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시감상
병여 음성 사절 / 강희맹
病餘 吟成 四絶 姜希孟
其四(기사)
南窓終日坐忘機(남창종일좌망기) 남창에 종일토록 세사(世事) 잊고 앉았는데
庭院無人鳥學飛(정원무인조학비) 뜰에 사람 없으니 새는 날기 배우네
細草暗香難覓處(세초암향난멱처) 가는 풀에 그윽한 향기 어디인지 찾기 어려운데
澹煙殘照雨霏霏(담연잔조우비비) 옅은 연기 스러지는 햇빛에 부슬부슬 비 내리네
〈감상〉
이 시는 병든 뒤에 우연히 읊조린 시로, 한아(閑雅)한 시인의 마음과 정경(情景)이 한데 잘 어우러진 시이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강경순의 「양초부(養蕉賦)」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또한 청경(淸勁)하다. 그 「병여음(病餘吟)」에 ······라 하고, 「영매(詠梅)」에, ‘어둘 녘 울타리 가에서 퍼진 가지 보고서, 느린 걸음 향기 찾아 물가에 와 닿으니, 천년의 나부산(羅浮山) 둥근 달이, 지금에 와 비치니 꿈이 깨일 때로세.’라 한 시구들은 모두 한아(閑雅)하여 볼 만하다
(姜景醇養蕉賦極好(강경순양초부극호) 其詩亦淸勁(기시역청경) 其病餘吟曰(기병여음왈) 南窓終日坐忘機(남창종일좌망기) 庭院無人鳥學飛(정원무인조학비) 細草暗香難覓處(세초암향난멱처) 澹煙殘照雨霏霏(담연잔조우비비) 詠梅曰(영매왈) 黃昏籬落見橫枝(황혼리락견횡지) 緩步尋香到水湄(완보심향도수미) 千載羅浮一輪月(천재라부일륜월) 至今來照夢回時(지금래조몽회시) 俱閑雅可見(구한아가견)).”
라 평하고 있다.
〈주석〉
〖忘機(망기)〗 기교(機巧)의 마음을 없앰. 항상 담백함을 즐겨 하여 세상과 다툼이 없음.
〖覓〗 구하여 찾다 멱, 〖澹〗 담박하다 담, 〖霏〗 조용히 오는 비 비
화홍겸선제천정차송중추처관운 / 김종직
和洪兼善濟川亭次宋中樞處寬韻 金宗直
吹花擘柳半江風(취화벽류반강풍) 꽃 날리고 버들 가르며 강바람 부는데
檣影搖搖背暮鴻(장영요요배모홍) 돛대 그림자 흔들흔들 저녁 기러기 등져 있네
一片鄕心空倚柱(일편향심공의주)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白雲飛度酒船中(백운비도주선중) 흰 구름은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지나네
〈감상〉
이 시는 제천정에서 중추부사 송처관의 운(韻)에 차운(次韻)한 홍겸선의 시에 화답한 것이다.
강바람이 거세어 꽃이 날리고 버들을 가르고 있는데, 저 멀리 흔들거리는 돛대를 가진 호화유람선이 떠 있다. 빨리 고향으로 가고픈 생각에 기둥에 기대고 있으니, 기생과 술을 실은 배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흰 구름은 청운(靑雲)에 대비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은자(隱者)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김종직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 도학(道學)에 치중하는 제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퇴계전서』의 「답이강이별지(答李剛而別紙)」에,
“다만 지금 점필재 전집에서 그것을 보니, 오직 시문을 제일의로 삼아 일찍이 이 학문과 이 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이 책임을 돌렸다
(但今以佔畢公全集觀之(단금이점필공전집관지) 惟以詩文爲第一義(유이시문위제일의) 未嘗留意於此學此道(미상류의어차학차도) 而寒暄以是歸責(이한훤이시귀책)).”
