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서있는 저 지고한 빛줄기
오늘은 모더니즘 문학에서 마르셸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프란츠 카프카 등의 작가들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가져와봤습니다. 출항, 달러웨이 부인 등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의 책 중 그래도 유명세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책입니다. 이렇게 모더니즘 작가로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리고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처럼, 상당히 난이도 있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책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명성에 걸맞게 모더니즘이라는 문학에 입문하고자 한다면 어렵게 읽힐정도의 난이도를 지녔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모더니즘이 가장 크게 비판 받는 이유 중 하나에 대해서 그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더니즘 특유의 기법, 전에 말했던 의식의 흐름처럼 일반적인 문학과는 다른 방식들을 차용했다는 점 때문에 거기서부터 나타나는 거부감도 포함해서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한 울프가 답을 내놓은 문제는 모더니즘에서 등장하는 납작하기만 하고 아무 의미없는 단어들의 사용입니다. 혹자는 모더니즘에 대해 그것은현실은 극단적으로 파편화함으로서 그 밀도를 낮게 만든다는 것인데, 실제로 많은 모더니즘 문학은 그저 한순간의 지나침도 붙잡아 그것을 극도로 늘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울프는 등대로에서 모더니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해 그 나름의 답을 내놓으면서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읽었을때 모더니즘이라는 분야에 깊게 빠지게 되면서입니다. 한창 특성없는남자 1권, 베케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리즈, 율리시스, 윌리엄 포크너, 트리스트럼 섄디 등 이리저리 무한 병렬독서를 하면서 모더니즘이라는 장르에 익숙해져가고 있을때, 그리고 다른 모더니즘 책을 찾다가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듣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이 아니라 동물이름을 필명으로 쓰는 작가인줄 알았습니다, 미국에 버지니아도 있고 동물에 울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름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보다가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씩 모아보자 생각이 들어서 등대로를 구매했었습니다. to the lighthouse, 이름에서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오던 책이었습니다.
줄거리
주된 인물로 등장하는 램지 부부와 그들 사이에서 나온 여덟아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집에서 일하는 릴리도 등장하고요. 부부의 아들중 하나인 제임스는 등대로 가기를 원합니다. 날씨가 그리 좋지만은 않은 오늘에도 그런 바람은 달라지지 않았네요. 램지 부인은 낙관하며 내일은 그가 원하는 대로 등대에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램지씨는 이와는 반대로 현실적인 답안을 그의 아들에게 줍니다. 결국 제임스는 램지씨가 말한대로 등대에 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전쟁이 발발합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발딛고 서있지 못하고, 세월이 지난만큼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등대에는 자꾸만 가까워져 갑니다.
삶의 태도
후술하겠지만, 등대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변증법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을 보여주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쳐져 그것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최후에까지 끌고면서 자신이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그것을 읽는이에게 위임하려는 듯 보입니다. 그렇게 결말에 이르러서 그녀는 자신만의 관점을 모두 총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릴리는 붓을 내려놓으며 그림의 마지막 붓칠로 선하나를 채워넣으며 캔버스를 바라봅니다. 그림을 완성하고 그녀는 그것을 또렷하게 바라봅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도 내일 등대로 향하고 싶어하는 막내아들에게 내일 날씨가 개일 것이라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램지부인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비웃는다는 듯 곧바로 반대의견인, 오늘 날씨가 좋지 않으니 내일 날씨는 좋지 않을 것이라며 이야기하는 램지씨가 있습니다. 이런 램지 부인과 램지씨가 지니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서 등대로에서의 첫 번째 변증법적인 부분입니다. 이둘은 서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제임스를 위해서 등대로 갈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다른 결말을 내고 있습니다. 한쪽은 감성적인 면모에 치중해서 제임스가 지니고 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낙천적인 답변을 내놓고, 다른 한쪽은 현상 그 자체를 바라보고 보다 현실적인 답을 내리는 것처럼 단면적으로 바라보았을때 이들은 이분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쪽이 감성적이라고, 어떤 쪽이 이성적이라고 해서 누군가는 틀렸고 누군가는 맞았다 라고 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화자를 램지 부부가 아닌 그들의 하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릴리를 택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어느 한 쪽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주장하고 싶었다면 작가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지닌 인물을 화자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의 분량이 많다거나 또는 그 자신이 화자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 명확하게, 포괄적으로 주장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을 지니지 않은 릴리를 택함으로써 울프는 그 어떤 주장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모순적으로 보이는 주장들을 섞은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택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객관성을 지닌 인물로써 릴리는 램지부부에게서 그들의 외연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꽤뚫어보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본다면 이 부부의 생활은 로맨틱한, 큰 문제없이 오래 사랑한 부부로써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릴리의 시선을 택함으로써 이들이 애써 감추어온 문제들을 적나라할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까지 파헤지게 됩니다. 