로 떠들어댄 것을 듣고 이들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렸군. 덫을 쳐놓고."
검호가 항변하듯 물었다.
"그럼, 이 표국 안에 있는 하인들은? 표사들은? 시녀들은? 그들은 모두 이 가짜와 한패야?"
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그렇다면 그들은 아직 싸워야할 많은 적들의 가운데에 놓여있는 셈이었다.
때를 맞추듯 표국 내의 이곳저곳에 불이 켜졌다.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 표국에 들어올 때 보았던 표사들, 쟁자수들, 그리고 하인과 목욕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들이 모두 잠옷 바람으로 달려나왔다.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횃불을 높게 치켜들은 하인의 우두머리가 그들의 발밑에 구르는 가짜의 목을 보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살인이다!"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를 한 손에 잡은 채로 있던 검표가 냉랭하게 그 말에 반박했다.
"내 사저를 건드리려고 해서 혼을 내준 것뿐이야."
불빛 아래에 보이는 검표의 모습은 마치 젊은 저승사자 같았다. 소리를 질렀던 하인의 우두머리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가 죽은 듯이 보였다.
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몰려든 가짜 패거리들은 지금처럼 겁먹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흉폭하게 달려들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입이 무겁습니다요."
검호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나으리들께서…… 이 사람을 혼내 준 사실을 저희는 절대로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요."
"그래서요?"
"그러니, 삯을 주십시오. 약속하셨던 금액의 반만 주신다면 군소리 없이 나가겠습니다요."
"삯?"
검호의 목욕 시중을 들었던 아가씨들 중의 한 사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모두 저자거리의 사람들인데, 저 죽은 분한테 돈을 받고 고용됐어요. 사소한 장난을 좀 치려 하는데 한 이틀만 자신의 하인 노릇을 해달라고요. 그저 하인인 것처럼 오락가락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돈은 꽤 많이 준다더군요. 하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했으니 당신네들이 대신 줄 수 없나요?"
검호는 머뭇거렸다. 이런 경우 과연 그들이 죽은 가짜 대신 돈을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설령 그런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 아침 객잔을 나오며 마지막 돈을 또 다 털어 준 그가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줄 삯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검표가 칼을 쥔 손에 힘을 가하며 대신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다들 꺼져!"
그들은 모두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횃불은 땅에 떨어지고, 삽시에 뜰에는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마치 도깨비의 장난처럼, 사해표국 안에는 오직 장백쾌검문의 제자들과 죽은 사람의 갈라진 몸통과 머리만이 남았다.
그들 앞에서 또다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검표가 죽은 자의 옷깃에 칼을 닦으며 말했다.
"아직도 하는 짓이 답답하군!"
그것은 검호를 비난하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위협하고, 시체에 칼을 닦아 흔적을 없애는 그의 태도는 사뭇 그런 일들에 익숙해 보였다. 그는 확실히 지난겨울보다 몇 배는 강해 보였다. 어쩌면 죽은 대사형보다 훨씬 더 강해졌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사형제들은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된 셈인지, 금릉의 봄은 장백의 겨울보다도 훨씬 싸늘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