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김종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
(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擘〗 가르다 벽, 〖檣〗 돛대 장, 〖度〗 지나다 도
각주
1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 13~1492, 성종 23):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는 고려 말·조선 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 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보천탄즉사 / 김종직
寶泉灘卽事 金宗直
桃花浪高幾尺許(도화랑고기척허)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銀石沒頂不知處(은석몰정부지처) 하얀 돌은 머리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兩兩鸕鶿失舊磯(양량로자실구기) 쌍쌍의 가마우지 옛 돌을 잃고
銜魚却入菰蒲去(함어각입고포거) 물고기 물고는 곧 부들로 들어가네
〈감상〉
이 시는 보천탄에서 지은 것이다.
보천탄에 한 겨울이 지나 봄이 되자 눈이 녹아 물이 불어 겨울 내 하얗던 돌을 잠기게 했고, 그 물결 위에 복사꽃이 흘러가고 있다. 그 위로 쌍쌍의 가마우지들이 예전에 앉아서 고기를 잡던 돌을 잃고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자 둥지가 있는 부들 숲으로 들어간다.
『성소부부고』에는, “그 「보천탄즉사」에서는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其寶泉灘卽事曰(기보천탄즉사왈) 桃花浪高幾尺許(도화랑고기척허) 銀石沒頂不知處(은석몰정부지처) 兩兩鸕鶿失舊磯(양량로자실구기) 銜魚却入菰蒲去(함어각입고포거) 此最伉高(차최항고) 東京樂府(동경악부) 篇篇皆古(편편개고)).”라 평하고 있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서 김종직의 문장에 대한 평과 함께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니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 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
(善山人(선산인) 字季昷(자계온) 淑滋之子(숙자지자) 自號佔畢齋(자호점필재) 我光廟朝登第(아광묘조등제) 操履端愨(조리단각) 學問精深(학문정심) 文章高古(문장고고) 爲一世儒宗(위일세유종) 誨人不倦(화인불권) 前後名士(전후명사) 多出其門(다출기문) 成廟重之(성묘중지) 擢置經筵(탁치경연) 以至刑曹判書(이지형조판서) 使所在官特賜米穀(사소재관특사미곡) 卒謚文簡(졸익문간) 燕士戊午禍及泉壤(연사무오화급천양) 焚滅遺文(분멸유문) 後收拾灰燼(후수습회신) 刊行于世(간행우세)).”
「본전(本傳)」에는 유문(遺文)이 불탄 것과 관련하여 유자광과의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그 고을 원에게 현판에 새겨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무오년의 화가 일어나매 선생이 무덤 속에서 극형을 받고 아울러 「환취정기(環翠亭記)」도 철거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함양에서 현판의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 하였다
(柳子光遊咸陽作詩(유자광유함양작시) 屬郡宰鏤版而懸之(속군재루판이현지) 佔畢齋守是郡曰(점필재수시군왈) 何物子光(하물자광) 乃敢爲懸板(내감위현판) 命撤而焚之(명철이분지) 及戊午禍起(급무오화기) 先生追被極刑(선생추피극형) 並撤去環翠亭記(병철거환취정기) 世以爲報咸陽之怨也(세이위보함양지원야)).”
〈주석〉
〖卽事(즉사)〗 앞에 있는 사물을 제재로 삼은 시. 〖許〗 쯤 허, 〖頂〗 머리 정, 〖鸕鶿(로자)〗 가마우지.
〖磯〗 수면에 드러난 돌 기, 〖銜〗 물다 함, 〖却〗 곧, 마침내, 도리어 각, 〖菰〗 풀이름 고, 〖蒲〗 부들 포
동도악부 칠수 / 김종직
東都樂府 七首 金宗直
怛忉歌(달도가)」
怛怛復忉忉(달달부도도) 놀랍고 놀랍고 또 근심스럽고 근심스러워라
大家幾不保(대가기불보) 임금이 하마터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뻔했네
流蘇帳裏玄鶴倒(유소장리현학도) 오색 장막 속의 현학금이 거꾸러지니
揚且之晳難偕老(양차지석난해로) 훤칠한 왕비가 해로하기 어렵게 되었구려
忉怛忉怛(도달도달) 슬프고 근심스럽고 슬프고 근심스러워라
神物不告知柰何(신물불고지내하) 귀신이 안 알렸으면 어찌되었을까?
