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렐루야!
사랑하는 성독 가족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수도원 4층의 조그마한 저의 방에서 내다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너무나 아릅답네요.
특별히 정원에 홀로 우뚝 솟은 큰 나무를
바라다보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매일 매일 새롭게 느낄수 있답니다.
요즈음은 날마다 아니 시간마다 나뭇 잎의
크기와 녹음의 색깔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지고 있답니다.
5월 아름다운 성모성월을 맞이해서 성모님께 더욱 의탁하며 밀씀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달에 살레시오 수녀원에서 발행하는 영성 잡지인 새벽별에 갑자기 원고를 써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아
엊그제 그 원고를 보냈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010년 5월9일
수도원에서
별 수사
렉시오
디비나(성독)를 잘하기 위한 조건
며칠 전
수도원의 조용한 내 방에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래서 급하게 전화를 받아보니 상대편 목소리는 별로 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대편에서는 다짜고짜 “신부님, 저를 아시죠?” 하면서 무척이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신다. 사실 나는
지난 3년 동안 미국 뉴멕시코 주에 있는 사막 수도원에서 특별한 수도생활 체험의 시간을 갖고 작년 12월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다른
신부님들이 받아 놓은 수녀원 연피정들을 나에게 떠넘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올해 초에 얼떨결에 살레시오 수녀님들과 인연이 되어 연례 피정을
안내했던 기억이 있다. 대략 그때 참석했던 수녀님들이 60명 정도였는데, 그 많은 수녀님들 가운데 한 수녀님이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초면에
아주 친근한 것 같이 말씀을 하시면서 톤도 약간 업 된 것을 보니 그냥 평범한 안부 전화는 아니란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의 경험상 대게
그러한 경우는 분명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 전화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다른 주변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시더니 조금
있으니 이제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가신다. 즉 원고 청탁을 하기 위한 전화였다. 요즈음 신학원 강의 준비와 다른 곳에 기고할 원고를 준비하던
중이어서 가능하면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쉽게 부탁을 거절 못하는 나의 성향과 집요한(?) 수녀님의 청탁이 결국을 며칠간 책상 앞에 앉아 새벽빛
가족들과 무엇을 나눌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
수녀님께서는 이번 호 주제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요한 12,21)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짝 다음과 같은 1급 비밀도 귀뜸해
주시었다. 즉 '아무에게도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는다'고 특별히 강조하시면서 1차 마감 날짜와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최종 마감 날짜까지 아주
친절히 알려 주시었다. 아무튼 수녀님의 세심한 배려(?)에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뵙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은 복음 속의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열심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을 뵈올 수
있을까?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 특별히 수도승 전통은 그분을 직접
뵈올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을 전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성독) 수행이다. 사실 이 주제는
본인이 지난 20년 동안 홀로 깊이 연구하고 직접 수행해오면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왔던 주제이다. 그러나 이 짧은 지면에서는
그 내용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단지 성독 수행을 잘하기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신앙의 최고 규범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닫고 말씀에 기초한 영성생활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집이나 성당에서 직접 성경을 자주 찾아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개신교 신자들은 주일날 교회에 가면서 항상 말씀을 가지고
가며, 또한 일상 안에서도 말씀을 가까이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불행하게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면이 많이 약한 것 같다. 더욱이
요즈음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날 미사에 가면서 간단히 『매일미사』 책만 가지고 감으로 인해서 성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실제적으로 놓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다. 이면에서 모든 신자들은 성당에 갈 때마다 항상 자기의 성경을 직접 들고 가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또한
집에서도 자주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셋째, 고정된 렉시오
디비나 시간을 갖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말씀에 더 깊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독을 위한 고정되고 여유로운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왜 당신은 성경을 읽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을 그분께 봉헌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분과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그분을 찾지도 않습니까?” 그분을 찾고 그분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을 위해 고정되고 자유로운 시간을 기꺼이 내어드리는데 있어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시간들 안에서 우리는 말씀에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언제나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고정되고 여유로운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위해서는 하루 중 아무 시간이나 혹은 자투리 시간을 마련하기 보다는 오히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말씀 수행을 해 나가는
것이 영성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점에 있어 본인은 최소한 매일 고정적으로 30분씩 성경독서와 성경묵상의 시간을 갖고 충실히 수행해
나가기를 권한다. 특별히 이러한 시간들을 하느님께 봉헌된 시간으로 그분께 내어 드림이 중요하다.