가령 램지 씨는 램지 부인에게 자신을 북돋아 주는, 남성적인 것의 상징인 권위를 주는 것을 얕게라도 요구하고 있으며, 램지 부인은 그것으로 끝없는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이런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그것에 때로는 안타까움을 여기지만 결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릴리는 끝까지 살아남아 등대로 도달한 이들을 직감적으로 알게됩니다. 이로써 릴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 갑작스러운 계시를 얻게됩니다. 등대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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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마치 그녀가 저기 있는 어떤 것에 의하여 상기된 것처럼 그녀는 캔버스를 향해 돌아섰다
거기에 그녀의 그림이 있었다
그렇다, 그 모든 초록색들과 파란색들을 가지고 선들이 달려 올라가고 가로질러 가면서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그림이 다락방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그것은 결국은 파괴되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녀는 브러시를 다시 잡으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층계를 바라보았는데 비어 있었고, 캔버스를 바라보니까 시계가 뿌옇게 흐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것을 한순간 명확하게 본 것처럼 갑자기 강렬하게 그녀는 그림의 한가운데에 선을 하나 그려 넣었다
됐다, 끝났다
그래, 브러시를 내려놓으면서, 극도의 피로를 느끼면서, 나는 드디어 통찰력을 획득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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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to the lighthouse 책의 영문 제목과 같이 이 책은 등대 그 자체보다는 등대로 향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등대가 아닌, 뒤에 로가 붙은 등대로 향하는 길이 제목인 만큼 등대 그 자체보다는 등대로 가고 싶다는 욕망, 등대라는 실질적인 형상에 도달하고 싶지만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그 상태가 등대로의 내용입니다. 책의 시작부터 램지 부부의 아들인 제임스가 등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제임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들은 등대로 가지 못합니다. 램지 씨의 예측이 맞는듯,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러했죠. 이들의 바램은 10년간 이뤄지지 못합니다. 그 사이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제서야 비로소 이들은 등대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도달하지 못한 등대, 그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상입니다. 실체적인 존재로서의 등대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등대가 등대가 지니는 두가지 의미로 작품 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그 밝은 빛을 쏴주고 있습니다. 등대는 그들의 시선에서 지금 당장 닿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계속볼 수 있고, 그들이 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등대란 존재는 유아론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등대는 언젠가 자신을 보고 찾아올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등대란 배에게 길을 알려주는 빛을 보내주는 동시에 인간 내면 내부에 꿈꾸는 어떤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기 자신의 이상의 실체화된, 구체적인 목적입니다. 등대는 그 실체와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에 그것은 영원성을 지니지만 변화와 떼어내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영원성을 지니는 것은, 인간 내면에 자신이 도달하고픈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할 것이기에 그러하고, 그럼에도 변화와 떼어낼수 없는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졌기 때문에, 즉 그것은 온전한 자신의 욕망만이 아닌, 언제라도 다른 것들에 의해 영향 받고 사라지며 흔들리는 것이 가능한 안개막같은 존재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등대는 바다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지만 바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곧 세계이고, 인간이 온전히 정복하지 못하는 우리가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영원의 공간, 우주입니다. 램지 가족과 릴리는 육지에 살고 있고, 바다를 항상 가까이 두지만 그들은 당장 바다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한다가 더 옳은 말일까요. 그것은 등대에 닿기위한 오랜 소망일수도 있지만, 등대안에 자신들이 원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지 않고 끝없이 등대에 가기 위해 갈망하는 등대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을수도 있지만, 그 등대까지 향하는 과정, 3부에서 조화를 이룬 릴리가 그들이 램지 씨가 등대에 도착했을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어쩌면 우리는 등대로 향하는 과정, 그 길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어디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예전에 읽었던 내용이기도 한데, 저는 이때 읽은 내용으로 등대를 생각핼때면 항상 어딘가 고독하다라는 걸 떠올립니다. 등대지기가 있습니다. 그는 항상 그리고 자신의 인생 대부분은 등대지기 노릇을 하며 보냈었는데, 다행인점은 그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여김없이 등대를 향해 오르며 그와 대화하는 그는 어느날, 창문을 바라보며 작게 오늘도 나는 혼잣말을 했다라고 말하고 다시 일하기 시작합니다. 고독,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누군가의 목표가 되어 있던 등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내부에서 등대가 내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아니, 그것을 보더라도 애써 무시하면서 그것에 매몰되어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등대 안에, 그것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독을 알게 해주고 싶은 것인지, 여전히 등대지기 일을 해나갑니다. 이 이야기가 떠올랐던 이유는 목표로써 등장하는 등대,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시각을 보여주며 오히려 등대로에서 등대에 가기까지 위한 그 모든 여정 자체를 중요시하는 그런 시각을 강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페미니즘 서사