神物告兮基圖大(신물고혜기도대) 귀신이 알려 주어 나라 운수 길어졌네
〈감상〉
이 시는 김종직이 30대 초반에 지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가운데 하나로, 지조를 잃고 음탕하여 군자를 섬기는 도리를 잃은 것을 풍자한 시이다.
이 시를 지은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소지왕 10년에 왕이 천천정에서 노니는데, 어떤 노옹(老翁)이 연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런데 그 외면(外面)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되어 있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말아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庶民)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뜯어서 보니, 그 글에 ‘금갑을 쏘아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왕이 궁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는 벽을 기대고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보니, 바로 내전(內殿)의 분수승이었다. 왕비가 그를 데려다 함께 간통을 하고 인하여 왕을 시해하려고 꾀했었으므로, 이에 왕비도 복주(伏誅)되었다. 그 후로는 나라의 풍속이 매년 정월의 상진일·상해일·상자일·상오일에는 온갖 일을 금기하여 감히 동작을 하지 않고 이를 지목하여 ‘달도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굳이 4일을 지목한 것은 그때에 마침 오(烏)·서(鼠)·시(豕)의 요괴가 있어 기사(騎士)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 결과 인하여 용(龍)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祭)를 지내었다
(照知王十年(조지왕십년) 王遊天泉亭(왕유천천정) 有老翁自池中出獻書(유로옹자지중출헌서) 外面題云(외면제운) 開見二人死(개견이인사) 不開一人死(불개일인사) 王曰(왕왈) 與其二人死(여기이인사) 莫若不開(막약불개) 但一人死耳(단일인사이) 日官云(일관운) 二人者(이인자) 庶民也(서민야) 一人者(일인자) 王也(왕야) 王惧(왕구) 拆而見之(탁이견지) 書中云射琴匣(서중운사금갑) 王入宮(왕입궁) 見琴匣(견금갑) 倚壁射之而倒(의벽사지이도) 乃內殿焚修僧也(내내전분수승야) 王妃引與通(왕비인여통) 因謀弑王也(인모시왕야) 於是王妃伏誅(어시왕비복주) 自後國俗(자후국속) 每正月上辰上亥上子上午(매정월상신상해상자상오) 忌百事(기백사) 不敢動作(불감동작) 目之爲怛忉日(목지위달도일) 必以四日者(필이사일자) 其時適有烏鼠豕之怪(기시적유오서시지괴) 令騎士追之(영기사추지) 因遇龍也(인우룡야) 又以十六日爲烏忌之日(우이십륙일위오기지일) 以粘飯祭之(이점반제지)).”
〈주석〉
〖怛〗 놀라다 달, 〖忉〗 근심하다 도, 〖大家(대가)〗 황제. 〖流蘇(유소)〗 채색한 휘장.
〖揚且之皙(양차지석)〗 훤칠한 이마(양(揚)은 이마 위가 넓은 것, 차(且)는 어조사, 석(晳)은 흼)로,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오는 구절임. 이 시는 위나라 부인이 음탕하여 군자를 섬기는 도리를 잃을 것을 풍자한 시임.
