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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탁해
ㅡ김정학
손목을 그어 버린다거나 수면제를 삼킨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란 것만 알아 줬으면 좋겠어 나는 의심해 본 적이 없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확실해졌어 나는 속고 있었던 거야 매일 떠오르는 붉은 태양에게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늙은 암코양이에게
죽는 것도 허무한 것이라고
사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라고 내게 말해 준 것은
길 위에 뒹굴던 아이의 신발이었네
신발이 튕겨 나온 곳에 스며들고 있던
붉은 얼룩이었네
배고픔에 지쳐 죽어 간 어느 아이였네
그가 간절하게 기다리던 그 무엇이었네
신문 한 귀퉁이에서
혼자 죽어 간 노파의 외로움이었네
그녀 곁에서 부패하던 고독한 시간들이었네
나는 자줏빛 노을 진 바닷가 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었네
하도 오래전 일이라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네
저 노을마저 지고 나면 어두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두려웠었네
기차를 타고 올 사람을 기다렸는지 내가 타고 떠날 기차를 기다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굳이 말하지 않으려네
다만 그 자줏빛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 때문에 나는 울었었다고 기억하네
간혹 길들은 나를 가로등 환한 거리로 데려다 주곤 하지
가로등 아래 서 있노라면 내 그림자는 혼자 흔들리며 자꾸 희미해지곤 하지
희미해지다 희미해지다
슬며시 나를 버리고
보도블록 사이로 스며들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