버지니아 울프라는 사람을 작가로써 조명한다면, 그녀를 흔히 페미니즘 작가라고 소개합니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그녀의 또다른 저서에서 여성의 독립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현재의 시각에서 그것을 바라본다면 분명, 남성이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벗어나려는 페미니즘에서 드러나는 탈피적인 성격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등대로에서도 이전까지는 많이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택함으로써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남자 어른으로 등장하는 램지씨를 좋은 인물로만 평가하지도 않죠. 그러나 이런 이유로 그녀를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요? 단순 여성 주체적인 서사는 모두 페메니스트 서사에 편입되어 그런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봐야 할까요? 라는 질문에는 저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 자체가 문학에 있어서 발전해나갈수 있는 길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보인 면모들로 인해서 그녀는 더욱 페미니스트 작가보다는 모더니스트에 가깝게 보입니다. 모더니즘의 핵심이자 골자, 그리고 그 자체는 이전의 전통적 가치들의 해체에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일반 문학이라고 부르는 전통적 가치에서 따라나오는 단조로움과 억압성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부수고 재해석 함으로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는 기존 페미니즘이 지닌 권위를 지녔던 남성성에서 벗어남이라는 주제와 동일하다고 볼수 있겠으나, 단지 그뿐입니다. 이것 하나로 울프를 페미니즘 작가로 규정하기에 그녀는 다른 전통적 가치들에 도전하였고, 그것을 넘어서는 시도를 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처음 사용한 것도 그녀로 알고 있고, 갑작스러운 시공간의 변화를 보이는 것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그녀는 가부장제에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려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닌 한계에 불쌍함을 내비춥니다. 나아가 여성성의 극단을 강요하기보다 남성성과의 조화를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페미니즘 해석이 일순위적으로 하는 해석, 즉 성차별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페미니즘 문학에 있어서 울프는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말한다는 점에서 비판 받기도 한 만큼 그녀가 완전하게 페미니즘 작가다 라고 선언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페미니즘적, 이를 여성성의 우월성이 아니라 이전 가치에 대한 타도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문학들은 남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전통적 작법이 아닌 새로운 방식에의 시도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더니즘이 스스로 그러했듯이, 그것은 스스로가 남성적으로, 즉 남성성 자화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흐름, 그녀가 사용했던 기법은 시간이 지나며 더이상 새로운 것, 즉 여성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차용하는 작품의 (남성적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남성성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한것입니다. 이건 모든 예술에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시의 가장 대표격이 아방가르드인데, 전위적임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통적 예술, 혹은 고전으로 편입되어져 그 자신의 색채를 잃어버립니다. 초기 아방가르드는 현시점에서 더욱이 아방가르드에서 멀어진 예술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위의 정의에 따른 페미니즘도 동일합니다. 즉, 페미니즘적 시각은 근본적으로 여성성을 주장하지만 그 주장은 또다시 남성적으로 퇴보하는 끝없는 진보와 퇴보의 웅합으로 설명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단기간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을 지닐 수 있지만, 진보와 동시에 퇴보가 이루어지는 끝없는 불완전성 때문에 진리에 도달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모더니즘
버지니아 울프가 모더니즘 작가라고 말을 했으니, 기왕에 한번 모더니즘 얘기하는게 좋아 보입니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모더니즘이란 결국에 변화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이는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도 지닐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수많은 예술의 분야에서도 서로 다르게 시작되었지만, 그 사건의 발단을 가능케 한것이 종교개혁이나 자본주의의 등장, 산업/시민혁명이나 세계 대전과 같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회가 자신의 과거이자 이제는 옛세대가 되어버린 역사에게 단절을 말하고자하는 그런 시간이기 때문에 발전적인 요소는 분명히 들어있습니다. 실제로도 사진이라는 하나의 분야가 등장하자 이전까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회화가 단순히 현상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것, 또는 추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도 하였고, 기존 드라마를 벗어나고자 새로운 연극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쨋거나 이전과는 다른 것을 해보자는 시도로 많은 유행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변화해나가는 사회, 즉 이전에 지녓던 경직성에서 벗어나 이제는 유동성을 추구하는 사회에 있어 모더니즘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역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다. 더이상 역사를 역사로서 바라보지 않는 현대 사회와 모더니즘이 입장이 취하고 있는 표어로서 보이는 명제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과거란 물론 자신들이 그 위에 기초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토대를 만들어준것일 뿐, 장애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 도래해야만 하는, 미래와 뒤섞여버린 존재입니다. 