동도악부 칠수 / 김종직
東都樂府 七首 金宗直
「陽山歌(양산가)」
敵國爲封豕(적국위봉시) 적국이 큰 멧돼지가 되어
荐食我邊疆(천식아변강) 연이어 우리 변경을 차츰 먹어 들어오니
赳赳花郞徒(규규화랑도)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들이
報國心靡遑(보국심미황) 보국하느라 마음에 겨를이 없었네
荷戈訣妻子(하과결처자) 창을 메고 처자를 이별하고서
嗽泉啖糗粻(수천담구장) 샘물로 입 닦고 말린 쌀을 먹다가
賊人夜劘壘(적인야마루) 적들이 밤에 성루를 무찌르니
毅魂飛劍鋩(의혼비검망) 씩씩한 넋이 칼날에 흩어져 버렸네
回首陽山雲(회수양산운) 머리 돌려 양산의 구름 바라보니
矗矗虹蜺光(촉촉홍예광) 우뚝하게 무지갯빛 뻗치었도다
哀哉四丈夫(애재사장부) 슬프다, 네 사람의 대장부는
終是北方强(종시북방강) 마침내 용감한 사람이 되었으니
千秋爲鬼雄(천추위귀웅) 천추에 귀신 영웅이 되어
相與歆椒漿(상여흠초장) 서로 더불어 술을 흠향하리
〈감상〉
이 시는 김종직이 30대 초반에 지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가운데 하나로, 화랑도의 의연한 기상을 기리는 과정을 통해 신라의 후예인 영남인의 기상을 과시하고자 한 시이다.
이 시를 지은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김흠운은 내물왕의 8세손인데 젊어서 화랑 문로의 문에 종유하였다. 영휘(당(唐)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 6년에 태종 무열왕이 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아 백제를 치게 하여, 그가 양산 아래에 진영을 두었는데, 백제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밤중에 급히 몰아와서 새벽에 진루를 타고 쳐들어왔다. 그러자 아군은 놀라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고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흠운은 말을 타고서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종자가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유하자, 흠운이 칼을 뽑아 그를 쳐 버리고, 마침내 대감 예파, 소감 상득과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싸워서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그런데 이때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골(骨)이 귀하고 권세가 높은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키고 죽었는데, 더구나 이 보용나는 살아도 도움이 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이 없음에랴?’ 하고는 마침내 적에게로 달려가 싸우다 죽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그를 슬퍼하였다
(金歆運(김흠운) 柰勿王八世孫(내물왕팔세손) 小遊花郞文努之門(소유화랑문노지문) 永徽六年(영휘륙년) 太宗武烈王(태종무렬왕) 以歆運爲郞幢大監(이흠운위랑당대감) 伐百濟(벌백제) 營陽山下(영양산하) 百濟人覺之(백제인각지) 乘夜疾駈(승야질구) 黎明(여명) 緣壘而入(연루이입) 我軍驚亂(아군경란) 飛矢雨集(비시우집) 歆運橫馬待敵(흠운횡마대적) 從者握轡勸還(종자악비권환) 歆運拔釰擊之(흠운발일격지) 遂與大監穢破少監狀得(수여대감예파소감장득) 赴賊鬪(부적투) 格殺數人而死(격살수인이사) 步騎幢主寶用那(보기당주보용나) 聞歆運死(문흠운사) 嘆曰(탄왈) 彼骨貴勢榮(피골귀세영) 猶守節以死(유수절이사) 况寶用那(황보용나) 生無益(생무익) 死無損乎(사무손호) 遂赴敵而死(수부적이사) 時人作陽山歌(시인작양산가) 以傷之(이상지)).”
〈주석〉
〖封〗 크다 봉, 〖豕〗 돼지 시, 〖荐〗 거듭하다 천, 〖赳〗 용맹스럽다 규, 〖遑〗 겨를 황, 〖訣〗 이별하다 결, 〖嗽〗 양치질하다 수, 〖啖〗 먹다 담, 〖糗〗 건량 구, 〖粻〗 양식 장, 〖劘〗 베다 마, 〖壘〗 성채 루,
〖毅〗 굳세다 의, 〖鋩〗 칼날 망, 〖矗矗(촉촉)〗 높은 모양(矗, 무성하다 촉). 〖虹蜺(홍예)〗 무지개.
〖北方强(북방강)〗 『중용(中庸)』 제십장(第十章)에,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임금혁(袵金革) 사이불염(死而不厭) 북방지강야(北方之强也)).”라는 말이 보임.