넷째,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고요한 기도의 장소를 갖는다. 성경을 어디에서 읽고 묵상해야 하는가? 이것 또한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 시끄럽고 번잡한
장소나 위험이 상존한 곳은 렉시오 디비나를 위해 적합한 곳이 아니다. 이러한 장소에서 말씀을 집중해서 깊이 독서하고 묵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하고 평온한 장소가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권고하였다(마태 6,6). 여기에서 말하는 골방은 단지 장소의 크고 작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라도 고요함과 평온함이 유지되는 장소라면 성독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장소는 그냥 일차적인
차원이 아니라 더 깊은 영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즉 말씀을 대하는 그러한 장소는 바로 영적 투쟁의 장소이며 동시에 호세아서가 말했던
빈들과도 같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그러한 장소로 불러내어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속삭여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성독을
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요한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섯째, 전 존재로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한다. 고대나 중세의 수도승들에게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단순히 오늘날과 같이 눈으로만 재빨리 본문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그것을 입으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귀로는 그것을 직접 듣고, 그리고
기억과 마음에 그 말씀을 깊이깊이 간직하였다. 비록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수행의 모습이 많이 사라져 버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인간 전 존재로
집중해서 성경독서를 한다면 평소 놓쳐버린 말씀의 심오한 신비들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독서를 할 때에는 자신의 전 존재를
사용하여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성경독서를 할
때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야 가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 집중하지 않거나 또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빨리 읽어 해치워 버려서는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데 어려움이 있게 된다. 우리는 결코 많은 부분을 읽으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혹은 정해진 분량을 어느 시간까지 다 끝내려고 과욕을 부려서도 안 된다. 그리고 어떤 본문을 완전히 다 읽기도 전에, 또 다른 본문을
또 다시 읽으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읽은 본문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대로
행하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독서는 오히려 더 천천히 그 의미들을 음미하면서 온 마음으로 읽어가야 한다. 이것은 마치
시집을 읽는 것과 같이 한마디 한마디 음미하면서 천천히 소리 내어 읽고 들어야 한다.
일곱째, 성경독서가
끝날 때는 저마다 마음에 다가오는 한 말씀을 선택하고 그것을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한다. 바로 그 말씀을 하루의 영적 양식으로 삼고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그 한 말씀을 되뇌이는 수행을 통해서 말씀의 참된 맛을 맛보아야 한다. 사실 옛 수도승들에게 있어
묵상(meditatio)은 오늘날과 같이 머리로 숙고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고 끊임없이 되뇌이는 수행이었다. 이것은 마치 소가 되새김(ruminatio)을 함으로써 음식물을 철저히 자기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고대의 묵상 수행을 본인은 반추기도(Ruminating
Prayer)라고 오래전에 명하였다.
여덟째,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할 때 지적이고 추론적인 접근 방법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로 다가감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있어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고대의 중요한 수행이었던 렉시오 디비나의 하나의 조건으로써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였다. 성독은 여타의 다른 독서와는 다르다. 즉 그것은
머리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순수한 마음 안에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기
때문이다(마태 5,8).
아홉째, 렉시오
디비나를 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와 항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참된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성독은
인스턴트식품처럼 금세 어떤 효과를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 꾸준히 공급되는 원천이기에 더욱 충실하고 항구하게 정진해야만 한다.
마치 우리가 육체적인 필요를 위해 매일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듯이,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우리는 충실하게 이러한 성독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 말씀과의 끊임없는 친교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행하는 모든 봉사나 외적인
활동도 곧 여러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랜 인내와 항구함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성경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고 말씀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가능하게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열 번째, 성령께
도움을 간절히 청해야 한다. 렉시오 디비나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실 그분 없이는 성경의 문자
너머의 더 깊은 영적인 의미들을 우리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뜻을 밝혀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할 사명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6,13). 그러므로 성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는 겸손된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그분께서 손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어 깊은 영적인 신비의 문턱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열한 번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의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성독은 단지 마음의 수양만을 강조하는 뉴에이지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그분의 전적인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이 우리를 손수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내어 놓고 그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때 성독은
우리의 모든 생활 안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열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이 일상과 분리되지 않도록 함이 중요하다. 즉 일상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말씀과 함께 동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듯
일상의 삶 안에서 말씀과 분리되지 않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수행이 바로 성독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말씀과 일상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될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우리 삶 안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