이들이 바라보는 이상 그 자체는 미래에 언젠가 등장할 것이고, 만일 그 순간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현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기보다 곧바로 과거라는 이름아래 퇴색됩니다. 이들은 끝없는 - 달리말하자면 목표가 없는 - 이상론을 펼치는 동시에 그 이상을 또다시 과거에 넣어 그것에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는 위선적인 무목적적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모더니즘이 비판을 받는 문제 하나에 답을 내렸다고 생각한 버지니아 울프에개도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모더니즘도 결국에는 닿을 수 없는 이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걸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사조는 그 자신이 지닌 표어로 인해 가장 큰 문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한계, 그것은 결국 일방적인 전통성을 추구하는 예술로서 재해석 되어버린다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을 따르는 모더니스트들이 아무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비평하고 해석하는 객체 그 자체는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탄생 이후에 물론 창조자 그 자신이 이러이러한 해석의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것으로부터 발전할수 있으나, 그 발전시키는 주체가 타자이다보니 이들 모두에게 모더니스트적인 시각을강요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모두가 모더니스트가 아니기에 이 문제가 부상하게 된것입니다. 모더니즘의 모토 자체는 기존, 즉 전통문학이 지니고 있는 구조와 운율을 부수고 자신들이 만들 질서에 부합하개 새로히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독자 또는 비평가는 모더니스트 들이 해체해 놓고 뒤짚어 놓은 모더니즘 문학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 즉 전통 문학적 방식으로 재조립합니다. 지금 제가 등대로라는 책에 리뷰를 쓰고있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통문학의 시선에서 이것과 이것은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 여기서는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의도가 들어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책을 찬찬히 뜯어봅니다. 이는 제가 모더니즘이 해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온전하게 알지 못하기에 이런 전통적인 시각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게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결말일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변화하기 위해 저항했던 모더니즘은 또다시 전통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되돌아가게됩니다.
이러한 해석들의 예시로 모더니즘에서 시간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시간선이 끊어져 있는 문학들, 가령 제5도살장과 소리와 분노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인 시간들을 묶어 직선적인 시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앞선 두 작품들의 경우에 시간선이 직선적이지 않고 중간중간 시간이 섞여있다거나 또는 시간의 이동이 산발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읽는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는 그것을 자신이 익숙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재구성합니다. A-C-B이라는 시간선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은 A-B-C로 바꾸어서 읽습니다. 모더니즘 내부에서 존재하는 시간을 그들은 처음엔 인지하지 못합니다. 모더니즘에서의 시간이란 개개인에게 독립적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로 바라보는 대상의 시간은 타인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갑니다. 그렇기에 모더니즘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빠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은 주변 시간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내면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어느 현상에 대한 종합적 판단으로,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흐름을 통해 동일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한 판단의 시간을 길게 유보하는 동시에 진행하기 떄문에 의식의 주체에게는 매우 짧은 기간내 많은 것들이 지니가고, 주체가 아닌 개인에게는 그것의 체험이 긴 기간으로서 다가옵니다. 이처럼, 그 인물이 그 자신의 시간을 체감하는 시간과 우리가 독자로써 그 인물의 시간을 체감하는 것 또한 다릅니다. 모더니즘은 작품 내에서만 시간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까지 그것을 확장해서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흐르게 만듭니다. 구분하자면 3가지 시간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실질적 시간, 즉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현실의 시간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허구적 시간, 즉 작품 내에서의 시간입니다. 작품과 현실은 구분되기 때문에 이들의 시간은 구분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만 있지만, 작품은 마치 역사처럼,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지니고 홀로이 멈춰있습니다. 그렇기에 문학은 시간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의 누구가 읽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시간만을 지시합니다. 세번째 시간은 주체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관점을 택하는 인물이 지니는 개인 내면 고유의 시간입니다. 두번째 시간, 작품내에서 보편적 시간과 구변되는 이유는 두번째 시간은 어디까지나 타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점을 누구를 특정해서 택하는 순간, 그의 내면을 알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내면이 침투하는 순간, 보편적 시간이 느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정지하기도 합니다.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관점의 시간을 흘러갑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으로 모더니즘에서는 시간이 구분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신경쓰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고수합니다.