〖歆〗 신이나 조상의 혼령이 제사 음식을 기쁘게 받다 흠,
〖椒漿(초장)〗 산초나무로 만든 술로, 고대(古代)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썼음.
야박보은사하 증주지우사 / 김종직
夜泊報恩寺下 贈住持牛師 金宗直
報恩寺下日曛黃(보은사하일훈황) 보은사 아래에 해가 어둑어둑해지자
繫纜尋僧踏月光(계람심승답월광) 닻줄 매고 스님 찾아 달빛 밟네
棟宇已成新法界(동우이성신법계) 기둥과 집이 이미 이루어져 새로운 법계인데
江湖猶攪舊詩腸(강호유교구시장) 강호는 오히려 옛 시 생각을 흔드네
上方鐘動驪龍舞(상방종동려룡무) 절에 종이 움직이니 여강(驪江)의 용이 춤을 추고
萬竅風生鐵鳳翔(만규풍생철봉상) 만물의 구멍에서 바람소리 나니 철봉산(鐵鳳山)이 나네
珍重旻公亦人事(진중민공역인사) 민공을 진중히 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거니
時將菜把問舟航(시장채파문주항) 때로는 채소 다발 갖고 뱃길을 물어야지
〈감상〉
이 시는 김종직이 46살에 내직에 임명되었다가 선산부사로 내려가던 도중에 여주에 있는 신륵사 앞에 배를 대고 주지 우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남겨 준 시이다. 제목 아래에는 “절의 옛 이름은 신륵이고 혹은 벽사라고도 하는데, 예종 때에 절을 고쳐 지어서 극히 크고 화려하게 하며, 지금의 편액을 하사하였다(寺舊名神勒(사구명신륵) 或云甓寺(혹운벽사) 睿宗朝改創(예종조개창) 極宏麗(극굉려) 賜今額(사금액)).”라는 말이 실려 있다.
신륵사 아래에 해가 어둑어둑해지자, 절 앞인 여강에 닻줄을 매고 달빛을 밟으며 스님을 찾는다. 절의 기둥과 집이 이미 이루어져 새로운 불국토(佛國土)가 이루어졌는데, 시인은 절과 강호에 감탄하여 시 생각이 절로 난다. 절에 종이 울리니 이에 호응한 듯 여강(驪江)의 용이 춤을 추는 듯하고, 만물의 구멍에서 바람소리가 나니 절의 뒷산인 철봉산(鐵鳳山)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두보(杜甫)가 민공이라는 스님에게 진중했듯이 자신도 주지에게 때로는 채소 다발 갖고 뱃길을 물어야지.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점필재 김종직은 선산사람이다. ······점필재를 두고 국조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佔畢齋金宗直善山人也(점필재김종직선산인야) ······所謂冠冕國朝者(소위관면국조자) 豈虛言哉(기허언재))?”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경련(頸聯)에 대해
“우리나라 시는 위로 고려시대부터 아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볼만한 경련이 적지 않다. ······점필재 김종직의 「신륵사」에 ······라 하였는데, 엄하고 무겁고 크고 밝아서 마치 균천광악이 창공을 크게 울린 것과 같다
(我東之詩(아동지시) 上自麗朝(상자려조) 下至近代(하지근대) 警聯之可觀者(경련지가관자) 不爲不多(불위부다) ······金佔畢齋神勒寺詩(김점필재신록사시) ······嚴重洪亮(엄중홍량) 如勻天廣樂(여균천광악)).”
라 하였다.
〈주석〉
〖曛〗 석양빛 훈, 〖纜〗 닻줄 람, 〖法界(법계)〗 각종 사물의 현상과 그 본질을 일컬음. 〖攪〗 휘젓다 교,
〖上方(상방)〗 주지가 거처하는 방, 절. 〖竅〗 구멍 규, 〖翔〗 날다 상, 〖把〗 줌 파