예술이란
책의 마지막인 3부에서는 예술관이 등장합니다. 이 예술관은 처음 릴리의 시각에서 램지 부부를 바라본 것처럼 변증법의 강한 영향을 받아 종합적인 예술관을 추구합니다. 처음 등장한 릴리의 시각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감성과 이성의 조화로 다루었다면, 이번에 등장하는 예술관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포괄하는 그런 중성적인 것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 릴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의 에피파니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예술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남성성 만으로 또는 여성성 만으로 완성되지 못하는 그런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결국 자신의 그림을 완성한 것도, 나아가 통찰력을 획득한 것 까지도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마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은 것과 같이, 울프의 예술관 또한 이런 두 양면적인 요소를 조화시켜야만 등장할 수 있는 종합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이전까지 예술에 있어서 여성적 측면이 강조되지 않았으나, 3부에 이르러 그런 것이 폭발하게된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램지 부인의 역할 때문입니다. 그녀는 2부에서 죽는것으로 설정되어져 3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3부 내내 등장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는 부재하고 있으나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성의 대표격인 인물이 사라지더라고 그것은 남성성에 영향을 짙게 남깁니다. 어찌보면 이는 죽어버린 여성성이 팽배한 예술적 사고관에서 여성성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으로도 비춰집니다.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두가지가 떠오릅니다. 바로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개념과 플라톤의 향연입니다. 이둘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인간의 성적인 측면에서 나름의 이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등대로에서의 결과가 이것의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향연은 제가 읽다 말아서 이야기하진 않을겁니다.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살짝 복잡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아니마라는 것은 남성의 무의식 측면의 여성성을 말하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측면의 남성성을 뜻합니다. 융의 <인간과 상징>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니마는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적 심리 경향이 인격화한 것이다. 즉 막연한 느낌이나 기분, 예견적인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인 사랑과 능력, 자연에 대한 감정, 그리고 무의식 등이 바로 이러한 심리 경향이다." 그리고 아니무스에 대해서는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이 인격화한 남성상이다. ~ 오히려 이 아니무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숨은 거룩한 신념이라는 모습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융 학파에 따르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남성과 여성에게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작스레 생기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출생 이후 반대성별인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동시의 경우에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에게 그것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며, 인식, 사고, 중재자 역할 등 여러 것들이 자신의 -성과 결합하여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등대로에서 이를 바라본다면, 등대로 향하는 모든 과정은 하나의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 기로에서 릴리라는 인물은 남성성과 여성성 둘다 마주하고, 무엇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닌, 둘다 택함으로써 내적성장을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아니마 아니무스 관점으로 등대로를 온전히 해석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것, 그것은 그림자도 있지만, 그것이 발달하는 4단계과정이 등대로에서 전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마 4단계과정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과정
로맨특하고 미학적인, 그러나 여전히 성적인 상태
사랑의 헌신성
성스럽고 지순한 것마저 초월한 상태
아니무스 4단계 과정
육체적 능력의 인격화
주도적인 계획과 행동
말씀, 즉 성스럽거나 로고스적인 면모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것
로 정리가 가능한데, 릴리의 경우에는 3단계나 4단계는 거쳤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1단계와 2단계의 경우 그것을 지니고 있다거나 이미 거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하려는 가치관은 예술관으로도 충분히 확장이 가능합니다. 진정한 예술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다 지닌 양성성을 보여야 도달할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며 말이죠. 가령, 책에서 등장하며, 상황을 관조하는 예술가인 릴리의 경우 그러합니다. 노처녀인 그녀는 앞서 말했듯이, 램지 부부의 결혼생활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해체하기도하며, 결말에 다다라서 그녀는 그로 인해 삶의 통찰력을 얻게 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예술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드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쨰서 릴리는 화가인 것인가? 왜 다른 예술 영역에 몸담은 직업이 아니라 어째서 회화라는 영역의 예술가인가? 이는 울프가 생각했던 예술관이 나아가야하는 방향성과도 연관이 있어보입니다. 언어로써, 언어로 예술을 펼치고 그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라고 여겨지던 모더니즘의 의식의 기법을 활용하며 기존의 구조를 탈피하고자했던 울프가 오히려 화가, 즉 비언어적인 예술을 사용하는 예술가를 활용하여 이상적인 예술상을 등대로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느 방식이던 간에 언어를 사용하는 로고스적인 예술을 진정한 예술로 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바라보았을 수 있습니다. 다음 차원의 문학은 더이상 언어로써 남아있으면 안된다는 것, 이런 생각이 후대에도 미쳤을까, 실제로 많은 모더니즘 문학에서도 탈언어적인 구조가 드러납니다. 청각적인 요소를 활용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문장과 단어에 운율을 부여한다던가, 악보 그 자체를 작품 내 집어 넣는다거나, 또는 모더니즘의 거의 시초라고 생각되는 트리스트럼 섄디에서처럼 작품에서 묘사하는 그림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집어 넣는다거나, 언어가 언어라는 틀에 정형화되게 갇히지 않고 그걸 넘어서 다른 감각들도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입니다.
실제로 로고스적인 예술의 한계는 뚜렸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단 한순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잡지 못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의 또는 현실의 단면이 아닌, 그 단면의 일부만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며, 전부를 포착하는데 실패합니다. 울프 자신의 반대 테제로 등장한 릴리가 다루는 회화의 경우에는 최소한 그것이 부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언어는 현실의 단면의 순간의 극히 일부를 써내려갈수 있지만, 최소한 회화는 현실의 단면 그 자체를 그려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화는 현실을 그려내는데 언어보다 조금더 장점이 있다지만, 단점또한 명백합니다. 언어는 현실을 온전히 그려낼수는 없지만, 글자 이면에 담져진 가능성들을 엿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화는 중첩된 가능성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언어의 경우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 단순한 이 문장도 어쨋거나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말그대로 언어에는 운동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화의 경우에는 그것이 현실을 묘사하는데 너무나 치중해 경직되어버렸습니다. 운동성은 드러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간내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산란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이동뿐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가능성을 퓨표현할수 있고, 그 가능성은 중첩되어져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회화가 이것이 불가능한 또하나의 이유는 차원에 관한 것입니다. 회화는 언어와는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언어가 2차원적 평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회화는 3차원적 세계, 즉 연장적 성격은 동일하게 지니고 있으나 깊이의 차원을 지니고 진행됩니다. 이러한 차원의 차이로 인하여 회화는 가능성의 제약을 받습니다. 가능성의 중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덧그리거나 덧칠을 해야하는데, 그러는 순간 자신이 생각했던 원본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표현은 가능성의 합성보다 현실의 다면성을 그린것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회화라는 것도 그 자신의 한계를 지니고 있고, 언어는 그 한계를 보완할수 있는 그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회화로 예술의 발전을 도모하려던 그녀의 생각은 온전히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할수 없습니다.
전부 다 쓰고나서 다시 읽어보니 사실 책 이야기보다는 제가 하고싶은 말만 써놓은거 같네요. 최근에 뭔가 이런식으로 글을 많이 쓰게 되는거 같은데, 어차피 읽는 사람만 읽는 이 리뷰, 그냥 하고 싶은 말이나 하면서 놀래요. 꺄르르륵
ps. 융을 건드렸으니 프로이트도 살짝 건드려서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컴플렉스에 저항하는 내용이랑 등대에 관한 부분 더 쓰려는데 며칠째 얘만 잡고 있어서 귀찮아 졌어요. 그래서 안씀
pps. 마지막으로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을 폐기하고 짤막하게나마 쓰기로 결정한 등대로의 종교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원래는 니체가 자신의 저서인 아마도 선악의 저편일텐데 거기서 등장한 내용인 소피아, 즉 일자의 여성적인 면모에 대한 것을 엮어서 쓰려고 했었습니다. 성별이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남성적이라고 여겨졌던 신이라는 이미지에 그것을 소피아라고 부르며 여성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를 쓰려고했는데, 등대로에서 워낙에 종교적인 색채가 드러나지 않아서 비약적인 해석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변증법적인 요소들은 너무 많이 다뤄서 그냥 넘겼습니다. 만약 작성했다면 에술관에서 연장하여 종교와 비종교, 마치 하이데거가 기존 형이상학을 존재-신-론으로 비판한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다루려고 했었습니다.
첫댓글 문단 나눠주시면 안되나요?
충분히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피드백 감자하구료…
세줄요약해주세여
예술을
당장발전
시켜야한다
미대생이라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네요.
그리고 글이 너무 T같아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